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시집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공기는 상처로 가득하고 나를 덮은 상처 속에서 광대뼈는 뾰족하지만 당신이 세게 잡으면 뼈가 똑 부러지는 그런 작은 새가 태어나는 순서
새하는 여자를 보고도 시가 모르는 척하는 순서 - P11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 죽을 만큼 아프다고 죽겠다고 두 손이 결박되고 치마가 날개처럼 찢어지자 다행히 날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종종 그렇게 날 수 있었다고 문득 발을 떼고 난간 아래 새하는 일종의 새소리 번역의 기록 그 순서
밤의 시체가 부푸는 밤에 억울한 영혼이 파도쳐 오는 밤에 새가 한 마리 세상의 모든 밤 밤의 꼭지를 입에 물고 송곳같이 뾰족한 에베레스트를 넘는 순서 눈이 검고 작아진 새가 손으로 감싸 쥘 만큼 작아진 새가 - P12
입술을 맞대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새가 새의 혀는 새순처럼 가늘고 태아의 혀처럼 얇은데 그 작은 새가 이불을 박차고 내 몸을 박차고 흙을 박차고 나가는 순서
결단코 새하지 않으려다 새하는 내가 결단코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라고 말하는 내가
이 삶을 뿌리치리라 결단코 뿌리치리라
물에서 솟구친 새가 날개를 터는 시집
시방새의 시집엔 시간의 발자국이 쓴 낙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연필을 들고 가느다란 새의 발이 남기는 낙서 - P13
혹은 낙서 속에서 유서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 그 순서의 뒤늦은 기록
이것을 다 적으면 이 시집을 벗어나 종이처럼 얇은 난간에서 발을 떼게 된다는 약속 그리고 뒤늦은 후회의 기록 - P14
쌍시옷 쌍시옷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의 마음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의 처절
도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여러 넘버들을 매겨주었지
나는 이 도시에서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않겠다 더 이상 먹지도 않겠다
부리처럼 입술에 조개껍데기를 물고 물고기의 피를 얼굴에 바르고 바람의 손목을 두 손에 나눠 잡고
웃어주겠다 증발하겠다 은퇴하겠다
나는 도시의 눈에 띄지 않겠다 - P17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아이스크림집 빵집 책방 국솟집 아케이드를 잘근잘근 씹어서 먹으면 뜨거운 해변이 목구멍에서 쏟아질 것 같다
나는 이제 줄이 긴 새 떼가 될 거다 이 도시를 칭칭 감을 거다 그러면 새 떼가 말할 거다
(다음에 서로 어울리는 항목끼리 줄을 그으세요) 나무 고래 남국의 고래는 꽃의 정원 꽃 얼음 햇빛을 정육면체로 잘라 차곡차곡 담장을 쌓는다 햇빛 강 강물에 발을 담그자 이 물결이 개미떼라는 걸 알았다 개미 배 뿌리내린 배
도로들이 일어서게 한 다음 자동차를 공중에 띄우고 새 떼가 공중에 뜬 강물로 활강해 갈 거다 - P18
금빛 가는 실로 검은 바다에 수를 놓던 한 마리 새가 바다를 물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그만 탁 놓아버리면 물결이 도시를 뒤덮을 거다 내 공책의 행과 행 사이로 물이 들어올 거다
새들은 발바닥에 쌍시옷이 두 개 달렸다 (한강의 다리 난간 위 새 한 마리 왼발에 미래 오른발에 과거 었, 겠, 었, 겠, 었, 겠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고 내 일기엔 쌍시옷이 쌓인다)
(나는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이 세상이 너무 좁다고 폐소공포증에 걸린다)
그리하여 나는 공책에 긴 줄을 내리그으며 - P19
새는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걸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러겠다 얼굴에 깃털을 기르겠다 날아가겠다
라고 쓴다 - P20
날개 환상통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 P21
(그 콩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 P22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 P23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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