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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6월
평점 :
서양의 장기(將棋)라 불리는 체스에는 폰(Pawn)이라는 말이 있다. 한 번에 한 칸씩밖에 이동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장기로 치자면 졸(卒)과 쓰임새가 같다. 그런데 이 폰이 어찌어찌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게 되면 퀸(Queen), 여왕이 된다고 한다. 체스에서는 이것을 퀴닝(Queening)이라고 부른다. 저자 한승태는 서문 「우리도 퀴닝 할 수 있을까?」 에서 책의 제목은 본래 ‘퀴닝’이지만 출판사의 반대 때문에 『인간의 조건』이라는 진부한 제목으로 출간되었음을 밝혀놓았다. 저자의 불만에 공감한다. 여기에는 가장 약한 말이지만 한 번에 한 칸씩 꾸준히 오르면 여왕이 될 수 있는 체스의 규칙처럼 대한민국의 수많은 워킹푸어가 삶에 쏟아 붓는 노력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현실이 오길 바란다는 저자의 염원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인간의 조건)을 부제로, 저자가 정한 제목 ‘퀴닝’을 원제로 쓰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퀴닝: 인간의 조건』.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p.567
노동의 숭고함? 개나 줘버리라지. 이 책에는 VJ 특공대와 극한직업이 보여주지 않는 이 나라 중노동의 민낯이 있다. 대한민국 노동의 숭고함은 웬 친일파 독재자가 국민에게 ‘잘 살아보세’를 외치게 하던 그 순간 사라졌다. 낡은 것을 쓰레기 취급하고 느린 것을 도태시키는 사회에서 숭고한 노동과 노동자를 기대한다는 게 어불성설. 저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현 사회가 당연시 생각하는 24시간 영업, 저렴한 가격, 친절한 서비스의 이면에는 변기통에 버려진 휴짓조각보다 못한 누군가의 인권, 위생, 안전이 깔려 있다. 내일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타인의 죽음에서 휴식을 탐하는 개망나니만도 못한 인간이 될 뿐이다.
누군가가 바다에 빠졌다는 소식을 ‘오늘은 일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로 해석하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란 대체 얼마나 힘든 것일까? 이 책의 첫 번째 일화, 바로 꽃게잡이 어선 이야기다. 일이 너무 힘들어지자 자해까지 고민하고 곧이어 그 고민이 또 다른 누군가를 해할(그래야 쉴 수 있으니) 생각으로 번지는 대목은 이 나라 중노동의 지난함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배에서 탈출하려다 익사한 어느 중국인 노동자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며 이 일을 그만두겠노라고 다짐하는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지. 몇 개월 치 임금 체불은 예사인 이곳에서 그만 두겠다는 그를 순순히 보내주는 선주의 행동을 일종의 배려로 인식하는 동료들의 모습은 애석하고 또 씁쓸하다. 지옥 같았던 6주가 40만 원이라는 어이없는 금액으로 환산되어 돌아와도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하게 되는 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바닷일이란 6시 내 고향 같은 티비 프로그램에서 비춰지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다.
무례한 손님들을 상대하며 하루하루 변해가는 주유소,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화도 남 일 같지 않다. 그는 카스트제를 언급하며 한국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처우는 수드라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계급사회라는 얘기다. 고시원 일화를 읽을 때는 박민규의 단편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가 많이 생각났다. 문제는 그가 겪은 일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돼지 농장에서 몽골인들을 차별했던 고백은 열악한 근무 환경과 짐승만도 못한 처우가 만든 중노동에 지친 인간이 얼마나 야박해질 수 있는지 시사한다. 춘천 비닐하우스 주인아주머니의 눈물은 우리 사회에 워킹푸어와 삶의 조건이 크게 다르지 않은 고용인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들려주는 일화들은 이처럼 고발적이기보다는 고백적이기에 와 닿는다. 나는 저자가 노동의 고단함을 말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이 나라 자본이 노동과 노동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독자가 발견하길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기실 그가 겪은 일들은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일상의 한 단면일 뿐이니까. 꼭 육체적 고통이 따라야만 중노동인가? 그가 보고 경험한 일들을 ‘남’의 얘기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이 책은 주말 저녁 시간 때우기 시사 다큐와 다를 게 없어질 것이고 ‘나’의 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진정 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노동은 숭고한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그 안에서 어떤 부조리한 구조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퀴닝이 가능한 사회가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