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모처럼 잠자리에 일찍 들었는데 잠결에 휴대폰이 울린다. 전화를 받으면서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간다. “여보세요?” 하고 상대를 확인하니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친한 후배다. 아, 또 싸웠구나.
요즘 그녀는 사귄 지 일 년 남짓 되는 남자친구와 걸핏하면 싸우고서 이렇게 남의 단잠을 깨우곤 한다. 한 밤에 잠에서 깨는 건 괴롭지만, 오죽 답답하면 이 시간에 전화를 할까 싶어서 싫은 기색 없이 전화를 받는다.
“언니, 언니가 보기에도 내가 그렇게 예민하고 까칠해? 그 사람한테 불만을 얘기하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화를 내. 근데도 나는 자꾸 그 사람이 나를 섭섭하게 하고 속상하게 한 일이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해? 한 번 사과 받았으면 그만이지, 자꾸 들춰내는 내가 잘못된 걸까? 아마 내 성격이 문제가 있는 거겠지?”
후배의 잠긴 목소리에서 막막함이 뚝뚝 묻어난다. 에고, 오늘도 잠자긴 글렀구나.
미안하다는 말은 두 가지의 용도가 있다. 하나는 이 순간을 회피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진심으로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고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상처 입었음에 깊이 공감해서 나오는 사과이다. 두 번째 사과만이 진짜 사과다.
남자들이 자주 하는 말, “미안하다고 했잖아”라는 말은 솔직히 ‘미안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미안하지 않은데, 자꾸 사과를 강요하니까 화가 나는 거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으니, 사과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상대의 몫이란 것이다. 근데도 남자들은 바람을 피워놓고도, 도박으로 집을 날려도, 숱하게 구타를 했어도 몇 번 미안하다고 하면 다 되는 줄 안다. 미안함의 정도도 자신이 정한다고 착각한다. 내가 열 번쯤 미안하다고 할 생각인데, 상대가 열한 번째 사과를 요구하면 그때부터 화가 나는 것이다.
“미안해.”
그 한 마디 말이 때로는 “사랑해.”라는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와 관계를 지속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겐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랑할수록 미안한 마음을 더 자주 표현해야 한다. 미안하다는 것은 상대에게 내가 잘못한 일이 있고, 그 일로 해서 상대가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해서 내가 그 상처를 씻어주길 원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남자들이 그 말을, 내가 사과했으니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쯤으로 해석하는 데서 늘 싸움이 일어난다.
남자들은 자신이 사과하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대는 아니다. 상대는 그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파트너가 자신의 상처를 이해해 줄 준비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상처가 떠오르면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자꾸 반복된다고 난감해할 필요 없다. 또 다시 사과하면 되니까. 온 마음을 다 담아서 당신에게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당신의 진심어린 사과가 상대의 상처를 조금씩 씻어줄 것이고, 그렇게 상처가 씻긴 다음에는 더 이상의 반복은 없을 테니까.
잊지 말자.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미안해.”라는 말은 나로 인해 생긴 상처가 들쑤실 때마다 내가 그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간호하겠다는 다짐이란 것을.
후배와 전화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니 달아난 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도 연고 한번 발라주고 “이제 안 아프지? 다시는 징징거리지 마!”라고 으름장 놓는 남성들이여, 제발 연애를 하려거든 공부 좀 하자. 그대들의 무지 때문에 연애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쉬고 있는 나까지 툭하면 잠을 설쳐대니, 이래서야 쉬고 있는 보람이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