책은 언제나 수다 떨고 싶어지는 주제다. 책과 여행, 이 두가지에 관해서라면 나는 언제 어디서든 숨도 안 쉬고 몇 시간 떠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게 들어오는 책 기획안의 대부분은 내 직업과 관련된 엄숙한 책 아니면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 충고하는 책들이었다. 나 자신이 즐겨 읽지않는 종류의 책을 써서 남들에게 권하고 싶진 않았다(참고로수많은 기획안 중에서 ‘쾌락독서‘ 이외에 유일하게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걸그룹‘에 대해 써달라는 제안이었다). 물론 그동안 썼던 책들은 분명 사회에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의무감, 또는 세금 내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무거움을 안고 썼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 즐거움을 위해 쓴다. 언제나 내게 책이란 즐거운 놀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심심해서 재미로읽었고, 재미없으면 망설이지 않고 덮어버렸다.  - P10

먼저 얘기해둘 것이 있다. 내 독서 취향은 그리 특별하지않다. 난 항상 그 시기에 누구나 좋아했던 뻔한 책들을 좋아했다. 남들이 아다치 미츠루 만화를 열심히 볼 때 나도 그랬고, 남들이 하루키에 열광할 때 나도 그랬고, 남들이 김용 무협소설에 대해 침 튀기며 얘기할 때 나도 그랬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실망시킬 때도 있었다.
첫 책을 내고 북토크를 했을 때의 일이다. 대학 때 즐겨 읽었던 책이 뭐냐고 눈이 초롱초롱한 여학생이 묻길래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들을 즐겨 읽었다고 대답했다.
순간 감추지 못한 실망의 탄식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한번은 ‘작가의 책‘이라는 릴레이 인터뷰에서 어릴 적 가장좋아했던 책을 묻길래 『삼국지와 만화 『유리가면을 얘기했는데 0.5초 정도 정적이 흐르더라. 이런 반응을 접할 때면 괜히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 P11

책에 관한 최초의 강렬한 기억은 책이 가득 꽂힌 친구의 책꽂이다. 초등학교(정확히 말하자면 ‘국민학교‘ 였지만 역시 ‘국민학교‘라는 말은 별로다) 1학년 때였다.
서울역 뒷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부유했던 그 친구의 방에는천장에 닿을 듯 방 한쪽 면 전체에 차곡차곡 책이 꽂혀 있었다. 거의 모두가 ‘세계명작전집 위인전기 ‘과학백과사전‘ 같은 전집류였다. 책들은 모두 깨끗했다. 인간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 행운은 그걸 그리 절실하게 원치 않는 이에게 편중되게주어지곤 한다. 친구는 그다지 책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친구의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는 어린 아들을 소망했다.
- P19

그런데 항상 예외는 있다. 엉터리 번역에 어린이용으로 읽어도 『녹색의 장원의 신비로운 소녀 리마는 가슴을 설레게만들었고(상대를 신비화하는 연애물은 의외로 아주 어릴 때부터 먹힌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대단했고(사람이 죽어나가는 파란만장한 연애물은 대단해 보이기 마련이다), 뒤마의『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흥미진진했다(치정복수극은 언제나 먹힌다). 『소공녀』 『소공자』가 그리 재미있었던 걸 보면 화려한부자들 세상에 대한 동경 및 빈부·계급 격차로 인한 울컥함이라는 양가감정은 어리나 늙으나 비슷하다.
이런 걸 보면 왜 주말 드라마가 다루는 이야기들이 늘 비슷비슷한지 알 수 있고, 동시에 왜 서사가 강한 대중문학, 장르문학이 인기가 높은지도 알 수 있다. 어린이도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건 결국 누구나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말이기도 할 테니까.
- P23

인간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 내가 절실하게 선망했던 것이라 하여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중 무엇무엇이 특히 재미있다고 골라서 따로 뽑아놓기까지 해보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들의 손길을 받아본 책은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전부였다 (역시 로맨스물, 그것도 빈부 격차를 배경으로 한 것의 위력이란).
내 독서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인 주제에 애들 독서에 대해서는 그래도 뭔가 ‘제대로 된 책‘을 좀 읽어주었으면 하는 걱정을 하던 나는 아이들이 열심히 읽어대던 『헝거게임 등을 가져다 읽어보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그 유명한 ‘고전 명작들에서 읽었던 것들이 거기에도 어딘가에 다 있었다. 우정, 유머, 용기, 사랑, 희생,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
- P25

이 세 장면에 왜 소년 시절의 내가 그리도 매료되었는지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지만,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그저 삶을 바라보는 어떤 한 태도에 본능적으로 매력을 느겼었던 것 같다.
집착하지 않고, 가장 격렬한 순간에도 자신을 객관화할 수있고, 놓아야 할 때에는 홀연히 놓아버릴 수 있는, 삶에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태도랄까. 그렇다고 아무런 열망도 감정도 없이 죽어 있는 심장도 아닌데 그 뜨거움을 스스로갈무리할 줄 아는 사람, 상처받기 싫어서 애써 강한 척하는것이 아니라, 원래 삶이란 내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잠시 스쳐가는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눈부시게 반짝인다는 것을 알기에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건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동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어떤 결핍도 없이 세상이 모두 나를 위한 커다란 선물 상자 같기만 했던  - P37

내 경우 책 고르기에도 ‘짜샤이 이론‘이 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권의 책이 갖고 있는 많은 요소 중에서 나는 유독문체에 좌우되는 편이다. 문장이 내 취향인 글은 내용이 아무리 시시해도 술술 읽게 된다. 반대의 경우 아무리 내용이 훌금해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덮는다. 방금도 책 두 권을 폈다.
가 5분 만에 둘 다 덮었다. 하나는 너무 거창한 관념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포르테 범벅의 글, 또하나는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언어의 반복이라 특별함이라곤 한구석도 없는 글.
- P53

전체적인 작품의 주제나 시대적 배경, 역사 등보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에만 집중해서 소설을 읽는 내 습성은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때도 계속되었다. 당연히 고양잇과 캐릭터의 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최서희에 매료되어 읽기 시작했고, 후반부에는 그의 아들들인 환국, 윤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심지어 후반부에 와서는관심 없는 부분은 휙휙 넘겨버리면시 보고 싶은 부분만 찾아읽기도 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대하소설에서 나는일종의 멜로드라마적인 재미가 있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은것이다. 그래도 분명히 읽을 때는 그 무수하게 많은 인물들의기구한 삶과 비극적인 시대에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감동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나는 건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두루뭉술한 에피소드뿐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  - P83

결국 이야기란 각자의 욕망과 감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접했던 그 수많은 이야기의 주어는 대부분남성에 편중되어 있었다. 여성 작가가 쓴 『제인 에어 빨간머리 앤』 『작은 아씨들이 유독 새롭게 느껴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겨우 여성이 주어인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교사가 되는 것 정도가꿈의 최대치인 세계 말이다.
순정만화의 세계는 반대였다. 무대가 연극이든 발레는 혁명이든 여성이라 하여 주변에만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여성캐릭터들도 경쟁하고, 좌절하고, 우정을 맺었다. 남자가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여성의 감각이 녹아 있었다. 그동안 본 적이없는 다양한 감성의 남성들이 등장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도 동성애도 자주 등장했다.
- P106

어찌면 나는 동네 만홧가게의 초라한 순정만화 코너에 앉아 나도 모르는 채 세계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란 두 가지 성으로 간단히 분류할 수 있는 단순한존재가 아니다. 개인마다 욕망도 감성도 무지개 색깔의 스펙트럼이 미세하게 변화하듯 다양하다. 나와 반대로 만홧가게안쪽, 공을 던지거나 차고 사람을 때리거나 걷어차는 만화들이 더 취향에 맞는 여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여학생은 순정만화 코너에, 남학생은 소년만화 코너에 일사불란하게 나뉘어 앉아 가끔 서로를 힐끔거리던 그때의 만홧가게가 떠오른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 P107

슬램덩크에는 숱한 명장면과 명대사가 있지만, 그때의 내게 가장 깊이 와닿은 장면은 조금 엉뚱하다. 체격은 좋지만팀 동료만큼 천재적 재능이 없는 센터 변덕규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 "난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좋다" 였다. 난 이 대사가 이상할 만큼 뭉클했다. 위로가 되는말이었다.
이 대사와 겹쳐지는 말이 또 있다. 〈무한도전) 초기 시리즈인 〈무모한 도전 당시에 유재석이 외쳐대던 "000 씨는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라는 멘트다. 지하철보다 빨리 달리기, 목욕탕 물을 배수구보다 빨리 바가지로 퍼내기 등 말도 안 되는 도전을 멤버들이 차례로 시도해서 미친놈처럼 애를 쓰다가 실패해서 넘어진다. 함께 용을 쓰다가 좌절해 있던유재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라고외친다. "이번에 도전했던 000 씨는,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큰 경사라도 났다는 듯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며 - P112

에이스가 아니었어. 팀의 주역이 아니면 어때? 그냥, 내가 중아하는 걸 하고 있으면 그걸로 족한 기 아니? 누가 비아남기려도 웃을 수 있게 된다. 죄송함다. 제가 원래 에이스가 아니거든요..
내가 감히 이렇게 책도 쓰고, 신문에 소설도 쓰고, 심지어드라마 대본까지 쓰고 할 수 있었던 힘은 저 두 마디에서 나온 것 같다. 나도 내가 김영하도 김연수도 황정은도 김은숙도노희경도 아닌 걸 잘 알지만, 뭐 어때?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나는 나만의 풋내기 슛‘을 즐겁게 던질 거다. 어깨에 힘 빼고,
왼손은 거들 뿐.
- P1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