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센티


간혹 천사는 갇힌다
미쳐서

나는 남의 알을 품었다고 쓴다

사전의 글자들 위에 까맣게 쓴다
새장에 앉아 쓴다

손을 잡아보면 알아요
당신은 새가 아니군요
당신은 더러운 손을 내미는군요

간수가 오면 나는 내 혀를 두꺼운 책 속에 감추어둔다

어느 아침은 높이 날았고
어느 아침은 깊이 떨어졌다고
쓴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게요라고
쓴다 - P49

동터올 때 부리로 쓴다

가다가서고
가다가 울고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서는 멀리 갈 수 있답니다
노래도 아니고
메아리도 아니고
아주 멀지만 자유만 있는 장소에서
나는 그곳을 나는 새입니다

겨우 지상에서 10센티 떠오른 채

새장엔 미친 새

어느 밤하늘 날아가는데
너희의 화살이 심장을 꿰뚫어
푸르르푸르르 불안 장애 경련 장애
그 때문에 새가 된 새  - P50

어느새
새가 된 새

그 칼날의 울음 같은 소리
미친 게 분명한 새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
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

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
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모국어 사전에 혀가 물린 천사는
입속이 뜨거울 정도로 상냥하답니다라고
쓴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의 시집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공기는 상처로 가득하고
나를 덮은 상처 속에서
광대뼈는 뾰족하지만
당신이 세게 잡으면 뼈가 똑 부러지는
그런 작은 새가 태어나는 순서

새하는 여자를 보고도
시가 모르는 척하는 순서 - P11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
죽을 만큼 아프다고 죽겠다고
두 손이 결박되고 치마가 날개처럼 찢어지자 다행히 날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종종 그렇게 날 수 있었다고
문득 발을 떼고
난간 아래 새하는
일종의 새소리 번역의 기록
그 순서

밤의 시체가 부푸는 밤에
억울한 영혼이 파도쳐 오는 밤에
새가 한 마리
세상의 모든 밤
밤의 꼭지를 입에 물고 송곳같이 뾰족한
에베레스트를 넘는 순서

눈이 검고 작아진 새가
손으로 감싸 쥘 만큼 작아진 새가 - P12

입술을 맞대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새가
새의 혀는 새순처럼 가늘고
태아의 혀처럼 얇은데
그 작은 새가
이불을 박차고 내 몸을 박차고
흙을 박차고 나가는 순서

결단코 새하지 않으려다 새하는 내가
결단코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라고 말하는 내가

이 삶을 뿌리치리라
결단코 뿌리치리라

물에서 솟구친 새가 날개를 터는 시집

시방새의 시집엔 시간의 발자국이 쓴 낙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연필을 들고
가느다란 새의 발이 남기는 낙서 - P13

혹은 낙서 속에서 유서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
그 순서의 뒤늦은 기록

이것을 다 적으면
이 시집을 벗어나 종이처럼 얇은 난간에서
발을 떼게 된다는 약속
그리고 뒤늦은 후회의 기록 - P14

쌍시옷
쌍시옷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의 마음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의 처절

도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여러 넘버들을 매겨주었지

나는 이 도시에서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않겠다
더 이상 먹지도 않겠다

부리처럼 입술에 조개껍데기를 물고
물고기의 피를 얼굴에 바르고
바람의 손목을 두 손에 나눠 잡고

웃어주겠다
증발하겠다
은퇴하겠다

나는 도시의 눈에 띄지 않겠다 - P17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아이스크림집 빵집 책방 국솟집 아케이드를 잘근잘근 씹어서 먹으면 뜨거운 해변이 목구멍에서 쏟아질 것 같다

나는 이제 줄이 긴 새 떼가 될 거다
이 도시를 칭칭 감을 거다
그러면 새 떼가 말할 거다

(다음에 서로 어울리는 항목끼리 줄을 그으세요)
나무 고래  남국의 고래는 꽃의 정원
꽃 얼음  햇빛을 정육면체로 잘라 차곡차곡 담장을 쌓는다
햇빛 강 강물에 발을 담그자 이 물결이 개미떼라는 걸 알았다
개미 배 뿌리내린 배

도로들이 일어서게 한 다음
자동차를 공중에 띄우고
새 떼가 공중에 뜬 강물로 활강해 갈 거다 - P18

금빛 가는 실로 검은 바다에 수를 놓던 한 마리 새가
바다를 물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그만 탁 놓아버리면
물결이 도시를 뒤덮을 거다
내 공책의 행과 행 사이로 물이 들어올 거다

새들은 발바닥에 쌍시옷이 두 개 달렸다
(한강의 다리 난간 위 새 한 마리
왼발에 미래
오른발에 과거
었, 겠, 었, 겠, 었, 겠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고
내 일기엔 쌍시옷이 쌓인다)

(나는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이 세상이 너무 좁다고 폐소공포증에 걸린다)

그리하여 나는 공책에 긴 줄을 내리그으며 - P19

새는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걸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러겠다
얼굴에 깃털을 기르겠다
날아가겠다

라고
쓴다 - P20

날개 환상통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 P21

(그 콩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 P22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 P23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 P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
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절뚝절뚝 산동네 아래 구멍가게까지 
걸어내려가
주머니에 사 넣는 한갑 담배를 미워하면서,
술 취한 아들이 밤늦게 사들고 들어와
심통과 함께 들이미는 군밤을 미워하면서,
너무 반가워, 그것도 너무 반가워
말보다 먼저 나가는 야윈 손을 미워하면서,

돌아가셔도 눈물 한방울 안 보일,
남편의 미운 짓이 미워 눈물 한방울 안 보일
아내를 미워하면서,
시신을 덮은 홑이불 밖으로 나온 그의 앙상한 발을 만지며 울 막내를 
미워하면서, 고향 선산까지 그를 실어갈 낡은 장의차를 미워하면서,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를 미워하면서,
산동네를 환하게 비출 달빛을 미워하면서,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지금도 살고 계신다.


시집 [사진관집 이층] p 16, 17

서울의 춥고 스산한 이미지는 아내와도, 또 할머니와 아버지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홍은동 산동네 생활을 청산하고 안양 비산동의 산비알에 작은 집을 지었을 때 아내는 여간만 좋아하지 않았다. 집이라고는 하나, 수도가 나오지않고 우물도 없어 뒷산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비문화주택이었다. 그 무렵 우리집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의 몸을 쓰지 못하는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세 칸뿐인 방이 모자라 목욕탕을 없애고 방을 들여야 할 지경으로 갑자기 대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아내는 이 집에서 겨우 일년을 살았을 뿐이다. 시름시름 앓았으나 위궤양이라해서 별것 아니려니 했던 것이 막판에 위암으로 판정을 받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아내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까지도 집에서는 아내가 벽과 마루에 칠한 페인트와 니스 냄새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 P90

그 다음 해 겨울에는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아흔이 가까운 호상이라고는 하나 젊어서 과부가 되고 아들 하나를 청춘에 앞세웠으니 좋은 팔자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더욱이 국수장사도 하고 돼지도 키우고 하며 극성스럽게 돈을 모아 땅마지기도 장만했지만 아들이 다 날려 말년을 서러운 셋방살이로 살았다. 그래도 늦도록 건강해서 잔병치레 같은 것은 없었는데, 손주며느리를 앞세우고부터는 노망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중풍으로 누워 있는 아들을 괴롭히는 짓을 일부러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 년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들어누운 지 칠 년, 내게 와 의탁한 것만도 육 년, 아마 아버지한테도 오래 사는 것이 꼭 복된 일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 P90

그리고 내게는 그 육 년이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한 시절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만 같아 단하루도 마음놓고 밖에 나다니지를 못했다. 여행을 하다가도 불안해져 도중에 돌아오기가 일쑤였고, 일을 할 때도 술을 마실 때도 늘 안절부절, 집에 돌아와 부기가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물론 집에 전화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때로 아직 일할 나이에 병들어누워 있는 아버지가 가엾어 좋아하는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가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공연히 심술이 나서 불쑥봉투를 내밀어 놓고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내 방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눈물이 나지않았다. 어쩌면 내가 이 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는지도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 P91

안양집에서 산 것이 그때까지 만 육년, 오 년도 안되는사이에 가장 가까운 사람 셋을 잃은 그 집이 나는 싫어졌다. 이듬해 이른봄 서울 삼양동에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셋을 안양집에 버리고 오는 것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고향의 선영에 묻혀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 나만 오는 서울은 옛날보다 더 스산했다. 몹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짐을 대충정리하고 방에 누우니 창문으로 환한 달빛이 새어들어왔다. 마루의 유리문을 사납게 흔들고 지붕을 지나는, 전선을잉잉 울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역시 임화의 시구절을 생각했을까, 지금 기억에 없다. - P91

누릇누릇 벼가 익어가는 논이 있는가 하면 벼베기를 하는논도 있고, 벤 벼를 널어 말리는 논도 있었다. 어떤 늙은 부부는 새참을 사이에 놓고 논둑에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내친김에 논둑길로 해서 강까지 나갔다. 새파란 강물에는두둥실 떠가는 하얀 구름과 바위너설의 새빨간 단풍이 아프게 박혀 있고, 치마를 둥둥 걷어 허리에 동여맨 아낙네들과 열댓 살이 안되었을 소녀들이 허리께까지 차는 찬물에들어가 올갱이를 줍고 있었다. 수수를 꺾어 머리에 무겁게인 아낙네들이 왁자지껄 진한 육담을 주고받으며 떼를 지어내 곁을 지날 때 내가 느낀 것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다음날부터 강마을로 산마을로 나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를 찾아가기도 하고 친척을 찾아가기도 했으며, 노자를 구해 멀리도 갔다. 새재를 넘어 문경에 점촌까지도 가고 박달재를 넘어 제천과 영월과 단양까지도 갔다. 걷기도 하고타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이 실의와 좌절, 그리고 격절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나의 이십대도 끝났다. - P108

농토를 빼앗기고 농촌서 떨려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든 마을이 바로 홍은동이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시골서 살던 버릇과 정서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서울로 옮겨 왔으나 여전히 농민이요, 시골 사람들인 것이다.
장구경은 내가 가장 나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고, 나는 아직 새댁 티를 못 벗은 젊은 아내와 함께 그 사람들 속에 섞이는 일이 더없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때 아내는 행복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언 이십 년이 지난 이야기다. 이제 아내도 가고, 아내에게 술심부름을 시키던 김관식, 박봉우, 백시걸, 이현우시인도 갔다. 기쁨과 고달픔을 신혼의 아내와 함께했던 월세방, 전세방, 장골목 자리는 찾을 길조차 없다. - P116

산과 들에는 막 새잎이 피기 시작하고 개울마다 맑은 물이 철철 흐르는이른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첫여름 풍경에 연실 감탄을 하는 사이 버스는 바꿔 타야 할 곳에 와 우리를 내려놓았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하지만 두어 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아 나는 강변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그때 어깨에 그물을 멘 소년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알 수는 없지만 민요조였다. 나는 문득 내가 두 번이나 쓰고도 실패한 시「목계장터」가 생각났다. 나는 이 자리에서 새로 쓸 시의 첫구절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를 생각해냈다.
돌아가라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그 암울했던 70년대가요즘은 가끔 그립기도 한 것은,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 아래서 그래도 나는 강물처럼 흘러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 P148

백두를 떠나 장장 천오백 리를 달려오다가 산줄기는 꿈틀 발을 멈춘다. 민족의 분단으로 해서 온통 쇠붙이로 메워진 허리가 아파서다. 산줄기는 잠시 얼굴에 주름을 잡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 내달려 마침내 파도 높은 동해를 마주해 선다. 바야흐로 바다와 맞닿은 동녘 하늘 그 밑동이붉게 물들고, 해를 머금은 바다는 하늘을 향해 크게 몸을벌리고 그 힘차고 화려한 창조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다, 바로 이곳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 년 전, 십만 년 전에 우랄과 알타이의 지붕 밑 중앙아시아를 출발, 험준한 산과 강을 건너고 거친 초원과 사막을 지나, 다시 백두대간이 꾸불텅 만들어놓은 산줄기를 따라 허위단심 내려오다가 마침내 멈추어 서서 바라보고 감격의 울음을 운 곳이. - P233

그들은 해를 잉태하여 만삭이 된 바다를 향해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곳이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준 땅이 아니냐며. 그리하여 한바탕 춤과 노래로 하늘에 감사드리면서 바다의 용왕님을만나는 잔치를 벌인 다음, 산기슭과 언덕 아래 움을 파거처를 마련하고, 달과 별에게도 뜨거운 사랑은 부끄러워 감추면서 언 땅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만리, 십만리 먼 길을안고 이고 온 씨를 뿌렸으리라.
저 눈 덮인 설악을 보라. 지금 내설악, 외설악이 그 속의바위며, 나무며,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우리 조상들이 처음 동해를 마주했을 때의 그 감격과 외경을 간직한 채 바다를 향해 서 있지 않느냐. 대륙에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온 반도의 등뼈 저 백두대간은 비단 우리 조상들이 삶의터전을 찾아 더듬어 내려온 산줄기만이 아니라 그들이 피와 땀으로 돋우어놓은 산줄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 P234

바다를 믿고 살다 보면 기상학자가 다 된다. 먼저 새댓바람(북풍)을 보고 그날의 날씨와 바다 상태를 예상한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조금만 세면 그날의 조업은 포기해야한다. 먼바다에 파도가 높다는 징후다. 가까운 바다에도이내 큰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저녁에 부는 새바람은 다음날의 평안한 바다를 약속해 준다. 새벽의 출어준비를 저녁에 미리 해둔다. 마댓바람(남풍)은 더 불길한바람이다. 약하든 강하든 반드시 사나운 파도를 데불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름을 보고도 기상을 미리 안다. 서쪽 하늘에 노란 구름이 끼면 급히 조업을 중단하고 귀항한다. 서쪽 하늘의 노란 구름은 언제고 강풍을 몰아온다.
그들은 또 생태학자, 해양지리학자가 되기도 한다. 봄철썰물 때는 어떤 지점에 어떤 종류의 고기가 몰려들고, 가을철 밀물 때는 어느 지점으로 어떤 종류의 고기가 이동하는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안다. 어느 지점에 화성암이 발달해 있고, 또 얼마를 가면 표면이 평평한 수성암이 펼쳐져있고, 또 어디가 모래펄로 덮여 있는가도 안다. 섬게며 대 - P235

합이 어디에 많고, 소라나 전복이 어디에 몰려 있는가도 안다. 그래서 5미터씩 6미터씩 바닷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섬게를 잡고 전복을 따는 일은 힘들지만 즐겁기도 하다.
때로 물안경 너머로 보이는 물 속 풍경은 꿈속처럼 아름답고, 발에 밟히는 바다 바닥은 새 흙처럼 부드럽다. 그 즐거움을 알기에 삼십 년, 사십 년을 잠수부로 살아온 사람은이제 갯마을의 당나무가 되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본디 바다로부터 나왔다. 모든 생명체들이 그들의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은 본능이리라.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로부터 바다를 찾아가 사람이살아갈 수 있는 두 축인 꿈과 먹거리를 얻었으니, 그 꿈과먹거리를 바다로부터 건져올려 준 어부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열어준 최초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 P236

하지만 바다는 늘 표범처럼 사나워 때로 느닷없이 성을 내고 몸부림을 치니, 그 바다를 터전으로 하는 일이 어찌고달프고 힘겹지 않으랴. 그러나 그물을 놓아 광어,삼치, 고등어, 도미, 이면수를 잡아 올려, 또는 보름씩 한 달씩 바다에 나가 오징어를 잡아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기쁨을, 바다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 아니고 어찌 알랴. 동해에 가거든 작은 어항(港)의 지붕 낮은 횟집에서 늙은 어부나잠수부를 찾을 일이다. 그들의 굵은 주름살 속에서 당신은대륙의 성화와 섬나라의 악다구니 속에 태평양의 한 모서리에 반도로 삐어져 나와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우리의 엄청난 생명력을 보게 될 것이다. - P236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그 땅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삶의 모습을 땅에 맞추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람이 땅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리하여우리가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함부로 산을 깎아내리고, 아무렇게나 들판을 파헤치고, 닥치는대로 물을 막는다. 빠른 길이라면 바위와 산을 가리지 않고 뚫고, 좋은 터라면 천년 묵은 솔숲도 아낌없이 베어제친다. 당장 생산성, 경제성만이 문제가 되지, 우리 조상들의숨결과 땀이 배어 비로소 그 땅이 이룩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생각에도 없다. 남정네들이 수백 년에 걸쳐 장을 보러다니던 길과 고개는 비능률적이라 하여 버려지고, 젊은이들이 외적의 침입을 피로 막은 성은 새 길에 방해가 된다하여 치워지고, 아낙네들의 한숨과 눈물이 서린 고가들은 살기 어렵다고 헐려, 마침내 우리 땅은 경박한 새 부자의 날림집 꼴을 하게 되었다. - P239

더 딱한 것은 염치도 체면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위락 시설들이다. 웬만큼 산세 좋고 물 맑은 곳이다 싶으면 이른바 ‘러브호텔‘이나 ‘가든‘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식당이 차지하고, 멀쩡한 산과 언덕이 까뭉개져 골프장으로 바뀐다. 이런 위락 시설들은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아름다운 경관에 흠집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몰고오는 추악한 바람과 더러운 오물이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 - P239

까지를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사람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아무렇게나 뜯어고쳐도 좋다고 생각한 그 땅이,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안타까움으로 내쉬는 깊은 한숨이, 지금이나라에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우리 국토는 아름답다. 하늘에우뚝 솟았다가 짐짓 몸을 낮추어 마을까지 내려와 가만히사람 사는 구경을 하고 있는 산줄기를 보라. 그 산등성이에 우뚝 서서 억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받고 있는 키 큰나무들을 보라. 그 묵은 잎과 줄기에 앉은 하얀 눈송이들을보라. 바위너설에 달라붙은 가는 잎의 키 작은 나무들을보라. 골짜기의 얼고 녹은 얼음 밑을 쫄쫄거리며 흐르는냇물을 보라. 비록 그 산줄기에 잇대어 펼쳐진 들은 넓지않지만, 우리들의 체질에 맞는 먹을 거리를 만들어 주고,
우리들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위해 양지를 제공해 주지 않는가. 우리가 이 땅을 오로지 당장의 편의를 위해 짓밟고뭉개는 대신 우리 생명의 근원으로서 천년이고 만년이고그 속에 안겨 함께 살아갈 땅으로 귀히 여긴다면, 이 땅은더욱 아름다워지고 그 위에 사람 또한 한결 아름다워지리라. - P240

도시의 소음에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강산은 더 아름다워진다. 산은 사람을 피하듯 가파르게 기어올라가고 물은람을 그리듯 골짜기를 더듬으며 내려온다. 그 산은 군데군데서 잣나무와 소나무숲, 낙엽송숲으로 깨끗이 정돈되어 - P240

있는가 하면, 또 군데군데서 노간주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오리나무가 뒤섞인 잡목 숲을 만들어 화려함을 뽐내고 물은 댐에서 모여 큰 호수를 이루기까지 얼었다 녹았다하면서 바위 틈에 막혀 웅덩이가 되거나, 폭포로 급하게 떨어지기도 하고 큰 줄기로 함께 흐르기도 한다. 이래서 우리 조상들은 우리 땅을 한마디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이라표현했는가 보다. 산의 뜻과 물의 마음을 아는 그들은 산자락에 조심스레 집을 틀어, 스스로 산자락이 되고 물가에밭을 일구어 물과 함께 사는 길을 터득했으리라. 한데 이아름답고 맑은 산과 물은 비무장지대가 가까워지면서 몸살에 걸려 있으니 어찌 딱하지 않으랴. 국토의 분단으로형제끼리 총을 겨누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우리의 다른형제가 무서워, 소나무숲을 아무렇게나 뚫어 구불구불 시뻘건 군삿길을 내고, 잡목숲을 잘라 을씨년스러운 차폐물을 설치한 것이다. - P241

물길은 아무데서나 막히고 비틀리고, 철조망으로 가로막히고, 자명(明)하다던 산과 물이 건드리기만 해도 단숨에 온 천하를 날려보내는 폭발물로 가득 차,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짐승도 마음놓고 다닐 수 없는 무서운 곳이 되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우리 형편을 위정자들이 국민을 순치하는 방편으로 이용, 없어도 좋을 시설들을만들어 산과 물을 더욱 어지럽혀 왔다는 점이니, 이른바
‘평화의 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초 이 댐은 북한이 금 - P241

강산댐을 만들어, 그것을 터뜨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해서, 5공 당시 776억 원의 국민성금에 총 1,509억 원의예산으로 부랴부랴 공사에 착수했으나 일단계 공사만 완료한 채 흐지부지돼 버린 터이다. 당시 이 공사는 초등학생들의 코묻은 돈까지 우려내며 안보 공포증에 걸려 있는국민들을 긴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이제 북한이 금강산댐을 터뜨려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 했다고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금강산댐은 소양강댐과 마찬가지로 단번에는 어떠한 힘으로도 허물 수 없는 사력(砂礫)댐이라고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게 된 그 평화의 댐까지도 어느새 우리 산자수명의 한부분이 되었다. 산과 물의 아름다움을 크게 해친 것마저 아름다움 속에 쓸어 안을수 있는 우리 땅의 힘은 놀랍다. - P2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물에 뗏목이 떠 있으면 또 말했다.
「저 떼가 어데서 오는 건지 아니? 강원도 정선이야. 정선서 서울까지는 일주일이 걸리는데, 마포 가서는 돈을 받아 진탕 먹고 마시는 거야.」다음날 쌀 한 말에 찬거리를 지고 되짚어올 때는 선돌백이에서 쉬는 경우가 많았다. 70년대에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은 중원고구려비가 도랑에 처박혀 빨랫돌로 쓰이고 있던 마을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돌을 그는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어이, 저 글씨 같은 거 보이지? 저기 무슨 내력이 있을거란 말야.」또 「저쪽에 보이는 저 여울 있지? 거기가 의병들이 일본헌병 삼백 명을 몰살시킨 데거든. 그런데 말이다, 그 의병장은 상놈이었는데, 말 안 듣는다고 양반 의병장한테 목을잘렸단 말야」하고 이곳이 의병전쟁의 격전지였음을 상기시켜 준 것도 그로서, 말하자면 내 장시 「남한강」의 모티프의 상당 부분은 이 길에서 그로부터 제공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 P52

길은 고통의 이미지로도 남아 있다. 육이오 때다. 나는피난 가면서 아버지한테 돈을 식구 수대로 칠등분해 가지자고 제안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아느냐는 것이 내 제의의 근거였지만 술자리나 노름자리를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아버지를 나는 철저하게 불신했던 터이다. 처음 아버지는 어린 놈이 되바라지다고 노발대발했지만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던지 내 제의를 수락했다. 하지만 돈을 간수할 수 있는 나와 동생에게만 한 몫씩을 나누어 주고 나머지 다섯 몫은 여전히 아버지가 보관한다는 수준이었다. 이래서 나는 보름쯤 걸린 피난길에서 내내 느긋할 수가 있었는데, 우리가 가서 멈춘 곳은 기껏 충북의 끝인 영동이었다. 나는 내 몫의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양담배 장사를 시작했다. 한데 하루 종일 장사를 해도 담배 한보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영동에는 미군부대가 없어다른 데서 떼어오는 중간상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이문이 - P53

박했던 것이다. 어느날 우리는 미군부대가 있는 대전에 가서 직접 담배를 떼어오기로 하고 친구들 셋이 함께 떠났다. 국도는 통제가 심해 철로를 택했는데 걷기가 너무 불편했다. 특히 발 아래로 까마득히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철교를 지날 때는 금방 죽을 것 같았다. 본디 고소공포증이심하던 터였다. 하루를 묵고 담배를 사가지고 돌아올 때는나는 며칠을 기다렸다가라도 군용 트럭을 타고 가겠다고버티기까지 하였다. 한데 이렇게 힘들게 담배를 사가지고돌아와 보니 하룻밤 사이에 영동에 미군부대가 들어와 양담배값은 반으로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제값을 받고 팔곳을 찾아 아픈 다리를 끌고 황간으로 내려갔다. 하지만영동의 반만도 못한 황간에 양담배의 수요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사흘쯤 묵는 사이 나는 본전을 거의 까먹었다. - P54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길은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똑똑한 체는 독판 하더니 하고 끙끙 앓고 누워 있는 나를 냉소했다. 나는 바로 그 다음날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들어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불과 500미터밖에 안 떨어진 미군부대까지의 그 길이 왜 그렇게 멀고지루하게 생각되었던지 알 수 없다.
한때 나는 막걸리에 취해 김일성을 찬양하고 북한의 노래를 불러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다. 친구들한테 공짜로술 얻어먹기가 계면쩍어 값을 한다는 것이 이 꼴이 된 것 - P54

이다. 그 덕에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용기가 없고소심한 터라 겨우 제천, 영월, 원주, 횡성, 홍천 등 평소에설지 않던 곳을 맴돌았을 뿐이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아는 사람을 찾아 돈을 구걸할 비위도, 일을 찾아 돈을 벌 능력도 없으니까,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곳과 돈 안 들이고잘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어릴 때의 적극적인 성격이몇 번의 실패 끝에 이렇게 소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늦은 봄에서 초가을까지의 기간이었는데 길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때이다. 특히 나는원주의 흥업이라는 데서 자고 목계까지 걷던 길을 가장 고통스럽던 길로 기억하고 있다. 아침도 못 먹고 먼지가 뽀얗게 나는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트럭이며 버스에 섞여걸어서 목계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 P55

왜 하필 그때 목계로 갔을까?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명확히 모른다. 더는 걸을 수 없다는 절망감과 마지막으로 목계를 보아두자는 체념 같은 것이 복합되어 있지 않았을까,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발에 익은 뒷골목을 찾아 들어가니 막국숫집이 있었다. 냉수 한 대접을 들이켜고, 막국수 한사발을 먹으니 무일푼이 되었다. 나는 나루터로 나갔다.
나루를 건너 왼쪽으로 강을 따라 걷다가 고개 하나를 넘으면 고향이었다. 어떻게 나루를 건널까 궁리하며 강을 보고서 있다가 불심검문에 걸렸고, 그것이 내 고통스러운 길의종말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끝도 시작도 없는 길을 걷고 - P55

또 걷는 꿈을 꾸다가 땀에 흠뻑 젖어 깨는 일이 잦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자랐다는 뜻의 시를 쓴 일이 있지만, 내가 길에 대해서 특별한 정서를 가지게 된 데는 아버지의 몫도 적지 않았을것이다. 아버지는 좀더 큰 공부를 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 간이 농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 서기(처음에는 면서기)에 머물렀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광산에손을 대기 시작했다. 삼촌을 덕대라는 대리인으로 내세워분광(分)을 얻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안은 늘 광부와 그 아내들로 들끓었는데, 대개가 외지 사람들로 억센 사투리를 쓰고 행동거조도 거칠어 싸움이 잘 날이 없었다.
특히 놀기들을 좋아해서 파수로 돌아오는 간조날이면 돼지를 잡고 신바람나게 한판 놀았는데 남정네고 아낙네고노래들을 썩 잘들 불렀다.  - P56

그 주막집에서는 객지에서 들어온, 동네 사람들의 표현 그대로 배추 줄기처럼 시원하게 생긴 과부가 과년한 딸과 내 또래의 아들 그리고 아직 성가를 하지 않은 데릴사위를 데리고 밥과 술을 팔고 있었다. 내가 그 집을 좋아했던 것은 그 집은 동네의 다른 사람들과는 사는 게 달랐기 때문이다. 과부는 이집 저집 드나들지도 않았고 아들도 아이들을 따라 나무를 가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통하여, 사는 것이 이곳과는 다른 바깥의 세상을 어렴풋이 내다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볼수 있었고 또 바깥 세상으로도 나왔다. 그 길은 때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길을 타고, 사람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니 웬일일까.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에 실린 글들은 자전적인 것들로서 서너 편을 빼면 모두 최근 한두 해 사이에 쓴 것들이다. 나는 최근 한 신문에...... 문득 고향 생각이 나서 무작정 찾아간 일이 있다.
산허리를 타고 올라와 고개로 사라지던 언덕길을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거꾸로 걸었다. 길게 아스팔트 위로 뻗은그림자를 앞세우고 걸어가는 길가 숲에는 유난히 까치가많았다. 까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잊었던 일들, 잊었던 얼굴들을 생각해냈다. 길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평범한사실에 생각이 미친 것도 그때였다. 이로부터 나는 일부러안으로 났다고 여겨지는 길을 찾아 걸었다. 잊었던 마을과마주치기도 했으며, 사라졌다고 여겨지던 감정이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어쩐지 그 안 제일 구석진 곳에서 늙고 초라한 나 자신의 모습과 마주칠 것 같아 두렵기도 했지만,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쓴 일이 있지만, 이것이 최근 내가 이런 글을 꽤 여러 편 쓴 이유에 대한 부분적인 변명은 될 것 같다.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자, 말하자면 이런생각이 이런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이 자기 존재의 전방위적 확인이라고 할 때 시 외에이 산문들도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 한 방법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가로 쓴 것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독자에게 즐거운 읽을 거리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가져본다.


새 천년의 첫 정월에
신경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