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테바는 현대 사회가 운명적으로 살아왔던 거주지를 상실함에 따라 인간을 뒷받침해주던 본래적 장소와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파괴될 위협에 처해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차적 안정성의 파괴가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성을 승화하고 상징화할 수 있는 최종적 지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을 둘러싼 욕망과 억압으로 인한 문제에 문을 열었다면, 클라인은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간에 심리적 공간의 파괴와 정신적 삶의 멸절로 이어진 광기(정신병) 분석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최초 모성과의 대상 관계에서 도출한 아브젝시옹을 문화해석의 열쇠로 삼고 있다면, 리쾨르는 상징 해석과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전체성에 대한 시각을 열어준다. 두 대가가 모두 비천함과 성스러움은 인접해 있으며 그 수렴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써 자기중심적인 근대적 자아의 빗장을 열고 타자를 향해 걸음을 옮길 것을 조용히 주장한다. 이러한 사유는 현대인의 메마른 감성에 대한 치유와 새 시대의 영성(靈性)을 위한 지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브젝시옹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대해 그가 만든 개념이다. 그런데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이 최초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숙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할 때 그 고향은 기술 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이었지만, 크리스테바에게 고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이다.

대표적인 지적 기능은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주로 ‘속성판단’과 ‘존재판단’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속성판단은 어떤 사물이 어떤 특수한 속성을 지녔나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판단이고, 존재판단은 어떤 것의 표상Vorstellung이 현실계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반박하는 판단이다.

‘부정’의 메커니즘은 나의 본능을 충족시켜줄 대상 상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아가 대상을 내부에서 축출하거나 거부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부정성’은 최초 사유하는 자아의 정립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가 본능의 만족에 붙들려 있는 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통해 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생의 초기에 유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배척하는가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브젝시옹은 원초적 상실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사고는 항상 원초적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Verneinung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다. 즉, 주체는 대상이 상실되었을 때에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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