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의 사진엽서를 통해 본 시선의 권력과 조선의 이미지
권혁희 지음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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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 백 년 앞서의 사진, 그 사진엽서는 과연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너와 나가 동등한 입장이 아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자리, 폭발적 제국주의의 힘이 꿈틀거리는 거리에서 약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를 지니는가? 지은이는 이 물음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 봅니다.(107쪽)

이 이야기는 우리 조상들은 일 백 년 전에 어떻게 살았나라는 호기심보다, 사진엽서가 말하지 않는 숨은 헤게모니를 파헤치려는 야심찬 작품입니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으로 읽히는 동양의 낯선 시선 -신비함 보다 미개인이라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합리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우선 지은이는 서구에서 행해지는 식민지에서 사진찍기를 통해, 그들이 낯선 이민족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볼거리'로 전락시킵니다. 이들은 삶은 이야기꺼리가 아닌 동물원의 구경꺼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동물원 우리 속 코리끼에 과자를 던지는 것이 아무런 잘못이 되지 않듯, 그들의 손가락질 역시 죄가 없습니다. 그들은 '볼거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게모니를 주입시키는 것은 제국주의며, 그들의 충실한 실행자는 사진가입니다. 이들은 특정 종교인 처럼, 그들이 지배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숭고히 따르라는 것처럼 사진을 찍습니다. 종교인들이 현지에서 식민지를 합리화했다면 사진가들은 본국의 시민들에게 그 의미를 전수합니다.

"많은 아프리카인, 인디언, 아시아인들이 서구인들의 차별적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었으며, 지배자의 의도가 반영된 장치에 의해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23쪽)"

이러한 서구의 제국주의적 시선은 아시아에서 일찍 근대화에 눈을 뜬 일본인들에 의해 재탄생됩니다. 일본인들은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인을 담았다는 모습을 조선에서 담아냅니다. 그들은 조선의 생활상을 근대화되지 못하고, 궁핍하다고 묘사하여 식민지를 합리화 합니다. 또한 식민지를 통해 발전되었다며 이미지를 구성하여, 연출을 꽤합니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것이 아닌, 지배자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서구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함포를 앞세우고 세계 곳곳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때 함선에는 어김없이 사진가가 동승해 그들이 발견한 지역의 지형과 원주민들을 기록했으며, 이 자료는 본국에 보고되어 통치 자료로 활용되었다."

"사집엽서는 이 이미지들을 대량 생산, 복제헤 제국주의를 대중에 널리 유포하고 그들의 인식 속에 깊이 각인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사진엽서는 간편하고 저렴한 근대적 우편 제도로서 대중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사진이라는 새로운 시각 문화를 손쉽게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36쪽)"

2.
사진 엽서, 타자화 즉 문화적으로 나 보다 못한 민족으로 표현되는 [인디아나 존슨]같은 영화적 도구라고 말한다. 이러한 것이 정책적으로, 국가의 전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국가외 시민을 동등하게 놓고 보는 점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즉 그는 제국주의라는 말로 일반 시민들에 대한 경험담을 닫아버린다. 이러한 정책은 '제국주의의 산물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너는 빨갱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실제 사진이 미친 문화적 파장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지 않고, 어련히 그렇게 되었다라는 전체주의적 시야를 곳곳에 보이곤 한다.

아프리카에 가서 자연을 담으면 제국주의적 시선인가? 아름다움을 담으려는 보편적 감정은 아닐까. 이 아름다움은 낯설음과 동경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내가 우리나라를 여행하며 처음 들런 곳에 사진 찍는 행위나 나라 밖에서 다른 이가 사진 찍는 행위는 같은 모습이다. 아름다움, -낯설음과 동경이다. 물론 여기에 상업적 요소가 들어가면 상품적 가치를 변용될 것이며, 많은 판매를 통해 상업적 이익을 얻으려 할 것이다. 이 때에 아프리카 여인의 옷 벗은 몸매는 서구인들의 억압 속에 성적 유희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물론 지은이 말처럼 '아프리카의 원시성'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은이는 상업적인 요소와 함께 국가적 폭력 -식민지에 가해지는 차별, 억압적 시선을 통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논리-을 말하고 있다. 상업적 요소와 국가적 폭력이 아무런 문제 없이 융화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하지만 더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러한 논리적 근거를 이미 읽은 책에서 찾는 듯 한, 서구인들의 생활상에서 비켜서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 폭력이 과연 서구인들의 생활상에 합리화 내지는 제국주의적 논리를 지지하는 도구로서의 가치로 인정 받았는가 아니면 단순한 성적인 호기심으로 전략한 상술인가에 대해 깊이 살펴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미 지은이는 피해자로서의 오리엔탈즘에 젖어서, 이분법적으로 서구와 동양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논리적 근거는 희박하다. 즉 내재적으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피해의식에 젖은 지은이의 시선은, 이미 정답을 마음에 두고 글을 쓰 내려 가고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사진가들이 제국주의의 헤게모니에 동승한 것 까지는 별문제이지만 과연 이들의 사진이 서구인들에게 어떻게 미쳤는가에 대한 해답은 없다. 아니 서구인들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책에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3.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서구 사진이라는 발명품이 어떻게 식민지의 삶을 재구성하였는가라는 문제 제기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근거를 찾는 과정과 깊이 있는 분석은 얇은 강물을 보는 듯 하다. 너무 정답을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글자의 간격만큼 생각도 넓어져 보인다. 조금은 더 치열하고, 자료를 많이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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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지음, 도솔 옮김 / 꿈꾸는돌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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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그러나 지극히 일상적인

지난 가을,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만에 친구(형)를 만났다. 그는 부산의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도 지난 여름 방학 때 우리집에 온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네는 그대로이며, 풀을 건내눈 소는 아직 거기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지... 십년 동안 그의 머리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우리나라가 아닌, 저, 내게는 '왜 그런 곳에'라고 생각되어지는 곳에 살고 있다. 내가 받은 느낌은 '우리 보다 못한',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곳으로 갔느냐이다. 이민을 가려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으로 갈 것이지 왜 하필이면, 하지만 친구는 그곳에서의 삶이 행복하다며, 나에게 놀러 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국에서 짧은 시간을 마무리 했다.

제이미를 보면서 나는 11월에 떠난 친구를 생각했다. 물론 잠시 다녀오는 여행이라면,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라면, 낯설음에 대한 동경이라면 떠날 수 있지만 2년은 너무 길지 않은가? 이 두려움을 나만 가지고 있었던게 아닌가 보다. 처음에는 내가 제이미며, 제이미가 내가 된다. 차츰 부탄 속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제이미가 될 수 없고, 제이미 역시 내가 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는 제이미 할아버지처럼, 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
제이미는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영어 선생님을 구한다는 알림글을 보고 떠난다. "현실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11쪽)"고 생각한 스물넷살의 아가씨는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다시 멀미 혜성(35쪽)을 타고 도시와는 격리된 듯한 공간에 다다른다.

경험을 위해 낯선 곳에 도착한 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천장을 운동장이냥 삼고 있는 쥐와 비만 오면 똑똑 안기는 빗방울. 경험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삶이 궁핍하며 감당하기에는 벅찬 곳이다. 제이미는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었던 사람들 속에 이방인으로 놓여져있다. 더구나 그는 꽃띠가 아닌가? 처음 마음 먹었던 의지는 오래지 않아 빛이 바래고, 급기야 계절을 하나도 채우지 못하고 떠날 결심을 한다. 하지만 운명이였던 것일까? 길을 잃고 다시 찾아 온 곳이, 페마 카첼이다.

제이미는 페마 카첼에서 2학년 C반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는 아이들 곁에서 가르침과 배움을 동시에, 순수함 속에서 때묻지 않은 동심을 보고는 가끔 놀라기도 한다. 그가 보기에는 천지가 아름다움뿐이다.

"모든 이름들을 종교와 자연과 관련된 뜻을 갖고 있었다. 카르마는 별을 뜻하고, 싱게이는 붓다를 뜻하며, 페마는 연꽃, 체링은 장수를 의미했다. 그 단어들을 이어 놓으면 놀랄 만큼 시적인 이름이 되었다. 예를 들어 페마 카펠은 행복의 연꽃, 카르마 장초는 별들의 호수였다.(132쪽)"

차츰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칠판을 도저히 쓸 수가 없을 정도이며, 53곳이나 버룩에 물렸지만(144쪽) 좋아져만 간다. 부족하기에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곳(221쪽), 아이들은 선생님의 집에 놀러와서는 자칭 쓰레기라는 것을 보물로 만들어버리는 마술을 부린다. 즉 빈병이며 깡통을 어떻게 치울까 고민을 했는데... 아이들은 빈병은 천을 뭉쳐 주둥이로, 빈깐통은 계랑컵이나 화분으로 쓴다. 한아름 부족한 것을 가지고도 행복해하는 아이들,

"찌그러진 축구공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집을 떠나는 아이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선생님 덕분에 너무 행복해요."하고 아이들이 몇 번이나 말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165쪽)"

아이들은 부족하지만 '선생님이기에' 무엇을 주려한다. 아침 일찍 그들은 문을 두드리며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채소를 들고 서 있다. 좋아하는 선생님이기에, 부모들이 존경해야 한다기에... 하지만 고마움의 댓가로 1달러 정도를 준 것이, '상품 즉 물질의 값어치'로 매겨지는 장면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즉 그는 부탄이라는 나라에 들어온 '낯선이'며,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또한 문화 속에 벌어지는 차별에 대해서 침묵해야 할 것인가 의미를 드러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이루어진다. 이는 초등학교를 벗어나 대학교에 서게 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2.
초등학교의 모습은 순수함 그 자체이다. 여기에는 사생활도 없으며 도둑도 없다. 모두가 이웃이며 가족이며, 친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교가 있는 도시로 발령을 받아 오게 되면서, 제이미는 좀 더 깊이 부탄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그를 사로잡는 것은 남부와 북부의 갈드이다. 부탄의 문화를 지키려는 북부, 이주민으로의 문화를 지키려는 남부의 네팔인들. 그는 다시 한번 이방인으로 서게 된다. 이런 갈등을 통해 부탄이라는 실체를 보게된다. 즉 부탄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며, 시기와 질투가 있고, 슬픔도 존재한다. 또한 이곳에는 부족하지만 넉넉함이 존재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물질적인 욕심보다 부족함 속에 넉넉함으로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직 완전체로서의 이상향은 아니지만, 불교를 통해 심적인 평화와 깨달음을 얻는 제이미는 차마 부탄을 버리지 못한다.

"나는 부탄에서의 내 삶을 사랑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지 알고 있었다.(276쪽)"

지은이는 '경험삼아 떠난 낯선 곳에서 자아(自我)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문화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그가 넘어야 할 것인가 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계속적인 물음은 잠시 둘러보고, '다 보았다'는 수박 겉?기식의 자랑이 아니다. 사랑이 없이는 차마 할 수 없는 물음이다.

나는 제이미를 만나면서, 친구가 왜 그곳에 집을 지었는지 조금씩 이해를 해 간다. 분명 한 번 놀러 가기에는 좋은 곳에, 왜 굳이 집을 지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이다. 나는 진정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면서 속으로는 줄을 세우고 등수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미는 내게 이렇게 들려준다.

"행복하다면 가난해도 상관없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한국인 이주철을 보게되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희상이를 아느냐고?', '희상이가 이제 조금씩 형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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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지혜가 드는 창 6
진중권 지음 / 새길아카데미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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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진중권


둘 다 관심이 가는 문제이다. 지은이에 대해서는 전공보다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내게 더 각인되어 왔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토론의 중심에 서 있어 곤했다. '인물과 사상'을 통해 그를 먼저 만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자칫 엉뚱한 만남은, 지은이의 진정성으로 이어져 그의 작품에 대한 믿음의 고리를 엮어내곤 한다.


미학, 솔직히 이런 전공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내게는 너무 먼 그대였다.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일면서, 미(美)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증도 일었다. 미를 배우는 학문? 미학? 아직까지도 미학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개념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지은이가 들려주는, 서양 예술을 통한 미학은 그림 읽기가 아닐까 할 정도로 한 분야에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은이는 '미학이라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을 전(全) 지구적인 '미'가 아닌, 지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유럽의 어느 나라를 통해 들려준다. 얘기는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 서술 방식과 쌍둥이라 할 정도로 서구 지향적이다. 그는 살짝 이집트의 미를 빌려오지만, 그 중심에는 그리스 로마가 존재한다.


지은이는 그리스 로마를 중심으로 '미'라는 것이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가를, 몇 몇의 지인을 통해 들려준다. 그의 곁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벵겔만, 드보르자크, 황금가지의 작가 프레이저 그리고 다빈치에서 칸트, 헤겔로 이어진다. 지인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미학과 역사는 별개, 즉 '미는 미로써 존재한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린 듯 하다. 이는 몇 몇의 중요 작품을 통해 전체적인 역사적 분위기를 마무리 짓곤 하는데에서 짐작이 가능하다. 고딕에서 바로크, 낭만 등으로 이어지는 미학은, 사회 문화적 배경은 생략한다. 아울러 민중적이거나 타국(他國)과의 조율 역시 생략한다. 오늘날에 미학의 발자취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굳이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는 듯하다. 즉 익히 눈에 든 선구자적 천재를 줄 세울 뿐이다.


1권까지 읽는 내내, 내가 느끼는 감정은 ‘'미'란 이럴 것이다’라는 주입식 답만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즉 미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풀어내야할지 고민을 하다, 가장 노둣돌이 되는 개념만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지은이가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가에 대해 고민고민하다 가장 객관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 즉 이전과의 전혀 다른, 지은이의 시선은 찾기 힘들다. 다만 익히 알고는 있지만 정리가 되지 않은 이를 위해 재구성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책은 읽으면서 나와 시선이 엇나가거나 비판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종종 보인다.


지극히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였지만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너무 잘 알기에 두 번 말하면 잔소리가 될 소리가 있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서구의 어느 나라에 대한 '미'가 전 세계적인 미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한국 현대미가 무비판적으로 일백 년 동안 서구의 미를 숭상하였더라도, 그에 앞선 시대에 고유의 미가 존재했다. 또한 낮은 곳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문화적 조율을 하고 있는 가운데 서 있다. 근데 그의 지향점은 서구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차 있다.


두 번째는 자기의 생각을 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앞서 말한 이들의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줄 세우기 하는 것인지 아닌가에 대해 걱정스럽다. 개념을 쉽게 풀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 있지만 -두 스승의 대화가 이런 구실을 하리라는 것을 짐작한다 -지은이는 너무 물러나 있다. 이렇게 개념 정리는 주변 상황 -총체적 시선으로 작품을 담아 내지 못하는 한계로 존재한다.


세 번째는 개념 정리를 하면서, 혼동을 하지 않고 있나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어떤 게 아름다운지 금방 알아낸다. 가령 전철에 탄 수많은 '안 아름다운' 아가씨들 가운데서 당신의 예리한 눈은 실수 없이 예쁜 아가씨를 찾아낸다. 이렇게 미의 관념은 '명학'하다. 하지만 막상 '아름다움'이  뭐냐 물으면, 아마 당신은 대답하지 못할 거다. 어떤 게 아름다운지 잘 알면서도, 정작 그게 아름다운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미의 관념은 '혼돈'이다. 미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 남기 마련이니까."(194쪽)


천년의 고찰광 유럽의 중세 건축을 놓고, 어느 것이 아름다운가 묻는다면 고찰보다 중세 예술에 고개를 돌릴 것이다. 미륵보살의 반가사유상 보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예술보다 우리나라의 예술이 더 고급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힘의 헤게모니가 존재한다. 내 눈에는 미스코리아보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우리 아가씨가 더 예쁘지만 t.v에서는 미스코리아가 백번 더 예쁘다. 우리 눈은 익숙한 것, 힘이 있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눈에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문화적 혹은 힘의 논리가 풀어놓은 '미'를 좋아한다. 미스코리아의 아름다움은 황금비율이 아닌 소수의 문화 권력가가 줄 세운 '미'이며,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미란 자유롭지 못하고 학습에 따른 인식의 결과물이다. '미'의 관념은 '혼돈'이거나 항상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틀리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지은이는 이 명제를 부분과 전체를 혼동하고 있다. 즉 그가 주워온 명제가 '사회적 결과물인지', '지속가능한 본질적 문제인가'에 대해 대답을 늘어놓고 있지 않다. 그가 들고 온 보기는 분명 300년 역사를 훌쩍 넘은 '답'이지만  아직까지 유효한가. 그렇다면 그가 풀어내는 변화와 지속성, 진보적 미의 관념과는 상반된다. 그는 미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하고 있으며, 이는 진보적 의미를 띄고 있다. 어제 보다는 오늘의 미가 좀 더 복잡하거나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300년 전의 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오늘의 미를 논(論)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미는 오늘의 기준으로 설명해야하기 때문이다. 


미스코리아 보다 못하지만 내 여자친구가 더 예쁜 것은 익숙함이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차츰 만나면서 나는 그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율 기간을 없애는 방법을 일부 지식인은 그들의 잣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가 미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미스코리아와 내 여자친구의 미는 분명 다르게 볼 수는 없지만, 미를 바라보는 근본은 같다고 생각한다.


지은이가 풀어내는 미학 오딧세이는 태생적 한계 -서구 지향적이면서, 힘의 논리가 있는 것이다. 즉 그의 미에는 열림이나 다양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물론 지은이가 논하는 미를, 전지구상에 펼쳐온 무지개 빛깔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면 다른 문제가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오직 '이것이 일곱빛깔 무지개'라고 말할때 앞서의 논의는 이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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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나무 2006-01-2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학 책 몇권을 읽으며 고민스러웠던 점이 바로 서구중심적이라는 것이 였어요. 동양의 미학은 서구적인 관점으론 접근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영역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미학은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같아요. 제겐 정말 어려운 분야입니다.
 
산행길은 인생길 - 이채의 life & life 시리즈
황정곤 지음 / 이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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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이라고는 동네 뒷동산 밖에... 아니다. 남해 금산과 창녕 화와산을 한번씩 오른게 역사적 기억인데.. 지난 여름 난 달랑 집을 나가 우리나라를 밟아 보았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양양에 들러게 되었고, 아시는 분에게 어디가 좋으냐고 어쭈어보니 두번도 생각않고 '대청봉'에 오르란다. 테어나서 산에 오른 기억이 다섯 손가락보다 짧은데, 우리나라에서 몇 번 째 높은 산을 오르라 하니, 오르기에 앞서 숨이 막힌다. 컥~~!! 몇 번이고 '대청봉'보다 더 좋은데가 없느냐고 물어보지만 메아리는 여전?. 할 수 없이 나는, 오색에서 대청봉으로 오르기로 했다. 표를 건내받고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냐고 여주어 보니, '4시간씩이란다' 합이 8시간. 4시간 동안 다시 내려와야 하는 산을 왜 오르는걸까? 합이 8시간이 아닌가.

아마 산을 오르는 의문은 대청봉에 오르는 길에서 처음 마주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난밤에 김밥 한 줄 먹고 하루를 버텄고, 오늘 가방에는 물병하나 뿐이다. 내 몸은 다섯째 한데에서 잠을 잤으며, 처음길이다'라며, '나 보다 산을 더 못타네'라고 들려오는 소리에 온갖 구실을 불러 모운다. 대청봉가지 오르는길은 여간한 길이 아니다. 정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예닐곱번을 쉬고, 허기진 배를 계곡물로 달래가며 오른 길,

 "왜 올랐지?"

 대청봉까지 나는 뭐하러 올라온걸까? 죽기살기로, 갈 때 까지 가보자하며 올라온 산,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걸까? 나는 나와 같은 길에 있는 사람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보곤 한다. '왜 산에 오르세요?'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를까? '산이 거기에 있어서', 지리산 천왕봉의 해돋이가 눈물나게 감격스러워서, 대청봉 꼭때기에 올랐다는 사진을 남기기 위해... 나는 왜 산에 오르는 걸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왜 산에 오르나요?

지난 여름과 가을 동안 이 산 저 산  동가식서가숙 하며 품었던 생각이다. 나는 말 없이 산에 오르고, 꼭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람과 함께 엿듣을려고 했다. 그네들은 '정상1004고지'라는 팻말앞에 김치하고는, 누가 부르는 냥 내려가 버린다. 바람 결에 묻어오는 소리는 쓸쓸함분이다. 어쩌면 산으 오르면서 깊은 번뇌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거나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내려서는 걸까? 아랫동네가 벌써 그리운걸까?



                                                                     상사뱀 사연이 깃든  청평사, 적멸보궁에서                

2.
지은이는 백두대간의 첫 발걸음을 지리산에서 띈다. 그는 이십년 이상 산을 다녔지만 아직도 입장료가 아까운가 보다. 처음 나와 첫 마주한 장면은 입장료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는 새벽에 국립관리공단에서 돈을 받은다고 어린아이 마냥 투정을 부리는 것을 쉽게 흘려 듣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있는 멋 없는 멋을 통해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신을 꾸밀 수 있지만, 이런 문장보다 소박한 일상에서 녹아든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그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

백록담에서 듣은 애기인데, 나 역시 너무 일찍 돈을 받는다고 투덜거리니 아저씨가 이런 애기를 들려 주셨다. 한 원어민 교사가 주말마다 백록담에 오르길래 한 번은 무임승산(---山)을 하랬더니, 이렇게 고운 산을 어떻게 그냥 보겠냐라며 입장료를 건냈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보기 위해 얻은 댓가와 이를 지키고 가꾸기 위해 애 쓰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입장료를 건내지 않았을까? 이른 아침 산행을 통해, 계곡에서 목욕과 산림욕 등 하는 것은 공짜이며, 입장료를 내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모습에 조금은 실망감과 희비를 안고 산길에 따라 나선다.

지은이는 직장 때문에 한번에 종주를 하지 못하고 쉬는 날마다 내려와서, 다시 올라서곤 한다. 이렇게 산악회 사람들과 혹은 혼자서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백두대간은 고지도 '산경표'가 세상에 나온 다음부터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일제시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산맥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산맥와 백두대간은 개념이 완전히 상이한 것으로, 진정 산을 오르고 내리려면 백두대간의 줄기를 알아야 한다. 산경표가 나온 다음부터 사람들은 대간을 타기 시작했으며, 그 가운데 한 분에 지은이도 포함된다. 나는 백두대간이라는 말보다 '산행길은 인생길'이라는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책을 펼친다. 분명 어떤 이는 '거기 있어서' 오를 뿐인데... 이 책의 지은이는 산행을 통해 인생을 들려 주려 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은이가 20년 산행과는 다르게 그의 사유와 필력이 부족하지 않나라는 생각은 책장을 넘길 수록 그림자 처럼 따라 다닌다.

글이라는 것은 여타의 예술작품과 같으면서, 직접적으로 사유를 표현할 수 있다. 한편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서, 지은이가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그 미(美)가 달라진다. 나는 보고도 못 본 아름다움을 다시 접하게 된다. 이렇게 '낯설게 하기'를 통한 심미안(審美眼)은 글 읽기에 재미를 더할 것이다. 하지만 일기를 쓰기 싫어하는 어린 아이에게 억지로 일기를 쓰게 하듯,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 먹고 학교에 갔다. 공부가 끝나자 집에 와서 놀았다. 일기 끝'이라는 식의 단순 사실 나열이라면...

'망설이는 호랑이는 벌 보다 못하다'며 꿈을 향해 나아간 점은 높이 평가하나, 산행에 대한 깊은 사유가 아닌 단순 사실 나열과 자아성찰의 부족함이 곳곳에 엿보인다. 또한 자연에 대한 깔끔한 묘사는 새벽에 올라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이는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 사는 얘기나 자연의 운치보다 답사에 대한 객관적 기록물로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은이가 던져주는 화두(話頭)-'산행길은 인생길'은 멋 있으나, 사색을 통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는 바람결에 묻혔나 보다.

3. 나는 왜 산에 오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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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기른 원숭이
데즈먼드 모리스 / 까치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지은이와 첫 만남은 『털 없는 원숭이』이에서였다. 그의 유쾌하고 발랄한 이야기는 재치가 넘치고 재미가 있었다. 나는 새로운 시선이지만 그를 신뢰하고 『접촉』과 『인간 동물원』이라는 책을 보았다. 그는 동물학자이면서 사람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의 시선은 동물의 선상에 사람을 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말하듯이 호모 사피엔스라고 스스로를 높여서 다른 종과는 구별하게 했다. 지은이의 눈 맞춤은 동물학이지만 그 끝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몇 권의 책에서 느꼈다. 그리고 다시 『머리 기른 원숭이』를 잡았다. 그는 절대 인간을 특이한 종으로 보지 않고, 원숭이 선에 놓고 있다. 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이 감상을 적는 것 보다, 부분 부분을 할애하여 글을 적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즉 한 장 마다 쟁점을 내어놓고 나와 그의 시선이 같으면 이야기를 이끌고 가고, 시선이 다르면 내 부족한 지식이지만 다른 선을 그어 보려 한다. 그의 글은 동물에서 나타나는 몸짓에서 잃어버린 고리-인간의 조상을 찾는 가설에 새로움을 하나 더 한다. 그것은 '초원의 사냥꾼 이론'이 아닌 '수생이론'(75쪽)을 들려준다. 도시가 인간에게 가하는 정서적 불안과 사랑의 행위, 사람의 전생(全生)과 놀이로서의 인간 등에 대해 말한다.

1장 신체의 언어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에 아마도 몸짓이 먼저 행하여 졌을 것이다. 몸짓은 언어가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는 소통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하여, 같은 몸짓이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지은이는 우리 몸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 몸짓의 행위에서, 문화적 흐름에 따라 달라진 몸짓을 재미나게 풀어낸다. 하지만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전통의 "폭로 신호들 (tell-tale signs, 52쪽)"들은 숨길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리고 만국 공통의 의미를 내포한다. 거짓말이나 긴장감은 여느 사람이 같게 나타난다고 했다.

거짓말이나 긴장감에서 나타나는 등의 몸짓이 의식화된 위장이 아닌가를 문제가 남게 된다. 하지만 지은이는 포커에서 벌어지는 보기를 통해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며, 사람이 택한 방법-'무표정'이라 말한다. 즉 아무런 표정 없음이 거짓말이나 긴장감에서 나타나는 몸짓을 숨기는 방법이라 한다. 두 가지 방법, "가짜 광대"나 "엉뚱한 신호 보내기(55쪽)"라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탈로 나거나 힘들다고 말한다.

또 하나 공통점은, '좋은 것을 보면 눈이 커진다'는 점이다. 좋은 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대상물로 전이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이성을 눈을 보면 알 수가 있다(?)

2장 사냥하는 원숭이

"지구상의 모든 운동 중에서 추적이나 포살, 또는 두 가지 요소 모두의 상징성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96쪽)

이는 심리적인 문제를 버리고 동물적 요소로 규정짓는 이분법 혹은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가 있다. 모든 것은 상징성과 연결고리가 맺어지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답을 짝 맞추기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열렬히 계층상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모조품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사람에게는 지위를 나타내는 모든 상징이 진짜여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페라리(Ferrari)나 모터-요트를 살 돈이 없으면 돈을 빌려서라도 자신들의 우위를 과시하고, 이런 속임수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해서 언젠가는 자신이 꿈꾸던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상상에 빠진다."(144쪽)

즉 시각적인 작용에 의한 자신의 지위 행사가, 힘에 의해서라기보다-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가 상위 계층이라고 나타내기 위해, 돈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는 표현방법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동물학적 접근과 동시에 심리학적으로 바라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나는 너와 다르지 않다' 드러내듯이, 그들은 이란 걸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옷은 외적 표현물이다. 이는 화장이나 등과 같이 무기의 동일 선상에 놓을 수가 있다. 싸움을 할 때에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칼을 든 사람이 아니라 맨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다. 이는 그의 몸 전체가 무기이기 때문이다. 즉 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칼이 자기의 무기를 대신하게 된다. 칼이 없어지게 되면 그를 보호하거나 위장하는 무기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에 나약한 존재로 남게 되다. 화장 또한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힘을 숨기기 위한 치환작용이다. 즉 현대 사회는 고도로 전략 화된 머리와 상업주의 어우러져 내면의 허약함을 철저하게 위장하고, 겉모습으로 스스로를 들어내곤 한다. 여기에는 동물적 서열이 존재하지만 인간적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를 분할하는 것이 언어이며, 이를 통합하는 것이 신체언어이다"(65쪽)

언어 또한 사람과의 이야기 통로가 아닌, 서로를 나누는 도구로 전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조금 안다는 이들은 '너와 다르다'는 생각을 넌지시 주입하기 위해 낯선 언어를 선택한다. 즉 '너와는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에 나는 너보다 위에 선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주류의 흐름이 작용하겠지만, 지금 현상화는 문법을 무시한 새로운 언어에 집착을 보인다. 문법이 중요하지 않고 몇 개의 낯선 언어가 들어 있는가에 따라 자기의 존재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 낯선 존재의 언어는 문화적 다양성을 비어 버리고 우열성을 갖다 주었으며, 힘을 실어 주었다. 즉 모국어 대신에 타국어를 써야 높게 보이는데, 타국어의 기준을 문명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언어나 동남아시아의 언어 대신에 서구의 언어 특히 미. 영어는 나 보다 낫다는 문화 서열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잃어버리고, 문화 서열주의로 만들어 다시 자기 자리를 높이려 한다. 하지만 그는 항상 2등 밖에 될 수가 없다.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없고, 다른 무엇인가를 끌고 와야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기에. 진정 그는 스스로의 1등이 되지 못하면서, 1등인 체 하며 살아간다. 이런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질 경우, 낯선 언어 속에 자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모조품'과 '언어'는 동일한 도구로서 인간의 위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지은이는 이런 계층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분노를 폭발시켜 다른 이를 상하게 하거나 대리만족을 통해 해결한다고 본다. 그의 논리로 나아가면, 사색이나 지식의 사유 등은 허약한 자가 취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이가 취한 행동이다. 더구나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은 약한 자의 변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인간의 존엄성 대신에 동물적 인간만이 존재하며, 자본을 통한 치장은 힘에 의한 것과 동일하게 놓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다름 아닌 동물들의 전이된 싸움터이며 적자생존의 서열이 존재하는 곳이다.

3.인간 동물원

동물적 인간에 의한, 집단의 거대화에 따른 문제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거대하지만 자율성이 잘 지켜지는 평등한 집단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지은이의 사유는 다양한 접근을 막아버리고, 동물에서 인간이라는 하나의 잣대만 존재하고 있다.(그는 "도심을 파괴적 본능이 아닌 창조성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자율적이고 유쾌"(147쪽)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는 인간적 접근이 아니 동물학적 접근 방법이다)

4. 사랑의 생물학

"자상한 수컷이 자기 가족들을 위해서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가 우연히 매력적인 다른 암컷을 보았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이 수컷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정자를 다른 암컷에게 조금 나누어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184쪽)

가족을 위해, 다른 암컷과 잠자리를 같이 해도 된다? 지은이의 동물학적 관점은 '우열 유전자의 전승'이다. 즉 다른 이성과 성행위를 가질 경우 '들키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고도의 지식이라는 전략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현대 사회에 변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나곤 한다고 말한다.

"남성은 다른 여성과의 성행위를 공상할 수 있는 상상력"(189쪽)을 허용하는 것을 통해 "성인쇼나 영화 소설" 혹은 "포르노그래피"를 통한 대리만족으로 얻는다. 또한 "매춘부와 성관계"나 냉혹한 유혹이라 부르는 "강간" 등을 통해 성행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가 보는 시선이 동물학적 관점으로 통해 남성의 성적 편력을 합리화한다는 비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두번째로는 강간이 "병리적 지배행위"(191쪽)로 보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가 있다. 그는 그 근거로 강간 뒤 살인을 보기로 들었는데, 강관 뒤 살인은 비례관계가 아니다. 또한 강간을 충동적 행위로도 접근할 수가 있는 점을 빼버리고 있다. 세번째로 아이 아빠와 아가씨가 눈맞을 경우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점이다. 혹시 아가씨의 우성 유전자를 얻기 위한 동물적 행위인가? 그렇다면 우성 유전자는 무엇으로 평가할 수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젊은 군인"들이 통제에서 벗어나 저지르는 전쟁의 광기를 "가학적 강간범들과 같은 정신병자가 아니다(191쪽)"는 표현은 어색하다. 어찌 집단적 강간을 하고, 집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것이 '병'이 아닌가?

동물학적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가운데 핵심은 힘에 의한 지배를 통한 우성 유전자의 전승에 대한 이해이다. 그의 모든 논의는 '강한 자의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는 식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모든 행위를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동물과 사람이 완전히 같은가? 동물과 사람이 나눠지면서 사람으로서 지니는 고유한 특성은 없는가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5. 불멸의 유전자

이 장에서는 인간이 태어나서 평생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옴과 함께, 어린아이의 눈, 20, 30, 40대를 넘어서 황혼에 이르기 까지……. 장수하는 비결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 마음을 먹는다. 이 마음가짐은 엄마가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 시작을 한다.

"의학적 관점이 아닌 동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진화과정이 이런 중요한 문제를 간과했다는 것은 엄청난 실수인 것처럼 생각된다. 장시간에 걸쳐서 진행되는 출산과정 동안 임산부는 거의 무방비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선사시대의 여성들은 큰 위험에 직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원래는 인간도 다른 동물들처럼 쉽게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 좀 더 설득력을 가진다."(214쪽)

성행위와 출산은 자연계에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한다. 네 발 달린 아기 동물들이 눈뜨기에 앞서 먼저 서는 것은 위대함이나 신기함이 아닌 생존본능이다. 다른 동물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에, 그들은 언제든지 뛰쳐나갈 준비를 취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도 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알몸으로 자연계에 서면, 결코 힘센 천하장사가 되지 못한다. 이는 출산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인류학자들이 촬영한 기록영화를 보면 부족의 산모들은 커다란 나뭇잎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별반 소동도 피우지 않고 조용히 아기를 낳는다."(214쪽)

이는 몇 해 전, TV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하다. 제주도의 할머니들은, 예전에 의자에 앉아 아기를 낳았다고 들려주었다. 즉 우리나라에서도 의자에 앉아 아이를 순탄하게 낳곤 한 것이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산모는 꼭 넘고 가야 할 산으로 '산고'를 치르고 있다.

지은이는 나무의자 대신에 수중분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중분만은 새로운 흐름이라고 말한다. 수중분만을 통해 아이가 물에 빠질 위험성이 없다. 아이는 탯줄로 숨을 쉬며 자연스레 물위로 떠오른다. 또한 공기의 압력을 차단하기에, 외부의 압력에 따른 고통으로 벗어날 수가 있다. 물속은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자궁 속의 환경'(215쪽)에 부담도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앞서 말한 '수생이론'으로 볼 때에,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산모는 불안할수록 출산 시간이 더 길어지고, 산모가 평안할수록 출산시간은 짧아진다."(216쪽)

엄마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편안한 마음과 자세이다. 그리고 지은이는 아이를 순산하고 나서, 엄마와 함께 머물기를 강조한다. 아이는 먼 거리에 있는 물체는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하지만 30cm이내에는 분간할 수 있다며, 이는 엄마의 얼굴까지임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이 아닌, 병원의 한곳에 놓이는 것은 분명 엄마와 아이의 입장이 아닌 병원의 입장임은 분명하다.

"다섯 살이 되면 2,000단어를 알고 10년간의 학교교육을 받을 준비를 갖춘다. 아이의 뇌 무게는 성인 것의 90퍼센트에 육박하고 젊은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들로 채워져야 할 때이다. 5`15세까지의 긴 교육기는 스폰지나 압지에 견줄 만한 인생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는 놀라운 속도로 정보로 빨아들인다. 진화과정은 이런 시기를 만들면서 성년이 도는 것을 늦추었다. 다른 어떤 종보다도 인간의 유아기는 훨씬 길다."(231쪽)

TV에서 3살도 되지 않았는데, 모르는 게 없다면서 부러운 시샘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아이의 타고난 천재성이라면 잘 키워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평범한 아이인데, 맹목적인 주입식이라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생존본능으로 인하여 주변의 사물을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한다고 했다. 여기에 동물적 존재로서가 아닌 지식의 몇 알이 자리매김을 한다면 그는 정서적 불안과 삶의 균형 감각이 흔들릴 수가 있다.(과학적 검증이 아닌, 어느 책에서 읽은 부분은 재구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이의 눈높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항상 곁에서 지켜보며, 양손을 마주잡고 첫발을 내디딜 때의 조심스러움으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6. 생존을 넘어서

지은이는 인류발전을 놀이와 호기심으로 보고 있다. 침팬지와 어린아이도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침팬지는 주기적 반복과 패러다임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된 물음과 호기심으로 더 낳은 문명을 만들었다. 즉 어린아이의 놀이와 호기심은 인류발전의 틀을 새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다.

프롤로그

이 책은 앞서의 책의 종합판이라 할 수가 있다. 『털 없는 원숭이』는 1장에서 다루어지고, 『인간 동물원』은 2장과 3장에서 논의되고 있다. 『접촉』은 4,5장에서 이어진다. 즉 세 권의 책을 한 권에 담아 놓았다고 볼 수가 있다. 세 권의 책을 읽은 장점과 수생이론을 통한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는 시선은 새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동물의 선상에서 사람의 행위를 놓고 보니 '힘의 논리'가 합리화되는 헤게모니가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헤게모니를 읽어낸다면 색다른 책읽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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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2006-01-0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스는 정말 매력적인 저자이지요. 털없는 원숭이만 읽었는데, 읽을 책 목록 하나를 추가합니다. 인류학에 관심이 있다면 헬렌 피셔의 <성의 계약>을 추천합니다. 방금 검색했더니 품절로 나오네요.

열린사회의적 2006-01-08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의 역사(정신세계사)에서 나온것이 맞다면 읽어 보았습니다. 요즘이 말그대로 계약관계라고 말핸 듯 한데... 데스몬드 모르스에 비하여,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로 글을 적었다기 보다 머리로 쓴 듯 한 느낌. 야한 생각에 읽었는데... 둘 다 건지지 못한 느낌이였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