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빚어낸 환상의 섬 제주 - 대한민국 대표 여행지
양영훈 지음 / 넥서스BOOKS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10년이 지난 뒤, 다시 제주를 찾아가려하니 나를 가장 먼저 막아서는게...

'돈!!'

제주는 물가가 비싸다는 인식 때문에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이어도였다. 그런데 지난 가을 여행-10월에 주왕산에서 제주에 계시는 분을 만나 초대를 강요받다싶이했다. 즉 꼭 제주에 놀러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신 것이다. 제주에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심리적 위안이 되는지...

혼자 동경해온 제주, 아주머니로부터 초대받은 강요, 11월 중순부터는 추워서 한라산에 오르기 힘들다는 우려, 마음 먹은 것을 해치워야지 하루 이틀 끌고 간다면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차츰 눈두덩이로 불어나 나를 제주로 이끌고 갔다.

제주, 단돈 5만원으로 부산여객선 터미널에 올라 10월 마지막 밤에 배를 탔다.

11월 아침에 나를 반긴 건, 어설프게 남아 있는 어둠과 낯선 바다, 낯선 공기, 두려움과 설레임... 제주에 오고 싶다는 생각에 진작에, 제주에 관한 책을 샀지만 막상 차례도 펼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제주라고는 10년 전 졸업여행 왔을 때의 이미지와 제주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영주12경이 전부이다. 나는 우선 지도를 한장 얻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 거린다.

여객선터미널에는 '시'에서 내어놓은 알림 지도보다 관광지에서 자기집 찾아오라고 홍보하는 지도가 더 많이 널려있다. 더구나 이른 아침, 5시 30분에는 공무원도 집에서 잠자고 있지 않은가? 나는 관광지에서 펴 낸 지도 한 장을 들고 서회선일주도로(12번 국도)를 따라 걷는다.

집에 와서, 책을 펼친다. 그러니깐 여행을 갔다와서 제주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관광지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얼마쯤의 입장료가 아깝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곳들 가운데에는 인위적으로 조성됐거나 인공적인 구조물과 편의시설이 많아서 제주도 특유의 자연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데가 적지 않은 탓이다. 더군다나 계절에 따른 변화가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곳도 많다. 그런 곳은 사시사철 어느 때 찾아가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을 보요준다.(5쪽)"

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을 무엇이 달라도 다르구나 하며, 나는 은근슬쩍 기대를 했다. 내가 보지 못한 곳을 지은이가 들려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하지만 책을 넘길수록 이건 아닌데, 혹은 너무나 익숙한 곳인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즉 제주도에서 펴낸 '제주(The jeju lsland with theme of 365 days)'와 너무나 닮았다.

제주도에서 펴낸 홍보책은 주제별로 분류하여 제주를 소개하는 반면에, 지은이의 책은 해안도로-동회선, 서회선 그리고 서귀포시 관광지를 차례로 지나가고 있다. 앞서 말한 "사시사철 어느 때 찾아가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을 친절한 도우미가 되어 알려준다. 제주도 전도를 하나 펼쳐놓고, 관광지와 비교하면 너무나 닮은 꼴에 놀라고 말 것이다. 더구나 지은이는 제주라는 이국적인 섬에 가서도 신발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차에서 내리지 못한다. 그가 여행하는 곳은 차가 다닐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성산 일출봉을 보고 섭지코지를 볼 수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해안(해수욕장)은 못 보고 지나간다.(섭지코지 오른쪽에 붙은 알려진 신양해수욕장을 알려준다)





지도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는 관광정보를 하나의 책으로 펴 내어놓은 것이다. 또 아쉬운 점은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서, '아 나도 그 곳에 가고싶다'라는 동경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그냥 사진으로 머무르고 있다. 추천여행코스는 철저하게 '자동차' 위주이며, 새로운 것이 없고 관광지처럼 있는것 없는것 다 불러 모운 느낌이다. 또한 여객선 운항 시간표는 차라리 없는 것이 좋겠다.(너무나 상이함, 지은이 말대로 사전 문의가 필수!!)

너무나 잘 차려진 제주 관광정보, 처음 나들이를 하는 이에게 더 없이 좋은 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게 전부이다. 객관적인 관찰자에 머무르는 발빼기 때문에 주관적인 감상은 어디에도 없고, 발품발아 찍은 비경은 숨겨져 있고, 한라산 그 지루한 4시간 이상으로 오르면서 마주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부록으로 제주시에 무료료 나누어 주는 제주지도를 한 장 주어도 될터인데...(지은이의 지도는 반, 반으로 짤라 놓아 펼쳐놓고 보기에는 불편하다)





제주 여행을 가고 싶다면, 그냥 떠나세요. 책이 다 말해주지는 않아요!!

 

 2% 부족한 여행 지식

 < 제주도에 가장 싸게 가는 방법? >
 ......당연히 '배'를 탄다.(ARS 1544-1114)


 -  부산 <--169 마일(11시간) --> 제주. 최저가격 29,000원/ 36,000원 
     인천 <--266 마일(13시간) --> 제주, 최저가격 48,500원(주3회)
     목포 <--96마일  (4시간 30분)--> 제주,   가격 19,950원
  * 부산, 인천 출발은 저녁이며 도착시간은 아침이다. (제주출발도 동일)


 < 여행 지식 얻는 방법 >

    커뮤티니를 이용한다.
    책을 이용한다.
   무작정 찾아간다.(제주는 국제 관광도시이기에 지도가 많이 준비되어있음)

 * 소풍가기 전날의 설레임처럼, 제주를 가기 앞서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도 중요,
    하지만 정보에 묻혀 내가 볼 것을 읽어버리는 어리석음은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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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동안, 우리나를 조금 돌아다녔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과연 내가 보는 것이 옳은가? 혹시 놓치는 부분은 없는가라는 의문이 들곤했습니다. 여행서를 읽고, 정보를 찾을 수록 더 궁금증이 읽었습니다. 여행의 기술이라...? 여행에도 기술이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방법일까?

여행의 기술은 언론을 통해 널리 이름을 떨쳤습니다. 지난 여름부터 흘러나온 책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은데, 글읽기는 왜 이리 힘든지... 좋은 만남이 되지 않을 듯한 느낌이 듭니다.

글읽기의 어려움.

"나는 어느 늦은 오후에 날아온 광고지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16쪽)"
->어느 늦은 오후에 날아온 광고지에, 나는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들은 어두운 직관을 통해,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 과다의 사진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닌 이런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16쪽)"
->만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 명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음.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을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계획이 [그리고 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16쪽)"
->실제로.....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스스로의 사고를 기정 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필력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광고지를 보는 순간 반응은 '개인'이지만,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이라는 글쓰기를 할 때에는 '사회적 자아'를 형성한다. 즉 그의 말은 지금부터 개인적 말이 아니라 어느 학자처럼 권위있는 말이 된다. 마지막으로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이라고 말 할 때에는 '신적인 화자'가 된다. 우연찮게도 그의 글쓰기는 수필처럼 평범한 글인 듯 하지만 놀랍게도 내 말이 절대 진리라는 '신(神)'의 개념이 들어서있다. 마지막으로 보기를 든 부분에서, 그는 논리적인 근거없이 '사람의 계획', 혹은 '인생 전체'도 영향을 받는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자의 실수인지 몰라도. '있었다', '있었다', '있었다'(밑줄 친 부분)는 글쓰기를 통해 자연스레 개인적 화자에서 신적인 화자로 넘어 가고 있다.)

여행 가치관 문제

"결국 내 몸과 마음은 나의 목적지를 평가한다는 임무를 앞에두고 자기들 기질에 따라 공모를 하게 되었다. 몸은 잠을 이루기 힘들어했고, 더위, 파리, 소화가 안 되는 호텔 식사에 대해 불평했다. 마음은 불안, 권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슬픔, 재정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기는 행복은 사실 짧다.(
34쪽)"
 
과연 그럴까? 하루 종일 걷다가 마주친 바닷가, 반나절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간 대청봉의 풍경. 오를 때에는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노'라면서도 다시 가고픈 행복이 왜일까? 순간에 느끼는 행복은 분명 아침부터 걸어온 시간에 비하면 짧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도 희석되지 않고, 내안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또한 자부심도 조금식 커 나가기 때문에, 그 힘겨움이 큰 뫼(山)이 되지만 다시 마주 서고픈 그리움으로 파도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호텔에서 아침먹고 땡, 점심먹고 땡, 택시를 타고 시내를 둘러보고 저녁 먹으며 하루 일과를 접는 이에게 여행은 피곤함과 지루함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간 속에 그리움은 썰려가지 않을까?

""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본 것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 수많은 풍경들이 내 마음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지금 이 순간, 내 평생 단 하루도 이 이미지들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쁨이 밀려온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수십 년 뒤에도 알프스는 계속 워즈워스 안에서 살아남아, 기억 속에서 그곳을 불러낼 때마다 그의 영혼은 힘을 얻었다. 이렇게 알프스가 그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자 워즈워스는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210쪽)"

비행기 안에서 해방감(61쪽)을, 자연 속에서 해방감(210쪽)을... 엇갈린 사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다. 이는 지은이의 일관된 가치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거나 너무나 자유분방한 사고를 함을 의미할 것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83쪽)"

물론 비행기나 배, 기차가 생각의 산파(産婆)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의 산파는 무엇보다 걷는 행위만큼 자유로운 것은 없다. 천천히 들판길이나 숲길을 걸으면 내 안에 살고 있었나라는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서서 걷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앉아서-편안함에 젖은 잠시 잠시 생각에 비하여 휠씬 자유스럽다고 할 수 있다.

동기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지은이는 플로베르를 들어서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 즉 그는 중동을 동경한다. 그는 (지은이의 말을 빌리면) "그가 분노했던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신념과 행동이었다. 이것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사회의 지배적인 힘이 되어, 언론, 정치, 예절, 공적 생활의 기조를 규정했다. 플로베르가 보기에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가장 극단적인 내숭, 속물근성, 거드름, 인종차별, 오만의 진열장이었다.(109쪽)"

왜 플로베르는 중동을 동경하였을까? 그곳은 "그의 기질에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는 곳(114쪽)"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지만 그 자신의 사회에서는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던 관념과 가치들을 지지해주었(114쪽)"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기질과 가치관은 무엇있을까? 지은이는 3가지로 나누어 설명을 하는데, '혼돈'(건축미), '똥'(카페에서 똥 누는 당나귀), '낙타'(우울함)이라 한다.(114쪽~123쪽)
 
위의 3가지로 플로베르의 가치관을 짐작할 수가 있을까? 내게는 너무나 힘들다. 건축의 혼돈미(美)와 카페에서 오줌을 누는 광경, 낙타를 보고 플로베르를 읽어라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이거나 지은이의 잘난체이다. 또한 플로베르가 동경한 이집트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자칫 오리엔탈리즘의 경향으로 흐를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기우도 든다. 플로베르의 가치관과 이집트 문화가 빛어낸 예술품 그 속에서 플로베르가 느낀 이국적 동경을 좀더 상세히 풀어놓지 못하고, 플로베르의 글자 몇개를 불러온 것에 공부하지 않은 지은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마무리(내 발로 호흡하고, 숨쉬는 여행인가?)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 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활주로 출발점에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기계 안에서 창밖을 보면 낯익은 크기의 풍경이 길게 내다보인다. 도로, 기름 실린더, 풀밭, 구릿빛의 창문이 달린 호텔, 우리가 늘 알고 있던 대로의 땅이다. 우리가 차의 도움을 받아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 종아리 근육과 엔지들이 산꼭대기에 이르려고 애를 쓰는 곳.(61쪽)"

지은이는 기계 문명과 자아를 동일시 하고 있다. 그는 "종아리 근육"의 힘으로 풀밭을 거닐거나 산꼭대기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 힘겨움 뒤에 찾아오는 그 상쾌함을 알지 못한다. 그의 여행은 고생 끝에 맛보는 달콤함이 아니라 돈으로 움직이는 기계틀 속에 갇혀 있다. 그가 꿈꾸는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의 상태(17쪽)"는 기계 문명 속에 갇힌 머리를 식히지 위한 동물원이다. 우리는 자연을 우리 곁에 두려하지 않고 동물원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언제든지 가고 싶은 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듯이 지은이도 원시림을 비행기 타고 간다. 이런 여행은 사색을 불러 오기 힘들뿐더러 자아의 정체성과 자연과의 동화를 키우지 못한다. 단순히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며, 내가 언제든지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동물원으로 전략해버린 곳이며, 원시림에 살고 있는 이들은 동물원의 동물이다. 즉 그들이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이 아닌 것이다.

지은이의 비행기 예찬은 현대 기계문명의 예찬이며, 이는 자연을 파괴 내지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가치관과 맞닿아있다. 과연 자연이 파괴와 정복의 대상인지는 진진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 시간을 넘게 올라가서 마주친 민둥산의 광경. 할머니와 손주는 그 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내가 가지는 여행은 머리를 식히기 위함도 있지만 비우기 위함이 먼저이다. 지난 여름에 남설악에서 처음 대청봉을 오를 때에 지천명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짐이 많으니 힘이들지."

나는 작은 가방 하나 속에 노트하나 연필하나, 물통하나 들고 산에 올랐는데 짐이 많다니. 또한 선문답 같은 그 말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어디어디에는 좋은 것이 있다 꼭 보고 와야지 하며 목적을 먼저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여행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볼 뿐 자연이 내게 보여주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어제에 깨달았다. 내 마음을 비우고, 가장 낯은 발걸음으로 자연과 숨소리를 같이 고를 때에 자연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준다. 하지만 비행기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자연은-귀를 낯게 드리워도 들리지 않을 것이고,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과 눈맞춤을 할 때에 있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은이는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고 한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은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다름 아닌 물음이다'라고 생각해 본다. 내가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내가 같이 호흡한 부분이다. 내 가치관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지말고 두 다리로 흙을 밟아보며 땀을 흘려 봐라'하고 싶다. 하늘에서 보는 광경과 내가 땀 흘리고 나서 보는 광경은 똑같지만 크게 다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지은이의 가치관과 내 가치관이 너무나 평행선을 달려서 책을 넘기기에 상당히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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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star 2005-12-0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집기'가 아니라 '짜깁기'입니다.

열린사회의적 2005-12-0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무무키 2006-12-14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감상하는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모두가 이 책에 대한 찬사 뿐인데, 적님의 글만 유일하게 공감되네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7 - 완결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자연과 사람은 다르지가 않다!!"]

문명과 자연,
내 사춘기 시절에 한동안 아니 아직 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문명이 우위에 설까 아니면 자연이 우위에 설까? 우리는 산에 오르는 것을 정복이라는 말로 간혹 한다.(등정) 과연 그럴까 산은 거기에 말 없이 있었을 뿐이고, 다만 내 발로 올라간 것인데 정복인가? 누구와 싸워서 이겼단 말인가? 분명 싸웠다면 나 자신과의 싸움이지 산과의 싸움이 아니다. 하지만 간혹 우리들은 산과의 싸움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차츰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게 되며, "오직 인간만이 유일 혹은 사랑하사" 자연에 대해 면죄부가 주어지는 듯 행동을 한다.

춘천 청계사에는 영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그 연못은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자연에 대해 최소한의 인공적인 기형을 가하고, 자연과의 중용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어떻게 시멘트로 아스팔트로 더 공고히 하는가라는 것에 온통 관심이 집중 된 듯 하다. 이제 신발에 밟혀 오는 진흙의 무게는 더 이상을 무거울 수가 없다. 땀을 흘리기 위해서 땡볕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아스팔트로 포장된 사각 안에서 땀을 흘린다. 단순히 땀을 흘리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다. 땀을 흘리는 것은-데스몬드 모리스가 엄마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것이 자기 젖을 먹이는 행위 그 밖에 심정적 안정감과 평온함, 심장의 박동 소리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울림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했 듯이, 산을 오르면서 숨 쉬고 땀을 흘리는 것은 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시멘트며 아스팔트를 모조리 벗겨내고 다시 떼를 입히거나 흙을 덮어야 하는가?

내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은이는 나우시카의 눈을 통해, 인간이 오염에 적응하여 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의 모습이 아닌,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은이의 자연에 대한 동경은 그 뒤의 작품이나 앞서서에 잘 나왔기에 더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연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공산주의의 결정론을 빌려온다면, 기계문명 다음에는 오직 기계에 대한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회의를 가지고 있는데, 문명과 자연은 공존을 할 수가 없는가? 자연의 품은 넓으면서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다가갈 때도 있지만....

살짝 훔쳐보기

나는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나씩 엿보기를 한다.

[불의 7일]간이 끝나고-고도의 기계문명은 스스로의 화약을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화약은 권력욕에 눈먼 몇 몇 사람들에 의해 거대한 전쟁이 일어나고 기계문명은 수천년 뒤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쓰레기는 가져가지 못하여 자연은 정화되지 못한체, 독기를 내 뿜고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가? 그네들은 스스로의 적응 능력을 길러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부해에 사는 오무는 천천히 자연을 정화해간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더디기 때문에 간혹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라며 외면을 하고, 오무는 공존의 생물에서 금(線) 밖에 서 있다. 이 옆에 바람계곡, 그곳에는 지르의 딸 나우시카가 살고 있다. 오직 이 소녀만이 오무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자연에 대해 차츰 귀를 기우려 간다.

바람계곡은 트로메키아라는 대국에 소후국으로 종속되어 있다. 그네들은 트로메키아가 전쟁을 일으켜 동원령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하게 된다. 트로메이카아의 황녀 크샤나는 페지테라는 소후국을 침략하고 왕녀가 가지고 있던 비밀물건을 찾아 나선다. 크샤나는 오빠들의 꾀임에 속아 남하하여 수많은 병사들을 잃게 되고 나우시카를 만나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도 차츰씩 키워간다. 그와 동시에 나우시카에 대한 동화도 이루어진다. 트로메키아의 3왕자들은 토르크라는 남쪽의 대국을 침략하여 본격적인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또한 오무는 남쪽 숲으로 가야한다며 수많은 벌레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르크에 있는 소후국 가운데, 승려들은 예언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네들은 파란 옷을 입은 날개달린 무엇이 와서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 한다. 파란 옷을 입은...

나우시카는 오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남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나우시카 앞에서는 전쟁의 참상과 현실에 대한 허상 등이 무수히 나타나, 또 다른 [불의 7일간]을 예언한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나우시카

이 작품에서, 큰 주제를 이끌고 가고 있는 사람은 제목에서 나타났듯이 나우시카이다. 그는 트르메키아의 소후국 바람계곡의 딸이지만 자연의 딸이기도 하다. 그에게 적은 없으며 모두가 친구이자 아픔이다. 그는 외모나 냄새 등으로 친구를 나누지는 않는다. 이런 포용력은 부해에 살고 있는 오무와도 닮은 것이 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부해에서 스스로 숨을 쉬며 정화를 해 가는 것이다. 나우시카 역시 싸움 속에 스스로를 던져서 평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무가 남쪽 숲으로 가야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만 떠남은, 오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우시카는 흙이며 나무이고, 물이며 불이고, 해이며 별이다. 나를 가두려 하지마라. 나는 자유롭고 자유로이니(自然) 어디 한 곳에 내가 머물지 않는 곳이 없으며, 어느 한 부분 내가 아닌 것이 없다. 그는 메시아이다. 그가 가는 곳에는 오직 선(善)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려 한다.

크샤나는 나우시카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트르메키아의 왕녀이다. 그는 오직 전쟁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를 만나게 됨으로서 차츰 전쟁이 아닌 공존과 자연으로 동화되어 간다. 적개심이 가득 찬 곳에서 살아온 크샤나가 나우시카를 만남으로 인해 바뀌어간다는 건 나우시카가 구원의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샤나에 의해 동생과 자기 나라를 잃은 아스벨에 대한 초첨이 너무 희미하게 비추어진다. 유파와 승정은 삶에 대한 지혜자로서 나우시카에게 수호자가 되어준다. 그네들은 나우시카 곁에서 보필하면서 한편으로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내고 있다.

조금은 아쉬운 점
[불의 7일]간 뒤, 세계에 퍼진 환경에 대한 아무런 의문점 내지 치유가 없이 스스를 가두고 사람들은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런데 나우시카의 등장으로 세계(自然)의 틀이 부셔지고 만다. 즉 나우시카는 메시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태어남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며, 전쟁을 통해 전쟁이 안좋은 것인데 왜 하는걸까라는 유아적인 문제를 던진다. 그리고 평화, 평화를 간절히 구한다. 이는 나우시카에 대한 메시아적 입장을 너무 강조함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우시카가 없다면... 전쟁은 일어날 것이며,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이의 중재자가 나우시가라면... 그는 분명,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지만 메시아로서 예언적 존재로 비추어진다. 이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과 무계급적인 평등이 사라지고 나우시카 그리고 사람으로 나뉘어지는 계급을 만들어 낸다. 지은이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더 부해속으로 던져 버리고,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려라 한다.(혹시 지은이 스스로 '큰바위 얼굴'이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메시아적 입장에 비중을 두게 됨으로서, 권력욕에 물든 인간이 어떻게 침잠되어가는 가에 대한 접근은 없으며, 무조건 나쁘다는 이분법 논리만이 버티고 서 있다. 크샤나의 비극은 권력의 무대에서 자란 한 인간의 비극인데 인간에 대한 연민보다 나우시카에 대한 동저이 더 강한 것은 위의 논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메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트로메키아의 군대 동원령은, 명분이 필요없다. 또한 이분법적 논의로 보면 '모두가 원래 악당'이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없다. 악당은 원래 그런 것이니, '미랄라'의 집권욕 또한 이와 같다. 황제이기에 나쁜 놈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족장 딸이며 , 어린 여성이지만 메시아기에 예외이다. 그리고 그의 차지(소)족 장의 딸은 신비함을 더 하고 권위에 둘러 쌓인 인간이 아닌 눈높이를 맞춘 인간으로 들어낸다.

지은이의 권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 대후국의 권력과 자치(소)국의 권력에 오른자가 틀리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치국의 여성에 대한 동경 내지 환상을 품고 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이 부분이 이 책이 지니는 한계이며, 여기에서 출발하게 되면 지은이의 주제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은이의 환경 아닌 사람에 대한 성찰을 더 깊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크샤나의 자리가 너무 흐지부지한 것이 조금 아쉽다.

인간의 한계, 즉 그는 권력욕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덧에 걸려 들은 것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메시아이며,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않은 여린 순수 소녀이다. 질적으로 다른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나오는 여성으로서의 구원자에 대한 모티브가 여기에서 들어나며, 남성은 폭력, 권력이라는 이분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여성을 예언자 혹은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사람에 의한 꿈의 건설이 아닌 신에 의한 구원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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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골의사 블로그(NAVER)

 

권지예 작가님께.... | 人生

2005/11/12 01:45
http://blog.naver.com/donodonsu/100019377438

권지예 작가님께..

 방금 방송 녹화를 마치고 막 돌아와 문학동네 게시판에 권지예 작가님께서 발표하셨다는 입장을 보았습니다.

 먼저 저 자신도 이것이 결국 이전투구가 될 줄 알면서도 이일에 휘말렸고, 그리고 결국 닫았던 입을 다시 열어야 하는 상황이 많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일은 이제 심정적으로는 더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버린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좀전에 서울에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제가 사적으로 존경하는 어떤 지인으로부터 밤 9시경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 지인께서 권작가님측 관계자분으로부터 이런 부탁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일이 발생한 이후 권작가님께서 대처가 다소 미숙하셨고, 권작가께서도 여러모로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므로 이 부분에 대해 사과하는 글을 문학동네 게시판에 올리는 형식으로 사과를 대신하면 어떻겠느냐.."는 뜻을 전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저를 잘 설득해 달라는 뜻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그 지인의 말씀 이전에, 이미 이 일에 대해  "아름다운 화해"를 맺겠다는 뜻을 권작가님측에 전달했었기 때문에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만 권지예 작가님께서 시종일관 고집하시는 문학동네 게시판에 조용히 유감을 표하는 방식은 이 사건의 파장이나 성격으로 볼 때 그 방식이  적절하지 못하고 많이 비겁한 것이므로, 유감표명의 방식은 앞으로 서로 잘 상의해서 적절한 수위에서 마무리 하겠다는 뜻도 아울러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안동에 도착해서 확인한 결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지난 며칠간 저와 권작가님 사이에서 오갔던 사전조율에 대해서는 일체 고려가 없이 쉽게 이해하기가 쉽지않은 변명을 담은 글을 "사과의 형식"을 빌어 문학동네 홈페이지에 게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 밤 늦게 저의 지인을 통해 부탁하신 말씀들은 결국 권작가님께서 이미 저녘 8시경 문학동네 게시판에 이미 해명글을 올리신 후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또 한번의 "사후통보" 절차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사회속에서 이정도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 것은 정말 유례가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릴만큼 놀랍습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이제 더이상은 권작가님의 진정성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권작가님의 그동안의 해명에 따르면...

 이일은 권작가님께서 "누군가로부터 인터넷에 떠돌던 글을 메일로 받으신 다음, 그 글에서 "힌트"를 얻으셔서 소설로 구성하려는 생각을 하셨고, 실제 그것을 소설로 구성하시면서 심지어 문장 자체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셨지만, 그것은 의학적인 부분이라 백과사전을 참조하는 기분으로 하셨으며, 아이의 손에 묵주를 쥐어 준다거나,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주변사람들의 심경은 병원 24 시를 보고 스케치한 정도의 느낌으로 하신 것이라, 그것을 작가적 양식에 비추어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우연이란 놀라운 것인가 봅니다..

 공교롭게도 그 내용이 그렇게 소설로 구성하고, 이미 인쇄까지 들어가시려는 즈음에 우연히 제 블로그를 알게되셨고, 더구나 제 블로그에 실린글이 책으로 묶여진다는 사실을 알게되시면서는 제게 메일까지 보내셨지만 제가 그 메일에 답을 하지않아 그냥 그대로 책으로 묶어 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권작가님께서는 제가 이웃들께 그동안 블로그의 "작위성"을 피하기 위해 원래 블로그 메일이나 쪽지를 읽거나, 답장을 드리지 않으며, 심지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댓글이나 인삿말조차 보지않음을 양해해 주십시오"라는 입장을 누차 글로서 밝혔고, 그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메일과 쪽지를 보내신 많은 저의 이웃분들께서 제게 서운함을 가지실 줄 알면서도, 제가 블로그를 "운영"하는것이 아니라, 이웃과 오래도록 "공유"하기위해 메일이나 쪽지를 읽거나 답을 드리지 않음을 많은 이웃들께서 양해하고 계신다는 사실 역시 권작가님께서는 진정 모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권작가님께서 계간지에는 이미 그전에 글을 발표하신 다음, 그로부터 몇 달뒤 책을 인쇄하실 때에야  제게 문제의 메일을 보내심으로서, 작가적 양식에 입각한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을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일은 그렇게 끝날 수 있었고, 어쩌면 그랬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의 반년이 지나서 공교롭게도 권작가님께서 문학적 역량이 인정받아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신다는 발표가 나시면서 님의 책이 새삼 많은 분들의 주목을 받게되었고, 그것이 6개월전에 출간된 제 책과 대비되면서 북까페를 비롯한 몇군데 인터넷에서 논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문학동네나, 그외 언론 그리고 제게도 지인들로부터 사적메일로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처음에 그 사실을 가볍게 넘겼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저는 처음에 지인들에게 "동인문학상 수상작가가 표절 이야기가 나올정도로 제 이야기와 비슷한 소설을 쓰셨다면 그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라고 말하면서 웃었넘겼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목요일에 모 언론에서 확인과 취재요청 전화가 오고, 그로인해 제가 그 책을 서점에서 직접 읽고는 그때는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함 불쾌감이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폭행을 당한 여인의 마음이 이럴까.. 싶은 느낌,,

 작가이시니 아마 이점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 출판사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권작가께서 쓰신 책의 내용이 표절 여부를 떠나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뜻을 전했더니, 출판사에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출판사에 제 전화번호를 남기면서 " 언론에는 문제삼고 싶지 않다고 이미 말했으며. 실제 제 스스로도 법적인 문제를 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권작가님의 직접 해명과 입장표시는 듣고 싶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제게 전화를 주신 권작가님의 말씀과 뜻은 제가 부모님과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상식과는 많은 거리가 있었습니다.

 권작가님께서는 제게 말씀하시기를 " 표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음 4판이 출간 될 때는 책의 뒷머리에 블로그에서 소재를 얻었다고 명시하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그것은 권작가님께서 많이 잘못하신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권작가님은 후기에 그 소설집에 실린 다른작품 하나도 악명높은 모 드라마작가처럼 " 지인의 대화를 듣고 작품을 썼다, 소설가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라는 표현으로 처리하신 것처럼, 이 문제 역시 그렇게 처리하려고 하시는 것은 권작가님의 작가적 위상에 비추어 그리 당당하지 못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님에게 ""...작가적 양식에 따라 님을 믿는 독자들에게 믿음에 실망을 주셨다면 최소한의 "자기견책"은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잘못해도 한대의 회초리는 맞듯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공인의 입장에서 한사람도 아닌 다수의 사람에게 실망을 주었다면 그것은 "적정수준"에서 자신의 양식에 입각한 자기견책이 필요한 것이며. 잘못을 무조건 회피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제게는 아니어도 좋으니 작가적 양심에 입각해서 어떤 방식으로던 견책을 동반하는 방식의 유감을 표명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에대해 권작가님께서는 분명히 동의를 하셨습니다,  

권작가님도 잘 아시다시피 대개 이런문제의 시발점은 열에 아홉은 일단 " 출판물 판매금지와 회수 가처분 신청"과 함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변호사의 내용증명서 송달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저의 양식으로는 그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처음부터 법적인 대응은 배제하기로하고 저와 권작가님 두사람이 주말동안 진지하게 숙고해서 "문제가 확대되지 않으면서 적절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는 방식을 찾아서 월요일까지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 아울러 그와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기우였지만, 혹시라도 동인문학상 위원회에서 수상취소라도 결정 할 것을 우려해서 저는 문제확대를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언론에 누차 설명 했었습니다 ) 

그러나 권작가님이 같은날 저와 나누신 대화와. 그날 언론에 내보낸 입장은 그야말로 "표리부동"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님은 제게 월요일까지 서로 고민하기로 하신 다음 메일을 주고 받기로 하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신문지상에 게제된 님의 입장은 "황당하다.. 하루아침에 파렴치한이 되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전날 저와 나눈 대화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말씀이며, 저로서는 권작가님이 정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신의를 가지신 분인지를 의심케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에 제 블로그에 깊은 유감을 표명하는 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오늘 님이 해명하신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토요일자 조선일보,동아일보를 검색해 보시면 이 부분은 명백하게 정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님의 해명은 지금 이러한 사실을, 특히 저의 진의를 상당히 왜곡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제가 처음부터 줄곳 고수했던 입장, 즉 "법적 대응을 하지 않겠다"는 선의를 이용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 더구나 실제 님이 이점에대해 제게 보내신 두번째 메일은 사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사실은 제가 마음이 상할 정도로 비례( 非禮 )하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 

그 결과 제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아졌었습니다.      

이제는 동인문학상을 심사하신 이문열님의 문학적 입장과는 별개로 진실을 가리기 위한 법적 판단을 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님의 말씀대로 제 스스로 법적대응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이상 제 스스로 친 올가미에 제 목을 걸고 이 문제를 그대로 덮는 길 두가지 뿐 이었습니다.    

님은 후자에 무게를 두셨던 것 같습니다 

고백하건데.. 

저역시 불민한 사람이라 감정적으로는 전자를 택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장 꺼려했던 부분은 법적판단을 구함으로서 "제가 말을 뒤집은 사람이 되는것" 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조용히 추스려갈 수 있었던 문제가, 그렇게 할 경우 님의 작가적 미래를 매장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올 가능성이 컸고, 만약 그 경우에는 그것이 악연이던 인연이던 저와 연이 닿은 분에게 그런 큰 결과를 초래케함으로서 제가 부담져야 할, 평생의 업(業)을 감당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님과 저 사이의 메신져 역할을 자임했던 분에게 이번주까지 다시한번 깊이 한번 재고해보시고 법적 분쟁을 택하지 않고 "아름다운 화해"를 바라는 제 마음을 전달해 주실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님도 알다시피 그 아름다운 화해의 시나리오는 이랬습니다.. 

어차피 이 문제는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미 문제가 커졌으므로 이제는 님이 문학동네 게시판에 조용히 유감을 표시하고 넘어가시는 것은 ( 그나마 이 말씀도 책의 후기에 사과가 아닌 블로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밝히겠다는 입장에 비하시면 큰 진전이었지만,..), 님으로서도 표절작가라는 오명을 벗을 길이 없고 아울러 회피로 일관하시는 것은 양식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며, 저 역시 즐겁지 않은일에 연루되어 이름이 오르내려 주변의 걱정들이 크시므로, 적절한 방법을 찾되...  

그것은 "어느 조용한 찻집에서 이 일을 기사를 다루었던 해당 기자분들을 비공식적으로 초청해서 같이 차를 나누면서 권작가께서는 "비록 관행으로 여겨졌던 일이라 하더라도 이제 저명작가로서 깊이 고민하지 못했던 실수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일을 계기로 삼아 좋은 작가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겠다,,"는 입장을,, 저는 이일은 "권작가님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인터넷문화라는 아직 입장이 정돈되지 않은 일에 대한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으며, 권작가님의 작가적 능력이나 양심을 믿고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입장을 말씀드림으로서 이 문제를 가장 부드럽고 원만하게 처리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린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는 없는 일이므로, 진정으로 어떤 어렵고 복잡한 일들도 회피하기보다는 당당하게 부닥치고, 이후에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함으로서 아름다운 결말을 맺음으로서 그동안의 서로의 허물을 모두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일의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문학동네 게시판에 몇 줄의 글을 올림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보다, 그렇게 최소한의 범위에서라도 공개적인 형식의 사과과 해명을 하시는 것이 훨씬 책임있게 행동하시는 것이라 생각했고, 아마 그렇게 하셨다면 모든 님의 독자분들도 님에게 격려의 덕담과 박수를 드렸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마 이것은 제가 님께 전달한 내용을 토씨하나 빼지 않고 제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뜻에 대해 권작가님께서는 며칠 기다려달라는 뜻을 제게 두번이나 전하셨고, 제게는 그 기다림의 결과가 오늘 제가 존경하는 분을 통한 부탁과 아울러, 님이 게시판에 "해명과 유감"의 표시가 아닌 "변명"을 일방적으로 게시하시는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권작가님....

외람되지만 질문을 드립니다..

혹시 지금 제가 쓴 장문의 글에서 혹시 한치의 틀림이라도 있으신지요.. 또 제가 쓴 글이 조금이라도 진실을 가린것이 있는지요...?  그리고 진정 님의 작가적 양심은 오늘 문학동네 게시판에 게시하신 글로서 이 긴 과정의 경과를 마무리 하는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리셨는지요..? 또 님의 오늘의 결론은 정녕 회피가 아니라 작가적 양식에 입각한 당당한 자기견책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진정 님의 이러한 유감표시를 진정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저의 협량함 때문인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소이부답(笑以不答) 함이 분명히 옳겠음에도 결국 얼굴이 붉어진 소인배의 모습으로 이글을 쓰는 자신을 자책하며,. 아울러 제가 제안했던 "아름다운 화해"가, 정작 님의 해명글로 등장하였음을 보면서 쓴 웃음이 지어지는 제 스스로가 부끄러운 밤입니다.....

박경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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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5-11-13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이 주식시장에서 분석가로 꽤 유명한 분이죠. 증권방송에도 지금 고정출연하고. 권작가의 표절 대상이었는지는 몰랐습니다.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형경이 상을 받았다는 신문광고 기사를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몇 권의 책을 내었다는 것을 간간히 접했지만 이렇게 깊이 있게 만나기는 오늘이 처음인 듯 합니다. 하지만 낯설은 만난인지 쉽게 그에게 다가 가지가 않네요. 그는 나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내 머리는 자꾸만 고개를 젖습니다. 내 손은 가슴에 가 있지가 않고, 메모장을 꺼내어 계속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상당히 어려운 만남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누구를 위한 글쓰기인가?

"아기는 99퍼센트 엄마가 만든다(25쪽)"

이상적인 논의라 하더라고 감정, 심리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즉 엄마에 대한 사람만이 절대적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니, 다른이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누구의 사랑이 크고 작다의 문제가 아니라, 지은이가 말했듯이 '엄마의 손을 떠나 할머니, 이모, 고모의 손에서 자란 사람들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모든 아이의 불행은 결손가정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를 할머니가 품고 있는 사랑과 지혜를 깡그리 무시하게 되며, 현대사회에 대한 강한 부정도 드러낸다. 나는 무엇보다 어머니 없이 힘들게, 굳굳하게 살려는 이에게, '네 문제는 엄마가 없어서이다'라고 무 자르듯이 삭뚝 잘라버리는 그 악마적 글쓰기가 두렵다.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면, 분명 이는 살짝 덮고 치유의 방법부터 찾아야 할 터인데 상처난 부분을 찬바람에 들추어 내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의 책을 '절대 진리'인냥 받아들임도 두렵다. 최소한 인긴적인 존재만이 아닌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면도 찾아보아, 어떠한 결론을 내렸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데스몬드 모르스의 저서 『접촉』 등을 권해 본다.

글쓰기 관한 문제.

1. 여행 풍경
2. 정의 (책 인용)
3. 가정 (~있을 것이다)
4. 보기
5. 결론


지은이는 여행을 하면서 잠시 느낌 감정을 풀어낸다. 이 풍경은 어느 학자의 정의로 연결고리를 만든다. 그리고 정의는 지은이의 사념과 결합한다. 정의는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반면에 지은이의 가정은 상당히 사념적이다. 즉 '~있을 것이다'는 책을 넘기는 순간에 정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할 보기를 줄 세운다. 이 보기는 이미 그의 머리속에 줄 세워진 입에 맞는 맞춤식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글쓰기는 개인적 사념이 정의로 둔갑하는 것이다. 즉 그가 끌고온 정의는, 그의 사념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 정의'에 불과한 것이다.

다양한 사고관으로 좀 더 넓게 보아야 하는데, 그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몇 몇 만난 사람들을 쉽게 단정짓어버리고, 이를 합리화할 근거를 책 속에 끌어온다. 다시말하면 앞서 모든 인용문은 그의 '사념적 정의'를 합리화 하기 위한 '도구적 정의'가 되는 것이다.

사견인 작가론

어릴적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를 현실에 내어놓지 안는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뒤에 서서 나름대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기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의 편지가 전부 옳다고는 할 수없다. 수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사람과 부딪히여 스스로를 보이지 않았기에 그는 착각 속에서 세상을 재단하고 있다. 진정 그가,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세상에 나와야 할 것이다. 내면에 꽁꽁 숨어 세상을 보는 것은 비겁하다. 더욱이 이를 사실인냥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솔직히 이 지은에 대해 모른다. 이 모습은 내게 보여지는 모습을 적은 글이다. 옳다그르다는 분명 자신만이 알 것이다. 내가 글을 적고, '그는 이렇다', '몇 권의 책을 읽어보니'라고 단정 짓는 것도 옳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세상과 부딪히고, 그와 이야기를 주고 받기 앞서 까지는 그를 본 것은 빙산의 조그마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글을 적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그에 대한 '사적인 견해'를 정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내게 소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관리인 사내가 쐐기박듯, 무슨 말인가를 남긴 채 단호히 몸을 돌려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47쪽)

박물관을 나와서도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만약 어린 시절에 그 모든 과학 원리들을 이했더라면 모호한 상상력을 키우는 대신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웠을 것이고, 소설가가 되는 대신 고하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53쪽)

파리에서 우울증의 위력을 경험한 후 뒤늦게 또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삶이 어딘가에 막혀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는 느낌. 불투명한 막이 한 겹 의식을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바로 우우증의 증상이었다. 20대의 그 막막하고 암울한 느낌. 30대의 그 무력하고 적막한 상태가 죄다 우울증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없다고 느꼈지만 어‰F게 살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상태(58쪽)

서양 남성들이 혼자 여행하는 동양 여성에게 친절한 것은 다만 그 여성이 새롭게 보는성적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247쪽)/ 로마에서 전차를 타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더 유심한 시선이 얼굴에 와닿는 것을 느끼며 무심히 그쪽으로 고개 돌렸을 때 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어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채 얼굴이며 몸 전체를 삼킬 듯한 시선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아마도 상상 속에서 내 옷을 거의 벗긴 겉 같았다.(248쪽)


오만한 글쓰기

내개 지은이의 글쓰리를 두려워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그의 글쓰기는 유아기적 놀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들면 너는 내편,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편이라는 일방적인 금긋기가 행해지고 있다. 박물관 관리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는데, 혼자서 상상을 한다.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고 자기를 알몸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녕 가까이 다가가서 애기를 듣어보았는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가서는 마음을 놓는다. 즉 쉽게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고 한발 물러서서 '신'인냥 재단하는 글의 글쓰기는 오만하고, 상대방에게 상당히 무례하다.

책읽기가 이런 오만과 무례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긴 향해를 하지 못한 점을 밝힙니다. 물론 나와는 다르게 좋은 시선으로 본 사람을 틀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내가 본 지은이의 시선'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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