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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ㅣ 역사 인물 찾기 18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버림받은 영웅, 잊혀진 존재.
내 가슴에는 항상 뜨거운 이가 한명 숨쉰다. 그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져진 존재다. 그리고 고향에서 마저 잊혀져 간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 시대의 암묵적 금기가 되었으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직 국정교과서에 잠시 나올 뿐이다. 그는 시험용 이름으로 불리고, 대학 입시가 끝나면 잊혀진다. 어쩌면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있은 다음 잊혀지 듯...
길을 가다 물어보라. '여기가 악산의 고향이냐고?" 그렇다면 열에 여덟 아홉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그 사람이 누군인가? 우리는 우리곁에 잊혀져 가는 영웅을 지워버리고, 저 바다 건너에서 큰바위얼굴을 데려온다. 그는 구렛나룻을 기르고 빨간 배경에 서 있으며 반항과 열정 혹은 게릴라의 전설이자 영웅으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는 정치에서 손을 놓고 끝까지 전선에 있었다는 것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항했고,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재가 말한, 조선에 오면 조선의 부처가 되지 않고 부처의 조선이 되는 일백년의 유구한 역사의 물결 위에 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약산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입을 모으기 시작한 것을 어깨 너머로 보았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그는 죽은이에 불과하며, 고향에서 울리는 소리는 남천강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 가슴 속에, 그는 살아 숨쉬지만 이는 막연한 동경이거나 우리 동내 사람이라는 지연(地緣) 때문이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약산을 만나로 간다.
약산은 경남 미리벌(密陽)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가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면서 하나 의문을 지녔다. 그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약관의 나이에 타향 먼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몇 해 뒤에 의열단이라는 전대미문의 독립의지를 이끈 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라는...
그의 곁에는 동화학교의 전홍표 교장, 마산의 황상규 고모부(창신학교 교장), 표충사 현각 스님 등의 스승과 평생 친구이자 동지인 윤세주 등이 있었다. 약산이 보고 듣는 것이 이러할진대, 그가 의열단을 이끌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의열단, 조선의 혼을 깨우다.
몇 해 뒤, 의열단의 원천적 힘이 되는 곳에 세워진 밀양경찰서, 그들은 그렇게 자기의 목숨을 걸고 폭파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에는 밀양경찰서 폭파, 종로경찰서 폭파라는 단순한 기록만 내어놓는다. 서울이 아닌 남쪽의 소읍이 밀양경찰서가 폭파된 이유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의열단의 이름만 잠시 올린 뿐, 약산의 이름은 철저히 숨기려 한다.
약산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밀양경찰서, 종로 경찰서 폭파, [조선혁명선언] 채택 등으로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조선이 살아 있다고 외쳤다. 힘이 없는 이가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목소리 높이는 것을 테러리스트니 폭력은 절대 안된다는 도덕적 힘으로 그를 지울 수가 있을까? 사람에게 가장 존귀한 것이 생명인데, 그는 스스로의 생명보다 만인의, 민족의 생명을 더 중시하였다. 이러한 선인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때에 우리의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약산은 흩어진 힘을 모으기 위해, 군대 같은 훈련을 시키고 민족혁명당으로 사상적으로 나뉘는 당을 모우려 한다.
"1935년 7월 초, 남경의 금릉대학 대례당에서 각 단체 대표들은 며칠간의 마라톤 회의를 거쳐 마침내 민족혁명당 창당을 선언했다. 약산은 중앙위원 겸 서기로 추대되어 당의 핵심에 앉게 되었다. 중앙위원은 김약산 외에 윤세주, 김두봉, 조소앙, 이청천, 신익희, 김학규, 김규식 등 독립운동전선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375쪽)"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광복에 누구보다 앞장 선 이. 그는 독립을 위해 싸우면서 가족과 아내, 친구, 동지를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남들이 방에서 잠을 편안히 잘 때에, 예닐곱 개의 거처를 마련하고 언제든지 자리를 옮겨야 했으며, 항상 머리맡에는 권총이 놓여져 있었다.
"보름쯤 지나서 그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은 박효상의 보고서를 받았다.
수신 :조선의용대장
발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
제목: 전투상황보고
1942년 5월 25일 팔로군 총부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조선의용대에 포위망을 뚫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비무장 유수요원들을 후방에 두고 무장대원 전체가 혈전으로 벌여 적 포위선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팔로군 총부는 4,500명 대부분이 무사히 탈출했고 우리 의용대는 추격하는 일본군 중대를 역포위해 섬멸했습니다. 그러나 비무장 유수요원들이 적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석하게도 우리의 영명하고 탁월한 지도자 윤세주 동지와 진광화 동지가 전사했습니다.(435쪽)"
잊혀진 전쟁, 잊혀진 죽음.
두 세대가 지난 다음에 다시 그의 죽음이 나왔지만 얼마나 크게 울릴지는 의문이다. 팔로군 4,500을 무사히 탈출시키고, 일본군과 싸운 조선의용대의 무장군인들은 얼마인가? 일본군은 얼마인가?
그의 절친한 황포군관학교의 동창이며 친구인 '등걸'도 이 싸움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군 6만이 화북의 조선의용대가 합류해 있는 팔로군 사령부를 포위"하였고, 이 싸움에 한발짝 물러섬이 없이 싸움을 한 이가 조선의용대이다. 일본군이 '5월 대소탕작전'이라 불리는 전투, 6만명으로 중첩된 일본군의 포위망, 4,500명의 같은 적을 맞써 싸우지만 지금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팔로군, 그리고 비무장 요원들을 지키고 포위망을 뚫어야 하는 자리에는 '조선의용대'가 있었으며, 그들은 역사에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그와 일심동체가 됨을 의미한다. 그가 어디에서 밥을 먹고, 어느 뒷간에서 똥을 샀다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 西家宿)의 글쓰기가 아닌, 밤늦게 잠 못들며 홀로 싸우는 고뇌와 끈기, 인내 그리고 주변인물과의 관계를 거미줄처럼 엮어가는 총제적인 삶을 펼쳐야 한다. 물론 여기에 소설에 바탕을 둔 허구적 요소와 플롯에 대한 극적 재미가 더 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전기 인물에 대한 진성성을 바탕으로 하기에, 허구적 요소와 극적 재미가 목적이 되지 않고 도구에 머무름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쓰여지지 않고 동가식서가숙을 쫓아가게 되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역사적 기억일 뿐.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가며 이야기를 풀어주는 글쓰기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한데에서 잠자고, 얼은 밤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갈 때에 비로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하여 완전한 인물을 그릴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탕을 통해 우리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운 것이, 교과서의 확장판이 아닌가라는 조바심. 단순히 세줄 네줄로 요약 정리한 것을 수백쪽에 걸쳐 늘여 놓은 것이 아닐까라는 . 약산의 사상이나 황철주에서 받은 사상적 영향, 윤세주와 김익상과의 얘기, 장지락(김산)과의 믿음 등은 드라마적 대화로만 마무리 되어진다. t.v드라마는 손주녀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보며 웃고 우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지은이의 글쓰기가 여기에 머물렀다면...
백여년이 지난 다음에 살아온 약산.
지은이가 잊혀진 인물을 다시 부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는 처음이였기에 많이 힘겨워겠지만 그 만큼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쉽게 읽혀지는 것은 약산에 대한 동경과 그의 글쓰기 어렵지 않은 점에서 일거다. 조금은 더 공부를 하였으면 하는 욕심이 인다.
책을 덮으면서 머리를 감싸는 의문점이 몇 가지 있다.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임정, 약산과의 관계가 흐지부지 넘어가버린다. 테레리스트로의서 인지도가 백범보다 앞서고, 당의 규합도 민족혁명당이 중심적 위치에 차지하고 있다. 조선 의용대라고 하여 정규군대로서의 인정은 아니지만 그에 맞는 자리를 튼 것도 약산이며, 6만원 대군과 싸워서 포위망을 뚫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부대도 광복군이 아닌 조선의용대인데, 왜 광복군을 통한 임정, 백범으로 이어지는가? 그것이 단순히 공산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민족적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되는 약산을 기억에서 내몰았다. 그리고 의열단이 지닌, 사상적 구심체와 동지들을 다 지워버리고 역사적 혼 마저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