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학 오디세이 1 ㅣ 지혜가 드는 창 6
진중권 지음 / 새길아카데미 / 199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 진중권
둘 다 관심이 가는 문제이다. 지은이에 대해서는 전공보다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내게 더 각인되어 왔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토론의 중심에 서 있어 곤했다. '인물과 사상'을 통해 그를 먼저 만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자칫 엉뚱한 만남은, 지은이의 진정성으로 이어져 그의 작품에 대한 믿음의 고리를 엮어내곤 한다.
미학, 솔직히 이런 전공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내게는 너무 먼 그대였다.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일면서, 미(美)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증도 일었다. 미를 배우는 학문? 미학? 아직까지도 미학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개념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지은이가 들려주는, 서양 예술을 통한 미학은 그림 읽기가 아닐까 할 정도로 한 분야에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은이는 '미학이라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을 전(全) 지구적인 '미'가 아닌, 지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유럽의 어느 나라를 통해 들려준다. 얘기는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 서술 방식과 쌍둥이라 할 정도로 서구 지향적이다. 그는 살짝 이집트의 미를 빌려오지만, 그 중심에는 그리스 로마가 존재한다.
지은이는 그리스 로마를 중심으로 '미'라는 것이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가를, 몇 몇의 지인을 통해 들려준다. 그의 곁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벵겔만, 드보르자크, 황금가지의 작가 프레이저 그리고 다빈치에서 칸트, 헤겔로 이어진다. 지인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미학과 역사는 별개, 즉 '미는 미로써 존재한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린 듯 하다. 이는 몇 몇의 중요 작품을 통해 전체적인 역사적 분위기를 마무리 짓곤 하는데에서 짐작이 가능하다. 고딕에서 바로크, 낭만 등으로 이어지는 미학은, 사회 문화적 배경은 생략한다. 아울러 민중적이거나 타국(他國)과의 조율 역시 생략한다. 오늘날에 미학의 발자취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굳이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는 듯하다. 즉 익히 눈에 든 선구자적 천재를 줄 세울 뿐이다.
1권까지 읽는 내내, 내가 느끼는 감정은 ‘'미'란 이럴 것이다’라는 주입식 답만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즉 미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풀어내야할지 고민을 하다, 가장 노둣돌이 되는 개념만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지은이가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가에 대해 고민고민하다 가장 객관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 즉 이전과의 전혀 다른, 지은이의 시선은 찾기 힘들다. 다만 익히 알고는 있지만 정리가 되지 않은 이를 위해 재구성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책은 읽으면서 나와 시선이 엇나가거나 비판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종종 보인다.
지극히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였지만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너무 잘 알기에 두 번 말하면 잔소리가 될 소리가 있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서구의 어느 나라에 대한 '미'가 전 세계적인 미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한국 현대미가 무비판적으로 일백 년 동안 서구의 미를 숭상하였더라도, 그에 앞선 시대에 고유의 미가 존재했다. 또한 낮은 곳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문화적 조율을 하고 있는 가운데 서 있다. 근데 그의 지향점은 서구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차 있다.
두 번째는 자기의 생각을 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앞서 말한 이들의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줄 세우기 하는 것인지 아닌가에 대해 걱정스럽다. 개념을 쉽게 풀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 있지만 -두 스승의 대화가 이런 구실을 하리라는 것을 짐작한다 -지은이는 너무 물러나 있다. 이렇게 개념 정리는 주변 상황 -총체적 시선으로 작품을 담아 내지 못하는 한계로 존재한다.
세 번째는 개념 정리를 하면서, 혼동을 하지 않고 있나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어떤 게 아름다운지 금방 알아낸다. 가령 전철에 탄 수많은 '안 아름다운' 아가씨들 가운데서 당신의 예리한 눈은 실수 없이 예쁜 아가씨를 찾아낸다. 이렇게 미의 관념은 '명학'하다. 하지만 막상 '아름다움'이 뭐냐 물으면, 아마 당신은 대답하지 못할 거다. 어떤 게 아름다운지 잘 알면서도, 정작 그게 아름다운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미의 관념은 '혼돈'이다. 미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 남기 마련이니까."(194쪽)
천년의 고찰광 유럽의 중세 건축을 놓고, 어느 것이 아름다운가 묻는다면 고찰보다 중세 예술에 고개를 돌릴 것이다. 미륵보살의 반가사유상 보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예술보다 우리나라의 예술이 더 고급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힘의 헤게모니가 존재한다. 내 눈에는 미스코리아보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우리 아가씨가 더 예쁘지만 t.v에서는 미스코리아가 백번 더 예쁘다. 우리 눈은 익숙한 것, 힘이 있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눈에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문화적 혹은 힘의 논리가 풀어놓은 '미'를 좋아한다. 미스코리아의 아름다움은 황금비율이 아닌 소수의 문화 권력가가 줄 세운 '미'이며,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미란 자유롭지 못하고 학습에 따른 인식의 결과물이다. '미'의 관념은 '혼돈'이거나 항상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틀리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지은이는 이 명제를 부분과 전체를 혼동하고 있다. 즉 그가 주워온 명제가 '사회적 결과물인지', '지속가능한 본질적 문제인가'에 대해 대답을 늘어놓고 있지 않다. 그가 들고 온 보기는 분명 300년 역사를 훌쩍 넘은 '답'이지만 아직까지 유효한가. 그렇다면 그가 풀어내는 변화와 지속성, 진보적 미의 관념과는 상반된다. 그는 미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하고 있으며, 이는 진보적 의미를 띄고 있다. 어제 보다는 오늘의 미가 좀 더 복잡하거나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300년 전의 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오늘의 미를 논(論)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미는 오늘의 기준으로 설명해야하기 때문이다.
미스코리아 보다 못하지만 내 여자친구가 더 예쁜 것은 익숙함이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차츰 만나면서 나는 그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율 기간을 없애는 방법을 일부 지식인은 그들의 잣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가 미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미스코리아와 내 여자친구의 미는 분명 다르게 볼 수는 없지만, 미를 바라보는 근본은 같다고 생각한다.
지은이가 풀어내는 미학 오딧세이는 태생적 한계 -서구 지향적이면서, 힘의 논리가 있는 것이다. 즉 그의 미에는 열림이나 다양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물론 지은이가 논하는 미를, 전지구상에 펼쳐온 무지개 빛깔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면 다른 문제가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오직 '이것이 일곱빛깔 무지개'라고 말할때 앞서의 논의는 이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