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
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절뚝절뚝 산동네 아래 구멍가게까지 
걸어내려가
주머니에 사 넣는 한갑 담배를 미워하면서,
술 취한 아들이 밤늦게 사들고 들어와
심통과 함께 들이미는 군밤을 미워하면서,
너무 반가워, 그것도 너무 반가워
말보다 먼저 나가는 야윈 손을 미워하면서,

돌아가셔도 눈물 한방울 안 보일,
남편의 미운 짓이 미워 눈물 한방울 안 보일
아내를 미워하면서,
시신을 덮은 홑이불 밖으로 나온 그의 앙상한 발을 만지며 울 막내를 
미워하면서, 고향 선산까지 그를 실어갈 낡은 장의차를 미워하면서,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를 미워하면서,
산동네를 환하게 비출 달빛을 미워하면서,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지금도 살고 계신다.


시집 [사진관집 이층] p 16, 17

서울의 춥고 스산한 이미지는 아내와도, 또 할머니와 아버지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홍은동 산동네 생활을 청산하고 안양 비산동의 산비알에 작은 집을 지었을 때 아내는 여간만 좋아하지 않았다. 집이라고는 하나, 수도가 나오지않고 우물도 없어 뒷산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비문화주택이었다. 그 무렵 우리집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의 몸을 쓰지 못하는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세 칸뿐인 방이 모자라 목욕탕을 없애고 방을 들여야 할 지경으로 갑자기 대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아내는 이 집에서 겨우 일년을 살았을 뿐이다. 시름시름 앓았으나 위궤양이라해서 별것 아니려니 했던 것이 막판에 위암으로 판정을 받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아내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까지도 집에서는 아내가 벽과 마루에 칠한 페인트와 니스 냄새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 P90

그 다음 해 겨울에는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아흔이 가까운 호상이라고는 하나 젊어서 과부가 되고 아들 하나를 청춘에 앞세웠으니 좋은 팔자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더욱이 국수장사도 하고 돼지도 키우고 하며 극성스럽게 돈을 모아 땅마지기도 장만했지만 아들이 다 날려 말년을 서러운 셋방살이로 살았다. 그래도 늦도록 건강해서 잔병치레 같은 것은 없었는데, 손주며느리를 앞세우고부터는 노망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중풍으로 누워 있는 아들을 괴롭히는 짓을 일부러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 년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들어누운 지 칠 년, 내게 와 의탁한 것만도 육 년, 아마 아버지한테도 오래 사는 것이 꼭 복된 일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 P90

그리고 내게는 그 육 년이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한 시절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만 같아 단하루도 마음놓고 밖에 나다니지를 못했다. 여행을 하다가도 불안해져 도중에 돌아오기가 일쑤였고, 일을 할 때도 술을 마실 때도 늘 안절부절, 집에 돌아와 부기가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물론 집에 전화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때로 아직 일할 나이에 병들어누워 있는 아버지가 가엾어 좋아하는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가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공연히 심술이 나서 불쑥봉투를 내밀어 놓고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내 방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눈물이 나지않았다. 어쩌면 내가 이 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는지도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 P91

안양집에서 산 것이 그때까지 만 육년, 오 년도 안되는사이에 가장 가까운 사람 셋을 잃은 그 집이 나는 싫어졌다. 이듬해 이른봄 서울 삼양동에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셋을 안양집에 버리고 오는 것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고향의 선영에 묻혀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 나만 오는 서울은 옛날보다 더 스산했다. 몹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짐을 대충정리하고 방에 누우니 창문으로 환한 달빛이 새어들어왔다. 마루의 유리문을 사납게 흔들고 지붕을 지나는, 전선을잉잉 울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역시 임화의 시구절을 생각했을까, 지금 기억에 없다. - P91

누릇누릇 벼가 익어가는 논이 있는가 하면 벼베기를 하는논도 있고, 벤 벼를 널어 말리는 논도 있었다. 어떤 늙은 부부는 새참을 사이에 놓고 논둑에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내친김에 논둑길로 해서 강까지 나갔다. 새파란 강물에는두둥실 떠가는 하얀 구름과 바위너설의 새빨간 단풍이 아프게 박혀 있고, 치마를 둥둥 걷어 허리에 동여맨 아낙네들과 열댓 살이 안되었을 소녀들이 허리께까지 차는 찬물에들어가 올갱이를 줍고 있었다. 수수를 꺾어 머리에 무겁게인 아낙네들이 왁자지껄 진한 육담을 주고받으며 떼를 지어내 곁을 지날 때 내가 느낀 것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다음날부터 강마을로 산마을로 나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를 찾아가기도 하고 친척을 찾아가기도 했으며, 노자를 구해 멀리도 갔다. 새재를 넘어 문경에 점촌까지도 가고 박달재를 넘어 제천과 영월과 단양까지도 갔다. 걷기도 하고타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이 실의와 좌절, 그리고 격절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나의 이십대도 끝났다. - P108

농토를 빼앗기고 농촌서 떨려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든 마을이 바로 홍은동이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시골서 살던 버릇과 정서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서울로 옮겨 왔으나 여전히 농민이요, 시골 사람들인 것이다.
장구경은 내가 가장 나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고, 나는 아직 새댁 티를 못 벗은 젊은 아내와 함께 그 사람들 속에 섞이는 일이 더없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때 아내는 행복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언 이십 년이 지난 이야기다. 이제 아내도 가고, 아내에게 술심부름을 시키던 김관식, 박봉우, 백시걸, 이현우시인도 갔다. 기쁨과 고달픔을 신혼의 아내와 함께했던 월세방, 전세방, 장골목 자리는 찾을 길조차 없다. - P116

산과 들에는 막 새잎이 피기 시작하고 개울마다 맑은 물이 철철 흐르는이른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첫여름 풍경에 연실 감탄을 하는 사이 버스는 바꿔 타야 할 곳에 와 우리를 내려놓았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하지만 두어 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아 나는 강변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그때 어깨에 그물을 멘 소년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알 수는 없지만 민요조였다. 나는 문득 내가 두 번이나 쓰고도 실패한 시「목계장터」가 생각났다. 나는 이 자리에서 새로 쓸 시의 첫구절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를 생각해냈다.
돌아가라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그 암울했던 70년대가요즘은 가끔 그립기도 한 것은,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 아래서 그래도 나는 강물처럼 흘러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 P148

백두를 떠나 장장 천오백 리를 달려오다가 산줄기는 꿈틀 발을 멈춘다. 민족의 분단으로 해서 온통 쇠붙이로 메워진 허리가 아파서다. 산줄기는 잠시 얼굴에 주름을 잡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 내달려 마침내 파도 높은 동해를 마주해 선다. 바야흐로 바다와 맞닿은 동녘 하늘 그 밑동이붉게 물들고, 해를 머금은 바다는 하늘을 향해 크게 몸을벌리고 그 힘차고 화려한 창조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다, 바로 이곳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 년 전, 십만 년 전에 우랄과 알타이의 지붕 밑 중앙아시아를 출발, 험준한 산과 강을 건너고 거친 초원과 사막을 지나, 다시 백두대간이 꾸불텅 만들어놓은 산줄기를 따라 허위단심 내려오다가 마침내 멈추어 서서 바라보고 감격의 울음을 운 곳이. - P233

그들은 해를 잉태하여 만삭이 된 바다를 향해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곳이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준 땅이 아니냐며. 그리하여 한바탕 춤과 노래로 하늘에 감사드리면서 바다의 용왕님을만나는 잔치를 벌인 다음, 산기슭과 언덕 아래 움을 파거처를 마련하고, 달과 별에게도 뜨거운 사랑은 부끄러워 감추면서 언 땅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만리, 십만리 먼 길을안고 이고 온 씨를 뿌렸으리라.
저 눈 덮인 설악을 보라. 지금 내설악, 외설악이 그 속의바위며, 나무며,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우리 조상들이 처음 동해를 마주했을 때의 그 감격과 외경을 간직한 채 바다를 향해 서 있지 않느냐. 대륙에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온 반도의 등뼈 저 백두대간은 비단 우리 조상들이 삶의터전을 찾아 더듬어 내려온 산줄기만이 아니라 그들이 피와 땀으로 돋우어놓은 산줄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 P234

바다를 믿고 살다 보면 기상학자가 다 된다. 먼저 새댓바람(북풍)을 보고 그날의 날씨와 바다 상태를 예상한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조금만 세면 그날의 조업은 포기해야한다. 먼바다에 파도가 높다는 징후다. 가까운 바다에도이내 큰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저녁에 부는 새바람은 다음날의 평안한 바다를 약속해 준다. 새벽의 출어준비를 저녁에 미리 해둔다. 마댓바람(남풍)은 더 불길한바람이다. 약하든 강하든 반드시 사나운 파도를 데불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름을 보고도 기상을 미리 안다. 서쪽 하늘에 노란 구름이 끼면 급히 조업을 중단하고 귀항한다. 서쪽 하늘의 노란 구름은 언제고 강풍을 몰아온다.
그들은 또 생태학자, 해양지리학자가 되기도 한다. 봄철썰물 때는 어떤 지점에 어떤 종류의 고기가 몰려들고, 가을철 밀물 때는 어느 지점으로 어떤 종류의 고기가 이동하는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안다. 어느 지점에 화성암이 발달해 있고, 또 얼마를 가면 표면이 평평한 수성암이 펼쳐져있고, 또 어디가 모래펄로 덮여 있는가도 안다. 섬게며 대 - P235

합이 어디에 많고, 소라나 전복이 어디에 몰려 있는가도 안다. 그래서 5미터씩 6미터씩 바닷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섬게를 잡고 전복을 따는 일은 힘들지만 즐겁기도 하다.
때로 물안경 너머로 보이는 물 속 풍경은 꿈속처럼 아름답고, 발에 밟히는 바다 바닥은 새 흙처럼 부드럽다. 그 즐거움을 알기에 삼십 년, 사십 년을 잠수부로 살아온 사람은이제 갯마을의 당나무가 되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본디 바다로부터 나왔다. 모든 생명체들이 그들의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은 본능이리라.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로부터 바다를 찾아가 사람이살아갈 수 있는 두 축인 꿈과 먹거리를 얻었으니, 그 꿈과먹거리를 바다로부터 건져올려 준 어부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열어준 최초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 P236

하지만 바다는 늘 표범처럼 사나워 때로 느닷없이 성을 내고 몸부림을 치니, 그 바다를 터전으로 하는 일이 어찌고달프고 힘겹지 않으랴. 그러나 그물을 놓아 광어,삼치, 고등어, 도미, 이면수를 잡아 올려, 또는 보름씩 한 달씩 바다에 나가 오징어를 잡아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기쁨을, 바다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 아니고 어찌 알랴. 동해에 가거든 작은 어항(港)의 지붕 낮은 횟집에서 늙은 어부나잠수부를 찾을 일이다. 그들의 굵은 주름살 속에서 당신은대륙의 성화와 섬나라의 악다구니 속에 태평양의 한 모서리에 반도로 삐어져 나와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우리의 엄청난 생명력을 보게 될 것이다. - P236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그 땅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삶의 모습을 땅에 맞추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람이 땅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리하여우리가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함부로 산을 깎아내리고, 아무렇게나 들판을 파헤치고, 닥치는대로 물을 막는다. 빠른 길이라면 바위와 산을 가리지 않고 뚫고, 좋은 터라면 천년 묵은 솔숲도 아낌없이 베어제친다. 당장 생산성, 경제성만이 문제가 되지, 우리 조상들의숨결과 땀이 배어 비로소 그 땅이 이룩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생각에도 없다. 남정네들이 수백 년에 걸쳐 장을 보러다니던 길과 고개는 비능률적이라 하여 버려지고, 젊은이들이 외적의 침입을 피로 막은 성은 새 길에 방해가 된다하여 치워지고, 아낙네들의 한숨과 눈물이 서린 고가들은 살기 어렵다고 헐려, 마침내 우리 땅은 경박한 새 부자의 날림집 꼴을 하게 되었다. - P239

더 딱한 것은 염치도 체면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위락 시설들이다. 웬만큼 산세 좋고 물 맑은 곳이다 싶으면 이른바 ‘러브호텔‘이나 ‘가든‘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식당이 차지하고, 멀쩡한 산과 언덕이 까뭉개져 골프장으로 바뀐다. 이런 위락 시설들은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아름다운 경관에 흠집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몰고오는 추악한 바람과 더러운 오물이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 - P239

까지를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사람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아무렇게나 뜯어고쳐도 좋다고 생각한 그 땅이,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안타까움으로 내쉬는 깊은 한숨이, 지금이나라에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우리 국토는 아름답다. 하늘에우뚝 솟았다가 짐짓 몸을 낮추어 마을까지 내려와 가만히사람 사는 구경을 하고 있는 산줄기를 보라. 그 산등성이에 우뚝 서서 억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받고 있는 키 큰나무들을 보라. 그 묵은 잎과 줄기에 앉은 하얀 눈송이들을보라. 바위너설에 달라붙은 가는 잎의 키 작은 나무들을보라. 골짜기의 얼고 녹은 얼음 밑을 쫄쫄거리며 흐르는냇물을 보라. 비록 그 산줄기에 잇대어 펼쳐진 들은 넓지않지만, 우리들의 체질에 맞는 먹을 거리를 만들어 주고,
우리들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위해 양지를 제공해 주지 않는가. 우리가 이 땅을 오로지 당장의 편의를 위해 짓밟고뭉개는 대신 우리 생명의 근원으로서 천년이고 만년이고그 속에 안겨 함께 살아갈 땅으로 귀히 여긴다면, 이 땅은더욱 아름다워지고 그 위에 사람 또한 한결 아름다워지리라. - P240

도시의 소음에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강산은 더 아름다워진다. 산은 사람을 피하듯 가파르게 기어올라가고 물은람을 그리듯 골짜기를 더듬으며 내려온다. 그 산은 군데군데서 잣나무와 소나무숲, 낙엽송숲으로 깨끗이 정돈되어 - P240

있는가 하면, 또 군데군데서 노간주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오리나무가 뒤섞인 잡목 숲을 만들어 화려함을 뽐내고 물은 댐에서 모여 큰 호수를 이루기까지 얼었다 녹았다하면서 바위 틈에 막혀 웅덩이가 되거나, 폭포로 급하게 떨어지기도 하고 큰 줄기로 함께 흐르기도 한다. 이래서 우리 조상들은 우리 땅을 한마디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이라표현했는가 보다. 산의 뜻과 물의 마음을 아는 그들은 산자락에 조심스레 집을 틀어, 스스로 산자락이 되고 물가에밭을 일구어 물과 함께 사는 길을 터득했으리라. 한데 이아름답고 맑은 산과 물은 비무장지대가 가까워지면서 몸살에 걸려 있으니 어찌 딱하지 않으랴. 국토의 분단으로형제끼리 총을 겨누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우리의 다른형제가 무서워, 소나무숲을 아무렇게나 뚫어 구불구불 시뻘건 군삿길을 내고, 잡목숲을 잘라 을씨년스러운 차폐물을 설치한 것이다. - P241

물길은 아무데서나 막히고 비틀리고, 철조망으로 가로막히고, 자명(明)하다던 산과 물이 건드리기만 해도 단숨에 온 천하를 날려보내는 폭발물로 가득 차,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짐승도 마음놓고 다닐 수 없는 무서운 곳이 되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우리 형편을 위정자들이 국민을 순치하는 방편으로 이용, 없어도 좋을 시설들을만들어 산과 물을 더욱 어지럽혀 왔다는 점이니, 이른바
‘평화의 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초 이 댐은 북한이 금 - P241

강산댐을 만들어, 그것을 터뜨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해서, 5공 당시 776억 원의 국민성금에 총 1,509억 원의예산으로 부랴부랴 공사에 착수했으나 일단계 공사만 완료한 채 흐지부지돼 버린 터이다. 당시 이 공사는 초등학생들의 코묻은 돈까지 우려내며 안보 공포증에 걸려 있는국민들을 긴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이제 북한이 금강산댐을 터뜨려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 했다고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금강산댐은 소양강댐과 마찬가지로 단번에는 어떠한 힘으로도 허물 수 없는 사력(砂礫)댐이라고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게 된 그 평화의 댐까지도 어느새 우리 산자수명의 한부분이 되었다. 산과 물의 아름다움을 크게 해친 것마저 아름다움 속에 쓸어 안을수 있는 우리 땅의 힘은 놀랍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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