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가 연주하는 음악 1.2 세트 - 전2권
우루야 우사마루 지음 / 애니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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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과 상상력이 있다니...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도 오랜만에 만난 새로운 만화의 세계. 어린 시절 '모모'를 읽었을 때, 대학 1학년 때, '철학에세이'를 읽었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봤을 때, 이십대 후반, 버틀란트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었을 때, 최근 '만들어진 신'을 읽었을 때...

그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느낌. 그렇게 표현하면 될까? 그래도 내 모자란 표현력에 절망...

철학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 제기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신과 인간과 운명과 진보의 실타래 속에서 어떤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메타포를 사용해서 갖가지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까, 아니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을까?

기술의 진보는 인간의 진보인가?

폭력은 인간의 본성인가?

문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이토록 철학적인 사유를 끝없이 피어오르게 만드는 작품을 만나다니,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게다가 정말 만화라는 장르에 너무도 어울리는 상상과 결말.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렇게 보석같은 작품을 혹시라도 놓쳤더라면 어쩔 뻔 했나, 아찔함마저 든다.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멀리서 찾아온 벗'이겠고, 만화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생을 뒤흔드는 치명적 사랑'쯤 될 터이니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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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산딸나무 2007-09-0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한사님께 추천하고 싶답니다 ^^
 
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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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날 때부터 폭력적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토록 거부해 마지않는 폭력은 우리 인간의 숙명이라고...

9.11 테러가 일어난 날, 그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몸과 마음이 다 아팠다. 폭력과 폭력의 악순환, 이어지는 무고한 생명들의 죽음, 폭력이든 반폭력이든(이 구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생명을 불쏘시개 삼아 일으키는 이 화염더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느낌...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을 했을 때, 사무실 식구들의 화제는 단연 그 뉴스였다. 그런데 그 대화에서 나는 머리를 돌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 어제 그 뉴스 보는 순간 속이 다 시원하더라. 부시 녀석 완전 한방 맞았지!"

"미국 놈들, 지네가 했던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아주 난리더구만."

'어차피 거기 있던 놈들은 다 잘 사는 놈들인데, 뭐..."

국민적 여론이야 어찌 됐건간에 적어도 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그랬다. 그런데 나는 왜 인간의 목숨이 더 민중적인 목숨과, 덜 민중적인 목숨으로 나뉠 수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 기준은 무언가? 미국인과 미국 외의 국민? 소득수준? 인종에 따라?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얄팍한 감정과 논리 앞에 나는 한없이 화가 났다. 무고한 생명의 죽음 앞에 어떤 이성적 잣대보다 마음 아파할 줄 아는 것이 내가 인간인 증거이다라고 생각하던 내게 동료들의 발언은 내 속에서 폭력과 반폭력, 폭력과 평화, 폭력과 저항 따위의 개념을 일순간 흔들어 버렸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폭력과 인간의 관계는?

그 뒤로 지금까지 그 질문은 줄곧 내 삶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이 책 역시 그런 연장에서 읽게 되었다. 

그러나 개념을 정리하고 폭력의 철학에 대한 역사를 이해를 돕기위해선 상당히 재미있게 쓰여진 책인데 나에게는 썩 와닿지 않는다. 여전히 '그래서?'라는 의문들만 가득하다. 나 자신이 무조건 폭력에 대해서 반대를 외쳐본 적도 없고, 오히려 폭력과 반폭력을 구분하는 것에 더 익숙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쉽게 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면 적어도 폭력 앞에, 폭력 안에서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부터 고민을 시작해야겠단 생각은 든다. 

책 표지에 있는 노래 가사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생명은 하나, 인생도 한 번, 그러니 목숨 버리지 말자. 누군가 나라를 위해서라고 부추기면 파랑게 질려 꽁무니를 빼라. 도망쳐 숨어라"

'나라'가 아니라 '평화'이어도. '평화'가 아니라 '자유'이어도, '자유가 아니라 '안전'이어도, '안전'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그런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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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2-1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 진정 사랑을 위해서 기꺼이 한목숨 바치리라 즐겁게
 
온 1 - 애장판
유시진 지음 / 시공사(만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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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유시진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하다.

 세 권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났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욕망과 쾌락에 맞서는 절제와 금욕... 살아가면서 우리를 늘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세우는 의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무거운 이야기를 이토록 편안하고 감각적으로 풀어내다니, 역시 유시진이다.


 나는 타인에 대해서 무관심 하단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렇다고 딱히 인간미가 없다거나 냉랭한 성격도 아닌데 친구들에게 먼저 전화 거는 일도 없고, 남의 연애사 따위를 듣는 일도 내켜하지 않고, 심지어는 몇 번 만난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을 못 한다. 처음 내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는 걸 느꼈을 때에는 ‘그래서 뭐, 사는 데 지장 없잖아.’라는 생각과 오히려 번잡한 일들에 일희일비하는 타인들의 사고방식보다는 사는데 더 유용한 방식이라고 자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조금씩 철이 들면서 그런 내 성향은 완고하고 연약한 내 세계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단 걸 알게 되었다. 삶이란 더 많이 관심 가지는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더 많이 눈 뜨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상처받을 수밖에 없단 것을. 그래서 마을에 가까운 나무들이 더 많은 생채기를 지닐 수밖에 없단 것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 온실 안을 들여다보면서 나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던, 그래서 많이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나를 더 많이 사랑했기에 기꺼이 더 많이 상처받았던 사람들. 과거에 나는 그들의 맹목적 사랑이, 그들의 시기심이, 그들의 타오르는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러나, 그들의 사랑과 시기와 분노를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나의 성향. 그게 바로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인간이 반사판이 되었기에 가능한 감정이었음에도 어린 나는 그 모든 감정의 원천을 상대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늦은 게 아니라면 진정으로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구한 용서의 말들도 받아주고 싶다.       


 진정한 평화는 역동적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출렁거림. 그것이 가장 평화로운 세상이듯이. 우리 마음과 관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 혼자만의 안식과 나 혼자만의 평화는 결국 유리온실 안의 안식이고, 거짓 평화일 수밖에 없는 것.


 자기 세계가 완고한 사람들, 예술적 기질이 강한 사람들, 자기애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한번 권해보고 싶다. 혹은 유독 그런 사람들을 더 쉽게 사랑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치유가 될 만한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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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였던가? 아마 지난 해 가을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함께 운문사자연휴양림에 가서 하루를 쉬다 오려고 차를 몰고 청도를 넘어갈 때였다.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혼자서 중얼거리셨다.

 “하이고, 전쟁 때 여그를 넘어서 갔는데.”

 구불구불 이어진 고개를 넘느라 운전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어서 나는 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조금 있다, 재를 다 넘어서 너른 들판 사이 난 작은 강줄기를 따라 차를 몰고 있을 때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여그다가 천막 치고, 솥 걸고, 다 그래 살았는데, 우째 그래 안 죽고 다 살았는가 몰라.”

 순간,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란 것과, 어머니의 연세가 여든을 바라보고 계시니, 당연히 전쟁을 겪은 세대란 것과, 내 어머니의 전쟁도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삶 속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현재진행형의 과거’구나 싶은 깨달음이 스쳤다.

 때로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마치 공포영화의 공식처럼. 그 날도 책이나 영화에서 만나던 익숙한 전쟁이 내 어머니의 삶이 되어 오히려 너무도 낯설게 다가왔다.




 이 기억이 떠오른 까닭은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이 ‘전쟁과 여성의 삶’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참으로 낯설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이 년 만에 다시 잡게 되었다. 두 번째 읽는 책임에도 이 년이 지나는 동안 내 사유가 들어선 새로운 산길에서 만나는 책이라서 또 다른 깨달음에 즐겁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줄 그어가며 읽었던 다른 어떤 글귀보다 강하게 마음을 붙드는 장면이 있었으니 기예프의 전승 기념탑에 대한 선생의 깨달음이었다.

 힘들게 탈환한 고지에 깃발을 꽂는 병사들의 모습 따위에 익숙한 우리에게 두 팔을 벌려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맞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 탑은 전쟁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는 장면.

 나 역시 그 장면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니,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땅덩이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자유를 적들로부터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영웅들의 영웅담이 아니라... 오로지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여성들이, 어머니들이 전쟁에 대해 말해주는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이 여자, 이숙의>를 다음 날 바로 잡은 것도 아마 그 진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마음이 나를 부추겼기 때문일 터이다.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로, 딱 6개월간 함께 살았던 남편을 평생을 사랑하며 살았던 한 여인의 삶. 대단한 사랑이라고 추앙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사랑이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붙들어야 했던 종교였음을 이해하기에. 그러나 자식을 키우며 살아남아야한다는 당연한 본능이 사랑보다, 사상보다, 위대함을 읽었다.

 그 어떤 남성 지식인이 이토록 진솔하게 삶의 알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혜린의 <불의 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모임에서 읽고 토론을 하려고 뽑아 놓은 책이었는데, 내 사유가 이렇게 흐르고 있다보니 이 작품 역시 여성 주인공들의 삶과 그 삶을 뒤흔드는, 농락하는 전쟁과 운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그 어떤 여성도 운명에 농락당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고 확신했다. 악의 화신 ‘카라’조차도.

 여성들은 어떤 운명이 자기에게 닥쳐도 받아들이고 이겨낸다. 삶이 아무리 구차해도,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 살아남고,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고... 

 죽음은 운명에 지는 것이 아니다. 좌절이 운명에 지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도 늘 희망을 품어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왜 이리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자본의 욕망과, 사상과, 종교와 손잡은 운명이 우리의 삶을 농락해도 인간은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우리의 어머니가, 생명의 기원인 여성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희망하는 여성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세상, 자식들 땜에 살았지.”

 내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 의미가, 그 말의 무게가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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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2008-04-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산딸나무님 어머님께 현철 콘써트 표라도 한장 선물하고 싶네요
 
로맨스 약국 -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언어학자의 51가지 처방전
박현주 지음, 노석미 그림 / 마음산책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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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시간이 남아 컴퓨터에 담겨있는 이런 저런 원고들을 정리했다. 분류해 놓은 폴더에 정리하지 않은 글들이 중구난방 넘쳐나서 한참을 찾아 다시 정리하느라 애 먹었다.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놓았음에도 뭐가 들어있는지 기억나지 않는 폴더가 있었다.

 '호수에 잠긴 돌멩이'

 폴더 이름으로 뭐 이딴 걸 적어 놨을까 싶어서 클릭해 들어갔더니, 세상에, 그건 내가 그동안 사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폴더를 따로 만들 때, 이 사랑이 끝나도 이 마음만은 영원히 빛나리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지면 파문이 멎은 뒤에도 돌멩이는 호수 바닥에 영원히 잠겨드는 것 처럼.

 딴에는 어린 마음에 신경써서 만든 제목인데, 이젠 그게 뭐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다니... 갑자기  마음이 헛헛해졌다.

 그때 그 마음들이 어땠나, 그 돌멩이들을 하나 하나 확인해 보았다. 내가 보낸 편지임에도 참 아름다운 글들이어서 읽는 재미와 감동이 쏠쏠했다. 아, 내가 글을 이렇게 잘 썼나, 싶을 만치... 역시 연애는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더니, 나도 예외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근데, 받는 사람의 이름을 따로이 부르지 않고 써내려간 한 편의 편지가 있었다. 내가 당시에 이 사람에게 얼마나 애틋했었나,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편지였다. 그런데...

 이걸 도대체 누구한테 보낸 거였지?

 받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다. 글 쓴 연도를 써 놓았으면 그 즈음 사귄 사람이겠거니 싶을텐데, 날짜만 달랑 써 놓았으니 아무리 그 감정을 되짚어 찾아보아도 이게 내가 쓴 글이기는 한가 의심스러울만치 기억이 똑 끊어지는 것이다.

 아, 호수 안에 돌멩이가 남기는 남는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구분이 안 된다니... 사랑의 덧없음이여...

 혼자서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십여분을 깔깔거리면서 나뒹굴었다.

 '로맨스 약국'을 읽는 느낌이 바로 이 상황의 느낌 그대로이다.

 날 것 그대로 사랑, 날 것 그대로 인생. 그 유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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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재밌었답니다..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7-08-2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내 그 상황이 생각나서
피실피실 웃고 있었답니다.
재미있으셨다니 기쁘네요.

순오기 2007-08-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재미있을 것 같아 추천!

산딸나무 2007-08-25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는 분이네요.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