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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최전선 -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새롭고 더 창조적인 발상들
김호기 외 52인 지음 / 한길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지식의 최전선?
학문적 전투의 보고서, 조금은 살풍경적인 글쓰기를 통해, 지은이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어렵게 접근하지 않더라도, 스필버그가 [쥬라기 공원]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으로 BoA가 노래 불러서 벌어들이는 돈(金)으로, 지식의 금전적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지식=돈'이라는 수학적 공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은이가 말했듯이 지식이라는 것은 '미래를 기획, 설계'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는 쿤의 '패러다임'과는 별개로, 지식은 앞 사고에서 이어진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역시, 전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이기에 하늘애서 뚝 떨어진 사고라고만은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즉 지식이라 함은 넓은 바다에 떠 있는 배위의 '돛대'이며 '키'라 할 수 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해 궁극적 물음과 해답을 동시에 안겨 주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기초가 되는 지식이, 세 해가 지난 다음의 오늘에서도 유효한가? 유효하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유효하다면 지식은 만고불변의 법칙을 따르는가? 솔직히 3년이나 늦게 찾아온 지식에 대해, 나는 심한 갈등을 느낀다.
우선은 8개의 큰 주제 아래, 29개의 학문적 쟁점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거미줄처럼 전혀 낯선 것과의 연결고리를 찾아 새로운 집을 지을까 한다.
"이 책은 또한 숨은 그림 찾기와도 비교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학문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전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퍼즐의 한 조각이 다른 어떤 조각과 이어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그 단서를 찾아가는 것은 현대 학문의 키워드를 찾는 것과 같다. 숨은 그림을 찾듯 독자는 숨은 키워드를 찾는다. 숨은 그림을 발견하는 것은 그림의 부분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동시에 전체를 한눈에 보아야 가능할 것이다."(7쪽)
전체는 부분이며 하나이고, 부분은 전체이며 하나이다.
하나와 부분을, 부분과 하나를 자유자재로 연결 고리를 만들 때에 전혀 새로운 눈이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파편화된 삶 속에서 다른 것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내 이웃의 가난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저 불쌍하게 보일 뿐이다. 여기에는 사회구조적 문제라든가 윤리도덕적인 문제는 잊혀지고, 소비지향적이며 개인주의만이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부분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동시에 전체를 한눈'에 볼 때에 과연 무엇인 그려질까? 여기에 대해 지은이는 어떠한 명답을 내어 놓지 않고 있다. 아마 보는 눈의 다양성에 따라, 그려지는 밑그림이 틀리기 때문일까? 약간의 두려움과 설레임을 안고 나는 지식의 바다로 헤엄쳐 나가려 한다.
본문읽기
1, 나에게 다가오는 문화,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
2. 새로운 기술, 새로운 관점으로 생활을 디자인한다.
3. 극미의 세계로부터 우주까지
4. 생명복제, 기술의문제인가 윤리의 문제인가
5. 인간의 정신세계, 그 베일을 걷어낸다
6.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삶이 풍요롭게 한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주제인가. 문화에서 시작한 글 읽기는 새로운 기술을 넘어, 극미와 우주를 오가고, 생명복제에서 기술과 윤리를 논한다. 그 밑바탕에 자리 잡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문제 등은 충분히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다. 책읽기의 즐거움과 지식의 유희에 빠져볼까.
장준호(이하 존칭 생략, 쪽수 명기 18쪽)의 글쓰기는 희망찬 미래를 열어준다. 인터넷의 발전은 무한 기술과 경제적인 부담을 하향평준화 시켰다. 즉 돈이 없어서 영화를 못 찍겠다는 걱정은 70,80년대에 묻어버리고, 이제는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외치고 있다. 장준호가 보는 시선은, '디지털이다' 디지털은 변화무쌍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유지나는 대박영화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자연의 논리가 인과응보라는 인과론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는 나이기에 쉽게 수긍을 한다. 그가 보는 시선은 '관객의 눈'이다. 관객은 정확하며, 영화를 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객에 대한 우대는 한참을 이어지지 못하고 쉽게 엿하고 맞바꿔 먹는다.
그의 글쓰기는 정확한 근거나 논리가 없고 감성적이라는 점을 벗겨낼 수가 없다. 우선 그는 '대박영화의 저질성 시비'를 이야기 하며, 대중은 마케팅이나 선전에만 놀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쉬리나 조폭마누라의 흥행성적에 대한 관계는 무시하고, 나비나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영화를, 영화 살리기 위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관객의 눈도 덩달아 높이고 있다. 관객의 시선이 높은 수준이거나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애초부터 이른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은이가 말하는 '과잉 마케팅'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종 선택은 마케팅이 아닌 관객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영화를 보고 안보고의 선택의 문제이다. 또한 장준호의 말처럼 디지털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마케팅의 과잉으로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눈조차 잃고 있다는 것인가?
한창완의 글쓰기와 장준호의 글쓰기는 맥이 닿아 있다. 즉 이들의 글쓰기는 기술의 진하에 따른 무한한 잠재력에 대해 깊은 희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희망마저 버리면 절망밖에 남을 것이 없으니……. 하지만 비판 없는 희망은 기술에 대한 숭배로 이어질 뿐이다. 한창완의 글쓰기는 이에 빠질 우려가 있다.
2D에서 3D로 넘어오면,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되고 오락 등이 좀 더 친절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업적 논리를 완전히 젖히고 있다. 또한 기술에 따른 사람의 감정도 호응한다는 헤게모니가 숨어져 있다. 저 멀리 자연을 찾아가지 않고 동물원에 가서 자연을 보고, 난 자연을 다 보았다며 편리성에 눈멀어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자연을 가공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인해 사람마저도 위아래 서열을 만드는 준거의 틀을 제시하는 동물원으로 보는 시선 등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렇듯이 새로운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이 아닌데…….
환창완의 글 보다는 오카다 토시오가 지은 『오타쿠 』를 추천한다. 한창완이 묶어 쓰는 3개의 글 역시 희망찬 논리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이 없다. 절망보다 희망이 낳은 것은 분명하지만 용맹만 믿고 지기(知彼知己)를 믿지 않는다면, 이런 싸움은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 게임에 대한 과잉 친절은 보기에 민망하다. 이는 우리나라가 지니는 문화적 특성을 살펴보지 않고 감정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집을 내 몸 뉘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닌 부동산 투기물이며, 학교는 자아 성찰을 위한 구도장이 아닌 계급 상승의 필수코스로 전락하고, 오직 돈이 삶의 전부인 냥 아둥바둥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외면을 통한 글쓰기는 거짓 아름다움만 부풀린다. 게임의 저질성이나 폭력성, 어린이의 자제력과 경제력을 볼모로한 상술 등에 외면하는 지은이가 달리 보인다.
박신의의 글은 문제제기만 하고, 답은 스스로 찾기를 바란다. 혹시 가수가 노래를 잊어버려 관객에게 넘기 듯 그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문화의 혼성이 진정한 의미와 문화적 힘과 가치를 상실할 경우이다. 문화의 혼성은 그 자체가 새로운 문화 현실임에도 대개는 상업주의와 결합하면서 상품화되기 쉬운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머리 염색을 하는 젊은이들이 어떤 문화적 견해를 갖는지, 한류 선풍에서 어떤 문화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동서양 문화의 혼성이 어떤 새로운 문화적 지표를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남는 것이다."(78쪽)
김홍탁은 광고를 위한 광고라는 점을 무시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모기업이 1%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광고를 내보낸다고 기업 이미지가 상승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아들에 대한 편법 증여가 문제시되기 때문에. 광고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광고의 몸 비틀기는 새로움-'낯설게 하기'이지만 광고를 보면 한계를 지닌다. 다만 광고의 표현기법이 사람에게 미치는 점을 평가하여 다른 부분과의 연계성을 찾는 게 낳지 않을까?
마정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前)에 것과는 같이 않다고 들려준다. 그가 말하는,
"광고는 지금까지 직접 판매수단이 아니었다. 소비자가 매장에 가기까지 유도하는 판촉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쌍방향광고가 시작되면 더 이상 광고는 판매와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프로그램에 삽입되었든 쌍방향광고는 브랜드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온라인 판매에도 기여하게 된다. 때문에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미디어 독해력(media literacy)과 소비자 독해력(consumer literacy)이 요구된다“(116쪽)
이러한 독해력은 어떻게 기를 수가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들려주지 않는다. 즉 원론적인 이야기에 머무른다. 하지만 앞서의 기술 진보에 대한 희망찬 미래만 역설하는 글쓰기에 대해 진일보 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바로미터인가 일반화의 오류인가
'제1장, 나에게 다가오는 문화,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에서 보이는 글쓰기는 이 책의 전반적인 글 읽기에 대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글쓴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한결같기 때문이다.
첫째. 희망찬 미래
황금알을 낳는 거위마냥 다가온 미래에 대해 마냥 들떠 있다.
둘째, 전체를 아우르는 글쓰기.
몇 쪽 밖에 되지 않지만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주생성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셋째, 쉬운 글쓰기
통계가 저지르기 쉬운 숫자의 횡포나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근거를 두지 않는 글쓰기
넷째, 해답은 개인의 몫
어떠한 문제제기를 한 다음에, 답은 스스로 찾길 바라고 있다.
위에서처럼 지은이의 글쓰기는 핵심을 벗어나며, 원론적인 글쓰기 내지 희망찬 미래만 역설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접근이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핵심이 없으니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 역시 힘들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대해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아무래도 쉽게 씌어진 글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짧은 이야기 속에 함축적인 내용을 담으려 하니, 자칫 근거 없는 이야기나 추상적 메아리, 희망찬 논리, 일관성의 부재 등이 곳곳에 보인다.
한 사람의 교수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 해 보인다. 그 중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글에 대해서 몇 자 중언부언으로 마무리를 하려한다.
이 사람의 글을 보라.
이혁구가 쓴 [사회복지는 근대권력의 한 장치이다]라는 주제는 상당히 흥미를 끈다. '사회복지=근대권력'이라는 문제제기는 기존의 병원, 감옥, 학교 등의 푸코식 팝옵티곤에 대해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찌하여 사회복지가 이 주류에 들어서는가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지은이는 현재의 사회복지가 왜 근대권력의 한 장치가 되는지 화두를 던진다. 당연히 기존의 사고에 머물러 있는 나는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의 논의는 예상대로 푸코로 이어지며, 마르크스와는 또 다른 논의를 끌어낸다.
"사회복지학은 곤궁하고 소외된 계층과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삶의 양식을 보호하고 그들의 사회적 권리를 신장시키며 궁극적으로 그들의 사회적 적응능력을 재고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이론과 실천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푸코의 근대권력에 대한 통찰은 사회복지학과 실천기술을 위해 당연시되어온 전문적 지식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다. 즉 사회복지학의 이론과 실천은 사회적 주체를 생산하고 훈육하는 정상화 기술로서 사회적 삶의 각 부문들을 자본주의체계 혹은 그것을 넘어선 권력의 체계에 상응하도록 조율하는, 억압적이라기보다는 생산적이고 규율적인 근대권력의 한 장치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465쪽)
이렇게 마무리를 하는 글쓰기는, 이미 보아온 용두사미식의 글쓰기가 아닌 초점을 명확하게 잡고 자기의 주장을 단호하게 이끌어 낸다. 내 부족한 지식으로는 그의 글이 정답이라고는 단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정성에 대해 고마워하는 것이다. 큰 문제를 제기하고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는 유야무야 혹은 양비론적 글쓰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설레임과 실망감의 평행선...
나는 지식의 최전선을 읽으면서 설레임을 가졌다. 그것은 지식이 부의 도구화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식으로 돈벌이를 궁리했으며, 흩어진 지식의 연결고리를 찾아 '지식의 총체성'에 대한 허구할 정도의 기획을 그려보았다. 흔히 한 우물을 오래파면 장인이라고 한다. 이는 지극히 눈에 보이는 삶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인식하는 지식의 파편화에 따른 낮은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농사꾼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만물을 알아야 한다. 그냥 농사를 잘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햇살과 바람 그리고 수많은 풀벌레와 그 친구들을 잘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한다. 단순히 수십 년을 농사지었다고 장인이라고 부르지 않음은 이러한 총체성을 읽고 있냐. 없느냐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오래 하였다고 장인이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지금의 지식은 너무나 분파를 형성하여, 각기 다른 길에 서 있다. 건축학은 자연과는 멀어졌고, 심리학은 정치, 사회문화와의 거리를 멀게 하고, 디지털은 인간 감정과는 등을 쌓고 있다. 디지털의 발달이 인류 전체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막연한 기대감, 서구 건축에 부러움, 서양 사상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 등은 이 책이 가진 한계라고 생각한다.
분명 여기에 과연 우리의 사상이나 생각이 있나 묻고 싶다. 여기에 여섯 종이 하나로 뭉칠 수 있냐고 묻고 싶다. 지은이들은 자기의 물음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답을 던져주지 않고 '역사가 말하리라'하지 않고 있는가! 너무나 무성의 하다. 기획에 따른 기대감과 글쓰기에 대한 실망감이 평행선을 어찌 이리도 오래도록 달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책이다.
조선의 부처는 이미, 부처의 조선의 되었고, 우리 생각이 없는 글쓰기는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에 대한 해바라기가 너무나 짙다. 이러다 고개 부러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