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한반도 정전체제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평화체제 전환의 요건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한국 정전협정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폭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는 것, 이 협정 발효 후 3개월 이내에 전쟁 참여국들이 정치회의를 소집해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책을 마련할 것, 그리고 한반도에 새로운 무기체계를 반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 P242

정전협정 제4조는 "양측 관련 정부들에 대한 권고"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정전협정의 서명 및 발효 후 3개월 안에 양측 군사령관들은 양측 관련국 정부들에게 양측이 각기 임명한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고위급 정치회의를 개최해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국문제의평화적 해결 등을 협상을 통해서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정전협정의 제5조 63항은 이 협정의 모든 조항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부터 발효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4조 규정대로라면1953년 10월 말까지는 정치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그러나 정치회의 소집은 지연되었다. 북한 측이 한국전쟁 당사자가 아니었던 소련과 인도의 참석을 주장했다. 미국은 반대했다. - P243

문제의 핵심은 (미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군의 남한 주둔을 배경으로) 유엔이 남북한 모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이었다. 공산 측은 유엔의 중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선거를 포함한재통일 과정에서 유엔의 역할을 거부했다. 6월 15일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자유선거와 유엔 감독"이라는 두 가지의 기본 원칙을 공산측이 거부하기 때문에 회의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성명을 내고 회의장을 떠났다. 공산 측은 회의 계속을 주장했다. 한국문제에 관한제네바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 P245

미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협상을 반대하고 프랑스에게 "자유세계"를 위한 전쟁을 계속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거부했고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군사분계선을 북위 17도선으로 타협해 인도차이나 전쟁이 공식 종결된 것은 1954년 7월 21일이었다.
이 협정은 한편으로 한국의 경우처럼 남북 분단을 전제한 군사분계선을 결정한 정전협정이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베트남의 남북 통일정권을 세우기 위한 선거를 규정한 평화협정이기도 했다. - P246

한국 정전협정 제13항은 한반도에 새로운 무기체계를 들여오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1957년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 측에 이 13항을 무시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1958년 미국 - P247

전술핵무기들과 이것들을 발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사일 체계를 한국에 배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합참의장 래드포드에게 핵무기 중심 미국군사전략 재편을 의미하는 ‘뉴룩‘ (New Look)을 추진하라고 지시한것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11월이었다. 이에 따라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NSC 162/2」)는 향후 재래식 분쟁에서도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해 대응한다는 ‘대량보복‘ 전략을 담았다. 그것이 한국 정전협정 조인 3개월 뒤인 1953년 10월이었다.

미국이 대량보복전략을 동아시아에 적용해 오키나와 한국타이완·필리핀·괌에 핵무기를 대량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 P248

미국은 한반도 정전체제의 군사화를 주도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인도차이나에서는 제네바 평화협정의 무력화를 주도한다. 그 배경에는 한국전쟁을 통해 공식화된 미일동맹체제를 바탕으로 동아시아공산주의 봉쇄의 보루로서 일본을 재건한다는 청사진이 있었다. - P249

박정희 정권이 선택한 것은 독자 핵무장 모색이었다. 미국은 핵무장 확산 방지 차원에서 박 정권의 핵무장 기도를 좌절시킨다. 대신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무기의 존재를 사실상 공개하고, 북한에 대한 핵무기 선제사용 위협을 공식화했다.
미국은 또한 한국·일본·필리핀 · 타이완 등 동맹국들의 안보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1976년 한국에서 ‘팀스피릿‘라는 이름의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시작된다. 이 훈련의 규모는 해마다 늘어갔다. 미국은 한국과 미사일협정을 체결해 북한을 직접 위협하는 한국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개발계획을 승인한다. 이로써 한미동맹은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미사일 분야에서의 군비경쟁을 선도했다. 이것이야말로 1990년대초부터 국제화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의 진정한 뿌리였다. - P254

1990년대 초부시 행정부와 1993년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가능성이 커진다.
정책은 중국을 미국 중심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통합시켜서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1995-96년 타이완에서 독립론이 퍼지면서 타이완해협에서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미국 신보수주의 정치세력 내부에중국의 잠재적 도전을 미연에 꺾어야 한다는 중국봉쇄론을 확산시켰다. 이들 신보수주의적 중국관은 2001년 이후 부시 행정부의 대중국정책에 반영된다. 그 핵심은 공화당 보수혁명이 1990년대 중엽부터 추구한 국가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와 결합해 2002년 ABM협정 폐기로 이어진다. 그 결과 미국과 러시아 관계에서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사이에도 새로운 차원의 군비경쟁이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P257

김대중 정권에 이어서 2003년 초 역시 진보 정권인 노무현 정부가출범했지만, 부시 행정부가 북미 제네바합의를 폐기해 북미 간 신뢰관계가 완전한 파국에 도달한 이후였다. 북미 간 신뢰가 회복되어야만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에 의한 북한 핵문제 해결은 이미 기대하기 어려웠다. 2005년 6자회담에 의한 9·19공동성명이 성립했다.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는 이에 서명했지만 재무부는 북한에 금융제재 조치를 발동했다. 성명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미국외교에 대한북한의 불신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북한의 제1차 핵실험은 그 귀결이었다. - P263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대화가 파국을 맞은것은 김정일 정권의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벌어진 혼란, 그리고 이듬해인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天安艦) 침몰사태 때문이었다. - P264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북한붕괴론에발 하나를 담근 것이었다. 2009년 말에서 2010년 초에 김정일 정부가 시도한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북한이 경험하고 있던 대혼란, 뒤이은 김정일 사망으로 들어선 김정은 세습정권의 리더십에 대한 광범한 의심, 그리고 김정은 정권이 시도한 많은 미사일 발사 시험의 실패는 북한붕괴론을 부추겼다. 그것이 이 시기 미국의 전략적인내 정책의 무시할 수 없는 근거였다. - P265

미국의 대북정책은 ‘트럼프판 전략적 인내‘의 노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쟁도 해법이 아니지만 평화협정 협상도 대안이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현상유지 전략에 가깝지만, 북한에 대한 기존의 강력한 제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반중국 동맹네트워크 유지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매우 친화적이다. - P276

미국과 국제 사회를 향해 평화조약 협상의 명분과 전략적 불가피성을 당당하게 밝히며 설득하는 더 적극적인 한국의 외교가 시급하다. 그 핵심은 미국이 사실상 ‘북한의 비핵화 선행조치 요구‘가 뒤섞인 ‘막무가내식 빅딜‘을 내세울 때, 한국은 포괄적이면서도 단계적 동시행동의 일정표를 담은 일괄타결로서의 평화조약 형태의 ‘합리적인 빅딜‘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는 일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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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는 현대 사회가 운명적으로 살아왔던 거주지를 상실함에 따라 인간을 뒷받침해주던 본래적 장소와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파괴될 위협에 처해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차적 안정성의 파괴가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성을 승화하고 상징화할 수 있는 최종적 지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을 둘러싼 욕망과 억압으로 인한 문제에 문을 열었다면, 클라인은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간에 심리적 공간의 파괴와 정신적 삶의 멸절로 이어진 광기(정신병) 분석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최초 모성과의 대상 관계에서 도출한 아브젝시옹을 문화해석의 열쇠로 삼고 있다면, 리쾨르는 상징 해석과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전체성에 대한 시각을 열어준다. 두 대가가 모두 비천함과 성스러움은 인접해 있으며 그 수렴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써 자기중심적인 근대적 자아의 빗장을 열고 타자를 향해 걸음을 옮길 것을 조용히 주장한다. 이러한 사유는 현대인의 메마른 감성에 대한 치유와 새 시대의 영성(靈性)을 위한 지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브젝시옹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대해 그가 만든 개념이다. 그런데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이 최초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숙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할 때 그 고향은 기술 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이었지만, 크리스테바에게 고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이다.

대표적인 지적 기능은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주로 ‘속성판단’과 ‘존재판단’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속성판단은 어떤 사물이 어떤 특수한 속성을 지녔나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판단이고, 존재판단은 어떤 것의 표상Vorstellung이 현실계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반박하는 판단이다.

‘부정’의 메커니즘은 나의 본능을 충족시켜줄 대상 상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아가 대상을 내부에서 축출하거나 거부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부정성’은 최초 사유하는 자아의 정립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가 본능의 만족에 붙들려 있는 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통해 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생의 초기에 유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배척하는가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브젝시옹은 원초적 상실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사고는 항상 원초적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Verneinung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다. 즉, 주체는 대상이 상실되었을 때에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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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해보니 커피와 함께 이 책이 도착해 있었다(커피는 ㅈㅈㄴ님께 땡투했습니다^^).


수하님께서 서문의 일부를 올리셨길래 설마 하며 목차와 서문을 잠시 읽었는데 머리가 띵했다.







부랴부랴 크리스테바로 검색해보니 몇 권의 책이 나왔는데 그 중 저자의 정보가 전혀 없어서 아래 책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브젝시옹'이란 단어 자체를 몰라서 또 검색해보니 이런 책이 나오더라.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은 1부만 크리스테바와 관련되어 있지만 <공포의 권력>과 관련된 내용이라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첫 번째 책은 전자책으로 급하게 주문했는데 두 번째 책까지 주문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세권 다 어떻게 읽겠나ㅠㅠ 아무튼 그동안 여성주의 관련해서 읽어온 책들 중 가장 어려워보인다는 것. 


한달 안에 읽는 것이 가능할지. 그래도 어떻게든 읽어가봐야지. 읽는 분들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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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1-04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은주 선생님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도 약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제가 주문한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석학들의 이론을 알기 쉽게 정리한 인문학 입문서 시리즈를 번역한 거라고 해서 (평도 좋길래) 주문을 했어요. 그런데 책이 원래 얇기도 하지만 <공포의 권력> 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아브젝시옹‘ 부분은 21페이지밖에 안되네요 ^^;; 라이브 이론 책은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해뒀는데 거기까지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공포의 권력>을 읽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읽으시다가 정보 공유 부탁드립니다 ^^

거리의화가 2024-01-04 17:18   좋아요 1 | URL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조금 읽어봤는데요. 프로이트 이론부터 설명을 시작하는데 예시를 들어 설명해줘서 크게 어렵지 않네요. 저자가 말하기에 <공포의 권력>이 워낙 어려워 해설서를 써야겠다 생각해서 썼다고 합니다. 이 책이 <공포의 권력> 읽기 전 참고도서로 좋을 것 같아요(다만 2부는 다른 철학자의 내용입니다). 라이브 이론 책은 저도 크리스테바가 어떤 사람인가만 확인하고 다 읽지는 못할듯!ㅎㅎ 읽다가 관련 내용 올려보겠습니다.

건수하 2024-01-04 17:54   좋아요 1 | URL
화가님 감사합니다 ^^ 올려주시는 글 기다릴게요 :)

다락방 2024-01-04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여러분 제가 무슨 짓을 한걸까요. 저 진짜 시작도 못하겠네요. 아브젝시옹 때문에 미치겠네요? ㅋㅋㅋㅋ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이라니. 저도 여러분들이 관심 있어 하신 책들 다 담아 사야할까요. 생각하는 여자~는 이미 읽었지만 기억이 전혀 안나니(크리스테바..부분이 있었던가요?) 다시 읽어야겠고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여러분의 정보 공유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아놔...Orz

거리의화가 2024-01-04 17:26   좋아요 1 | URL
ㅋㅋ 다락방님.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아직 완전 앞부분이지만 일단 시작은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네요. 아<공포의 권력> 주석에 달려 있는 아브젝시옹 내용은 읽어봐도 뭔 내용인지 모르겠더라구요ㅠㅠ 휴... 아무튼 계속 읽고 공유할 것 있으면 올려보겠습니다.

단발머리 2024-01-04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저도 상호대차 신청했어요. 며칠내에 책 받고 먼저 읽고 ‘공포‘ 쪽으로 가려고요.
우리, 정보 공유 앞으로도 많이 해야할 듯 해요^^

다락방 2024-01-04 14:27   좋아요 3 | URL
저는 방금 샀습니다. 아브젝시옹~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1-04 14:33   좋아요 2 | URL
👏👏👏👏👏

거리의화가 2024-01-04 17:18   좋아요 2 | URL
와! 단발머리님, 다락방님 두분 다 멋지세요! 내용 읽어보니 이 책 참고도서로 괜찮을 듯합니다^^ 화이팅!
 

제3장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신냉전, 그리고 그 너머





청일전쟁과 미국-필리핀전쟁, 그리고 뒤이어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도발한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러시아를 대신해 중국의 동북지역을 장악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체제‘가 성립했다.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새로운 주체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신흥 제국이었다. 이들은 동아시아에서 각각 타이완과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필리핀에 대한 식민 지배를 발판으로, 서로 갈등하면서도 권력정치적 흥정을 통해 상호적응하고 협력했다. 극동에서 러시아의 힘을 견제하는 가운 - P184

데 중국을 경영한다는 두 개의 결정적인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였다.
갈등하되 흥정하며 협력하는 제국주의 카르텔의 질서였다. 이 카르텔의 표지는 동아시아 경영을 위한 일련의 비밀협정들 외에도 미일두 나라 사이에 형성된, 1940년 전후까지 ‘순진한 무역관계‘로 포장되어온 전략적 경제동반자 관계였다.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또 다른축은 기왕에 홍콩과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를 굳히면서이를 기반으로 중국에 대한 공동 경영에 참가하는 영국·프랑스·네덜란드와 같은 유럽 제국들이었다. - P185

트럼프주의는 부유층의 과두정 지향과 중하층 백인사회의 인종주의와반세계화 포퓰리즘의 연합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노동계층의 지지에 의존하는 민주당도 중하층 노동자층의 지지를회복하기 위해 그들의 정치적 요구에 민감해진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거스를 수 없는 미국 정치의 추세가 되었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으로 표상되는 미국 정치 내부의 반자유주의적경향과 포용성의 약화가 대외경제정책에서 개방성의 후퇴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201

바이든의 반세계화는 중국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와 유럽의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무역장벽을 들이대는 더 편협한 보호무역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이 경향을 ‘반도체도, 배터리도, 바이오도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요구와 함께, 이들 산업에 대한 산업보조금 정책으로 구체화했다. 주요 산업의 국적(籍)회복을 추구한 것이다. ‘리쇼어링‘(Reshoring)이라는 명패를 단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 시대가 부활했다. - P202

요컨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분명 ‘조약‘ 수준의 평화협정체제를 구성함으로써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을교환하는 틀을 마련한다는 상호이해에 근거해 진행된 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실제 공동선언의 내용도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함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을 먼저 밝히고 북한 비핵화 의무를 그 뒤에 배치했다. - P209

「2022 타이완 정책법안(The TaiwanPolicy Act of 2022) 전문(前文)에서는 "타이완의 안보를 증진하고, 지역 안정을 확보하며, 타이완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침략을 억지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중국이 타이완에 적대적 행동을 할 경우 중국에 "강력한 제재" (severe sanctions)를 가할 것을 경고했다. 이 법의 본문에서는 타이완의 민주정부를 "타이완 인민의합법적 대표자"로 정의하고, 미국과 타이완의 "강화된 방위 동반자관계"를 규정했다. 또한 타이완을 "주요 비(非)나토 동맹국" (a majornon-NATO ally)으로 지정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이 법에 향후 4년간 타이완에45억 달러 규모의 방위능력 증강을 지원하도록 명시했다. - P217

한반도의 평화협정은 현재에 없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자는 문서다. 핵무기와 핵전쟁 위협으로 고통받는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새 질서의 청사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화협정은 평화과정의 입구로서의 위치가 주어져야 한다. - P233

평화협정 협상에서 떠오를 주요 안건으로는 남북 간 군비통제 문제가 있고, 그것은 거의 합의 불가능한 문제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짓누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창의적으로 다양한 방식의평화협정을 모색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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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의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원폭투하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또한 지금은 더욱 아니다. 현재와 가까운 미래의 우리에게 더 절실한 군사적이고 인간적인 함의를 가진 문제로 엄존해 있다. 특히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첫째, 원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우처럼 ‘거악(巨惡)과의 전쟁을 빨리 끝내는 수단으로서 정당화된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할 합리적·역사적 근거가 있는가에 대해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94

한 발의 폭탄으로 상대국의 비무장한 민간인 수십만 명을 희생시키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 미국이말하는 효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않을 수 없다. - P95

2023년 2월 히로시마지방법원은 히로시마 피폭자들에게서 태어난 28명의 원폭2세들이 일본 정부를 향해 방사능 노출의 유전적 영향을 인정하고 의료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방사능의 유전적 영향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정부가 원폭2세들에게 의료지원을 거부한 것은 위헌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 P102

스팀슨이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트루먼은 원폭실험 성공 이후 포츠담회의에서 소련의 참전에 흥미를 잃었다. 원폭을 이용해 일본의 조기 항복을 이끌어내 소련의 참전 필요성을 예방하기를 가장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국무장관 번스였다. 메트레이가 지적하듯- 이, 이들 미국 지도자들이 원자탄을 사용하려는 주된 이유는 미국인들의 인명 손실을 줄이려는 것이었지만, 이 외에도 "일본의 조기 항복이 가져올 (동아시아에서의) 외교적·전략적 이익"이었다. 소련이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미국이 원폭을 사용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다면, 일본 점령과 일본의 전후 처리에서 소련의 참여를 배제할 수 있었다. 또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이 일방적인 점령을 - P116

할 수 있을 것을 미국은 기대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소련과 함께신탁통치를 협의해야 하는 "귀찮은 문제"도 피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 P117

혹자는 원폭사용으로 미소의 신탁통치를 피할 수 있게 되어다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소 협력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능해지면서 1948년 남북에 단독정권들이 수립되어 분단이 고착화되고, 그로부터 2년 후 거대한 전쟁의 참극이 한반도를 휩쓸고 마는역사적 결과를 생각하면 과연 그것이 다행한 것이었는지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 - P118

일본 정부의 모든 인사가 일치된 견해를 갖고있었던 이슈는 단 두 가지였다. 소련의 참전을 반대하고 천황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을 두고는 일본 정부안에 의견이 갈려 있었다. 군부의 군국주의자들을 포함한 강경파들은 추가로 세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종전 후 일본 점령 반대, 자체적인 무장해제(self-disarmament), 자체적인 전범재판이 그것이었다. - P124

바튼 번스타인에 따르면, 히로시마 원폭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겐 여전히 항복을 결심할 요인이 아니었다. 다만 히로시마에 충격을 받은 천황 히로히토가 개입해 항복을 추진하게 된다. 히로히토는천황제 유지를 유일한 항복조건으로 제시할 것을 내대신 기도에게지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일본 정부 안에서 군국주의 세력을 대표하고 있던 육군상 아나미 레치카(阿南惟)는 네 가지의항복조건 모두를 관철하기 위해 전쟁계속을 고집했다. "본토 결전에서 일본의 승리는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
본토에서 적어도 한 번은 싸워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 P128

외상 도고, 해군대신 요나이, 수상 스즈키는천황 지위 유지라는 것 하나만 항복조건으로 내세울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육군대신 아나미,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그리고 해군군령부총장 도요다는 세 개의 조건을 추가해 관철할것을 주장했다. 무장해제와 전범재판을 일본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것,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에 대한 연합국 점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날의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천황의 바람과 달리 결론을내지 못하고 끝났다. - P133

9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결단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그날 오전에먼저 열렸던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주장한 자와 ‘철저항전파‘가 3 대 3으로 갈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 열린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결심이 중요해졌다." 이자리에서 천황은 "천황제 유지"를 유일한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의견을 밝힌다. 천황의 말은 그 자체가 지시도 아니었고 - P134

구속력 있는 결정도 아니었지만, 3 대 3의 대립상태를 해소했다. 군부 강경파들도 동의했다. - P135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는 11일의 미국 답변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아울러 국민이 자신의 결정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나라에 방송할조칙(詔勅)을 준비할 것을 내각에 요청한다. 128이때 일부 군부 강경파들은 쿠데타를 시도하고 이 쿠데타는 거의성공할 뻔했다. 육군상 아나미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즈가 개입해 쿠데타를 봉쇄하고 내각을 유지함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 P139

전쟁에서 도덕성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라고 많은 사람이말해왔다. 그러나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스스로 인간임을 의식하는 한, 도덕성의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그럼 ‘전쟁에서의 도덕성‘
이라는 것의 요체는 무엇인가. 전쟁에서도 도덕성의 마지노선은 비무장 인간집단에 대한 살상행위를 배제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전쟁범죄‘
규정의 기본적 전제일 것이다. 전략폭격이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비무장 민간인이 대부분인 인구집중 도시들을 목표물로 삼는 대량살상행위라는 데에 있다. - P151

적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군사무기의 등장과 혁명과 반동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총력전의 시대를 열면서, 다른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부정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심오한 야만의 시대의 특징이다. 원폭은 그 본질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 P153

전시에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을 부과하는 국제법은 전후에 구체화됐다. 1949년의 제네바협정(Geneva Conventionsof 1949)과 이 협정에 대한 1977년의 제1 및 제2의정서(Protocols of1977)가 그것이다. 제1의정서의 48조는 교전 당사국들에 대해 민간인과 전투요원의 구별, 그리고 민간인 사물과 군사적 목표물(civilianobjects and military objectives)의 구별을 의무화했다. 이를 전제로군사적 공격은 군사적 목표물만을 대상으로 하도록 했다. 42조는 군사적 목표물을 정의했다. "그 성격과 위치, 목적 또는 사용에 의해서군사행동에 실질적 기여를 할 수 있고, 그것을 전부 혹은 일부 파괴하거나 포획하거나 무력화시켰을 때 당시 상황에서 명확한 군사적이점을 제공할 사물들"이라고 했다. 한편 54조는 민간인의 생존에필수적인 사물의 보호를 규정했다. 교전국들은 식료품과 같이 민간 - P161

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사물들을 공격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다. 예외는 적대국이 군대만을 위한 필수품으로 사용하는것이거나 군사행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사물들로 한정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두 도시에 대한 미국의 원폭투하가 수십만 비무장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한 점을 생각하면 보다 포괄적인적실성을 갖는 것은 분명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다룬 국제규범의 현주소라고 생각된다. 민간인 대량학살을 다루는 전후의 첫 국제적 규범의 성립은 물론 뉘른베르크법정과 도쿄재판의 근거가 된 국제군사법정(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IMT)의 성립이었다. 이법정의 법적 근거는 1945년 8월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네 나라가 체결한 ‘런던협정‘(London Agreement)의 부속합의문으로 채택된 「국제군사법정 현장(Charter)」이었다. 전범재판 법정의 구성과기본 절차를 규정한 이 헌장은 제6조에서 "이 법정은 유럽 추축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으로서 또는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다음 세가지 범죄 중의 어떤 것이라도 저지른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평화를 파괴한 죄 (crimes againstpeace), 전쟁범죄(war crimes), 그리고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humanity)였다. 이 헌장은 그와 관련된 모든 행위에 대해 ‘개인적 책임’(individual responsibility)을 물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 P162

1907년의 헤이그 규정 제46, 47, 50조는 그positive rules) 위반규칙들의 적용에 어떤 예외도 두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innocentpopulation)의 권리는 그 어떤 군사적 필요나 편의에도 불구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군사적 필요"로 정당화하는 것을 거부한뉘른베르크의 미국군사법정의 판결이 정당성과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패전국뿐 아니라 미국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전쟁행위에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옳을 것이다. 뉘른베르크의 미국군사법정이단죄한, 저항하는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인질로 삼아 계획적으로 학살해간 빌헬름 리스트의 나치 군대의 만행으로부터, 군부를 비롯한 일본 지도부의 항복을 더 일찍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행해진 이 나라 두 도시의 수십만 남녀노소 민간인들에 대한 원폭사용과 그 추가적인 사용의 위협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주민 인질 잡기와 대량학살이란 점에서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 P167

한국의 운명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원폭투하가없었다면 더 불행해졌을 것이란 생각도, 그리고 그 반대의 생각도 모두 역사적 가정법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이 두 도시의 수십만에 달하 - P177

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한 결과로 전개된 한반도의 역사는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을 역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뒤늦게나마 한반도의 반쪽이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는 세대의 시점에서 해방 후 10년의 비극과 그 이후 지속된 분단과갈등의 역사를 ‘가능한 차선(善)‘이었다고 말해버릴 수는 없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십만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육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역사인식의 문제가 어느 쪽으로는 ‘닫힌 역사적 가정법‘에 갇혀 전단(專斷)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178

일본의 이웃 사회들이 풀어나갈 첫 숙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의 반인도성에 대한 인식의 공유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의 두 도시에 대한 원폭투하의 반인도성에 대한 인식을 우선 한국인들이 가급적 널리 공유하고 그것을 다른 동아시아 사회들과 더 광범하게 나눌 수 있다면, 일본 사회의 역사반성이 이웃 사회PARTIR IKK들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사회 내부로부터 일본인들의 가슴으로부터 진정하게 우러난 것이 될 수 있는 기본조건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은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를 풀어낼 실마리가 될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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