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뗏목이 떠 있으면 또 말했다. 「저 떼가 어데서 오는 건지 아니? 강원도 정선이야. 정선서 서울까지는 일주일이 걸리는데, 마포 가서는 돈을 받아 진탕 먹고 마시는 거야.」다음날 쌀 한 말에 찬거리를 지고 되짚어올 때는 선돌백이에서 쉬는 경우가 많았다. 70년대에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은 중원고구려비가 도랑에 처박혀 빨랫돌로 쓰이고 있던 마을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돌을 그는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어이, 저 글씨 같은 거 보이지? 저기 무슨 내력이 있을거란 말야.」또 「저쪽에 보이는 저 여울 있지? 거기가 의병들이 일본헌병 삼백 명을 몰살시킨 데거든. 그런데 말이다, 그 의병장은 상놈이었는데, 말 안 듣는다고 양반 의병장한테 목을잘렸단 말야」하고 이곳이 의병전쟁의 격전지였음을 상기시켜 준 것도 그로서, 말하자면 내 장시 「남한강」의 모티프의 상당 부분은 이 길에서 그로부터 제공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 P52
길은 고통의 이미지로도 남아 있다. 육이오 때다. 나는피난 가면서 아버지한테 돈을 식구 수대로 칠등분해 가지자고 제안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아느냐는 것이 내 제의의 근거였지만 술자리나 노름자리를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아버지를 나는 철저하게 불신했던 터이다. 처음 아버지는 어린 놈이 되바라지다고 노발대발했지만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던지 내 제의를 수락했다. 하지만 돈을 간수할 수 있는 나와 동생에게만 한 몫씩을 나누어 주고 나머지 다섯 몫은 여전히 아버지가 보관한다는 수준이었다. 이래서 나는 보름쯤 걸린 피난길에서 내내 느긋할 수가 있었는데, 우리가 가서 멈춘 곳은 기껏 충북의 끝인 영동이었다. 나는 내 몫의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양담배 장사를 시작했다. 한데 하루 종일 장사를 해도 담배 한보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영동에는 미군부대가 없어다른 데서 떼어오는 중간상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이문이 - P53
박했던 것이다. 어느날 우리는 미군부대가 있는 대전에 가서 직접 담배를 떼어오기로 하고 친구들 셋이 함께 떠났다. 국도는 통제가 심해 철로를 택했는데 걷기가 너무 불편했다. 특히 발 아래로 까마득히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철교를 지날 때는 금방 죽을 것 같았다. 본디 고소공포증이심하던 터였다. 하루를 묵고 담배를 사가지고 돌아올 때는나는 며칠을 기다렸다가라도 군용 트럭을 타고 가겠다고버티기까지 하였다. 한데 이렇게 힘들게 담배를 사가지고돌아와 보니 하룻밤 사이에 영동에 미군부대가 들어와 양담배값은 반으로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제값을 받고 팔곳을 찾아 아픈 다리를 끌고 황간으로 내려갔다. 하지만영동의 반만도 못한 황간에 양담배의 수요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사흘쯤 묵는 사이 나는 본전을 거의 까먹었다. - P54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길은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똑똑한 체는 독판 하더니 하고 끙끙 앓고 누워 있는 나를 냉소했다. 나는 바로 그 다음날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들어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불과 500미터밖에 안 떨어진 미군부대까지의 그 길이 왜 그렇게 멀고지루하게 생각되었던지 알 수 없다. 한때 나는 막걸리에 취해 김일성을 찬양하고 북한의 노래를 불러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다. 친구들한테 공짜로술 얻어먹기가 계면쩍어 값을 한다는 것이 이 꼴이 된 것 - P54
이다. 그 덕에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용기가 없고소심한 터라 겨우 제천, 영월, 원주, 횡성, 홍천 등 평소에설지 않던 곳을 맴돌았을 뿐이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아는 사람을 찾아 돈을 구걸할 비위도, 일을 찾아 돈을 벌 능력도 없으니까,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곳과 돈 안 들이고잘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어릴 때의 적극적인 성격이몇 번의 실패 끝에 이렇게 소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늦은 봄에서 초가을까지의 기간이었는데 길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때이다. 특히 나는원주의 흥업이라는 데서 자고 목계까지 걷던 길을 가장 고통스럽던 길로 기억하고 있다. 아침도 못 먹고 먼지가 뽀얗게 나는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트럭이며 버스에 섞여걸어서 목계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 P55
왜 하필 그때 목계로 갔을까?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명확히 모른다. 더는 걸을 수 없다는 절망감과 마지막으로 목계를 보아두자는 체념 같은 것이 복합되어 있지 않았을까,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발에 익은 뒷골목을 찾아 들어가니 막국숫집이 있었다. 냉수 한 대접을 들이켜고, 막국수 한사발을 먹으니 무일푼이 되었다. 나는 나루터로 나갔다. 나루를 건너 왼쪽으로 강을 따라 걷다가 고개 하나를 넘으면 고향이었다. 어떻게 나루를 건널까 궁리하며 강을 보고서 있다가 불심검문에 걸렸고, 그것이 내 고통스러운 길의종말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끝도 시작도 없는 길을 걷고 - P55
또 걷는 꿈을 꾸다가 땀에 흠뻑 젖어 깨는 일이 잦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자랐다는 뜻의 시를 쓴 일이 있지만, 내가 길에 대해서 특별한 정서를 가지게 된 데는 아버지의 몫도 적지 않았을것이다. 아버지는 좀더 큰 공부를 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 간이 농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 서기(처음에는 면서기)에 머물렀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광산에손을 대기 시작했다. 삼촌을 덕대라는 대리인으로 내세워분광(分)을 얻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안은 늘 광부와 그 아내들로 들끓었는데, 대개가 외지 사람들로 억센 사투리를 쓰고 행동거조도 거칠어 싸움이 잘 날이 없었다. 특히 놀기들을 좋아해서 파수로 돌아오는 간조날이면 돼지를 잡고 신바람나게 한판 놀았는데 남정네고 아낙네고노래들을 썩 잘들 불렀다. - P56
그 주막집에서는 객지에서 들어온, 동네 사람들의 표현 그대로 배추 줄기처럼 시원하게 생긴 과부가 과년한 딸과 내 또래의 아들 그리고 아직 성가를 하지 않은 데릴사위를 데리고 밥과 술을 팔고 있었다. 내가 그 집을 좋아했던 것은 그 집은 동네의 다른 사람들과는 사는 게 달랐기 때문이다. 과부는 이집 저집 드나들지도 않았고 아들도 아이들을 따라 나무를 가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통하여, 사는 것이 이곳과는 다른 바깥의 세상을 어렴풋이 내다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볼수 있었고 또 바깥 세상으로도 나왔다. 그 길은 때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길을 타고, 사람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니 웬일일까.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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