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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1 - 애장판
유시진 지음 / 시공사(만화)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유시진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하다.
세 권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났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욕망과 쾌락에 맞서는 절제와 금욕... 살아가면서 우리를 늘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세우는 의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무거운 이야기를 이토록 편안하고 감각적으로 풀어내다니, 역시 유시진이다.
나는 타인에 대해서 무관심 하단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렇다고 딱히 인간미가 없다거나 냉랭한 성격도 아닌데 친구들에게 먼저 전화 거는 일도 없고, 남의 연애사 따위를 듣는 일도 내켜하지 않고, 심지어는 몇 번 만난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을 못 한다. 처음 내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는 걸 느꼈을 때에는 ‘그래서 뭐, 사는 데 지장 없잖아.’라는 생각과 오히려 번잡한 일들에 일희일비하는 타인들의 사고방식보다는 사는데 더 유용한 방식이라고 자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조금씩 철이 들면서 그런 내 성향은 완고하고 연약한 내 세계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단 걸 알게 되었다. 삶이란 더 많이 관심 가지는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더 많이 눈 뜨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상처받을 수밖에 없단 것을. 그래서 마을에 가까운 나무들이 더 많은 생채기를 지닐 수밖에 없단 것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 온실 안을 들여다보면서 나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던, 그래서 많이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나를 더 많이 사랑했기에 기꺼이 더 많이 상처받았던 사람들. 과거에 나는 그들의 맹목적 사랑이, 그들의 시기심이, 그들의 타오르는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러나, 그들의 사랑과 시기와 분노를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나의 성향. 그게 바로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인간이 반사판이 되었기에 가능한 감정이었음에도 어린 나는 그 모든 감정의 원천을 상대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늦은 게 아니라면 진정으로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구한 용서의 말들도 받아주고 싶다.
진정한 평화는 역동적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출렁거림. 그것이 가장 평화로운 세상이듯이. 우리 마음과 관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 혼자만의 안식과 나 혼자만의 평화는 결국 유리온실 안의 안식이고, 거짓 평화일 수밖에 없는 것.
자기 세계가 완고한 사람들, 예술적 기질이 강한 사람들, 자기애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한번 권해보고 싶다. 혹은 유독 그런 사람들을 더 쉽게 사랑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치유가 될 만한 작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