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이다.  

마흔이다. 

정말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서른을 맞을 때 한 번 사기 당해본 경험이 있어서 마흔을 앞두고 기대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이렇게 슬몃 눙치고 들어앉는 마흔이 오랜 친구처럼 정답다. 

내 나이 마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마흔의 나는 모든 게 새롭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십 년은 이 꿈과 이 길 덕분에 행복할 것 같다. 

나이 쉰에는 더 멋진 꿈과 더 멋진 길이 나타날 것 같은 마흔 살이어서 고맙고 행복하다. 

올 한 해도 신나게, 유쾌하게 낄낄대며 잘 살아야겠다. 

 

서재 친구분들께. 

서재 문을 오래 닫을 줄 알고 비장하게 한 글 남겼는데 

너무 빨리 다시 돌아와서 좀 머쓱하네요. 

자주 뵐께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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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0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lcome! 산딸나무님.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는 대로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하


산딸나무 2010-01-04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이렇게 잽싸게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플루토 완결편 보고서 감동에 푹 빠져 있었던 터라
아톰 얼굴이 더 반갑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진 2010-02-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반가워요~
오랜만에 들어와보네요.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갑자기 언니 서재가 생각나더군요.
올해 언니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래요.^^
 

새로 시작한 일을 1년도 안 되어서 그만 두었다. 

세상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내가 세상을 밀쳐내는 것인지...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마흔이 다 되어서,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직도 세상이 이해가 안 되다니... 

어떻게 타협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그러나, 나를 바꾸지 않기로 했다. 

세상과 싸워보겠다는 게 아니다.   

세상과 대화를 해보려 한다.  

세상을 억지로 이해하기 보다 나를 먼저 세상에 이해시켜 보기로 했다. 

단지 소수라는 까닭으로 나의 삶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게, 

"너 따위는 꼴도 보기 싫어!"라고 돌아서서 다시 골방으로 틀어박혀 살아서는 안 될 것이기에, 

이미 그게 답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나는 세상과 열심히 열심히 내가 가진 언어로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이해하고 인정하면 정말 좋은 일이고, 

그게 아니어도 나를 이해하는 친구를 하나쯤 얻는다면 손해볼 것 없는 일일 터이니. 

그러나 이도 저도 안 되어도 세상과 대화를 시도해본 것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절망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도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 

적어도 시도하는 과정에서는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세상과 대화를 위해 잠시, 아니면 아주 오래 이 서재를 닫습니다. 

가끔씩 들러서 대화를 나누어주던 좋은 분들께  

닫힌 서재에 대한 변명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세상과 대화하는 일이 일단락 되면 다시 글 올리겠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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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8-2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잠시후, 곧 다시 뵙도록 해요.
기다립니다. 하하


진진 2009-09-0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잠시 서재를 닫는군요.
요즘 자주 떠올라서 보고싶어요.
전화해야지 하면서...
 

 

 토요일 밤, 모처럼 잠자리에 일찍 들었는데 잠결에 휴대폰이 울린다. 전화를 받으면서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간다. “여보세요?” 하고 상대를 확인하니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친한 후배다. 아, 또 싸웠구나.

 

 요즘 그녀는 사귄 지 일 년 남짓 되는 남자친구와 걸핏하면 싸우고서 이렇게 남의 단잠을  깨우곤 한다. 한 밤에 잠에서 깨는 건 괴롭지만, 오죽 답답하면 이 시간에 전화를 할까 싶어서 싫은 기색 없이 전화를 받는다.

 “언니, 언니가 보기에도 내가 그렇게 예민하고 까칠해? 그 사람한테 불만을 얘기하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화를 내. 근데도 나는 자꾸 그 사람이 나를 섭섭하게 하고 속상하게 한 일이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해? 한 번 사과 받았으면 그만이지, 자꾸 들춰내는 내가 잘못된 걸까? 아마 내 성격이 문제가 있는 거겠지?”

 후배의 잠긴 목소리에서 막막함이 뚝뚝 묻어난다. 에고, 오늘도 잠자긴 글렀구나.

 

 미안하다는 말은 두 가지의 용도가 있다. 하나는 이 순간을 회피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진심으로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고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상처 입었음에 깊이 공감해서 나오는 사과이다. 두 번째 사과만이 진짜 사과다.

 

 남자들이 자주 하는 말, “미안하다고 했잖아”라는 말은 솔직히 ‘미안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미안하지 않은데, 자꾸 사과를 강요하니까 화가 나는 거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으니, 사과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상대의 몫이란 것이다. 근데도 남자들은 바람을 피워놓고도, 도박으로 집을 날려도, 숱하게 구타를 했어도 몇 번 미안하다고 하면 다 되는 줄 안다. 미안함의 정도도 자신이 정한다고 착각한다. 내가 열 번쯤 미안하다고 할 생각인데, 상대가 열한 번째 사과를 요구하면 그때부터 화가 나는 것이다.




 “미안해.”

 그 한 마디 말이 때로는 “사랑해.”라는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와 관계를 지속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겐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랑할수록 미안한 마음을 더 자주 표현해야 한다. 미안하다는 것은 상대에게 내가 잘못한 일이 있고, 그 일로 해서 상대가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해서 내가 그 상처를 씻어주길 원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남자들이 그 말을, 내가 사과했으니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쯤으로 해석하는 데서 늘 싸움이 일어난다.




 남자들은 자신이 사과하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대는 아니다.  상대는 그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파트너가 자신의 상처를 이해해 줄 준비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상처가 떠오르면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자꾸 반복된다고 난감해할 필요 없다. 또 다시 사과하면 되니까. 온 마음을 다 담아서 당신에게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당신의 진심어린 사과가 상대의 상처를 조금씩 씻어줄 것이고, 그렇게 상처가 씻긴 다음에는 더 이상의 반복은 없을 테니까. 

 잊지 말자.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미안해.”라는 말은 나로 인해 생긴 상처가 들쑤실 때마다 내가 그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간호하겠다는 다짐이란 것을.




 후배와 전화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니 달아난 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도 연고 한번 발라주고 “이제 안 아프지? 다시는 징징거리지 마!”라고 으름장 놓는 남성들이여, 제발 연애를 하려거든 공부 좀 하자. 그대들의 무지 때문에 연애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쉬고 있는 나까지 툭하면 잠을 설쳐대니, 이래서야 쉬고 있는 보람이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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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친구들을 불러다 밥을 해 먹이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즐기면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걸 보면 절로 행복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내가 요리를 즐긴다는 걸 몰랐다. 그 때는 정말 밥 하고, 상 차리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버지와 오빠들의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일이 너무 싫어서 학교 운동장을 빙빙 돌다가 해가 지고서야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아버지는 꼭 나를 기다렸다가 저녁상을 차리게 하곤 했다. 평생을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남자로 살아온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 밥을 차리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배고픔을 참았다가 늦은 저녁상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셨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은 가끔 내 꿈의 단골메뉴로 등장하기도 했다. 남자들이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혼자 살면서 정말 좋은 점은 나 아닌 누군가의 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밥 차리는 일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닌 오롯한 나의 권리가 되는 순간, 나는 요리가 즐거워졌다. 밥하지 않을 자유를 얻고 나니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요리 하는 일을 좋아하는지 자각하게 된 것이다.




 요즘,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서 먹이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대화하는 시간은 내 삶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은 귀찮지도 않느냐고 하면서 대충 시켜 먹자고 하지만 나는 내가 초대한 손님들을 위해 요리하는 게 귀찮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요리 솜씨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 요리 솜씨에 왜 혼자 사느냐? 맏며느리 감으로도 손색이 없는데…….”

 그러나, 그 말은 내 요리 솜씨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요리하는 일이 의무가 아닌 삶, 요리하는 자유가 주어진 삶이 아니면 나는 솜씨를 발휘하기는커녕, 요리하는 일을 지금도 끔찍하고 징글맞은 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요리하면서 살아보니 요리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알게 된다. 요리하는 일은 꽤 창조적인 일이어서 내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처럼 설레는 작업이다. 또 소통의 행복도 더불어서 만끽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일이 의무가 되는 순간 하루 세 끼 밥 차리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내가 죽어서야 끝나는 일……. 여자들에게 요리는 우리 어머니의 표현대로 참 징글맞은 일이다.




 추운 겨울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장을 봐서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마주 않는 밥상은 그 어느 부귀영화도 대신할 수 없는 행복이다. 삶에 지친 친구들을 두루 불러 모아서 해물탕과 파전 한 장으로 나누는 술상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위로이다.

 

 그러나 더 많은 시간,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혼자서 밥을 먹는 날, 나는 절대로 끼니를 대충 때우지 않는다. 그 어느 날 보다 정성들여서 밥상을 차린다.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의 소박한 밥상을 오로지 나를 위해 정갈하게 차린다. 




 내가 차린 밥상을 생을 음미하듯 찬찬히 비우다 보면, 나는 내 영혼을 먹이는 어미의 심정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나’를 먹이고 기르는 밥 한 그릇과 내 노동을 생각하다보면 감격스러움에 젖는 날도 있다. 




 나는 요리가 즐겁다. 이 사실은 요리하지 않을 자유가 주어져 있는 한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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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3-1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하는 일, 즐거운 일이지요.
저도 아이들 먹이느라 가끔 합니다.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좋지요. 하하


산딸나무 2009-03-13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이 요리를 즐기시는 까닭도 아마 '가끔' 하실 자유가 있기 때문일 거에요.^^

깔깔마녀 2009-06-23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글...좋아요

산딸나무 2009-06-2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세상 모든 자매들이 요리의 즐거움을 되찾을 날을 기대해봅니다.
 

 

 

 “나는 내 딸이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 마흔도 안 된 친구가 그 얘기를 하는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사실, 그 말 자체는 그리 낯선 말이 아니다. 내 또래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어머니들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얘기는 우리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이나 하는 흘러간 옛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또래의 여성들이 자기 딸에게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너무도 의외였다.




 우리 어머니들이야 교육받지 못 하고, 일을 할 수 없었던 절대적 차별 속에서 성장한 분들이니 그 억울함을 딸에게 그렇게 하소연할 수 있다고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면 비난받는 시대도 아니고, 교육을 못 받은 것도 아닌 우리들이 왜 우리 어머니들과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살아가는 걸까? 물론, 여성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이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건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세대의 그 말이 우리 어머니 세대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아주 친한 언니가 한 사람 있다. 그 언니는 도시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지역운동 하는 주민 운동가이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아이를 혼자 키운다. 일하는 곳에서는 월급이라고 할 수도 없는 활동비를 조금 받는다. 사회적 시선으로 성공한 커리어우먼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혼녀다. 그러나 그이는 언제나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구, 이것아. 니 애미 반만 닮아라. 나처럼 좀 멋있고 씩씩하게 살아. 니가 내 반만이라도 살아내면 내가 일어서서 박수 쳐 주마.”




 딸이 자기처럼만 살면, 아니, 그 반만이라도 살아내면 좋겠다는 그이의 말. 이보다 더 멋진 말이 또 있을까? 나는 늘 궁금했다. 그 어떤 사회적 시선에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심으로 자기를 긍정하는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십여 년 마음을 나누면서 관찰한 바로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끝없는 노력, 그것이 바로 답이 아닐까, 싶다. 남의 판단으로 자신의 행복을 재는 쉬운 길을 마다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도 힘들 것 같아 포기해버리는 안락함을 마다하고 진정으로 내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아서 노력해온 그이의 삶. 그게 자랑스럽지 않다면 세상에 자랑거리가 존재할 수나 있을까?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처럼 살지 마.’라고 하기 전에 나는 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는 수순을 밟자는 것이다. 자기를 돌아볼 시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면서,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할 에너지를 엉뚱하게 남편과 자식에게 쏟으면서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내조했는데.’ 따위의 감사를 강요하는 엄마들은 솔직히 질린다.

 

 이미 끝난 인생도 아니고, 아직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을 젊은 여성들이 (아니 살아갈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처럼 살지 말라는 얘기를 그토록 쉽게 하다니……. 내가 살아야 할 내 몫의 인생을 방기하고 다른 누구의 인생에 참견하겠다는 건가?  내 딸의 삶은 그 아이의 몫이지만, 내 삶은 여전히 내 몫이다. 




 내 딸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내가 그 애에게 거는 기대를 반만 거두자. 내 딸에게 투자하는 돈을 반만 줄이자. 내 딸에게 요구하는 치열함을 반만 기대하자. 그리고 그 반을 나 자신에게 쏟아보자. 그러면 우리도 “너도 나처럼만 살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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