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레구의 원정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통일된 제국이수행한 마지막 원정이었다. 이러한 원정은 1260년 이후 불가능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1259년 뭉케가 사망한 뒤 대칸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갈등 때문이다. 이제 제국은 다소 단순화해서말하자면 네 개의 독립된 칸국으로 나뉘었다. 중국과 몽골의 대칸국, 중앙아시아의 차가다이 울루스, 폰투스초원의 킵착 칸국, 그리고 훌레구 울루스가 그것이다. 그중 오직 일 칸들만이 쿠빌라이 - P321

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쿠빌라이는 훌레구의 형이고, 서방 원정군을 파견한 뭉케의 지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킵착 칸국 통치자들은 쿠빌라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차가다이 울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의 상황은 차가다이 영토 내에 새로운 칸국이 들어서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 칸국은 쿠빌라이의 적대적 반대자이자 우구데이 가문의 일원인 카이두가 이끌었다. 따라서 새로수립된 홀레구 울루스는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동쪽과 북쪽 국경에서 잠재적이고 종종 실제적인 적들을 상대해야 했고, 이집트와시리아의 맘룩 정권의 적대감도 감당해야 했다. - P322

케식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세습됐으며, 그 일원이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특권이자 의무였다. 홀레구 울루스에서 케식은 주로 페르시아 관료제와 병행하는 일종의 행정 체계를 구성했다(일부는 겹치기도 했다. 라시드 앗 딘은 자신이 아미르 쿠틀룩 샤와 같은 케식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는 몽골 페르시아 정부가 몽골적 특성을 매우 두드러지게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페르시아인과 몽골인 사이의 문화 변용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홀레구 울루스의 정치는 몽골인과 페르시아 관료를 모두 포함한 파벌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 P342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울제이투가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라시드 앗 딘은 가잔이 자신에게 의뢰하여 완성한 몽골사를 울제이투에게 헌상했고, 새로운 일 칸은가잔을 추모하는 의미로 이 작업을 이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라시드 앗 딘은 몽골이 만났던 모든 민족들에 대한 기록까지 포함시켜야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대작의 "세계사" 부분이다. 여기서 라시드 앗 딘은 중국인, 인도인, 튀르크인, 프랑크인 등의 역사를 서술했다. 추가된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사학사적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 P366

초기 몽골의 파괴적 영향과 그 이후의 통치 성격, 특히 홀레구가 자신과 후계자들을 위해 영구적인 왕국을 수립한 이후의 통치 성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 P383

몽골의 페르시아 지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고볼 수 있다. 적어도 초기 몽골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그랬다. 더 나아가 페르시아가 현대 이란 국가로 발전하는 데 몽골인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몽골인들이 그들의 페르시아 왕국을 "이란"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는 7세기 무슬림 아랍인의 침략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던 고대의 명칭이다. 몽골이 정복했을 당시 "이란"이라는 정치체는 600년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몽골의 이란 영토는 16세기 사파비 왕조가수립한 것보다 약간 더 넓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현대 이란의 국경과도 일치한다. 페르시아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명을 할 수 있다.
물론 페르시아어는 구어로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문어로 - P394

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됐다. 교육받은 계층 사이에서 아랍어로대체됐기 때문이다. 아랍어는 아랍 지배자들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페르시아로 가져온 이슬람교의 언어이기도 했다. 물론,
몽골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이미 "신(페르시아어 "(아랍 문자를 변형해 쓰고 수많은 아랍어 차용어를 포함한 페르시아어)가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랍어는 높은 위신과 지위를 유지했다. 쿠란과 이슬람 법학 및 신학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의 몽골인들에게 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 몽골의 통치 시기에는 신페르시아어가 아랍어를 제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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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집중해서 읽다가 우연히 알고리즘에 의해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들어봤지만 저자의 이름은 좀 낯설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라...' 되뇌어봐도 입에 탁 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책을 다 읽을 무렵 저자의 이름이 덜 낯설어지게 되었으니 다행인건가.

러시아 문학을 읽을 때마다 러시아 인명에 익숙해지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건가 다시 한 번 느낀다.

성과 이름을 합쳐서 하나만 쓰면 될 것이지 이들은 이름이 워낙 길다 보니(성이 겹치니 구별을 위해 길어지는 것 같기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 있다. 문제는 원래의 이름과 발음조차 비슷하지도 않은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때는 매번 다른 인물인가 하고 헷갈리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아, 아까 그 사람이구나...' 하는 경우가 몇 번이고 생긴다는 말.

닥터 지바고는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그 이후의 갈등과 여진, 적군과 내군 간의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사랑 이야기다. 보편적인 주제인 사랑 이야기라 오히려 기대치를 내려놓고 봐서인지 나름 잘 읽었다. 물론 나는 역사적 배경에 더 꽂혀 읽었으나 점차 주인공의 감정과 서사에 연민을 느끼면서 마지막에는 주인공 남녀의 결말에 한편으론 허무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짠하기도 해서 복잡한 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세월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말이 있던가. 사람은 의지를 갖고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지만 이것은 너무 팍팍하지 않을 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내 땅을 빼앗기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선택의 자유를 빼앗긴다면 돌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이웃과 국가, 세상은 협력자가 되었다가도 배신자가 되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 보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사건이지 당시 러시아에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제군주정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이들이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겁니다! ... 전 러시아의 지붕이 뜯겨져 나갔고, 전 러시아의 민중과 우리는 열린 하늘 아래 놓이게 된 겁니다. 우리를 감시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자유! 말이나 요구뿐이 아닌 진짜 자유, 기대 이상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유죠."

"모든 이에게 변화와 대변혁이 일어났죠. 각자에게 두 가지 혁명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자신의 개인적인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의 혁명이라고요. 제 생각에 사회주의,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혁명이 강줄기가 되어 흘러 들어가는 바다, 삶의 바다, 자주성의 바다예요. ... 이제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몸으로,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 혁명을 겪기로 결정을 내린 거죠."

이들이 원하는 이상은 공동의 목표인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각자 다름을 인지하게 된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편, 다른 한편에는 볼셰비키 편에 선 이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보다 건설적인 계획을 위해서 일정 정도의 파괴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었는가 하면(파괴의 정도는 논외로 하고)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여 새 삶을 일구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과정을 군중의 목소리를 빌어 '역사의 현장'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노동자 주민은 거주 공간을 제공받아 이주하고, 노동자가 아닌 주민은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과연 이들은 이런 형태를 원했던 걸까? 사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혁명이 그들을 깨우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더 큰 억압의 굴레를 마주해야만 했다. 생각했다. 과연 이들 중 진정으로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그중 다른 이들에 의해 동화된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변혁을 꿈꿀 수는 있어도 결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구체적인 목표가 없는 경우는 도중에 파기될 수도 있고 실현 가능성조차 낮을 수 있다. 사실 영웅은 몇 명에 불과하다. 서로를 모방하며 만들어진 우연이 역사가 되기도 한다는 것, 필연 같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이들은 이후 이동, 전쟁을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가깝거나 먼(또는 모르는) 이들을 통해 배신을 경험했으며 파멸, 죽음의 광경을 수도 없이 목도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쟁터에 나갔고 여자들은 간호사로 나가 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정을 살리기 위해 더 힘든 고난을 마주해야 했다.

라라는 일찍부터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고 미쳤으며 이후의 인생은 파멸, '돌아서 사는 삶'을 살아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고 천사 같은 광영을 본다. 라라가 하는 모든 일이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인 것을 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아니겠는가.

유리 지바고(유라)는 의사로 혁명 초기에는 이념을 열렬히 신봉한 만큼 열정적이었으나 10월 혁명 이후에는 시들해진다. 피를 흘려가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회의가 일었고 삶과 유리된 구호가 의미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의 삶이었다. 나도 지바고의 이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치만 파트너로 토냐 대신 라라를 선택한 것은 선뜻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토냐는 가정을 누구보다 잘 꾸려나간 강인한 여성이었다. 결국 감정이 가지 않았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래도 이미 있는 가정을 놓고 이상의 여인을 쫓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유라와 라라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자꾸만 커져 가는 라라에 대한 마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유라는 (드디어는) 결심 끝에 라라의 집에 간다. 이때 하필 지바고는 부대의 의사가 살해당했다며 의료 노역자로 동원당하고 만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강제 동원에서 빠져 나와 라라와 다시 해후한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탈영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쫓기는 입장에서 그녀와 헤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끝내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다. 둘의 최후가 어쩜 그리 안타깝던지... 그리운 이를 두고 떠나가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생각하면 참 먹먹하다.

"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 구부린 팔꿈치가 당신을 기억하는 한, 내 팔과 입술이 당신을 느끼는 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으리라. 뭐든 훌륭하고 오래 기억될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리라. 부드럽고 또 부드러운, 아프게 슬픈 묘사로 당신에 대한 추억을 기록하리라. 이것을 다 할때까지 이곳에 남으리라. 그 후에 떠나리라. 이렇게 당신을 표현하리라. ..."

3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4월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겨우 읽었다니 너무 오래 걸렸다. 길이가 상당한 소설인 만큼 등장 인물도 많고 그들 간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그래서 사실 이해하는 것에 집중을 요하지만 중반 이후에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막 읽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배경 이야기를 적는 데는 수월해서 금방 적어내려간 반면 인물을 이야기하고 그들 간에 이야기를 어떻게 적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어서 자꾸 글이 멈칫 멈칫 했다.

그래도 써놓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울 것 같아 짧게나마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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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4-2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라가 토냐보다 라라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은...... 라라가 이쁘기 때문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6-04-28 14:1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뭐 그렇겠죠^^; 책임과 의무를 져버릴 만큼 뛰어난 외모였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라라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마치 신처럼 묘사하더라구요. 근데 제가 한 눈에 빠진 사랑을 해보지 못한 경우라 감정 이입이 잘 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도 서서히 스며든 케이스라서요ㅋㅋㅋ

다락방 2026-04-28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구부린 팔꿈치가 당신을 기억하는 한‘ 이라니... 구부린 팔꿈치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한다고 하는걸까요. 팔꿈치에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 걸까요.. 왜 구부린 팔꿈치가 당신을 기억할까. 그저 내 온 몸 구석구석이 기억한다든 비유일까요. 구부린 팔꿈치 참.. 걸리적 거리네요. 유머인가..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거리의화가 님과 제가 아주 다른 사람이구나, 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저는 감상을 쓸 때면 언제나 배경에 대해 흐릿해지거든요. 배경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어요. 인물들의 감정에 대해 쓰는건 전혀 어렵지 않은데 배경은 정말이지 어휴... 그런데 거리의화가 님은 저랑 완전 반대십니다!!

거리의화가 2026-04-29 08:11   좋아요 0 | URL
다양한 관점으로 읽는 것이 책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저는 확실히 인물(과 이야기)에 취약한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제나 다락방 님의 글을 읽는 것이 제겐 신선하고 재밌습니다.
 

원 조정은 남송의 광범위한 상업적, 외교적 관계를 남중국해에서 물려받았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몽골은 이러한 기존의 관계를 결국 몽골 제국에 항복한 모든 이들에게 기대되는 종속국 지위로 전환하려 했다." 이 요구는 중국과의 전통적조공 관계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고, 압도적인 힘으로만 강제할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원은 고려 이외의 지역에서는 이를 실현할수 없었다. - P215

쿠빌라이가 몽골 제국에 남긴 유산은 두 가지 모순된 결정에서 비롯했다.
첫째는 한법, 즉 중국의 법을 채택한 것이고, 둘째는 몽골의 정복사명을 따라 남방을 제국에 편입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결정은 제국의 지배층에 막대한 재정적, 행정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 P231

쿠빌라이 가문 내부의 갈등은 차가다이 가문과의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테무르의 즉위는 평화롭게 결정됐지만,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의 야심은 분명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진김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모두 최소한 한 번씩은 통치했다. 진김의 후손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항상 쿠빌라이의 유언에 따라 방계가문은 왕위 경쟁에 나설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쿠빌라이의 다른 아들들의 많은 후손들은 이 "법"에 맞서서 야심을 굽히지 않았다. - P247

지정 연간에 발생한 기근의 두 번째 원인은 왕조 전반에 걸쳐서 기근에 대비한 비축 물자가 소진된 데 있다. 이러한 비축물의첫 번째 유형은 농업 위기 시 활용할 수 있는 자연적 비축물 (채집할수 있는 천연 식량 자원)이며, 화폐와 곡물 같은 정부 차원의 비축물이두 번째 유형이다. 역설적으로 평화와 번영, 효과적인 기근 구제로인한 인구 증가가 첫 번째 유형의 비축물을 감소시켰고, ‘태정의수렁‘과 더불어 정부 기능 및 의욕 상실이 두 번째 유형을 감소시켰다. 정확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섬서 지역에서는 가뭄 4년 차에이르러서야 식인 사태가 발생한 반면, 대동에서는 2년 만에 그런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 P280

쿠빌라이는 집권 말기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의 남중국 정복은 카안의 울루스에 몽골 세계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제국의 원래 중심지인 몽골과 멀리 떨어진 해외 조공국들을모두 아우르는 권위였다. 또한 이 정복은 몽골 통치자들에게 해양세계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었고, 몽골 시대의 유명한 문화 교류를활성화한 제도들의 정점이 됐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톨루이 계열통치자들은 이 전례 없는 해상 연결을 통해 중동과 동아시아 문명의 독특한 융합을 이루어냈고, 이는 청에서 오스만튀르크에 이르는 후대 유라시아 정권들에 영향을 미쳤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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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제국이 몰락하고 몽골고원에서 후퇴함에 따라 초원에서는 혼란과 불안정이 야기됐으며, 기존 주민들과 새로운 난민들 모두가 생계를 위한 치열한 투쟁으로 내몰렸다. 상대적으로 정체가 모호하고 경제적 기반도 약했던 몽골인들이 이 지역을 통일하고 국가를 건설할 거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내륙 아시아에서의 국가 탄생은 부분적으로 ‘위기 상황에 대한사회적 대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 P44

카안(대칸)이라는 칭호는칭기스가 죽은 이후, 아마도 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1264년경에 수여됐을 것이다. 3" 알타이 민족들은 백색과 9라는 숫자를 길한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흰 깃발인 툭(tuq)은초원 민족들에 대한 칸의 독점적 주권의 상징이 됐다. 1211년 이전부터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대몽골국(大蒙古國, YekeMongol Ulus), 즉 몽골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금의 중국식 명칭인 대금국(大金國)을 모델로 삼은 것이며, 한문 사료에는 - P52

대몽골국 또는 대조(大朝)로 기록됐다. 몽골의 집회에서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잔치를 베풀고 상을 배분하면서, 이들은 제국 설립과 새로운 지배 엘리트의 추대를위한 기반을 명문화하고 신성화했다. 몽골 사회의 무법과 폭력을질서와 규율로 대체하려는 욕구는 곧 칸의 제도 개혁의 추진력이됐다. 여기에는 초원 민족을 재편성하기 위해 칭기스 칸의 추종자들, 특히 영웅적인 행적을 보인 인물과 눈에 띄는 충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례도 포함됐다. - P53

몽골이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고 그에 따라 많은 비유목 민족들과 땅들을 흡수하면서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발생했다. 칭기스칸이 고향을 떠나 진군했을 때의 원래 목적(복수와 약탈)은 변화했다. 정복은 이제 신성한 사명이 됐다. 155 유라시아 초원은 점차 온전한 통일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이는 우구데이에 의해 완성됐다. 이로 인해 초원 주변의 정주 문명들은 칭기스의 후계자들이 계속 확장해나가는 제국에 저항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그 일부로 편입될수밖에 없었다. - P95

우구데이의 사망은 몽골 특유의 정치 양상을 야기했고, 이는 여러 층위에서 잠재된 차이와 갈등을드러냈다. 물질적 차원에서는 인력을 포함한 경제적 자원에 대한접근성, 사회적·정신적 차원에서는 몽골 정체성, 그리고 이념적또는 구조적 차원에서는 창건자의 유지에 대한 해석과 심지어 그표현 등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는 역사가들이몽골 역사를 쓸 때 사용하는 사료들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 시점에서 제국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했다고 해도, 그것은 전적으로 우구데이 재임 기간에 발생한 문제이다.
지배 집단 내부의 다툼은 오랫동안 작용해온 역학, 즉 강력한카툰들이 자신의 아들(또는 대리인)을 왕좌에 앉혀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보호하려는 욕구, 계승 절차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황금씨족의 선임 지도자들(아카)인 주치계 칸 바투와 오르다,
그리고 톨루이계 카툰 소르칵타니 베키의 입장, 정치적으로 밀려나고 (자원의 감소와 함께) 영토가 제한되는 상황에 대한 차가다이계와 우구데이계 왕자들의 점점 커지는 경계심 등이 표면화한 것이었다. - P122

뭉케의 승리로 인해 톨루이 가문의 미덕과 희생, 특히 자삭준수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페르시아 측 사료에서 즐겨 다룬 주제는 소르칵타니 베키에대한 찬사였다. 그녀는 이상적인 몽골의 어머니이자 카툰으로, 자녀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재혼을 거부한 지혜로움을 지녔다고 묘사됐다. 심지어 칭기스의 어머니 후엘룬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다른 서사는 막내아들이자 아버지의 화로를 물려받은톨루이가 칭기스의 유일하고 진정한 후계자였음을 강조하는 서사이다. 「몽골비사」의 편찬과 개정, 중국과 몽골의 다양한 전통에서보이는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의 모습, 주베이니와 라시드 앗 딘의연대기 등은 모두 뭉케의 집권을 ‘칭기스 칸 그 자체‘라는 자삭의원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사건으로 재해석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오직 뭉케만이 칭기스의 유산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P142

1259년경에는 몽골의 정치적 통일성이 취약해졌고, 과도한 확장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뭉케가 제국의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잘 통합해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는 불가피한 분열을 늦추었으며, 제국을 이루는 각부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뭉케의 통치는 대칸이 칭기스의 비전을 어떻게 역동적 청사 - P166

진으로 확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후 몽골인들이 분열을 어떻게다루었는지는 몽골 제국의 역사적 우연성, 변화, 지속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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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베이징에 4박 5일 간 여행을 다녀왔다.

대부분 인생에 한 번쯤은 자금성과 만리장성에 가보는 꿈을 꿀 것이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적부터 내 버킷 리스트에는 유독 어딘가를 여행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많았다.
무언가를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은 그때부터 내게 소중한 가치였던 셈이다.

베이징에 대한 인상은 상하이와는 완전 달랐다.
상하이는 금융 도시이자 경제 특구로 일찍부터 개방되어 외국인들, 관광객들이 많아 음식도 그렇고 글로벌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베이징은 중심가를 제외하면 골목에 옛 정취가 남아 있어 로컬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지역 범위가 넓어 가려는 곳을 걸어다니기는 무리인 만큼 지하철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나 있는 편이었다(총 17호선이었던가?).
상하이는 도보를 많이 했고 항저우는 디디를 많이 이용했다면 베이징은 지하철을 정말 많이 이용했다.

베이징은 상하이보다 확실히 정치적인 느낌이 있다.
어딜 가든 보안 검색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경찰서가 거의 도로 한 블럭마다 존재했고 돌아다니는 군인과 경찰이 많았다. CCTV는 말할 것도 없고^^
또 봄철 황사가 워낙 악명이 높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심했다.
폭우가 내린 한 날 빼고 대기질이 불쾌하다고 날씨앱에서 계속 알림이 왔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은 예사인지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니는 분들이 많았다.

만리장성은 여러 개의 코스가 있다. 현재 3군데 정도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일찍부터 개방된 팔달령 만리장성이다. 이곳은 시내에서 기차로 이동할 수 있어 접근성이 좋아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리고 목전욕 만리장성이 있다. 이곳은 후에 개방된 만큼 보존 상태가 좋아 외국인 등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지만 버스 투어로만 이동 가능한 단점이 있다. 세번째는 사마대장성이다. 이곳은 야간에 개방이 되어 주로 야경을 보러 가는 곳이다. 앞선 두 곳이 낮에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밤에 가볼 수 있는 만큼 특화된 점이 있다. 나는 사람에 떠밀리는 게 싫어서 목전욕 만리장성 코스를 택했다. 
만리장성 가기 전날에 폭우가 내렸다.
봄철 베이징에는 비가 거의 안 내린다는데 폭우 수준으로 내리다니 아무튼...
당일 오전 7~8시 무렵까지 비가 내려서 걱정했는데 11시가 넘으니 구름이 걷히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후가 날이 좋았어도 아침 일찍부터 이동하지 않았다면 인파에 떠밀려 사진 찍기도 어려울 뻔 했다.

게다가 운무에 쌓인 만리장성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케이블카와 리프트-루지 코스가 있었는데 나는 체력을 생각해서 케이블카를 골랐다(사방이 뚫린 곳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14번에서 18번 코스까지 다녀왔다. 19, 20번은 깔딱 고개라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천안문과 자금성은 보통 같은 날 관광하는 경우가 많다.
천안문은 처음에는 개인으로 갈까 했는데 사전 예약이 갈수록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자금성은 공부 안하고 가면 건물만 보다 올 것 같아 해설을 들으려고 투어를 신청했다.
단체라도 사전 예약이 어려워서 못 가는 경우도 많다는데 다행히 되어서 다녀올 수 있었다.
오전부터 황사가 심했고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천안문를 입장하는 데까지는 직진 코스를 다 막아버려 빙 둘러가야만 했다.
검문소 앞을 도착했을 때는 10시도 안 된 시간이었는데 이미 사람이 꽤나 되었다. 개인 줄은 이미 몇 바퀴를 돈 상태였고 단체 줄은 좀 적었다. 보통 개인 줄이 단체 줄보다 훨씬 길다고 한다. 심한 날에는 3~4시간도 서는 경우가 있다고. 그늘 하나 없는 볕에서 30분 넘게 서 있으니 이미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에 끝나고 천안문 광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운이 좋은 것이었다.
천안문 광장하면 떠오르는 모택동. 나는 이것이 사진인 줄 알았는데 그림이란다. 게다가 매년 그림을 바꾼다고. 예전에는 전담 화가가 있었는데 현재는 미술 대학 교수와 재학생들이 합작해서 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금성은 역시나 노란? 황금? 기와가 인상적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궁궐처럼 자연스런 느낌은 아니고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긴 하다. 한줄로 쭉 선 궁궐들은 고압적인 느낌이 강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전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긴 하지만 국내 방문객의 경우 지방 곳곳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특별한 추억을 갖고자 하기에 대부분 명, 청 시대의 전통 복장과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고궁 방문 때 한복을 입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처럼 이곳도 그런 것인가보다. 아무튼 복장이 정말 다양하고 화려했다.

베이징 하면 경극이 유명한데 사실 볼까 말까 망설였다.

내용을 하나도 이해를 못할 것 같아서...

그치만 현지에 가서 경극을 볼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 과감하게 질렀다.

대부분 관광 상품은 여러 극의 레파토리를 짜집기하여 1시간 남짓으로 구성하고 차를 곁들여 공연하는 것이 많았는데 나는 그런 방식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모로 찾아본 끝에 완전한 극본의 풀 공연을 하는 곳을 찾아 사전에 예약하여 찾아갔다. 경극 배우로 유명했던 매란방을 기려 만들어진 공간인 매란방 대극원이었고 제목은 <옥잠기>다.  

사랑 이야기라 잘 알아 듣지 못해도 극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방 좌우로 대본이 나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여행 기간 동안 보고 걷고 먹고 쉬고 그러면서 지냈다.
책은 한 자도 안 읽었다(혹시나 해서 종이책을 가져갔지만 역시나 그대로 가지고 왔다는^^;).
이번에도 서점은 한 곳을 다녀왔고 페이지 서점이라고 내부가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특히 어린이 책 코너가 참 잘 되어 있다고 느꼈다. 나도 그 코너에서 2시간쯤 머물면서 책을 읽다가 졸다가 하며 보냈다.
그리고 나오기 전 ‘역경(주역)‘ 관련한 만화책이 있길래 한 권 구입해서 왔다.
위화 등단 40주년 기념으로 된 책 ‘인생‘이 있었는데 살까 말까 하다가 무거워서 제외했다. 이미 읽기도 한 내용이니까.

온몸이 욱씬욱씬 여독이 풀리려면 며칠 걸릴 듯 하다. 그래도 언젠가 경험해보고 싶었던 곳을 다녀와서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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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4-20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다녀오셨군요. 만리장성에 루지가 생겼다고요…? 놀랍네요 정말… 전 2001년에 갔었는데 옛 모습은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에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

거리의화가 2026-04-21 09:14   좋아요 1 | URL
제가 다녀온 만리장성 코스에 대한 이야기를 안드렸네요(글에 추가했습니다). 제가 간 곳은 목전욕 장성이에요. 이곳이 루지, 리프트 때문에 체험 코스로 인기가 있더라구요. 2001년도에 다녀오셨으면 일단 목전욕 장성이 오픈된 이후이긴 한데 아마도 훨씬 유명한 팔달령 장성이 아니신가 짐작해봅니다. 팔달령 장성은 루지, 리프트가 없는 것으로 알아요. 천안문광장, 자금성은 과거 보안줄이 없었던 점만 빼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건수하 2026-04-21 10:54   좋아요 1 | URL
단체 행사에 관광이 좀 낀 거였는데 제가 알아보고 가지 않아 기억이 전혀 안나요... ^^;;;
7월 땡볕에 도보로 열심히 걸어갔고 화장실이 없어서 중간중간 소변 냄새가 났던 기억만.... 새 것 느낌이 없었으므로 팔달령이었나봅니다. 이화원 명13릉 천단공원 자금성 천안문광장.. 잊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상당히 많은 곳을 다녀왔네요. @_@ 이런게 패키지 여행의 폐해인가봅니다...

거리의화가 2026-04-21 12:51   좋아요 1 | URL
와 엄청 많이 다니셨네요. 저는 명13릉은 생각을 못했고 천단공원은 가보고 싶었는데 다른 일 때문에 못 갔어요ㅠ 7월에 가셨으면 엄청 힘드셨을 것 같아요. 저는 4월인데도 해가 나니까 찌던데...

건수하 2026-04-21 13:07   좋아요 0 | URL
명13릉은 좀 멀어서 어디 가는 길에 들렀던 것 같아요.
너무 더워서 버스에서 다 기절했다가 서면 내리고 했었네요. 화가님 덕분에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났어요 :)

희선 2026-04-21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중국에 다녀오셨군요 만리장성에는 사람이 많이 갈 것 같네요 잘 알려진 곳에는 사람이 많이 가겠지요 비가 오고 운무에 싸인 만리장성 멋있었겠습니다 경극도 보셨군요 좋은 시간 보내셨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6-04-21 09:16   좋아요 0 | URL
네 희선님 잘 다녀왔습니다^^ 만리장성은 비가 내려서 날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역시 많았어요. 하산하는 길에 보니 대기줄이 어마어마해졌더라구요(날이 개서)ㅎㅎ 경극은 보러 가길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자막을 제공해서 쉬운 문장은 알아보겠더라구요. 그리고 극 자체가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서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거든요.
여행은 언제나 참 즐겁습니다.

잠자냥 2026-04-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역시나 저 어마어마한 황사! =_=
전 베이징 가서 내리자마자 그 탁한 공기에 죽는 줄 알았어요.
이화원 풍경 오랜만에 봅니다. 근데 충격적인 건 제가 갔을 때 거기 분명 수영하지 말라고 붙어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수영하고 계셨다는 ㅋㅋㅋㅋㅋ
만리장성은 날씨 좋을 때 갔으면 더 좋았을 거 같은데... 공기 때문에 풍경이 아쉽네요.

거리의화가 2026-04-21 09:48   좋아요 0 | URL
ㅎㅎㅎ 봄철이라 꽃들이 만발하고 기온은 쾌적한 대신에 황사가 어마어마한 단점이...
제가 간곳들 중 자금성 다음으로 이화원에 사람이 제일 많았어요. 다행히 수영하는 사람은 없었던ㅋㅋ
이번에는 날씨가 비오거나 비오지 않으면 흐리멍텅하고 대기질이 그래서 아쉽긴 해요. 제가 날씨를 택할 수는 없는 거고 운이니 그러려니 해야죠.

건수하 2026-04-21 10:56   좋아요 1 | URL
이화원에서 수영요...? 어휴 서양 외국인 아니었을까요?
전 전에 행사에 잠깐 붙은 관광?에 갑자기 러시아 할머니께서 관광버스에서 수영복 갈아입고 바다로 입수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멀리 가서 안 나오셔서 (연락할 방법 없음) 행사가 지체되었고 나중에 사람들 다 버스에 타 있는데 옷을 다시 갈아입으셔야해서... 주최측 말단으로서 상당히 난감했어요 ㅠㅠ

잠자냥 2026-04-21 11:10   좋아요 1 | URL
자국민이었을 거 같습니다. 동양인이었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_=
근데 그 할머니가 바구니 같은 걸 들고 수영하고 있어서.... 음 뭔가를 잡는가?? 캐나?? 이화원 저 물에 무엇이 있는가? 고민했습니다........

건수하 2026-04-21 11:14   좋아요 0 | URL
혹시 거기 동전 던지는 곳이었던가...

잠자냥 2026-04-21 12:36   좋아요 1 | URL
ㅋㅋㅋ 궁금해서 지금 지도 찾아봤는데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아니라(관광객 많은 북동쪽도 아니고 가운데 곤명호도 아님)... (그때도 사람 없는 데 찾아다니다 보니 한산한 코스로 돌던 기억 ㅋㅋㅋ) 서쪽 문 근처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표시된 곳이었어요. 지도상에는 Jingmi Yinshuiqu 이렇게 표기되는데.... 헐 찾아보니 이화원으로 수원 공급하는 물줄기라고....(심지어 베이징 수원지라 수영 엄격히 금지라는데 ㅋㅋㅋㅋ) 물고기가 다양하게 사네요. 이거 잡으러 들어간 듯... (금지라고 해도 몰래 수영하는 사람들 있다네요)

거리의화가 2026-04-21 12:56   좋아요 1 | URL
수영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게 무턱대고 입수하는 분들이 많다니 놀랍네요^^;;;
제가 본 곳은 곤명호 부근이었을테니 구석진 곳까지 보진 못했겠죠? 그와중에 찾아보신 잠자냥 님!ㅎㅎㅎ 수원 물줄기인데 수영을 하시다니 어우... 하긴 이곳은 질서를 안 지키는 분들이 많았어요. 횡단보도에서 길건너는 분들보다 차도 중간에서 자동차랑 자전거, 오토바이가 쌩쌩 달리는데 그냥 막 건너시는 경우가 많아서. ‘저러다 다치겠다!‘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어요ㅎㅎㅎ

건수하 2026-04-21 13:06   좋아요 1 | URL
으어 잉어 같은거 많은 곳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거 잡으려고 바구니를...?;;;;
잠자냥님도 한참 옛날에 가신거겠죠? 최근 아니고...?

잠자냥 2026-04-21 14:09   좋아요 1 | URL
찾아보니 2016년 가을에 갔네요. ㅋㅋㅋㅋ (무려 십 년 전! ㅋㅋㅋ)

책읽는나무 2026-04-2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말로만 듣던 만리장성 그리고 천안문이네요. 엄청 걸었으셨을 것 같아요.
경극도 보시고 정말 새로운 경험이셨을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중드도 더 친근하게 보실 것도 같네요.^^

거리의화가 2026-04-23 08:42   좋아요 1 | URL
베이징 여행은 하루 2~3만보 이상은 기본이라고 하더라구요. 특히 천안문-자금성 투어 갔던 날은 진짜 많이 걸었습니다. 만리장성은 좁은 돌계단이라 올라갈 때는 괜찮은데 내려갈 때 특히 조심해야 했어요. 나중에 내려올 때 어르신들은 힘들어하시더라구요. 정말 보고 싶었던 곳들이라 다녀오니 뿌듯합니다.
경극은 진짜 보길 잘한 것 같아요. 베이징하면 경극이니까~ 설사 잘 못 알아들었어도 특별한 경험이니까요. 중드야 지금도 계속 보고 있는 중인데 앞으로는 청나라 시대 사극을 볼 때 좀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6-04-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베이징 못가봤는데,,, 가보고 싶네요. 많이 걸을수 있을때 얼른 가봐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6-04-23 15:59   좋아요 1 | URL
부모님 보시고 같이 오시는 자녀 분들도 많으시더라구요. 그치만 가능하면 내가 두 발로 잘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다녀오는 것이 좋겠죠. 특히 만리장성은 계단이 많아서 무릎 관절이 괜찮을 때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ㅎㅎ

다락방 2026-04-24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만리장성은 직접 보면 정말 장관일 것 같아요!
그토록 바라던 여행 하셨다니 너무 좋네요. 특히 경극이라니요, 그야말로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4-28 13:02   좋아요 0 | URL
만리장성은 날이 흐린대로 좋더라구요. 직접 두발로 걸으며 경험한 세계는 역시 더 감동이었습니다^^
여행은 참으로 좋아요. 기대한 것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또 그 이상인 경우도 있는데 그것대로 제 나름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까요. 경극 진짜 좋았답니다. 다락방 님 혹여나 후에 베이징 가실 일 있다면 경극 한 번 경험해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