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은빛 무늬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유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W. B. 예이츠, 하늘의 융단 p41



판사 문유석이 아닌, 책 덕후의 성공한 독서 이야기다. 딱 내 스타일로 유쾌하고 쉽게 풀어 놓으면서 사법 현실의 여러 문제들도 건드린다. ‘내로남불‘이 아닌 성찰이 돋보이는. 책의 많은 부분, 공감이었다.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
- P229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이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 P249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 P250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 P253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 P258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 P259

나에게 책이란

운동신경 제로의 꼬마에게 방구석에서
허풍선이 남작과 가르강튀아를 따라
대모험을 떠나게 해주던 날개.
부잣집 도련님 친구의 천장까지 가득찬 서가 앞에서
남의 인생을 빼앗고 싶은 리플리의 심정을 느끼게 하던 동경
세로글씨의 누렇게 바랜 책장을 넘기며,
제갈량, 양산박 호걸, 오다 노부나가, 사이토 도산을만나러 가게 해주던 타임머신
맹수의 포효에 몸을 떨며 비니키우스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작은 새 같은 리기아를 보며 조숙하게 찾아온 사춘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 나는 어느 쪽 인간일까
고민하게 하던 중2병앓이.
대학 문에 들어선 후 접한, 암호 같은 줄임말로 불리던
- P260

모피어스의 빨간악들,
하지만 어느 이즘보다 먹고사니즘이 중하기에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어야 하던 지식의 파편들.
밥벌이는 하면서도 변하는 세상의 가속도를 감히 따라잡아보려
번지르르한 실용적 지식만 찾아 헤맨 어리석음의 증거들.
뒤늦게 아무 써먹을 데 없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던
옛 기억을 떠올려 재회하는 고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들
하지만 속절없이 아는 형님> <왕좌의 게임) 다시보기와
카톡방, 페북에 넘쳐나는 석 줄짜리 언어들에뒷전으로 밀리곤 하는 퇴기.

언제나 사랑했고,
언제나 쉽게 버렸던 친구.

널 읽고 싶어,
마지막 장까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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