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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 7 - 완결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자연과 사람은 다르지가 않다!!"]
문명과 자연,
내 사춘기 시절에 한동안 아니 아직 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문명이 우위에 설까 아니면 자연이 우위에 설까? 우리는 산에 오르는 것을 정복이라는 말로 간혹 한다.(등정) 과연 그럴까 산은 거기에 말 없이 있었을 뿐이고, 다만 내 발로 올라간 것인데 정복인가? 누구와 싸워서 이겼단 말인가? 분명 싸웠다면 나 자신과의 싸움이지 산과의 싸움이 아니다. 하지만 간혹 우리들은 산과의 싸움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차츰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게 되며, "오직 인간만이 유일 혹은 사랑하사" 자연에 대해 면죄부가 주어지는 듯 행동을 한다.
춘천 청계사에는 영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그 연못은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자연에 대해 최소한의 인공적인 기형을 가하고, 자연과의 중용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어떻게 시멘트로 아스팔트로 더 공고히 하는가라는 것에 온통 관심이 집중 된 듯 하다. 이제 신발에 밟혀 오는 진흙의 무게는 더 이상을 무거울 수가 없다. 땀을 흘리기 위해서 땡볕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아스팔트로 포장된 사각 안에서 땀을 흘린다. 단순히 땀을 흘리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다. 땀을 흘리는 것은-데스몬드 모리스가 엄마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것이 자기 젖을 먹이는 행위 그 밖에 심정적 안정감과 평온함, 심장의 박동 소리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울림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했 듯이, 산을 오르면서 숨 쉬고 땀을 흘리는 것은 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시멘트며 아스팔트를 모조리 벗겨내고 다시 떼를 입히거나 흙을 덮어야 하는가?
내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은이는 나우시카의 눈을 통해, 인간이 오염에 적응하여 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의 모습이 아닌,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은이의 자연에 대한 동경은 그 뒤의 작품이나 앞서서에 잘 나왔기에 더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연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공산주의의 결정론을 빌려온다면, 기계문명 다음에는 오직 기계에 대한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회의를 가지고 있는데, 문명과 자연은 공존을 할 수가 없는가? 자연의 품은 넓으면서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다가갈 때도 있지만....
살짝 훔쳐보기
나는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나씩 엿보기를 한다.
[불의 7일]간이 끝나고-고도의 기계문명은 스스로의 화약을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화약은 권력욕에 눈먼 몇 몇 사람들에 의해 거대한 전쟁이 일어나고 기계문명은 수천년 뒤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쓰레기는 가져가지 못하여 자연은 정화되지 못한체, 독기를 내 뿜고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가? 그네들은 스스로의 적응 능력을 길러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부해에 사는 오무는 천천히 자연을 정화해간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더디기 때문에 간혹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라며 외면을 하고, 오무는 공존의 생물에서 금(線) 밖에 서 있다. 이 옆에 바람계곡, 그곳에는 지르의 딸 나우시카가 살고 있다. 오직 이 소녀만이 오무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자연에 대해 차츰 귀를 기우려 간다.
바람계곡은 트로메키아라는 대국에 소후국으로 종속되어 있다. 그네들은 트로메키아가 전쟁을 일으켜 동원령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하게 된다. 트로메이카아의 황녀 크샤나는 페지테라는 소후국을 침략하고 왕녀가 가지고 있던 비밀물건을 찾아 나선다. 크샤나는 오빠들의 꾀임에 속아 남하하여 수많은 병사들을 잃게 되고 나우시카를 만나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도 차츰씩 키워간다. 그와 동시에 나우시카에 대한 동화도 이루어진다. 트로메키아의 3왕자들은 토르크라는 남쪽의 대국을 침략하여 본격적인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또한 오무는 남쪽 숲으로 가야한다며 수많은 벌레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르크에 있는 소후국 가운데, 승려들은 예언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네들은 파란 옷을 입은 날개달린 무엇이 와서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 한다. 파란 옷을 입은...
나우시카는 오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남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나우시카 앞에서는 전쟁의 참상과 현실에 대한 허상 등이 무수히 나타나, 또 다른 [불의 7일간]을 예언한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나우시카
이 작품에서, 큰 주제를 이끌고 가고 있는 사람은 제목에서 나타났듯이 나우시카이다. 그는 트르메키아의 소후국 바람계곡의 딸이지만 자연의 딸이기도 하다. 그에게 적은 없으며 모두가 친구이자 아픔이다. 그는 외모나 냄새 등으로 친구를 나누지는 않는다. 이런 포용력은 부해에 살고 있는 오무와도 닮은 것이 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부해에서 스스로 숨을 쉬며 정화를 해 가는 것이다. 나우시카 역시 싸움 속에 스스로를 던져서 평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무가 남쪽 숲으로 가야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만 떠남은, 오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우시카는 흙이며 나무이고, 물이며 불이고, 해이며 별이다. 나를 가두려 하지마라. 나는 자유롭고 자유로이니(自然) 어디 한 곳에 내가 머물지 않는 곳이 없으며, 어느 한 부분 내가 아닌 것이 없다. 그는 메시아이다. 그가 가는 곳에는 오직 선(善)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려 한다.
크샤나는 나우시카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트르메키아의 왕녀이다. 그는 오직 전쟁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를 만나게 됨으로서 차츰 전쟁이 아닌 공존과 자연으로 동화되어 간다. 적개심이 가득 찬 곳에서 살아온 크샤나가 나우시카를 만남으로 인해 바뀌어간다는 건 나우시카가 구원의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샤나에 의해 동생과 자기 나라를 잃은 아스벨에 대한 초첨이 너무 희미하게 비추어진다. 유파와 승정은 삶에 대한 지혜자로서 나우시카에게 수호자가 되어준다. 그네들은 나우시카 곁에서 보필하면서 한편으로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내고 있다.
조금은 아쉬운 점
[불의 7일]간 뒤, 세계에 퍼진 환경에 대한 아무런 의문점 내지 치유가 없이 스스를 가두고 사람들은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런데 나우시카의 등장으로 세계(自然)의 틀이 부셔지고 만다. 즉 나우시카는 메시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태어남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며, 전쟁을 통해 전쟁이 안좋은 것인데 왜 하는걸까라는 유아적인 문제를 던진다. 그리고 평화, 평화를 간절히 구한다. 이는 나우시카에 대한 메시아적 입장을 너무 강조함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우시카가 없다면... 전쟁은 일어날 것이며,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이의 중재자가 나우시가라면... 그는 분명,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지만 메시아로서 예언적 존재로 비추어진다. 이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과 무계급적인 평등이 사라지고 나우시카 그리고 사람으로 나뉘어지는 계급을 만들어 낸다. 지은이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더 부해속으로 던져 버리고,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려라 한다.(혹시 지은이 스스로 '큰바위 얼굴'이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메시아적 입장에 비중을 두게 됨으로서, 권력욕에 물든 인간이 어떻게 침잠되어가는 가에 대한 접근은 없으며, 무조건 나쁘다는 이분법 논리만이 버티고 서 있다. 크샤나의 비극은 권력의 무대에서 자란 한 인간의 비극인데 인간에 대한 연민보다 나우시카에 대한 동저이 더 강한 것은 위의 논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메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트로메키아의 군대 동원령은, 명분이 필요없다. 또한 이분법적 논의로 보면 '모두가 원래 악당'이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없다. 악당은 원래 그런 것이니, '미랄라'의 집권욕 또한 이와 같다. 황제이기에 나쁜 놈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족장 딸이며 , 어린 여성이지만 메시아기에 예외이다. 그리고 그의 차지(소)족 장의 딸은 신비함을 더 하고 권위에 둘러 쌓인 인간이 아닌 눈높이를 맞춘 인간으로 들어낸다.
지은이의 권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 대후국의 권력과 자치(소)국의 권력에 오른자가 틀리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치국의 여성에 대한 동경 내지 환상을 품고 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이 부분이 이 책이 지니는 한계이며, 여기에서 출발하게 되면 지은이의 주제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은이의 환경 아닌 사람에 대한 성찰을 더 깊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크샤나의 자리가 너무 흐지부지한 것이 조금 아쉽다.
인간의 한계, 즉 그는 권력욕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덧에 걸려 들은 것이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메시아이며,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않은 여린 순수 소녀이다. 질적으로 다른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나오는 여성으로서의 구원자에 대한 모티브가 여기에서 들어나며, 남성은 폭력, 권력이라는 이분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여성을 예언자 혹은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사람에 의한 꿈의 건설이 아닌 신에 의한 구원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