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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동안, 우리나를 조금 돌아다녔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과연 내가 보는 것이 옳은가? 혹시 놓치는 부분은 없는가라는 의문이 들곤했습니다. 여행서를 읽고, 정보를 찾을 수록 더 궁금증이 읽었습니다. 여행의 기술이라...? 여행에도 기술이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방법일까?
여행의 기술은 언론을 통해 널리 이름을 떨쳤습니다. 지난 여름부터 흘러나온 책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은데, 글읽기는 왜 이리 힘든지... 좋은 만남이 되지 않을 듯한 느낌이 듭니다.
글읽기의 어려움.
"나는 어느 늦은 오후에 날아온 광고지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16쪽)"
->어느 늦은 오후에 날아온 광고지에, 나는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들은 어두운 직관을 통해,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 과다의 사진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닌 이런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16쪽)"
->만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 명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음.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을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계획이 [그리고 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16쪽)"
->실제로.....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스스로의 사고를 기정 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필력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광고지를 보는 순간 반응은 '개인'이지만,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이라는 글쓰기를 할 때에는 '사회적 자아'를 형성한다. 즉 그의 말은 지금부터 개인적 말이 아니라 어느 학자처럼 권위있는 말이 된다. 마지막으로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이라고 말 할 때에는 '신적인 화자'가 된다. 우연찮게도 그의 글쓰기는 수필처럼 평범한 글인 듯 하지만 놀랍게도 내 말이 절대 진리라는 '신(神)'의 개념이 들어서있다. 마지막으로 보기를 든 부분에서, 그는 논리적인 근거없이 '사람의 계획', 혹은 '인생 전체'도 영향을 받는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자의 실수인지 몰라도. '있었다', '있었다', '있었다'(밑줄 친 부분)는 글쓰기를 통해 자연스레 개인적 화자에서 신적인 화자로 넘어 가고 있다.)
여행 가치관 문제
"결국 내 몸과 마음은 나의 목적지를 평가한다는 임무를 앞에두고 자기들 기질에 따라 공모를 하게 되었다. 몸은 잠을 이루기 힘들어했고, 더위, 파리, 소화가 안 되는 호텔 식사에 대해 불평했다. 마음은 불안, 권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슬픔, 재정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기는 행복은 사실 짧다.(34쪽)"
과연 그럴까? 하루 종일 걷다가 마주친 바닷가, 반나절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간 대청봉의 풍경. 오를 때에는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노'라면서도 다시 가고픈 행복이 왜일까? 순간에 느끼는 행복은 분명 아침부터 걸어온 시간에 비하면 짧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도 희석되지 않고, 내안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또한 자부심도 조금식 커 나가기 때문에, 그 힘겨움이 큰 뫼(山)이 되지만 다시 마주 서고픈 그리움으로 파도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호텔에서 아침먹고 땡, 점심먹고 땡, 택시를 타고 시내를 둘러보고 저녁 먹으며 하루 일과를 접는 이에게 여행은 피곤함과 지루함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간 속에 그리움은 썰려가지 않을까?
""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본 것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 수많은 풍경들이 내 마음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지금 이 순간, 내 평생 단 하루도 이 이미지들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쁨이 밀려온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수십 년 뒤에도 알프스는 계속 워즈워스 안에서 살아남아, 기억 속에서 그곳을 불러낼 때마다 그의 영혼은 힘을 얻었다. 이렇게 알프스가 그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자 워즈워스는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다.(210쪽)"
비행기 안에서 해방감(61쪽)을, 자연 속에서 해방감(210쪽)을... 엇갈린 사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다. 이는 지은이의 일관된 가치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거나 너무나 자유분방한 사고를 함을 의미할 것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83쪽)"
물론 비행기나 배, 기차가 생각의 산파(産婆)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의 산파는 무엇보다 걷는 행위만큼 자유로운 것은 없다. 천천히 들판길이나 숲길을 걸으면 내 안에 살고 있었나라는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서서 걷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앉아서-편안함에 젖은 잠시 잠시 생각에 비하여 휠씬 자유스럽다고 할 수 있다.
동기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지은이는 플로베르를 들어서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 즉 그는 중동을 동경한다. 그는 (지은이의 말을 빌리면) "그가 분노했던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신념과 행동이었다. 이것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사회의 지배적인 힘이 되어, 언론, 정치, 예절, 공적 생활의 기조를 규정했다. 플로베르가 보기에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가장 극단적인 내숭, 속물근성, 거드름, 인종차별, 오만의 진열장이었다.(109쪽)"
왜 플로베르는 중동을 동경하였을까? 그곳은 "그의 기질에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는 곳(114쪽)"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지만 그 자신의 사회에서는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던 관념과 가치들을 지지해주었(114쪽)"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기질과 가치관은 무엇있을까? 지은이는 3가지로 나누어 설명을 하는데, '혼돈'(건축미), '똥'(카페에서 똥 누는 당나귀), '낙타'(우울함)이라 한다.(114쪽~123쪽)
위의 3가지로 플로베르의 가치관을 짐작할 수가 있을까? 내게는 너무나 힘들다. 건축의 혼돈미(美)와 카페에서 오줌을 누는 광경, 낙타를 보고 플로베르를 읽어라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이거나 지은이의 잘난체이다. 또한 플로베르가 동경한 이집트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자칫 오리엔탈리즘의 경향으로 흐를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기우도 든다. 플로베르의 가치관과 이집트 문화가 빛어낸 예술품 그 속에서 플로베르가 느낀 이국적 동경을 좀더 상세히 풀어놓지 못하고, 플로베르의 글자 몇개를 불러온 것에 공부하지 않은 지은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마무리(내 발로 호흡하고, 숨쉬는 여행인가?)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 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활주로 출발점에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기계 안에서 창밖을 보면 낯익은 크기의 풍경이 길게 내다보인다. 도로, 기름 실린더, 풀밭, 구릿빛의 창문이 달린 호텔, 우리가 늘 알고 있던 대로의 땅이다. 우리가 차의 도움을 받아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 종아리 근육과 엔지들이 산꼭대기에 이르려고 애를 쓰는 곳.(61쪽)"
지은이는 기계 문명과 자아를 동일시 하고 있다. 그는 "종아리 근육"의 힘으로 풀밭을 거닐거나 산꼭대기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 힘겨움 뒤에 찾아오는 그 상쾌함을 알지 못한다. 그의 여행은 고생 끝에 맛보는 달콤함이 아니라 돈으로 움직이는 기계틀 속에 갇혀 있다. 그가 꿈꾸는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의 상태(17쪽)"는 기계 문명 속에 갇힌 머리를 식히지 위한 동물원이다. 우리는 자연을 우리 곁에 두려하지 않고 동물원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언제든지 가고 싶은 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듯이 지은이도 원시림을 비행기 타고 간다. 이런 여행은 사색을 불러 오기 힘들뿐더러 자아의 정체성과 자연과의 동화를 키우지 못한다. 단순히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며, 내가 언제든지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동물원으로 전략해버린 곳이며, 원시림에 살고 있는 이들은 동물원의 동물이다. 즉 그들이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이 아닌 것이다.
지은이의 비행기 예찬은 현대 기계문명의 예찬이며, 이는 자연을 파괴 내지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가치관과 맞닿아있다. 과연 자연이 파괴와 정복의 대상인지는 진진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 시간을 넘게 올라가서 마주친 민둥산의 광경. 할머니와 손주는 그 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내가 가지는 여행은 머리를 식히기 위함도 있지만 비우기 위함이 먼저이다. 지난 여름에 남설악에서 처음 대청봉을 오를 때에 지천명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짐이 많으니 힘이들지."
나는 작은 가방 하나 속에 노트하나 연필하나, 물통하나 들고 산에 올랐는데 짐이 많다니. 또한 선문답 같은 그 말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어디어디에는 좋은 것이 있다 꼭 보고 와야지 하며 목적을 먼저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여행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볼 뿐 자연이 내게 보여주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어제에 깨달았다. 내 마음을 비우고, 가장 낯은 발걸음으로 자연과 숨소리를 같이 고를 때에 자연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준다. 하지만 비행기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자연은-귀를 낯게 드리워도 들리지 않을 것이고,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과 눈맞춤을 할 때에 있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은이는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고 한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은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다름 아닌 물음이다'라고 생각해 본다. 내가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내가 같이 호흡한 부분이다. 내 가치관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지말고 두 다리로 흙을 밟아보며 땀을 흘려 봐라'하고 싶다. 하늘에서 보는 광경과 내가 땀 흘리고 나서 보는 광경은 똑같지만 크게 다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지은이의 가치관과 내 가치관이 너무나 평행선을 달려서 책을 넘기기에 상당히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