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아마 지난 해 가을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함께 운문사자연휴양림에 가서 하루를 쉬다 오려고 차를 몰고 청도를 넘어갈 때였다.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혼자서 중얼거리셨다.

 “하이고, 전쟁 때 여그를 넘어서 갔는데.”

 구불구불 이어진 고개를 넘느라 운전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어서 나는 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조금 있다, 재를 다 넘어서 너른 들판 사이 난 작은 강줄기를 따라 차를 몰고 있을 때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여그다가 천막 치고, 솥 걸고, 다 그래 살았는데, 우째 그래 안 죽고 다 살았는가 몰라.”

 순간,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란 것과, 어머니의 연세가 여든을 바라보고 계시니, 당연히 전쟁을 겪은 세대란 것과, 내 어머니의 전쟁도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삶 속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현재진행형의 과거’구나 싶은 깨달음이 스쳤다.

 때로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마치 공포영화의 공식처럼. 그 날도 책이나 영화에서 만나던 익숙한 전쟁이 내 어머니의 삶이 되어 오히려 너무도 낯설게 다가왔다.




 이 기억이 떠오른 까닭은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이 ‘전쟁과 여성의 삶’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참으로 낯설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이 년 만에 다시 잡게 되었다. 두 번째 읽는 책임에도 이 년이 지나는 동안 내 사유가 들어선 새로운 산길에서 만나는 책이라서 또 다른 깨달음에 즐겁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줄 그어가며 읽었던 다른 어떤 글귀보다 강하게 마음을 붙드는 장면이 있었으니 기예프의 전승 기념탑에 대한 선생의 깨달음이었다.

 힘들게 탈환한 고지에 깃발을 꽂는 병사들의 모습 따위에 익숙한 우리에게 두 팔을 벌려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맞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 탑은 전쟁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는 장면.

 나 역시 그 장면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니,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땅덩이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자유를 적들로부터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영웅들의 영웅담이 아니라... 오로지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여성들이, 어머니들이 전쟁에 대해 말해주는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이 여자, 이숙의>를 다음 날 바로 잡은 것도 아마 그 진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마음이 나를 부추겼기 때문일 터이다.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로, 딱 6개월간 함께 살았던 남편을 평생을 사랑하며 살았던 한 여인의 삶. 대단한 사랑이라고 추앙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사랑이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붙들어야 했던 종교였음을 이해하기에. 그러나 자식을 키우며 살아남아야한다는 당연한 본능이 사랑보다, 사상보다, 위대함을 읽었다.

 그 어떤 남성 지식인이 이토록 진솔하게 삶의 알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혜린의 <불의 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모임에서 읽고 토론을 하려고 뽑아 놓은 책이었는데, 내 사유가 이렇게 흐르고 있다보니 이 작품 역시 여성 주인공들의 삶과 그 삶을 뒤흔드는, 농락하는 전쟁과 운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그 어떤 여성도 운명에 농락당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고 확신했다. 악의 화신 ‘카라’조차도.

 여성들은 어떤 운명이 자기에게 닥쳐도 받아들이고 이겨낸다. 삶이 아무리 구차해도,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 살아남고,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고... 

 죽음은 운명에 지는 것이 아니다. 좌절이 운명에 지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도 늘 희망을 품어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왜 이리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자본의 욕망과, 사상과, 종교와 손잡은 운명이 우리의 삶을 농락해도 인간은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우리의 어머니가, 생명의 기원인 여성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희망하는 여성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세상, 자식들 땜에 살았지.”

 내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 의미가, 그 말의 무게가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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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2008-04-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산딸나무님 어머님께 현철 콘써트 표라도 한장 선물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