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원폭투하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또한 지금은 더욱 아니다. 현재와 가까운 미래의 우리에게 더 절실한 군사적이고 인간적인 함의를 가진 문제로 엄존해 있다. 특히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첫째, 원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우처럼 ‘거악(巨惡)과의 전쟁을 빨리 끝내는 수단으로서 정당화된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할 합리적·역사적 근거가 있는가에 대해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94
한 발의 폭탄으로 상대국의 비무장한 민간인 수십만 명을 희생시키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 미국이말하는 효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않을 수 없다. - P95
2023년 2월 히로시마지방법원은 히로시마 피폭자들에게서 태어난 28명의 원폭2세들이 일본 정부를 향해 방사능 노출의 유전적 영향을 인정하고 의료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방사능의 유전적 영향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정부가 원폭2세들에게 의료지원을 거부한 것은 위헌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 P102
스팀슨이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트루먼은 원폭실험 성공 이후 포츠담회의에서 소련의 참전에 흥미를 잃었다. 원폭을 이용해 일본의 조기 항복을 이끌어내 소련의 참전 필요성을 예방하기를 가장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국무장관 번스였다. 메트레이가 지적하듯- 이, 이들 미국 지도자들이 원자탄을 사용하려는 주된 이유는 미국인들의 인명 손실을 줄이려는 것이었지만, 이 외에도 "일본의 조기 항복이 가져올 (동아시아에서의) 외교적·전략적 이익"이었다. 소련이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미국이 원폭을 사용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다면, 일본 점령과 일본의 전후 처리에서 소련의 참여를 배제할 수 있었다. 또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이 일방적인 점령을 - P116
할 수 있을 것을 미국은 기대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소련과 함께신탁통치를 협의해야 하는 "귀찮은 문제"도 피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 P117
혹자는 원폭사용으로 미소의 신탁통치를 피할 수 있게 되어다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소 협력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능해지면서 1948년 남북에 단독정권들이 수립되어 분단이 고착화되고, 그로부터 2년 후 거대한 전쟁의 참극이 한반도를 휩쓸고 마는역사적 결과를 생각하면 과연 그것이 다행한 것이었는지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 - P118
일본 정부의 모든 인사가 일치된 견해를 갖고있었던 이슈는 단 두 가지였다. 소련의 참전을 반대하고 천황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을 두고는 일본 정부안에 의견이 갈려 있었다. 군부의 군국주의자들을 포함한 강경파들은 추가로 세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종전 후 일본 점령 반대, 자체적인 무장해제(self-disarmament), 자체적인 전범재판이 그것이었다. - P124
바튼 번스타인에 따르면, 히로시마 원폭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겐 여전히 항복을 결심할 요인이 아니었다. 다만 히로시마에 충격을 받은 천황 히로히토가 개입해 항복을 추진하게 된다. 히로히토는천황제 유지를 유일한 항복조건으로 제시할 것을 내대신 기도에게지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일본 정부 안에서 군국주의 세력을 대표하고 있던 육군상 아나미 레치카(阿南惟)는 네 가지의항복조건 모두를 관철하기 위해 전쟁계속을 고집했다. "본토 결전에서 일본의 승리는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 본토에서 적어도 한 번은 싸워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 P128
외상 도고, 해군대신 요나이, 수상 스즈키는천황 지위 유지라는 것 하나만 항복조건으로 내세울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육군대신 아나미,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그리고 해군군령부총장 도요다는 세 개의 조건을 추가해 관철할것을 주장했다. 무장해제와 전범재판을 일본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것,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에 대한 연합국 점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날의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천황의 바람과 달리 결론을내지 못하고 끝났다. - P133
9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결단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그날 오전에먼저 열렸던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주장한 자와 ‘철저항전파‘가 3 대 3으로 갈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 열린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결심이 중요해졌다." 이자리에서 천황은 "천황제 유지"를 유일한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의견을 밝힌다. 천황의 말은 그 자체가 지시도 아니었고 - P134
구속력 있는 결정도 아니었지만, 3 대 3의 대립상태를 해소했다. 군부 강경파들도 동의했다. - P135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는 11일의 미국 답변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아울러 국민이 자신의 결정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나라에 방송할조칙(詔勅)을 준비할 것을 내각에 요청한다. 128이때 일부 군부 강경파들은 쿠데타를 시도하고 이 쿠데타는 거의성공할 뻔했다. 육군상 아나미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즈가 개입해 쿠데타를 봉쇄하고 내각을 유지함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 P139
전쟁에서 도덕성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라고 많은 사람이말해왔다. 그러나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스스로 인간임을 의식하는 한, 도덕성의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그럼 ‘전쟁에서의 도덕성‘ 이라는 것의 요체는 무엇인가. 전쟁에서도 도덕성의 마지노선은 비무장 인간집단에 대한 살상행위를 배제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전쟁범죄‘ 규정의 기본적 전제일 것이다. 전략폭격이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비무장 민간인이 대부분인 인구집중 도시들을 목표물로 삼는 대량살상행위라는 데에 있다. - P151
적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군사무기의 등장과 혁명과 반동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총력전의 시대를 열면서, 다른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부정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심오한 야만의 시대의 특징이다. 원폭은 그 본질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 P153
전시에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을 부과하는 국제법은 전후에 구체화됐다. 1949년의 제네바협정(Geneva Conventionsof 1949)과 이 협정에 대한 1977년의 제1 및 제2의정서(Protocols of1977)가 그것이다. 제1의정서의 48조는 교전 당사국들에 대해 민간인과 전투요원의 구별, 그리고 민간인 사물과 군사적 목표물(civilianobjects and military objectives)의 구별을 의무화했다. 이를 전제로군사적 공격은 군사적 목표물만을 대상으로 하도록 했다. 42조는 군사적 목표물을 정의했다. "그 성격과 위치, 목적 또는 사용에 의해서군사행동에 실질적 기여를 할 수 있고, 그것을 전부 혹은 일부 파괴하거나 포획하거나 무력화시켰을 때 당시 상황에서 명확한 군사적이점을 제공할 사물들"이라고 했다. 한편 54조는 민간인의 생존에필수적인 사물의 보호를 규정했다. 교전국들은 식료품과 같이 민간 - P161
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사물들을 공격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다. 예외는 적대국이 군대만을 위한 필수품으로 사용하는것이거나 군사행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사물들로 한정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두 도시에 대한 미국의 원폭투하가 수십만 비무장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한 점을 생각하면 보다 포괄적인적실성을 갖는 것은 분명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다룬 국제규범의 현주소라고 생각된다. 민간인 대량학살을 다루는 전후의 첫 국제적 규범의 성립은 물론 뉘른베르크법정과 도쿄재판의 근거가 된 국제군사법정(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IMT)의 성립이었다. 이법정의 법적 근거는 1945년 8월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네 나라가 체결한 ‘런던협정‘(London Agreement)의 부속합의문으로 채택된 「국제군사법정 현장(Charter)」이었다. 전범재판 법정의 구성과기본 절차를 규정한 이 헌장은 제6조에서 "이 법정은 유럽 추축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으로서 또는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다음 세가지 범죄 중의 어떤 것이라도 저지른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평화를 파괴한 죄 (crimes againstpeace), 전쟁범죄(war crimes), 그리고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humanity)였다. 이 헌장은 그와 관련된 모든 행위에 대해 ‘개인적 책임’(individual responsibility)을 물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 P162
1907년의 헤이그 규정 제46, 47, 50조는 그positive rules) 위반규칙들의 적용에 어떤 예외도 두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innocentpopulation)의 권리는 그 어떤 군사적 필요나 편의에도 불구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군사적 필요"로 정당화하는 것을 거부한뉘른베르크의 미국군사법정의 판결이 정당성과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패전국뿐 아니라 미국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전쟁행위에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옳을 것이다. 뉘른베르크의 미국군사법정이단죄한, 저항하는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인질로 삼아 계획적으로 학살해간 빌헬름 리스트의 나치 군대의 만행으로부터, 군부를 비롯한 일본 지도부의 항복을 더 일찍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행해진 이 나라 두 도시의 수십만 남녀노소 민간인들에 대한 원폭사용과 그 추가적인 사용의 위협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주민 인질 잡기와 대량학살이란 점에서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 P167
한국의 운명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원폭투하가없었다면 더 불행해졌을 것이란 생각도, 그리고 그 반대의 생각도 모두 역사적 가정법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이 두 도시의 수십만에 달하 - P177
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한 결과로 전개된 한반도의 역사는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을 역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뒤늦게나마 한반도의 반쪽이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는 세대의 시점에서 해방 후 10년의 비극과 그 이후 지속된 분단과갈등의 역사를 ‘가능한 차선(善)‘이었다고 말해버릴 수는 없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십만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육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역사인식의 문제가 어느 쪽으로는 ‘닫힌 역사적 가정법‘에 갇혀 전단(專斷)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178
일본의 이웃 사회들이 풀어나갈 첫 숙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의 반인도성에 대한 인식의 공유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의 두 도시에 대한 원폭투하의 반인도성에 대한 인식을 우선 한국인들이 가급적 널리 공유하고 그것을 다른 동아시아 사회들과 더 광범하게 나눌 수 있다면, 일본 사회의 역사반성이 이웃 사회PARTIR IKK들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사회 내부로부터 일본인들의 가슴으로부터 진정하게 우러난 것이 될 수 있는 기본조건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은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를 풀어낼 실마리가 될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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