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가 결혼식 사회를 부탁해왔다. 비혼주의자인 내게 결혼식 사회를 봐 달라니…….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을 했다.




 결혼식 당일, 여자 사회자를 처음 본 하객들이 좀 당황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정작 당황스러웠던 건 나 자신이었다.

 사회자를 찾는 안내방송에 앞으로 나갔더니, 예식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사회자가 맞느냐고 재차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제야 사회자가 읽을 식순과 문구들을 건네준다. 그걸 받아서 스윽 훑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다. 그러나 양가 혼주들이 엄숙하게 앉아있는 앞에서 웃을 수가 없어서 목을 가다듬는 척하며 억지로 참았다. 




 신랑, 신부의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이 문제였다. ‘군’과 ‘양’. 신랑은 서른아홉, 신부는 서른 넷. 우리 사회에서 그 호칭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청소년들에게는 조금의 예의를 갖추는 호칭일진 모르지만, 마흔을 앞둔 사람에게 붙이는 건 모욕이 아닌가? 결혼 유무와는 상관없이 이미 사회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성인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군과, 양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상황 앞에서 어떻게 실소가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결국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아이로 취급해도 된다는 말인데, 결혼만 하면 어른으로 대접하겠다는 단순함을 넘어서는 무식함 앞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신랑 신부가 입장하고 주례사를 들을 차례가 왔다. 주례사사 시작되는 순간, ‘아차’ 싶다. 결혼식에 참석해서 단 한 번도 주례사를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주례사가 시작되면 늘 밥을 먹으러 가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그 주례사를 끝까지 다 듣고 있어야 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주례사 내용이 나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 남편은 열심히 돈 벌어서 가정을 지키고 아내는 애교부리면서 남편의 기분을 잘 맞추어야 한다, 아이를 낳는 것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적 행동이다 등등 평소 사석에서 들었으면 당장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고 말았을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순간, 모든 게 황당하고 우스웠던 기분이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서글프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듣는 ‘좋은 말씀’이 저런 반인권적인 얘기들이라니, 게다가 저런 말씀들을 깊이 새기고 살라니, 처참하다. 나 뿐 아니라 결혼식에 대해서 입대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만치 결혼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런 악습들은 반복되는 걸까?




 결혼식이란 어차피 혼주들이 지인들에게 부조금 챙기는 자리니, 형식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결혼이란 게 원래 제도 앞에 무릎 꿇는 행위이니, 이런 저런 폐단 따위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일까?      




 나 같은 비혼주의자는 결혼이란 제도 자체를 거부하기에, 결혼식에 대해서까지 이러쿵저러쿵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러나 결혼이란 걸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발 결혼식과 그를 둘러싼 각종 반인권적 악습들에 대해서 좀 분노하고 저항했으면 좋겠다. 결혼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자리라고 하지 않나. 그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이렇게 마구잡이로 시작되어도 좋다는 건가? 정말 다들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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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글쓰기 - 발설하라, 꿈틀대는 내면을, 가감 없이
박미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내 불행이 누군가의 행복이 된다면 언젠간 나도 행복으로 삼을 만한 남의 불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불행을 징검다리 삶아 우리는 생의 매 고비를 죽지 않고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본문 53쪽)

 말하고, 글 쓰는 행위가 나를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행위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이 바로 타인의 불행이었구나. 그 불행을 기꺼이 표현해준 다른 이들 때문이었구나. 

 나의 고통이 더 이상 나만의 고통이 아님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그 안도감, 나의 생각이 더 이상 나만의 생각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그 반가움. 아마 내가 글쓰기를 사랑해 온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글쓰기를 저 높은 곳으로 모셔서 떠받들지 않고, 삶의 치유를 위한 맞춤한 도구로 만들어 내 손 안에 딱 쥐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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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여성들과 만나서 얘기를 하다보면 데자뷰를 종종 경험한다. 남편이 주말에 애들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붙어있는 꼴이 짜증난다는 얘기, 시어머니가 동서들과 비교하며 늘 인격적으로 모욕해서 화가 난다는 얘기, 아이들이 공부한답시고 엄마를 무슨 종 부리듯이 해서 서럽다는 얘기……. 그네들이 하는 얘기들은 듣다 보면 ‘어라, 지난번에도 똑같은 얘기를 들었는데…….’ 하는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시감 가운데 가장 익숙한 대사가 있으니, 온갖 문제 거리들을 다 털어 놓은 그네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다. 

  “아이구, 그래도 어떡해? 별 뾰족한 수 있나?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결혼한 여성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듣다보니 내게 결혼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한 아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결혼을 하면 왜 그렇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 왜 그렇게 분노하고 절망할 일들이 많은 걸까? 이해하기가 힘들다. 

 

 물론 혼자서 살아가는 나라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는 일이 왜 없겠나? 하지만 그네들처럼 똑같은 문제들이 그토록 장시간 반복된 경험은 거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같은 문제에 대해서 그토록 오래 분노한 경험이 없다.

 살면서 나를 화나게 하는 상황은 늘 들이닥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안을 만들어 능동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내 힘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 이상 화 낼 필요가 없다. 그냥 수용하는 수밖에. 

 

 많은 여성들이 그 ‘어찌할 수 없는 일’에 그토록 오래 화를 내는 까닭은 아마 그 일이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닌 데 있는 게 아닐까? 

 반복되는 분노는 자신을 갉아먹는 병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분노 앞에서 “어쩔 수 없지.”라며 포기하는 건 옳지 않다. 정말 그 일이 어찌할 수 없다면 화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화가 난다면 그 일은 이미 어찌해야 하는 일이다. 그저 투덜대고만 있을 일이 아니란 거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복해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라면 능동적으로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내 조언에 많은 이들이 코웃음을 친다. 
 “결혼해서 살아가는 게 다 그렇지? 그럼 주말에 애 안 본다고 이혼해?” 
 “저런 시어머니 만난 게 다 내 팔자려니, 해야지. 그럼 어떻게 해? 며느리 노릇 안 하고 살아?”

 

 

 그네들의 반응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신들은 결혼이란 계약을 했으므로 이미 계약서에 도장 찍은 마당에 어쩌겠냐는 말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가정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기로 하는 게 결혼 계약의 조건일 터이니,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계약에는 가정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밖에 없는가? 그 계약에는 구성원의 진정한 행복이란 조건은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 계약은 너무도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평생을 그 계약에 얽매여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습관처럼 화내고 절망하며 살아야 하는 일이 정말 그네들이 말하는 ‘평범한 일상’인가? 천만에, 그건 노예의 일상이다.

 

 결혼은 노예계약이 아니다.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과, 남편의 아이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이해, 배려, 헌신해야 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 조항이 결혼계약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다. 결혼해서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어찌할 수 없다’고 착각하는 그 문제들이 정말 그런 것인지, 한번 상대에게 변화를 요구해 보면 어떨까? 단, 계약 파기를 각오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단언컨대 아마 90% 이상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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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분석하길 좋아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평가에 잘 휩쓸리지 않고, 보편의 늪으로 등 떠밀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보면 참 속편하게 산다는 소릴 종종 한다. 그러나 그거야 말로 속 모르는 소리. 나는 그 놈의 분석력과 합리성 때문에 늘 속 끓이며 살았다.




 어릴 때부터 가까운 친구들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종종 받았다. 특별히 모난 성격도 아니고, 말을 밉살스럽게 하는 것도 아니고, 배려나 이해를 잘 못하는 것도 아닌데 친구들은 뜬금없이 나를 비난하곤 했다. 그 비난의 내용은 주로 이런 것이다.

 “너 같이 잘난 인간한테는 말해봤자 소용없지.”

 “그래, 네가 어려운 일이 뭐가 있니? 그렇게 똑똑한데.”

 “어이구, 잘나셨어. 어련하시려고.”




 친구들의 반응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 틀린 말 한 적 없는데……. 그러나 그들의 화를 풀기 위해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한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빈다. 그렇게 빌고 또 빌어서 상대의 기분을 풀어놓은 다음에야 내 생각을 돌아볼 여유를 얻는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정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억울함마저 생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난 척 한 적도 없고,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왜 이런 소릴 들어야 하는지.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이 두렵고. 나도 모르게 상대의 반응에 주눅 들곤 했다. 이젠 나를 욕하는 상대가 미운 게 아니라, 저 친구가 왜 나를 욕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먼저 하게 됐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삼십대를 다 보낸 이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한 가지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화를 내는 까닭이 내가 그들의 말을 공감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먼저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 그리고 만들어진 문제는 정면 돌파해 나가는 것,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합리적인가? 지금까지 그 방식대로 문제없이 잘 살아왔다.




 그러니 친구들이 일상적으로 털어놓는 얘기들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한다. 해결책이 없는 연애문제며, 집안 문제며, 부부싸움 같은 이야길 듣고 있노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 않고 문제를 즐기며 살아가는 그들의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그들이 털어놓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런저런 합리적 방법들을 조언한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뜻대로만 되는가? 아무리 조심해도 인생 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내 성향이란 것이 엎어져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네가 엎어진 원인이 뭘까?”라며 분석하는 꼴이니……. 내 친구들은 그걸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엎어진 일만으로도 부끄럽고 속상한데,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며 옷을 툭툭 털어줘도 모자랄 판에 빤히 들여다보며 돌멩이를 제대로 살피라는 둥, 다리 힘을 더 주었어야 한다는 둥의 얄미운 소릴 해대고 있으니 내가 어찌 욕 얻어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늘 정답만을 얘기하는 나, 내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이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운 것이다.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힘은 공감에 있지, 올바른 원인 분석에 있지 않다는 걸 어린 나는 몰랐다. 내 분석력과 합리성은 내 삶에서나 통하지, 타인에게는 무용지물이란 것을 몰랐다. 타인의 삶은 타인의 잣대로 이해해 주는 지혜, 그걸 우린 공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친구들이 내게 간절히 원했던 것, 그게 바로 공감이었다.




 더 늦기 전에 내게 모자랐던 게 무엇인지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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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21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하시군요..
역시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지향합니다.
차이점은 저는 그저 지켜보는 쪽이지요.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산딸나무님께서 훨씬 정이 많으시고 착하신 거지요. 하하


산딸나무 2008-11-21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여자 같은 건 정말 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나봐요.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죠.^^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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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을 사랑해야 하기에 사랑하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희생과 헌신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 희생하고 헌신한 것을 예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 외에 길이 없기에 그것을 선택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태어났고, 성장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그 지독한 아이러니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감동과 눈물을 흘렸겠지만, 나는 세상 모든 자식에게 '엄마'라는 이름은 무한착취보증수표로 통하는 우리 사회의 오물통과 마주한 느낌이다. 그 오물통을 치울 생각을 않고 뚜껑만 덮어두고 쉬쉬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좀 역겹다.  그리고 세상 모든 남편에게 '아내'라는 이름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아내를 등처먹지 않고, 세상의 모든 딸들이 더 이상 엄마를 갉아먹지 않고,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더 이상 어머니를 착취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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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엄마는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며 나의 에너지가 내 아이들에게 옮겨가는 거 같답니다.
그려러니 한답니다.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8-11-1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너지가 옮겨간다...
부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