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최전선 -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새롭고 더 창조적인 발상들
김호기 외 52인 지음 / 한길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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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의 최전선?

학문적 전투의 보고서, 조금은 살풍경적인 글쓰기를 통해, 지은이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어렵게 접근하지 않더라도, 스필버그가 [쥬라기 공원]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으로 BoA가 노래 불러서 벌어들이는 돈(金)으로, 지식의 금전적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지식=돈'이라는 수학적 공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은이가 말했듯이 지식이라는 것은 '미래를 기획, 설계'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는 쿤의 '패러다임'과는 별개로, 지식은 앞 사고에서 이어진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역시, 전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이기에 하늘애서 뚝 떨어진 사고라고만은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즉 지식이라 함은 넓은 바다에 떠 있는 배위의 '돛대'이며 '키'라 할 수 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해 궁극적 물음과 해답을 동시에 안겨 주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기초가 되는 지식이, 세 해가 지난 다음의 오늘에서도 유효한가? 유효하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유효하다면 지식은 만고불변의 법칙을 따르는가? 솔직히 3년이나 늦게 찾아온 지식에 대해, 나는 심한 갈등을 느낀다.


우선은 8개의 큰 주제 아래, 29개의 학문적 쟁점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거미줄처럼 전혀 낯선 것과의 연결고리를 찾아 새로운 집을 지을까 한다.


"이 책은 또한 숨은 그림 찾기와도 비교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학문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전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퍼즐의 한 조각이 다른 어떤 조각과 이어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그 단서를 찾아가는 것은 현대 학문의 키워드를 찾는 것과 같다. 숨은 그림을 찾듯 독자는 숨은 키워드를 찾는다. 숨은 그림을 발견하는 것은 그림의 부분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동시에 전체를 한눈에 보아야 가능할 것이다."(7쪽)


전체는 부분이며 하나이고, 부분은 전체이며 하나이다.


하나와 부분을, 부분과 하나를 자유자재로 연결 고리를 만들 때에 전혀 새로운 눈이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파편화된 삶 속에서 다른 것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내 이웃의 가난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저 불쌍하게 보일 뿐이다. 여기에는 사회구조적 문제라든가 윤리도덕적인 문제는 잊혀지고, 소비지향적이며 개인주의만이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부분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동시에 전체를 한눈'에 볼 때에 과연 무엇인 그려질까? 여기에 대해 지은이는 어떠한 명답을 내어 놓지 않고 있다. 아마 보는 눈의 다양성에 따라, 그려지는 밑그림이 틀리기 때문일까? 약간의 두려움과 설레임을 안고 나는 지식의 바다로 헤엄쳐 나가려 한다.


본문읽기


1, 나에게 다가오는 문화,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

2. 새로운 기술, 새로운 관점으로 생활을 디자인한다.

3. 극미의 세계로부터 우주까지

4. 생명복제, 기술의문제인가 윤리의 문제인가

5. 인간의 정신세계, 그 베일을 걷어낸다

6.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삶이 풍요롭게 한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주제인가. 문화에서 시작한 글 읽기는 새로운 기술을 넘어, 극미와 우주를 오가고, 생명복제에서 기술과 윤리를 논한다. 그 밑바탕에 자리 잡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문제 등은 충분히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다. 책읽기의 즐거움과 지식의 유희에 빠져볼까.


장준호(이하 존칭 생략, 쪽수 명기 18쪽)의 글쓰기는 희망찬 미래를 열어준다. 인터넷의 발전은 무한 기술과 경제적인 부담을 하향평준화 시켰다. 즉 돈이 없어서 영화를 못 찍겠다는 걱정은 70,80년대에 묻어버리고, 이제는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외치고 있다. 장준호가 보는 시선은, '디지털이다'  디지털은 변화무쌍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유지나는 대박영화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자연의 논리가 인과응보라는 인과론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는 나이기에 쉽게 수긍을 한다. 그가 보는 시선은 '관객의 눈'이다. 관객은 정확하며, 영화를 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객에 대한 우대는 한참을 이어지지 못하고 쉽게 엿하고 맞바꿔 먹는다.


그의 글쓰기는 정확한 근거나 논리가 없고 감성적이라는 점을 벗겨낼 수가 없다. 우선 그는 '대박영화의 저질성 시비'를 이야기 하며, 대중은 마케팅이나 선전에만 놀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쉬리나 조폭마누라의 흥행성적에 대한 관계는 무시하고, 나비나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영화를, 영화 살리기 위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관객의 눈도 덩달아 높이고 있다. 관객의 시선이 높은 수준이거나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애초부터 이른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은이가 말하는 '과잉 마케팅'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종 선택은 마케팅이 아닌 관객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영화를 보고 안보고의 선택의 문제이다. 또한 장준호의 말처럼 디지털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마케팅의 과잉으로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눈조차 잃고 있다는 것인가?


한창완의 글쓰기와 장준호의 글쓰기는 맥이 닿아 있다. 즉 이들의 글쓰기는 기술의 진하에 따른 무한한 잠재력에 대해 깊은 희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희망마저 버리면 절망밖에 남을 것이 없으니……. 하지만 비판 없는 희망은 기술에 대한 숭배로 이어질 뿐이다. 한창완의 글쓰기는 이에 빠질 우려가 있다.


2D에서 3D로 넘어오면,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되고 오락 등이 좀 더 친절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업적 논리를 완전히 젖히고 있다. 또한 기술에 따른 사람의 감정도 호응한다는 헤게모니가 숨어져 있다. 저 멀리 자연을 찾아가지 않고 동물원에 가서 자연을 보고, 난 자연을 다 보았다며 편리성에 눈멀어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자연을 가공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인해 사람마저도 위아래 서열을 만드는 준거의 틀을 제시하는 동물원으로 보는 시선 등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렇듯이 새로운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이 아닌데…….


환창완의 글 보다는 오카다 토시오가 지은 『오타쿠 』를 추천한다. 한창완이 묶어 쓰는 3개의 글 역시 희망찬 논리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이 없다. 절망보다 희망이 낳은 것은 분명하지만 용맹만 믿고 지기(知彼知己)를 믿지 않는다면, 이런 싸움은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 게임에 대한 과잉 친절은 보기에 민망하다. 이는 우리나라가 지니는 문화적 특성을 살펴보지 않고 감정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집을 내 몸 뉘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닌 부동산 투기물이며, 학교는 자아 성찰을 위한 구도장이 아닌 계급 상승의 필수코스로 전락하고, 오직 돈이 삶의 전부인 냥 아둥바둥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외면을 통한 글쓰기는 거짓 아름다움만 부풀린다. 게임의 저질성이나 폭력성, 어린이의 자제력과 경제력을 볼모로한 상술 등에 외면하는 지은이가 달리 보인다.


박신의의 글은 문제제기만 하고, 답은 스스로 찾기를 바란다. 혹시 가수가 노래를 잊어버려 관객에게 넘기 듯 그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문화의 혼성이 진정한 의미와 문화적 힘과 가치를 상실할 경우이다. 문화의 혼성은 그 자체가 새로운 문화 현실임에도 대개는 상업주의와 결합하면서 상품화되기 쉬운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머리 염색을 하는 젊은이들이 어떤 문화적 견해를 갖는지, 한류 선풍에서 어떤 문화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동서양 문화의 혼성이 어떤 새로운 문화적 지표를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남는 것이다."(78쪽)


김홍탁은 광고를 위한 광고라는 점을 무시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모기업이 1%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광고를 내보낸다고 기업 이미지가 상승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아들에 대한 편법 증여가 문제시되기 때문에. 광고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광고의 몸 비틀기는 새로움-'낯설게 하기'이지만 광고를 보면 한계를 지닌다. 다만 광고의 표현기법이 사람에게 미치는 점을 평가하여 다른 부분과의 연계성을 찾는 게 낳지 않을까?


마정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前)에 것과는 같이 않다고 들려준다. 그가 말하는,


"광고는 지금까지 직접 판매수단이 아니었다. 소비자가 매장에 가기까지 유도하는 판촉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쌍방향광고가 시작되면 더 이상 광고는 판매와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프로그램에 삽입되었든 쌍방향광고는 브랜드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온라인 판매에도 기여하게 된다. 때문에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미디어 독해력(media literacy)과 소비자 독해력(consumer literacy)이 요구된다“(116쪽)


이러한 독해력은 어떻게 기를 수가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들려주지 않는다. 즉 원론적인 이야기에 머무른다. 하지만 앞서의 기술 진보에 대한 희망찬 미래만 역설하는 글쓰기에 대해 진일보 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바로미터인가 일반화의 오류인가


'제1장, 나에게 다가오는 문화,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에서 보이는 글쓰기는 이 책의 전반적인 글 읽기에 대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글쓴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한결같기 때문이다.


첫째. 희망찬 미래

황금알을 낳는 거위마냥 다가온 미래에 대해 마냥 들떠 있다.

둘째, 전체를 아우르는 글쓰기.

몇 쪽 밖에 되지 않지만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주생성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셋째, 쉬운 글쓰기

통계가 저지르기 쉬운 숫자의 횡포나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근거를 두지 않는 글쓰기

넷째, 해답은 개인의 몫

어떠한 문제제기를 한 다음에, 답은 스스로 찾길 바라고 있다.


위에서처럼 지은이의 글쓰기는 핵심을 벗어나며, 원론적인 글쓰기 내지 희망찬 미래만 역설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접근이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핵심이 없으니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 역시 힘들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대해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아무래도 쉽게 씌어진 글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짧은 이야기 속에 함축적인 내용을 담으려 하니, 자칫 근거 없는 이야기나 추상적 메아리, 희망찬 논리, 일관성의 부재 등이 곳곳에 보인다.

 

한 사람의 교수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 해 보인다. 그 중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글에 대해서 몇 자 중언부언으로 마무리를 하려한다.


이 사람의 글을 보라.


이혁구가 쓴 [사회복지는 근대권력의 한 장치이다]라는 주제는 상당히 흥미를 끈다. '사회복지=근대권력'이라는 문제제기는 기존의 병원, 감옥, 학교 등의 푸코식 팝옵티곤에 대해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찌하여 사회복지가 이 주류에 들어서는가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지은이는 현재의 사회복지가 왜 근대권력의 한 장치가 되는지 화두를 던진다. 당연히 기존의 사고에 머물러 있는 나는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의 논의는 예상대로 푸코로 이어지며, 마르크스와는 또 다른 논의를 끌어낸다.


"사회복지학은 곤궁하고 소외된 계층과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삶의 양식을 보호하고 그들의 사회적 권리를 신장시키며 궁극적으로 그들의 사회적 적응능력을 재고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이론과 실천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푸코의 근대권력에 대한 통찰은 사회복지학과 실천기술을 위해 당연시되어온 전문적 지식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다. 즉 사회복지학의 이론과 실천은 사회적 주체를 생산하고 훈육하는 정상화 기술로서 사회적 삶의 각 부문들을 자본주의체계 혹은 그것을 넘어선 권력의 체계에 상응하도록 조율하는, 억압적이라기보다는 생산적이고 규율적인 근대권력의 한 장치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465쪽)


이렇게 마무리를 하는 글쓰기는, 이미 보아온 용두사미식의 글쓰기가 아닌 초점을 명확하게 잡고 자기의 주장을 단호하게 이끌어 낸다. 내 부족한 지식으로는 그의 글이 정답이라고는 단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정성에 대해 고마워하는 것이다. 큰 문제를 제기하고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는 유야무야 혹은 양비론적 글쓰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설레임과 실망감의 평행선...


나는 지식의 최전선을 읽으면서 설레임을 가졌다. 그것은 지식이 부의 도구화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식으로 돈벌이를 궁리했으며, 흩어진 지식의 연결고리를 찾아 '지식의 총체성'에 대한 허구할 정도의 기획을 그려보았다. 흔히 한 우물을 오래파면 장인이라고 한다. 이는 지극히 눈에 보이는 삶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인식하는 지식의 파편화에 따른 낮은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농사꾼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만물을 알아야 한다. 그냥 농사를 잘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햇살과 바람 그리고 수많은 풀벌레와 그 친구들을 잘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한다. 단순히 수십 년을 농사지었다고 장인이라고 부르지 않음은 이러한 총체성을 읽고 있냐. 없느냐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오래 하였다고 장인이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지금의 지식은 너무나 분파를 형성하여, 각기 다른 길에 서 있다. 건축학은 자연과는 멀어졌고, 심리학은 정치, 사회문화와의 거리를 멀게 하고, 디지털은 인간 감정과는 등을 쌓고 있다. 디지털의 발달이 인류 전체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막연한 기대감, 서구 건축에 부러움, 서양 사상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 등은 이 책이 가진 한계라고 생각한다.


분명 여기에 과연 우리의 사상이나 생각이 있나 묻고 싶다. 여기에 여섯 종이 하나로 뭉칠 수 있냐고 묻고 싶다. 지은이들은 자기의 물음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답을 던져주지 않고 '역사가 말하리라'하지 않고 있는가! 너무나 무성의 하다. 기획에 따른 기대감과 글쓰기에 대한 실망감이 평행선을 어찌 이리도 오래도록 달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책이다.


조선의 부처는 이미, 부처의 조선의 되었고, 우리 생각이 없는 글쓰기는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에 대한 해바라기가 너무나 짙다. 이러다 고개 부러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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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5-12-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지나님에 관한 부분 매우 공감합니다. 저 분은 10년 전에도 저렇게 글을 쓰시더니 여전히 변함이 없군요. 아쉽습니다.
 
모략 1
차이위치우 / 들녘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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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내가 살아가는 것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며, 이 선택은 나, 우리, 친구, 가족, 이웃, 나라 등을 상대적 혹은 절대적 우위에서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목표라 하곤 한다. 단재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라는 역사인식도, 근본적으로는 '선택'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을 뿌리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까지.

나는 의식 속에서든 무의식속에서든 수많은 선택을 한다. 여기에서 무의식의 선택은 조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번의 선택으로 '우위'에 놓인 결과를 인식하여 선입관으로 자리 잡아, 새로운 가치관이나 전략(선택) 등을 쉬이 수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무의식적 선택은 이미 검증된선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결과물에 집착하면, 스스로를 돌아볼 수가 없으며 수 없이 발생되는 변수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러한 선택 시 참고 사항이 될 전략(모략)등을 살펴보기로 했다.

예전에는 전쟁이 많아서인지 『모략』의 알찬 구슬은, 끔찍한 이야기 위주이지만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지은이는 수백 년, 지 천년 동안 쌓인 수많은 모략-전략의 변수를 하나씩 들려준다.

무엇보다 나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는 '나'라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 여름 매물도 바다에서 벌벌 떨었던 기억을 떨쳐내고 평상심을 얻어야 할 것이다. 즉 정체성을 확립하고 평상심을 찾은 다음, 전략 전술에 따른 변수를 익히기로 했다.

우선 '내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른 동반자격 가치관, 나는 내 가치관을 『모략』의 앞장에 마주친 '위이덕본(爲以德本)'을 삼는다. 혹자는 '제로섬 게임'이 존재하는 현실 앞에 도덕책으로 먹고 살 수 있는가라고 물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 버려도 버려도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믿는다.

'이덕위본'의 기치 아래, 여러 참모격을 불러 모은다.

'동감동고(同甘同苦)'
'근열원래(悅遠近來)'
'치명이신(治兵以信)'

이는 내 허약함을 사람의 숲을 만들려는 교토삼굴의 전략임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밑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信賴)'이다.

평상심.

정체성의 틀을 세웠으니,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平常心)을 갖추어야겠다. 지은이는 「동주열국지」의 책을 빌려 '격장지술(激將之術)', 「손자병법」[군정편]을 들어 '장군가탈심(將軍可奪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69쪽) 아무리 판단력은 뛰어난 전략가라도 평상심을 잃어버리면 이성보다 감성의 우위에 서게 되며, 이로써 칼 보다 냉철한 무디어지게 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평상심은 한결 같아야 하며, 아침저녁으로 기분을 달리하면 안된다. 이렇게 되면 큰 뜻을 세울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들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문치무공(文治武功)'
'대지약무(大智若愚)'
'안불망위(安不忘危)'
'관맹상제(寬猛相濟)'

평상심은 가치관의 틀을 세우게 하며, 전략의 구심적 지위에 이르게 한다. 평상심이 흔들리게 되면, 우선 전략이 흩트려지고, 전략이 흩뜨려지게 되면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지고 결국에는 무너지게 된다. 정체성이 쓰러지면 큰 뜻 또한 자연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 조선 후기 화가 칠칠이(崔北)의 비바람 치는 바다에서의 호통은 기인으로서 볼 것이 아니라 귀인(貴人)으로 보아야 함이 옳을 것이다.

전략은 일을 구체화시키는 추진력이 된다. 아무리 가치관이 옳고, 평상심을 가지고 있다한들 전략이 부재하면, 노 없는 배와 같다. 바람과 별을 잃고 낯선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게 괸다. 아무리 좋은 가치관과 평상심을 얻었다한들 전략이 없으면 이 또한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전략.

전략은 실전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늘어나는 것이지만, 몸으로 부딪혀 익힘과 동시에 선지식을 간접경험을 통해 얻지 못한다면 발전함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고금의 모든 전략을 익힘이 중요하며, 자기만의 전략을 터득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전략이라 함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한 가지 전략이 만병통치약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임기응변식으로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이러하지 못할 경우에는 400여 년 전의 비극이 부활될 수가 있다.

신립은 조선시대 누구나 알아주는 명장이였다. 명장 아래 약졸 없다했던가. 그렇다면 신립의군은 보통 군이 아니었을 터인데, 그는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의 전략으로 배수진을 쳤지만 그와 병사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이는 '지기(知己)'에 젖고. '지리'에 지고, '용맹'으로만 이기려했기 때문이다.

모든 전략은 '지피지기'에서 세워야 한다. 이를 어기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진배없다. '지피지기' 없는 전략은 가벼운 비바람에도 무너질 뿐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되내이면서, 오늘의 우리나라를 본다.

군주라 하는 대통령은 위엄이 없고,
신하라 하는 국회는 믿음이 없고,
백성이라 하는 시민은 의지가 없다.

위엄이 없는 상황에서 그의 존재는 허수아비이며, 신뢰가 없는 국회는 사리사욕에 눈멀어서 나라가 지향할 바를 제시하지 못하고, 시민은 먹고 살기에만 바쁘다. 어느 것 하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생각은 기우(杞憂)이길 바란다. 내 나중 지닌 것이, '희망'이기에 차마 주저앉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른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 보다 낳고, 움직이는 것은 아는 것 보다 낳다. 하지만 알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한 바보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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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역사 인물 찾기 18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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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영웅, 잊혀진 존재.

내 가슴에는 항상 뜨거운 이가 한명 숨쉰다. 그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져진 존재다. 그리고 고향에서 마저 잊혀져 간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 시대의 암묵적 금기가 되었으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직 국정교과서에 잠시 나올 뿐이다. 그는 시험용 이름으로 불리고, 대학 입시가 끝나면 잊혀진다. 어쩌면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있은 다음 잊혀지 듯...

길을 가다 물어보라. '여기가 악산의 고향이냐고?" 그렇다면 열에 여덟 아홉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그 사람이 누군인가? 우리는 우리곁에 잊혀져 가는 영웅을 지워버리고, 저 바다 건너에서 큰바위얼굴을 데려온다. 그는 구렛나룻을 기르고 빨간 배경에 서 있으며 반항과 열정 혹은 게릴라의 전설이자 영웅으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는 정치에서 손을 놓고 끝까지 전선에 있었다는 것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항했고,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재가 말한, 조선에 오면 조선의 부처가 되지 않고 부처의 조선이 되는 일백년의 유구한 역사의 물결 위에 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약산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입을 모으기 시작한 것을 어깨 너머로 보았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그는 죽은이에 불과하며, 고향에서 울리는 소리는 남천강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 가슴 속에, 그는 살아 숨쉬지만 이는 막연한 동경이거나 우리 동내 사람이라는 지연(地緣) 때문이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약산을 만나로 간다.

약산은 경남 미리벌(密陽)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가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면서 하나 의문을 지녔다. 그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약관의 나이에 타향 먼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몇 해 뒤에 의열단이라는 전대미문의 독립의지를 이끈 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라는...

그의 곁에는 동화학교의 전홍표 교장, 마산의 황상규 고모부(창신학교 교장), 표충사 현각 스님 등의 스승과 평생 친구이자 동지인 윤세주 등이 있었다. 약산이 보고 듣는 것이 이러할진대, 그가 의열단을 이끌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의열단, 조선의 혼을 깨우다.

몇 해 뒤, 의열단의 원천적 힘이 되는 곳에 세워진 밀양경찰서, 그들은 그렇게 자기의 목숨을 걸고 폭파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에는 밀양경찰서 폭파, 종로경찰서 폭파라는 단순한 기록만 내어놓는다. 서울이 아닌 남쪽의 소읍이 밀양경찰서가 폭파된 이유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의열단의 이름만 잠시 올린 뿐, 약산의 이름은 철저히 숨기려 한다.

약산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밀양경찰서, 종로 경찰서 폭파, [조선혁명선언] 채택 등으로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조선이 살아 있다고 외쳤다. 힘이 없는 이가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목소리 높이는 것을 테러리스트니 폭력은 절대 안된다는 도덕적 힘으로 그를 지울 수가 있을까? 사람에게 가장 존귀한 것이 생명인데, 그는 스스로의 생명보다 만인의, 민족의 생명을 더 중시하였다. 이러한 선인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때에 우리의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약산은 흩어진 힘을 모으기 위해, 군대 같은 훈련을 시키고 민족혁명당으로 사상적으로 나뉘는 당을 모우려 한다.

"1935년 7월 초, 남경의 금릉대학 대례당에서 각 단체 대표들은 며칠간의 마라톤 회의를 거쳐 마침내 민족혁명당 창당을 선언했다. 약산은 중앙위원 겸 서기로 추대되어 당의 핵심에 앉게 되었다. 중앙위원은 김약산 외에 윤세주, 김두봉, 조소앙, 이청천, 신익희, 김학규, 김규식 등 독립운동전선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375쪽)"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광복에 누구보다 앞장 선 이. 그는 독립을 위해 싸우면서 가족과 아내, 친구, 동지를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남들이 방에서 잠을 편안히 잘 때에, 예닐곱 개의 거처를 마련하고 언제든지 자리를 옮겨야 했으며, 항상 머리맡에는 권총이 놓여져 있었다.

"보름쯤 지나서 그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은 박효상의 보고서를 받았다.

수신 :조선의용대장
발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
제목: 전투상황보고

1942년 5월 25일 팔로군 총부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조선의용대에 포위망을 뚫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비무장 유수요원들을 후방에 두고 무장대원 전체가 혈전으로 벌여 적 포위선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팔로군 총부는 4,500명 대부분이 무사히 탈출했고 우리 의용대는 추격하는 일본군 중대를 역포위해 섬멸했습니다. 그러나 비무장 유수요원들이 적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석하게도 우리의 영명하고 탁월한 지도자 윤세주 동지와 진광화 동지가 전사했습니다.(435쪽)"

잊혀진 전쟁, 잊혀진 죽음.

두 세대가 지난 다음에 다시 그의 죽음이 나왔지만 얼마나 크게 울릴지는 의문이다. 팔로군 4,500을 무사히 탈출시키고, 일본군과 싸운 조선의용대의 무장군인들은 얼마인가? 일본군은 얼마인가?

그의 절친한 황포군관학교의 동창이며 친구인 '등걸'도 이 싸움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군 6만이 화북의 조선의용대가 합류해 있는 팔로군 사령부를 포위"하였고, 이 싸움에 한발짝 물러섬이 없이 싸움을 한 이가 조선의용대이다. 일본군이 '5월 대소탕작전'이라 불리는 전투, 6만명으로 중첩된 일본군의 포위망, 4,500명의 같은 적을 맞써 싸우지만 지금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팔로군, 그리고 비무장 요원들을 지키고 포위망을 뚫어야 하는 자리에는 '조선의용대'가 있었으며, 그들은 역사에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그와 일심동체가 됨을 의미한다. 그가 어디에서 밥을 먹고, 어느 뒷간에서 똥을 샀다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 西家宿)의 글쓰기가 아닌, 밤늦게 잠 못들며 홀로 싸우는 고뇌와 끈기, 인내 그리고 주변인물과의 관계를 거미줄처럼 엮어가는 총제적인 삶을 펼쳐야 한다. 물론 여기에 소설에 바탕을 둔 허구적 요소와 플롯에 대한 극적 재미가 더 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전기 인물에 대한 진성성을 바탕으로 하기에, 허구적 요소와 극적 재미가 목적이 되지 않고 도구에 머무름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쓰여지지 않고 동가식서가숙을 쫓아가게 되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역사적 기억일 뿐.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가며 이야기를 풀어주는 글쓰기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한데에서 잠자고, 얼은 밤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갈 때에 비로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하여 완전한 인물을 그릴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탕을 통해 우리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운 것이, 교과서의 확장판이 아닌가라는 조바심. 단순히 세줄 네줄로 요약 정리한 것을 수백쪽에 걸쳐 늘여 놓은 것이 아닐까라는 . 약산의 사상이나 황철주에서 받은 사상적 영향, 윤세주와 김익상과의 얘기, 장지락(김산)과의 믿음 등은 드라마적 대화로만 마무리 되어진다. t.v드라마는 손주녀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보며 웃고 우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지은이의 글쓰기가 여기에 머물렀다면...

백여년이 지난 다음에 살아온 약산.

지은이가 잊혀진 인물을 다시 부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는 처음이였기에 많이 힘겨워겠지만 그 만큼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쉽게 읽혀지는 것은 약산에 대한 동경과 그의 글쓰기 어렵지 않은 점에서 일거다. 조금은 더 공부를 하였으면 하는 욕심이 인다.

책을 덮으면서 머리를 감싸는 의문점이 몇 가지 있다.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임정, 약산과의 관계가 흐지부지 넘어가버린다. 테레리스트로의서 인지도가 백범보다 앞서고, 당의 규합도 민족혁명당이 중심적 위치에 차지하고 있다. 조선 의용대라고 하여 정규군대로서의 인정은 아니지만 그에 맞는 자리를 튼 것도 약산이며, 6만원 대군과 싸워서 포위망을 뚫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부대도 광복군이 아닌 조선의용대인데, 왜 광복군을 통한 임정, 백범으로 이어지는가? 그것이 단순히 공산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민족적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되는 약산을 기억에서 내몰았다. 그리고 의열단이 지닌, 사상적 구심체와 동지들을 다 지워버리고 역사적 혼 마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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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論
키리도시 리사쿠 지음, 남도현 옮김, 송락현 감수 / 열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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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0년 산(産)이라면, 그의 이름을 몰라도 그의 작품을 보며 자랐을 것이다. 평일 저녁이면 한 자리를 차지하는 미야자기표 만화. 이 만화는 무국적인 냄새와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그려내어 우리의 눈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차츰 미야자키라는 이름도 물밑에서 나왔다. 아직 극장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기 앞서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그의 작품은 건너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도움받기 놀이를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의 토토로, 붉은 돼지, 원령공주, 마녀 배달부 키키....

너무나 익숙한 이름. 나는 왜 미야자키표 끌리는 것일까? 그의 작품에는 뭔가 특별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내가 그의 작품에 대한 동경이 이는 만큼, 궁금증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곤 한다. 나는 아직도 그의 작품이 보고 싶으며, 그의 그림체가 좋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보여지는 한 없는 순수함과 시골의 포근함, 붉은 돼지에서 보여지는 이데아적인 공간과 싸움마저 놀이로 만들어 버리는 맘마유토단들의 유치발랄함, 원령공주에서 나타난 숲의 신비함과 멧돼지신의 분노, 마녀 배달부의 귀염움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하나씩 그의 작품에 중독이 되어갔고, 이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체 그의 실체를 다가가려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책-『미야자키 하야오론』은 지름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지은이는 수 없이-오타쿠- 애니메이션을 보고, 눈앞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하다. 미야자기표를 좋아하지만 그의 전작품을 보지 못했으며, 설령 한 작품을 예닐곱 아니, 쌔네번을 넘게 보지 못하였다. 더구나 옛날에 본 것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특히 "미래소년 코난"의 경우는 내 유년 시절의  친구인데, 지은이는 1화에서 끝화까지 하나하나 줄거리를 써 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즉 여느 작품론에서 비춰지는 지은이의 글쓰기는 8할의 줄거리와 2할의 작품론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렇다 보니 가로에서 세로로, 수많은 엇갈림으로 미야자기표의 작품을재구성하지 못하고, 커다란 흐름이나 사상적 밑천을 꿰뚫는 혜안(慧眼)을 볼 수가 없다.

나는 잊혀진 만화 줄거리를 떠올리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냥 글자만 보고 있다. 차라리 애니메이션 사진이라도 담아 놓았다면 좀 더 눈을 오래도록 두었을텐데... 못내 그렇지 못한게 아쉽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순수, 모험, 소년, 소녀(공주), 자연이라는 코드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해맑은 동심이 살아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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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 교양한국문화사 1
황수영 / 열화당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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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여 년을 건너와, 나에게 말을 걸다. ]


경주.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고, 천년의 중심지라는 곳이지만 내 발길은 학생 때 수학여행을 다녀 온 뒤로는 아직 낯설기만 하다. 구석구석 문화유적이 많다하여, 경주라는 마을 전체가 문화마을이라 불릴 정도이기에, 나는 어쩌면 이 위엄에 눌렸는지도 모른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아야할지 몰라서……. 막연하게 불국사, 석굴암 등을 어깨너머로 듣는다. 불국사에 가서 그 곳에 깃든 의미를 읽을 수가 있을까라는 기우는, 공부를 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발걸음조차 때지 않게 한다. 막연한 동경은 안고 있으면서 나는 아는 것이 없다면서 집에만 있다. 석굴암에 대한 내 지식도, 불국사랑 닮았다. 단순히 김대성이라는 이가 지었다는 것과 해돋이가 일품이라는 것 밖에는 내 머리를 지배하는 것이 없다. 일본이이 해체를 하여 이끼가 낀다는 이야기는 학생 때 졸면서 듣은 듯도 하다.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을 구하려다, 『석굴암』에 손이 갔다. 지난 봄에 보길도의 부용림을 보고 와서 느낀 낯선 거리감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봄에 만난 부용림은 한창 현대 기계로 공사 중이였고, 아무리 복원을 한다 하여도 정성을 복원할 수 있기에는 요원해 보였다. 절에서 중창을 한다면 포클레인으로 나무를 빼어내고, 레미콘으로 시멘트를 기둥을 채우는 듯 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굴암에도 보수가 있었다지만 내 눈은 보지 못하였기에……. 이렇게 보길도에서 경주로 돌아와, 오늘에는 본존불아미타여래좌상을 만난다.


사진으로 보는 석굴암, 나는 멈춰 섰다.


석굴암은, 석굴암을 말한다. 석굴암의 창건신화에서 풀어내어 팔부신장, 금강역사, 사천왕상, 천부상 등을 지나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돌아 본존 아미타여래좌상을 들려준다. 지은이는 하나하나 꼼꼼하게 설명을 해 나간다. 더욱이 빛나는 건 사진의 아름다움이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지만 나는 석굴암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여행을 하며, 손으로 사천왕이나 보살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44쪽 ~49쪽 사진]

지어팔부신장의 눈은 무엇을 응시하면서, 진한 시선을 보낸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이나 자세에서는 근엄함과 법적하지 못할 기품이 흐르면서도, 아이가 다각 옷자락이라도 만질라면 귀엽게 받아줄 인상이다. 이에 반해 금강역사는 우락부락하여 힘만 자랑하는 듯하다. 두 눈은 호리호리하며 다가가서 말이라도 붙일라면 상당한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지 않을가. 칼자루라도 주면 춤을 추며 잡귀를 몰아낼 듯하다.


본존불의 상호 [85쪽 사진]

몸이 움찔한다. 그러면서  내 눈은 그와 입맞춤하기 위해 다가간다. 이는 움찔하면서 한 발짝 떨어지고,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고, 다시 놀라서 한 발 물러서고……. 떨어졌다 다가갔다는 수 없이 반복하고 있다.


제자상이 본존불을 에워싸고 있는 주실 안의 광경 [89쪽 사진]

본존불아미타여래좌상은 큰 육질의 몸매에 아기자기한 찌찌를 가슴에 품고 있다. 그의 얼굴은 위엄에  가득 차있고. 팔은 근육으로 뭉쳐져 있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인상이 아니다. 위엄스럽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들어와 본존불을 보게 된다면, 아마 '엄마 저 찌찌봐'라고 하지 않을까? 위엄에 서러 있던 석굴안은 순간 정막이 깨어지고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근엄함을 보이는 듯 하면서 향마촉지인으로 자비로움을 품은 본존불. 나는 근엄과 자비를 동시에 느낀다. 


이렇게 보여지는 사진 속에 나는 석굴암에 대한 강한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사진이라 함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려 마음을 이끄는 사진이 아닐는지…….


빛이 너무 밝아서, 어둠이 없다.


"팔각기둥을 지나 굴 안으로 들어서면 둘레의 벽과 본존불이 앉은 원형대좌와의 사이에는 거의 같은 간격의 통로가 돌려 있다. 그 때문에 예불하는 사람들은 이 통로를 돌면서 차례로 다른 불상과 상대하게 된다. 그리하여 장소를 바꿈에 따라 여러 석상을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상면하게 되어, 이를 위한 설계자들의 깊은 용의가 있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낮과 밤에 따라 석굴 안의 광도(光度)는 미묘한 변화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같은 굴 안에서도 장소와 시간에 따라 석상에서 각기 다른 인상과 아름다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너무나 밝은 전등으로 조명되고 있어 옛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섭섭함이 있다. 석굴조성 당시 설계자가 의도했던 밝음과 그에 따르던 예불의 여건과 분위기는 오늘에 이르러 아주 달라지고 있다.(51쪽)"


우리는 시간과 자연(自然)을 잃어버리고, 수양(修養)을 잃어버리고, 도(道)를 잃어버리고, 나(自我)를 잃어버렸다. 이는 문명에 의한 전기의 혜택과 편리함으로 이어지는 조급함 등에 의한 복합적인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문화란 한 발 짝 떨어짐과 한 발 들어섬으로 표현되어진다고 생각된다. 정자 등을 자연을 볼 때에는 한 발 짝 떨어져서 보면, 그곳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인다. 정자는 강가에 자리를 틀고서 세월을 흘려보낸다. 이러한 운치는 끝내 나를 불러들여 바람을 맞게 하곤 하는 것이다. 정자에 앉아 물그림자를 보고, 들판을 보고, 구름을 보고, 자연을 보고 있으면 내가 자연인지 자연이 나인지 그 경계가 흐물흐물해진다. 멀리서 오는 이가 정자 속의 나를 보게 된다면 물아일체(物我一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풍경 속의 나'가 되고 싶어 몸이 건질건질 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문화적 밑거름 속에 석굴암의 예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석굴암은 너무 유명해졌고, 그에 깃든 정성은 불빛 속에 숨었다. 석굴암 속에 깃든 정성보다 보여지는 불상과 맹목적인 기복(祈福信仰)만이 존재한다. 자연에서 내가 걸어 나왔을 때 부터,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욕심이며 편리함이다. 욕심과 편리함은 자연을 물질적 도구나 편리한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였으며, 감상을 통한 자아를 찾는 나를 땅에 묻어 버렸다. 어쩌면 나는 책을 덮고서, 시간이 흘러 석굴암에 섰을 때 복(福)을 구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하지만 이러한 지은이의 석굴암에 대한 예찬과 꼼꼼한 시선은 건조체에 머물러 있다. 즉 그가 보는 눈은 정말로 따스하지만 표현은 건조하게 흘러, 조금 아쉬움이 남긴다. 할머니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이어지는 말이 아니라, 교수가 앞에 서서 학문적인 성과를 발표하듯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


즉 짧은 책이지만 석굴암에 대한 이야기는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사진은 석굴 안으로 불러들이는 듯하다. 하지만 지은의 글쓰기에 대한 건조체는 조금 무미건조하여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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