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형경이 상을 받았다는 신문광고 기사를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몇 권의 책을 내었다는 것을 간간히 접했지만 이렇게 깊이 있게 만나기는 오늘이 처음인 듯 합니다. 하지만 낯설은 만난인지 쉽게 그에게 다가 가지가 않네요. 그는 나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내 머리는 자꾸만 고개를 젖습니다. 내 손은 가슴에 가 있지가 않고, 메모장을 꺼내어 계속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상당히 어려운 만남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누구를 위한 글쓰기인가?

"아기는 99퍼센트 엄마가 만든다(25쪽)"

이상적인 논의라 하더라고 감정, 심리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즉 엄마에 대한 사람만이 절대적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니, 다른이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누구의 사랑이 크고 작다의 문제가 아니라, 지은이가 말했듯이 '엄마의 손을 떠나 할머니, 이모, 고모의 손에서 자란 사람들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모든 아이의 불행은 결손가정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를 할머니가 품고 있는 사랑과 지혜를 깡그리 무시하게 되며, 현대사회에 대한 강한 부정도 드러낸다. 나는 무엇보다 어머니 없이 힘들게, 굳굳하게 살려는 이에게, '네 문제는 엄마가 없어서이다'라고 무 자르듯이 삭뚝 잘라버리는 그 악마적 글쓰기가 두렵다.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면, 분명 이는 살짝 덮고 치유의 방법부터 찾아야 할 터인데 상처난 부분을 찬바람에 들추어 내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의 책을 '절대 진리'인냥 받아들임도 두렵다. 최소한 인긴적인 존재만이 아닌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면도 찾아보아, 어떠한 결론을 내렸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데스몬드 모르스의 저서 『접촉』 등을 권해 본다.

글쓰기 관한 문제.

1. 여행 풍경
2. 정의 (책 인용)
3. 가정 (~있을 것이다)
4. 보기
5. 결론


지은이는 여행을 하면서 잠시 느낌 감정을 풀어낸다. 이 풍경은 어느 학자의 정의로 연결고리를 만든다. 그리고 정의는 지은이의 사념과 결합한다. 정의는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반면에 지은이의 가정은 상당히 사념적이다. 즉 '~있을 것이다'는 책을 넘기는 순간에 정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할 보기를 줄 세운다. 이 보기는 이미 그의 머리속에 줄 세워진 입에 맞는 맞춤식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글쓰기는 개인적 사념이 정의로 둔갑하는 것이다. 즉 그가 끌고온 정의는, 그의 사념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 정의'에 불과한 것이다.

다양한 사고관으로 좀 더 넓게 보아야 하는데, 그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몇 몇 만난 사람들을 쉽게 단정짓어버리고, 이를 합리화할 근거를 책 속에 끌어온다. 다시말하면 앞서 모든 인용문은 그의 '사념적 정의'를 합리화 하기 위한 '도구적 정의'가 되는 것이다.

사견인 작가론

어릴적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를 현실에 내어놓지 안는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뒤에 서서 나름대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기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의 편지가 전부 옳다고는 할 수없다. 수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사람과 부딪히여 스스로를 보이지 않았기에 그는 착각 속에서 세상을 재단하고 있다. 진정 그가,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세상에 나와야 할 것이다. 내면에 꽁꽁 숨어 세상을 보는 것은 비겁하다. 더욱이 이를 사실인냥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솔직히 이 지은에 대해 모른다. 이 모습은 내게 보여지는 모습을 적은 글이다. 옳다그르다는 분명 자신만이 알 것이다. 내가 글을 적고, '그는 이렇다', '몇 권의 책을 읽어보니'라고 단정 짓는 것도 옳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세상과 부딪히고, 그와 이야기를 주고 받기 앞서 까지는 그를 본 것은 빙산의 조그마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글을 적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그에 대한 '사적인 견해'를 정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내게 소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관리인 사내가 쐐기박듯, 무슨 말인가를 남긴 채 단호히 몸을 돌려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47쪽)

박물관을 나와서도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만약 어린 시절에 그 모든 과학 원리들을 이했더라면 모호한 상상력을 키우는 대신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웠을 것이고, 소설가가 되는 대신 고하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53쪽)

파리에서 우울증의 위력을 경험한 후 뒤늦게 또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삶이 어딘가에 막혀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는 느낌. 불투명한 막이 한 겹 의식을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바로 우우증의 증상이었다. 20대의 그 막막하고 암울한 느낌. 30대의 그 무력하고 적막한 상태가 죄다 우울증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없다고 느꼈지만 어‰F게 살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상태(58쪽)

서양 남성들이 혼자 여행하는 동양 여성에게 친절한 것은 다만 그 여성이 새롭게 보는성적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247쪽)/ 로마에서 전차를 타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더 유심한 시선이 얼굴에 와닿는 것을 느끼며 무심히 그쪽으로 고개 돌렸을 때 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어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채 얼굴이며 몸 전체를 삼킬 듯한 시선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아마도 상상 속에서 내 옷을 거의 벗긴 겉 같았다.(248쪽)


오만한 글쓰기

내개 지은이의 글쓰리를 두려워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그의 글쓰기는 유아기적 놀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들면 너는 내편,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편이라는 일방적인 금긋기가 행해지고 있다. 박물관 관리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는데, 혼자서 상상을 한다.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고 자기를 알몸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녕 가까이 다가가서 애기를 듣어보았는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가서는 마음을 놓는다. 즉 쉽게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고 한발 물러서서 '신'인냥 재단하는 글의 글쓰기는 오만하고, 상대방에게 상당히 무례하다.

책읽기가 이런 오만과 무례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긴 향해를 하지 못한 점을 밝힙니다. 물론 나와는 다르게 좋은 시선으로 본 사람을 틀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내가 본 지은이의 시선'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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