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조정은 남송의 광범위한 상업적, 외교적 관계를 남중국해에서 물려받았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몽골은 이러한 기존의 관계를 결국 몽골 제국에 항복한 모든 이들에게 기대되는 종속국 지위로 전환하려 했다." 이 요구는 중국과의 전통적조공 관계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고, 압도적인 힘으로만 강제할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원은 고려 이외의 지역에서는 이를 실현할수 없었다. - P215
쿠빌라이가 몽골 제국에 남긴 유산은 두 가지 모순된 결정에서 비롯했다. 첫째는 한법, 즉 중국의 법을 채택한 것이고, 둘째는 몽골의 정복사명을 따라 남방을 제국에 편입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결정은 제국의 지배층에 막대한 재정적, 행정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 P231
쿠빌라이 가문 내부의 갈등은 차가다이 가문과의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테무르의 즉위는 평화롭게 결정됐지만,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의 야심은 분명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진김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모두 최소한 한 번씩은 통치했다. 진김의 후손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항상 쿠빌라이의 유언에 따라 방계가문은 왕위 경쟁에 나설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쿠빌라이의 다른 아들들의 많은 후손들은 이 "법"에 맞서서 야심을 굽히지 않았다. - P247
지정 연간에 발생한 기근의 두 번째 원인은 왕조 전반에 걸쳐서 기근에 대비한 비축 물자가 소진된 데 있다. 이러한 비축물의첫 번째 유형은 농업 위기 시 활용할 수 있는 자연적 비축물 (채집할수 있는 천연 식량 자원)이며, 화폐와 곡물 같은 정부 차원의 비축물이두 번째 유형이다. 역설적으로 평화와 번영, 효과적인 기근 구제로인한 인구 증가가 첫 번째 유형의 비축물을 감소시켰고, ‘태정의수렁‘과 더불어 정부 기능 및 의욕 상실이 두 번째 유형을 감소시켰다. 정확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섬서 지역에서는 가뭄 4년 차에이르러서야 식인 사태가 발생한 반면, 대동에서는 2년 만에 그런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 P280
쿠빌라이는 집권 말기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의 남중국 정복은 카안의 울루스에 몽골 세계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제국의 원래 중심지인 몽골과 멀리 떨어진 해외 조공국들을모두 아우르는 권위였다. 또한 이 정복은 몽골 통치자들에게 해양세계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었고, 몽골 시대의 유명한 문화 교류를활성화한 제도들의 정점이 됐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톨루이 계열통치자들은 이 전례 없는 해상 연결을 통해 중동과 동아시아 문명의 독특한 융합을 이루어냈고, 이는 청에서 오스만튀르크에 이르는 후대 유라시아 정권들에 영향을 미쳤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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