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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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어느 변호사가 울프에게 ‘당신의 견해로는 우리가 전쟁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9쪽)’라고 묻자, 울프는 자신과 그 사이에 진솔한 대화가 오고 갈 수 없다는 전제를 한다. 그 “의사 소통의 어려움”을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는 스페인 정부가 일주일에 두번씩 보내는 사진들을’ 보면서, 시험하자고 한다.

1938년, 버지니아 울프가 [3기니]를 풀판하고 난 뒤, 70여년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명확하다.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23쪽)’ 하지만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자연스레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의 희생자들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내안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으로 느낀다. 1994년 사라예보의 비참한 도시의 사진을 찍은 작가가 그의 다른 작품 소말리아의 사진과 같이 전시했을 때, ‘자신들이 겪는 고틍을 타인들의 고통과 나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사라예보가 겪은 수난을 그저[잔악 행위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양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어느 지옥이 더욱 나쁜가?)이었다. 사라예보 주민들은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잔악 행위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잔악 행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반발했다(166쪽)’는 모습이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간에는 고통을 쉬이 치료하기 위한 자기방어(168쪽)로서의 심리와 ‘대형 사점(또는 공항이나 박물관)을 공공 영역의 주된 모델로 삼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우연하게라도 진지해질 수 있도록 남아 있는 여지를 갖기가 힘들(173쪽)’기 때문이기도 하다.(~175쪽)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해지면서 진지한 사색은 부족하게 만들며, 즉흥적인 사고를 유도하면서, 쉬이 잊혀지게 한다. 대중들이 주목하는 것을 대중매체가 주목하는 것이 아닌, 주객이 뒤바뀐 형태, 대중매체가 주목하는 것을 대중들이 주목하게 되며(155쪽), 우리의 감각이 무감각해져 가는 사회현실에 놓여 있다.(156쪽) 하지만 이 보다 더 한 문제는 사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방관자 입장을 취하도록 무의식 중에 자리잡는 것이다. 즉 앞서서 말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t.v의 방송이 지루해지면 쉬이 채널을 돌리 듯이, 다른 사진이나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몇 양심적인 사진 작가들의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에 희망을 담을 수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영화감독 라리사 세피트코의 [고양]이나 하라 가즈오가 찍은 일본의 가장 놀랄 만한 다큐멘터리 [가자 가자, 신군](179쪽), 1992년 제프 월이 “죽은 군대는 말한다”라는제목으로 찍은 거대한 사진(180쪽)은 우리를 사색케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사진은 무엇을 담을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지…

지금까지는 [타인의 고통]을 내가 읽은 방식입니다. 지은이는 차례를 통해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단순히 숫자만 넣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내용을 꼼꼼히 정리하다 보면, 사진과 전쟁의 관계라든가, 사진의 왜곡, 상업성에 나란히 놓인 사진, 미국의 쓰러진 병사 얼굴이 나타나지 않은 시점부터 그런 이유-미국에 미침략사 박물관이나 인디언 침략 박물관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왜 아시아와 아프리카등의 어려운 나라들을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체 정면으로 찍은 사진을 찍어 내 보내는지., 왜 우리는 사진을 통해 전쟁을 억제할 수 없는지…

다양한 시선을 담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지은이는 은유적인 문체로 글쓰기를 하여, 읽는 나로 하여금 두 눈을 반짝 뜨게 했습니다.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다가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행위를 반복하게끔 하였습니다. 쉬이 읽혀지지만은 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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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58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에스키모 왕자 - 詩說: 시적인 이야기
윤대녕 지음, 하정민 그림 / 열림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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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너무 아파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긴잠을 자고 나서인지, 전날보다 머리는 맑았으며 난 무엇을 읽을까 고민을 하다가... 조금은 읽혀지기 쉬운 책을 들었다. 에스키모의 왕자, 과연 그는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어릴 적에-아직 철부지 시절, 가슴 가득 꿈을 꾸거나 대학 시절 첫 사랑에 불타오를 때 까지 스스로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내 안의 에스키모 왕자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서서히 성장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꿈 꾼 대로 나아가거나 사랑이 이루어지면 에스키모 왕자는 나와 동일시되며, 내 가슴속에 산다. 하지만 꿈과 사랑을 접고, 시간에 쫓기여 산다면 서서히 죽어간다. 주인공에게, 7, 8살 때 에스키모의 왕자가 찾아오고, 스무살 사랑이 싹틀 때에. 한 여인의 죽음으로 긴 잠을 자든 왕자는 내가 5년 동안 시계회사를 잠시 휴직한 뒤에야 비로소 숨을 몰아쉬며 나타난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살을 하고 나서는 일상에 더욱 부대꼈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에스키모 왕자는 숨을 쉬기가 곤란하게 된 것이다. 즉 에스키모 왕자는 '꿈' 속 주인공이며, 사랑을 불태우는 열정의 사나이다. 그런 그에게서 사랑을 빼앗고, 꿈을 접게 하였으니...

난 윤대녕이라는 지은이를 처음 접했지만 그가 쓴 글은 낯설지가 않았다. 시간의 소중함을 언뜻 이야기하는 내용은 어릴적에 해적판(?)으로 읽은 '모모'라는 작품이 떠올랐으며, 바쁜 일상에 묻혀서 자기 자신을 망각한다는 비판적인 느낌은 인문사회서적을 읽으면서 내가 쫓는 문제이자 대안을 이끌어 내기 위한 행동에서 계속 고뇌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지령을 받아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어느 영화에서 본 듯 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시처럼 깊고 산뜻한 그림소설'이라는 출판사의 문구는 책을 읽기 전에는 강한 호기심이였으며, 읽고 난 다음에는 짚은 상업성 냄새만 난다. 어쩌면 내가 너무 황금만능주의의 일상에 찌들었기 때문이리라...

위의 모든 생각이 일방적인 착각이며, 시의 문체에 대한 무지에 의한 것이더라도, 다음은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서하원이라는 이를 만나서, 그의 권고대로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비일상적이다. 물론 이 책은 '시적인 언어'로 쓰여지고 표현된 글이기에 여기에 대해서 가타부타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서하원이라는 상징성, 인격체가 가지는 의미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 어머니로서 상징되지 않고, 연인으로 머물러 있다. 여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내지 우월감에 의한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그가 자연이나 어머니로서의 은유로 다가와 '지친 일상에 자아를 찾는 여행'을 하게끔 했을 때, 더 깊이가 녹아날 것이다. 단순히 여인으로 머물런 서하원에 대한 애정은 여행을 갔다와서 다시 그와 여행을 가는 설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지은이의 눈높이가 연인간의 사랑이기에 그가 이끌어 내는 결론은 자연스럽기는 하다) 서하원을 어머니의 은유로 표현되었을 경우, 주인공인 나의 불완전성도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며, 성찰의 계기로 삼기에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서하원에 대한 성찰이 너무 엷게 드리워진 것이 아쉽다.

즉 지은이의 문명 비판에 대한 시적인 글쓰기는 너무 유치하며, 내용상의 설정 또한 연인간의 사랑이야기로 마무리 지어, 깊은 은유를 담아내지 못한다.

추신: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뉴잇(인간)이라 부른답니다. 에스키모의 왕자 -> 이뉴잇 왕자. 지은이의 이러한 제목은 이미지의 연출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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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왜 하지? - 꼼꼼하게 들여다본 아홉 개의 수업 장면
서근원 지음 / 우리교육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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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내성적인 성격이여서, 손을 들고서는 '선생님 왜 공부를 해야하지요'라고 묻지는 못한체... 계속 가슴에 품어온체 살아왔습니다. 나름대로 몇 권의 책을 읽어오면서 정리된 내용이 아무래도-미셀 푸코의 추론-남의 이론을 무작정 수용한 것이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에 읽어나갔습니다.

지은이는 여덟개의 수업 장면을 통해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덟개의 수업 장면을 통해 교사가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고뇌를 담담히 담아내며,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산골의 분교에서 수업의 이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24쪽)' 기대는 낭만적 환상이며, 교사가 교과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최소화하며(50쪽), 몸이 아파도 수업은 계속 진행되어여 합니다(112쪽). 아울러 '교사들이 [새교실]이나 [교육자료]를 베끼듯이, 대부분의 아이들은 저가를 베겨 오다시피(146쪽)'하면서 수업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교사들은 사전지식(85쪽)을 동원하여, 좀 더 다양한 접근을 할려고 합니다. 상급기관이 통제와 관리라는 관점에서 교사와 아이들을 본다면 교사들은 그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할려고 합니다. 이런 여러 모습을 훓어 본 다음에 마지막장,

9장. 지은이는 자기의 글쓰기를 통해 근본적인 물음을 내놓습니다. 즉 지금까지 교사들이 다양한 시도는 자기에게 맞추어져 있지 학생의 눈높이에 가 있지가 않다, '나는 왜 아이들이 그처럼 사고하게 만들려고 애를 쓴 것일까? 언어로 표현된 타인의 사고를 이해하고, 자신의 사고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223쪽)'에 대해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한 때 현직 교사였던 이가 이상을 위해 몸부림 친 고뇌가 나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몇 몇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지은이의 시선은 상급기관이 내어준 숙제를 좀 더 다양하게 푸는 문제이지, 왜 숙제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사들이 다양하고 자기가 꿈꾸는 이상적인 수업을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은 업무량 때문이라는 외부적인 변수로서만 한정합니다. 즉 지은이는 '교사와 학생들이 현재의 삶 또는 둘 사이의 관계는 무시되거나, 교과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고려되(208쪽)'는 수업을 계속 관찰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적인 관점에 대한 제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그가 들여다 본 교사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공기중에 28%는 산소이며 나머지는 무엇인가에 대해 한 아이가 물과 이산화탄소라고 대답을 하자, '이 교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는(92쪽)'은 조금은 권위적인 모습이 풍깁니다. 이런 장면은 실험 도중 풍선이 터지자, 놀라지 않았니 하는 걱정스러운 물음보다 실험을 촉구하는 대답(96쪽), 길건너 교회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이 듣는 가운데 '또 방해공작이 시작되었군(99쪽)'이라고 말하는 장면,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을 체벌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136쪽)'지만 지금은 체벌함으로써 자기에게 피해가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에서는 말문이 막힙니다. 체벌에 대한 반성이 없으며, 학생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체벌밖에 없다고 한정하는 지은이의 모습은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꼼꼼히 들여다 본 모습은 조금 현실적이였을는지는 몰라도, 학생 선생님과의 이야기가 없기에 방관자적 입장 밖에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대안은 지은이의 사고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조금의 아쉬운 장면이 여럿 보이지만은 지은이의 진지한 고뇌(마지막 장면)가 새삼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더욱이 지은이의 의지대로 가르치다가 학부모와의 마찰. 하지만 학기말에는 거꾸로 그를 붙잡는 모습에 참 잘 가르친다는 착각으로 마무리 지었어도 되는데, 한 학생의 입을 통해, 선생과 학생간의 믿음에 대한 고뇌는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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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별 2004-12-0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사회의적님에 리뷰는 언제나 장점과 단점 모든 면을 비추기 때문에, 책 선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네요..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열린사회의적 2004-12-0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아침에 들어와서..^^ 정말 설렁한 서재인데, 많은 리뷰를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하하~~ 한번 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답니다.

그리고 님께서도 얼릉 책을 읽고서 글을 올리시면 제가 종종 놀러가겠습니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의 아쉬움이라도 있다면 훌훌털고 가시길 바랍니다.

님께서도 날씨가 추워지는데.. 항상 몸 건강하십시오. 진심으로 비손해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난 듯 합니다.*^^*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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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오래된 과거라고 하면 좀 이해하기 쉬울터인데, 지은이는 왜? 부제로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고 했습니다. 라다크로부터 배우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오래된 미래에 대한 제목이 암시하는 의미는 내겐 넘을 수 없는 뫼일 뿐이였습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서야 지은이가 암시하는 말을 어렴풋이 짐작해 봅니다.

이 책은 지은의 머릿말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에 모든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은 본인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좀 더 서술적으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그의 논의는 좁은 세계관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본 세계만이 전부인냥 인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욱이 나이와 일정량의 경험이 축적이 되면 더욱 공공히 해져서 큰 벽을 만들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본 것 만 믿을려 하고, 다른 것을 보면 '속임수다'라고 함부로 내뱉습니다. 흔히 파블로프의 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세계를 들여다 보면, 파블로프의 개는 다름아닌 경직된 사고를 하는 우리 자신일런지도 모릅니다. 주인이 종을 치면 밥을 준다는 인식이 시간과 경험에 의해 축적된 나머지, 그를 맹신하듯. 어떠한 비판적인 사고가 형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계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일방적인 (우월성)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이를 진리인냥 믿게하는 사회적인 흐름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지은이는 큰 혼란을 느낍니다. '라다크로 가기 전에 나는 '진보'의 방향은 어쨌든 불가피하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 나는 공원 한가운데를 질러가는 새 도로, 200년 된 교회가 서있던 자리에 세워지는 철골과 유리로 된 은행 건물, 길모퉁이의 가게 대신 들어서는 수퍼마켓, 그리고 삶이 나날이 더 힘들고 빠르게 느껴지는 사실을 모두 수동적으로 받아들(7쪽)'였을 뿐입니다. 더욱이 그는 ' 나는 또 정말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고, 좀더 협동적인 사회는 유토피아적인 꿈에 불과하다(8쪽)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는 라다크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자신이 속한 산업문화'속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 열린 다른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곳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경의을 표하며, '일과 잔칙 하나(25쪽)'되는 곳입니다. 노동적 집약적인 일을 '부드러운 속도로 일을 하고, 놀라울 만큼 많은 여가를 누(40쪽)'는 곳! 서구의 문화속에서는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으며, 내가 처한 현실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설령 이런 사회를 만들자고 한다면 사회운동가니, 이상주의자니하는 식의 비판만 받게 됨은 불을 뻔합니다. 하지만 이는 존재하지 않은 나라가 아니며, 존재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본 세계만 인식하는 닫힌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슴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은이는 라다크에 살면서 두 가지의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공동체적 삶이라면 다른 하나는 서구 산업문화가 침투하면서 물질자본주의를 낳게 한 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자집에 태어난 먹고 사는 문제에 고민을 하여 보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물질자본주의는 이상향입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시간에 날마다 쫓기게 되며, 내 아닌 다른 이웃이 하루 한끼 걱정을 하며,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같은 지구촌이라는 한 마을에 살지만 약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을 나와같이 아파하는 이라면... 지은이와 같은 큰 의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과연 진정 우리는 행복한가라고...

라다크로 배운다는 것은 지극히 지은이의 주관적인 냄새가 풍기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모든 논의가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왜일런지... 오래된 미래라는 의미는, 우리가 같이 누리고 행복하게, 자연과 더불어 지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라다크에 대한 찬사가 아닐런지... 또한 서구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미래(이상향)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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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마을 이색기행 - 색다른 풍경과 풍물, 숨겨진 마을문화를 찾아서
이용한 글, 안홍범 사진 / 실천문학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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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동강과 서강이 있다. 서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혹은 물길이 세지 않아서 사람들이 찾지 않아 자연 그대로에 좀 더 친숙한 반면에, 동강은 많이 알려져 훼손이 적잖이 되어버렸다. 이런 동강에 대해 부러움을 갖고 있던 영월 군청에서 다리를 놓아 관광수익을 얻어 낸다는 계획이란다.(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은 자연의 훼손되지만 이에 따른 수익도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방 경제 자립은 언감생시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 때문)

사람이 찾는다고 무조건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 자세부터가 바르지 않다면, 불을 보 듯 뻔한 이치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찬바람을 쌩쌩 맞으며 1시간 이상이라도 기다릴 수가 있으며, 하루가 걸리는 먼 길이라도 발이 불어 터져도 걸어갈 수는 있지만 사람에서 그 대상이 자연으로 바뀌면 마음도 변한다. 그곳에 대한 동경이 가슴 가득 채워지면 자동차를 몰고서 휭~~하니 한 두 시간에 달려가서는 사진을 찍고 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추억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히 채운다. 정말 자연을 좋아한다면... 뫼를 좋아하는 사람이 주위에 한 분 계신다. 그 분은 뫼가 좋아서 주말 등등 시간을 내어서 종종 오르곤 하는데, 원칙 하나만은 가지고 계신다. 즉 절대 차로 뫼를 올라가는 것이 아닌, 두 발로 오르는 것이다. 뫼를 좋아하기에, 뫼와 같이 호흡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란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 한다. 이런 면에서 지은이의 성찰은 많이 부족하다.

지은이는 '오늘날 서강이 이만큼이나마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엄한 물굽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서강은 300~400미터 마다 여울목을 끼고 있어 자체 정화늘역이 뛰어난 편이다. 물론 동강에 비해 찾는 이가 드물었던 것도 서강을 온전한 모습으로 남게 한 커다란 요인(15쪽)'이라는 점을 안다. 그러면서도 여행수첩(22쪽)을 통해 승용차로 들러보러 오는 길을 자세히 알려준다. 사람과 차가 모이는 곳에 자연 그대로를 꿈 꿀 수가 있는가?

나는 커다란 어지저움증에 휩쌓인다. 지은이는 자연을 사랑하는 걸까? 내가 아는-뫼를 좋아하는 이는 두 발로 오르는데...자연을 아끼는 이가 왜 자동차로 움직일까? 혹시 그는 자연을 좋아는 것이 아니라 차로 여행을 하는 그 안락함과 쉽게 자연을 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명의 이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겨울이 계곡물 사이로 물러나고 그 빈자리에 개나리나 강아지풀이 피면 꽁고 얼어던 땅도 마음을 풀고 진흙을 잉태한다. 이런 들판을 한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신발보다 더 무거운 진흙을 한웅큼이 떨어지지 않는 경험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다음도 신발에 붙은 흙은 해마다 반복될 것이며,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선물-봄이 다가오는 암시-이라는 것을 알게도 될 것이다. 진흙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고서 어떻게 자연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즉 이 작품은 아쉬운 점을 몇 몇 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나누어 한 쪽을 동물원 구경가듯 한다는 점과 문명의 이기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 자연의 깊이에 대한 관찰력이 부족하고,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보다 운치에 대해 더 안타까워 하는 점(78쪽) 등은 아무래도, 인간적 성찰이 덜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글과 어울리는 사진, 사람과의 친숙한 만남과 이야기, 다양한 시선을 통한 길라잡이 등으로 세계관을 넓히고, 아스팔트 위에서 여유를 선사하는 장점이 뭉친 책이다.

언젠가 떠날 날이 있다면 이 책을 들고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본 눈으로 누리를 담지만은 않을 것이다.

추신: 이 책에는 부안과 위도의 이야기도 나온다. 과연 물질적인 풍요앞에 정신적인 풍요를 저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은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외국에서는 동아시아 최고의 풍어제(114쪽)'라며 찾아오는 곳을 정부는 없애버릴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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