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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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소세키 월드에 입문했다. 원래 계획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는데 풀베개라는 제목이 왠지 모르게 운치 있다. 무작정 펼쳤는데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다. 아니, 괜찮다고 해야겠다. 다 읽은 후 인터넷에 몇 가지 서평을 찾아봤다. 이 책을 쓴 무렵 소세키의 나이가 불혹이란다. 전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과 비교해 적잖이 점잔을 뺀 작품이라고도 한다. 어쩐지 괜찮더라. 입문은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점잔을 좀 빼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15p)



 소설은 서양화를 배운 화가(그때는 화공이라 불렀던 것 같다)이자 화자가 그림을 그리고자 작은 시골 마을을 들어서며 시작한다. 화가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듯하다. 나중에는 "발길을 멈추면 싫증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쿄에서 그렇게 하면 금방 전차에 치여 죽는다. 전차가 죽이지 않으면 순사가 내쫓는다. 도회는 태평한 백성을 거지로 오인하고, 소매치기의 두목인 탐정에게 많은 월급을 주는 곳이다."(134p) 라며 도시를 평하는 걸 보니 작품 속 시종일관 비인정(非人情, 의리나 인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일)한 시선으로 모든 풍경과 상황을 사유하는 그의 태도를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반면 일백여 년 전 삭막한 도회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그를 2014년 속 도쿄로 떨어뜨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도 궁금해진다. 아마도 증발하지 않았을까?


 작품 속 화가는 소세키 자신일 것이라 짐작한다.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그가 도회 생활을 어찌 생각했을지는 보지 않은 블루레이가 따로 없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소세키와 같은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사람이 지금도 많다. 모두 힐링 힐링 거리며 팍팍한 세상살이를 한탄한다. 여기서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힐링 관련 서적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시치미를 떼 왔으나 이미 백여 년 전에도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세키는 불혹의 나이에 화가가 돼, 비인정의 풍류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나 보다.


 그림을 그리려던 화가는 어찌 된 일인지 그림 한 점 그려내지 못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쪽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그림과는 영 무관한 일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면서도 비인정의 시선은 그대로 유지하는데 작은 돌부터 시작해 유채꽃과 종달새의 울음소리며 서양과 동양의 미학론을 따져보기도 하고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 여인과 곧 만주의 전장으로 떠날 청년에 이르기까지 한치도 쉴 틈이 없다. 애초에 그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 산길을 오를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心眼)에 비친다. 그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고 혼탁한 속세를 마음의 카메라에 맑고 밝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16p)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불쑥 떠오르는 하이쿠 한 소절을 가슴속에 써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목련의 따뜻한 담황색을, 연못에 떨어지는 동백꽃의 붉은색을 심안에 비출 수 있었다. 애써 무엇인가 그리고자 했다면 모처럼 맞이한 우아한 경지에 이치를 내세우고 쓸데없이 탐색하여 그림을 망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써 이해하고자 했다면 여인의 뜻밖의 행동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터이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소세키식 힐링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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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기보다
풀노래와 숲빛을
모두 가슴으로 받아들였구나 싶어요.

5DOKU 2014-01-24 15:36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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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메뉴는 닭볶음탕인가보다.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더니 금세 코로 스며든다. 반지르르한 닭고기를 보니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뜻뜻한 밥 한 공기에 당근, 감자, 닭고기 한 점 올려 한 숟갈 뜨는 상상을 하니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다. 국자 한가득 접시에 떠 담아본다. 흐음, 이 정도면 내 위장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구나 하고 양을 가늠해보곤 식탁에 올린다.



모두들 똑같은 검은 옷 위에 번호표를 달고 있어서 똑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만저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서열이 이만저만 다른 것이 아니다. (22p)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좋게 보면 자유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에겐 그저 사소하기만 한 저녁을 먹기 전 잠깐의 과정도 책 속 슈호프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장소가 수용소라는 것과 신분이 죄수라는 이유로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야 할 자유조차 수많은 부조리 속에서 흔적을 감춘다.억압된 생활 속에서 그들은 '인권'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들에게 부조리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일상이 돼버렸고 환경은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대신 스스로 작아지는 법을 가르쳤다. 통제는 사람을 작아지게 한다. 그 결과 어쩌다 주어지는 작은 자유에도 만족감을 느끼는 나약해진,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이 이야기는 허구지만 허구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저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생활을 하며 느끼고 보았던 현실을 가감 없이 서술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전적 소설인 것이다. 당시 소련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어이없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저자의 죄명은 반소였다. 노동형 8년을 선고받은 그는 탄광 지대에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게 되는데 아마 이 책을 쓸 때 필요했던 모든 제재를 당시에 습득하지 않았나 싶다. 수용소 안에도 서열은 있으며 가진 것(받는 소포의 양)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계급까지 정해지는 현실. 어떻게 보면 부조리한 사회 모습을 축약한 듯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며 저자는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를 고발한 격이 됐다. 저자는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인물이 겪은 수용소의 하루를 담담하게 보여주며 그 속에 사회가 가진 수많은 부조리와 다양한 종류의 인간상을 고발하고자 한 게 아닐까. 수용소라는 축소된 사회는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는 셈이다. 사회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야말로 그 중 가장 현명하고 확실한 표현법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을 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어이없이 빨리 지나가고는 한다. 수용소에서의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이 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닌 슈호프지만, 형기는 왜 그리 더디게 지나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다. (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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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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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내 관심은 온통 자본주의가 이 나라에 가져온 폐해에 쏠려 있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경찰이 쏘아 대는 물대포와 최루액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전진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이곤 한다. 반면 힐링이라는 유행에 휩쓸려 모순적인 사회 구조가 안긴 상처조차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도 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힐링에 관련된 소비 행위로 해결한다. 뺨 때린 사람은 생각도 못 하고 내 지갑을 열어 치료하는 게 유행처럼 번져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코레일 파업과 공권력에 짓밟힌 민주노총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된 지 오래다. 오늘은 회사에서 어떻게 버텨낼지 중요한 사람들에게 그건 마치 길에서 만난 다른 나라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처럼 변해버렸다. 현재 우리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고 반복되는 도돌이표에 갇혀 있는 셈이다.


 '프로' 야구가 처음 시작했던 1982년. 인천에 연고를 둔 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한다. 그리고 그 삼미 슈퍼스타즈를 열렬히 사랑하고 응원했던 소년.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년에게 삼미는 그야말로 슈퍼맨과도 같은 존재였다. 프로야구 역사에도 기록돼 있지만, 이후 시간이 흐르고 꼴찌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던 삼미를 보며 소년은 단순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내 자신은 절대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프로' 세계는 열심히 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고 '잘' 하는 사람만 반긴다는 것을 세상은 어린 소년에게 가르치고 있었고 자신의 야구를 하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소년의 기억에서 그렇게 지워졌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126p)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기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27p)



 실로 그렇다. 우리 사회는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사람을 우선시한다. 전문가라면 물론 자기가 하는 분야에서 일을 잘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비전문가에게도 사회는 '프로 정신'을 운운하며 열정과 재능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교육을 만들며 노동을 착취한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평범한 삶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슬프게도 2013년 현재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범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배우며 자란 사람들은 이제 기성세대의 자격으로 사회 새내기들을 반기고 있다.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으며 더 나아질 기미도 없다. 이게 2013년 대한민국 현실이다.


 사회 가르침에 따라 프로가 되기로 한 소년은 일류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다. 부모가 바라고 사회가 강요하던 그 '프로'가 된 것이다. 기쁨도 잠시. 이상하게도 소년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일은 하면 할수록 늘어나고 상사의 잔소리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프로의 영광은 행복이 아니라 마치 로봇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같은 삶이 소년이 이루어 낸 '프로' 세계가 달아준 훈장이었다. 기계는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법. IMF는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고 치욕적인 평범한 삶을 피해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하며 버텨 온 소년은 마치 수명이 다한 냉장고처럼 폐기처분 되고 만다. 남은 것은 없었다. 돌아보니 오히려 잃은 게 더 많은 세월을 지나쳐왔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일찍 일어난 새가 아니라, 일찍 잠을 깬 벌레였다는 것을. (223p)



 이후 소년은 자신이 어릴 적 그렇게 좋아했던 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와 재회하게 된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고 프로야구 구단 목록에는 팀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당시 소년과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응원했던 팬클럽 동료이자 대학 시절 갑자기 일본으로 떠났던 친구 조성훈이 돌아온 것이다. 소년은 삼미 슈퍼스타즈를 잊었어도 조성훈은 단 한 번도 삼미 슈퍼스타즈가 보여준 자신만의 야구를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조성훈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왜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자신만의 야구를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별안간 없어진 팀의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소년에게 조성훈의 제안은 곧 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손에 쥔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었다.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 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235p)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279p)



 나는,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야구를 하고 있을까? 안타깝지만 내가 느낀 현재 우리는 자신만의 야구를 이미 오래전에 잊은 채 달려가고 있다. 손에 쥔 것을 나눠주기 싫어하는 기성세대와 공부하는 기계처럼 자라나는 학생들. 열정을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는 기업과 자신의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유행에 이끌려 지갑을 열기 바쁜 사람들.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삶을 치욕이라 배우고 느끼며 보이지 않는 내일을 준비한다. 하지만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251p)라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는 사실 치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마추어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당연한 진리다. 빼앗기지 말아야 할 마음가짐이다. 조금은 모자라고 조금은 평범해도 우리가 잘하는 야구를 해야 한다. 행복은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야구로부터 생겨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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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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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사기 전 종종 인터넷 서점을 들르곤 한다. 미리 보기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차례부터 머리말, 도입부까지 읽다 보면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책을 썼는지 알 수 있어 좋다. 그중 내 지갑을 열게 하는 책은 대부분 도입부만 훑어도 느낌이 온다. 바로 이 책이 그랬다. 주인공 셜보 우르셔리의 마지막 외줄 타기를 다룬 도입부는 표현력이 생생해 작가가 마치 머릿속에 들어와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 한마디로 활자로 그려진 그림 한 폭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렇게 잘 쓰인 도입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를 자연스레 안내했다.


 집시의 인생은 태생 자체가 비극인 걸까. 셜보는 집시의 자식이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몸 한번 편안히 누일 곳 없는 집시들의 삶.  "나를 선 채로 묻어라. 평생을 무릎 꿇고 살아왔으니." (25p), "우린 도망치는 게 아니란다. 때가 되어 더 나은 곳으로 떠나는 거지." (56p) 등 집시 언어에는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남을 도와주고도 집시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부모의 삶을 되풀이하는 것보단 줄 위에서 사는 인생이 그에게는 편안했던 걸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 외줄 타기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정확히 말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88만 원 세대와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셜보가 타는 외줄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건 현재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선택한 진로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날 우리는 사회라는 외줄에서 떨어지고 만다. 서커스 단장과 가족들이 안전망 설치를 제안해도 안전 그물 때문에 줄을 타는 순간의 집중력이 오히려 흐트러질 수 있다며 제안을 거부했던 셜보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어리석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함께 외줄을 타던 가족을 잃게 된 것이다. 사실 그들은 살기 위해 외줄을 선택했지만 누군가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두를 비극 속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셜보의 잘못은 아니었다. 문제는 실수를 저질러도 다시 튕겨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전망이 없었을 뿐이다. 안전망이 없는 건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독자로서 셜보에게 부러웠던 한 가지는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자가 그랬던가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셜보는 진심으로 외줄 타기를 즐겼던 것 같다. 비극적인 일조차 줄타기를 잠시 그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수는 있었을망정 포기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심지어 그것이 죽음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셜보의 모습은 오히려 행운아처럼 느껴졌다. 


 셜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하는 그 일이 진정 당신을 즐겁게 하는가. 혹시 안전망 없이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안전망 따위는 필요가 없다. 떨어지더라도 그 순간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셜보는 아버지가 고난의 시기에 웅얼거리곤 했던 집시 속담을 떠올린다. "나를 선 채로 묻어라. 평생을 무릎 꿇고 살아왔으니." 하지만 셜보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거의 평생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해온 그 생각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생각이 될 것이다.


나를 아무렇게나 묻어도 좋다. 나는 서서 죽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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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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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보태든 무엇을 외치든 세연이 말하는 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는 모든 것이 휘발된다. 표백세대는 이 완성된 세상에서 개인의 색깔과 목소리를 잃은 채 살아가야만 한다. 모든 규칙은 기성세대가 정해 놨으니 유지하고 보수하는 삶은 우리 표백세대의 몫이라는 것이다. 세연은 위대한 업적을 이룰 자격을 박탈 당한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저항을 '자살'로 규정하고 '와이두유리브닷컴'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한다. 더불어 자신의 자살선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잡기 모음이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표백을 읽으며 세연이 주장하는 자살 저항은 나에겐 그저 무책임한 방법으로 느껴졌다. 얼마나 더 읽었을까. 잡기 모음 내용을 반절 이상 읽었나? 그 논리가 완벽해 어떠한 반박거리도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모 대학교 학생들의 자살 문제와 전교 1등을 하고 부모에게 이제 됐느냐는 유서만 남긴 채 자살해버린 어느 고등학생의 사연은 허구가 아닌 내가 숨 쉬는 이 나라 어디선가 일어난 현실이기에 그리고 내가 이 '표백세대'의 일원이기에 세연의 이야기는 극단적이지만 한편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 세대와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 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190p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며 나 이외 모든 사람은 경쟁자라 교육 받고 자란 우리 세대. 누군가의 삶을 짓 밟으며 올라간 그곳에 우리가 바라던 행복이라는 게 있을까? 그렇게 세연은 자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표백세대에게 저항하라 유혹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자살이라는 저항이 극단적이라 생각한다. 아무런 색깔을 가지지 못하는 세대라 할지라도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의미를 부여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파이트 클럽」을 쓴 척 팔라닉은 '최고의 복수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것을 보는 것 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상은 아직 세연의 말처럼 완성된 곳이 아니며 우리 세대는 어떤 방법으로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성공'만이 아니다. 우리는 세연에 대한 휘영의 반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중략)...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297p



  위대한 일을 해야만 하는 세대와 자격라는 게 애초에 있긴 한 걸까. 그런 업적을 남기라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기성세대끼리 정해 놓은 규칙 속에 교육 받으며 살아온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우리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도 저항의 방법일 수는 있지만 최고의 저항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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