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제국이 몰락하고 몽골고원에서 후퇴함에 따라 초원에서는 혼란과 불안정이 야기됐으며, 기존 주민들과 새로운 난민들 모두가 생계를 위한 치열한 투쟁으로 내몰렸다. 상대적으로 정체가 모호하고 경제적 기반도 약했던 몽골인들이 이 지역을 통일하고 국가를 건설할 거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내륙 아시아에서의 국가 탄생은 부분적으로 ‘위기 상황에 대한사회적 대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 P44

카안(대칸)이라는 칭호는칭기스가 죽은 이후, 아마도 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1264년경에 수여됐을 것이다. 3" 알타이 민족들은 백색과 9라는 숫자를 길한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흰 깃발인 툭(tuq)은초원 민족들에 대한 칸의 독점적 주권의 상징이 됐다. 1211년 이전부터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대몽골국(大蒙古國, YekeMongol Ulus), 즉 몽골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금의 중국식 명칭인 대금국(大金國)을 모델로 삼은 것이며, 한문 사료에는 - P52

대몽골국 또는 대조(大朝)로 기록됐다. 몽골의 집회에서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잔치를 베풀고 상을 배분하면서, 이들은 제국 설립과 새로운 지배 엘리트의 추대를위한 기반을 명문화하고 신성화했다. 몽골 사회의 무법과 폭력을질서와 규율로 대체하려는 욕구는 곧 칸의 제도 개혁의 추진력이됐다. 여기에는 초원 민족을 재편성하기 위해 칭기스 칸의 추종자들, 특히 영웅적인 행적을 보인 인물과 눈에 띄는 충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례도 포함됐다. - P53

몽골이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고 그에 따라 많은 비유목 민족들과 땅들을 흡수하면서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발생했다. 칭기스칸이 고향을 떠나 진군했을 때의 원래 목적(복수와 약탈)은 변화했다. 정복은 이제 신성한 사명이 됐다. 155 유라시아 초원은 점차 온전한 통일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이는 우구데이에 의해 완성됐다. 이로 인해 초원 주변의 정주 문명들은 칭기스의 후계자들이 계속 확장해나가는 제국에 저항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그 일부로 편입될수밖에 없었다. - P95

우구데이의 사망은 몽골 특유의 정치 양상을 야기했고, 이는 여러 층위에서 잠재된 차이와 갈등을드러냈다. 물질적 차원에서는 인력을 포함한 경제적 자원에 대한접근성, 사회적·정신적 차원에서는 몽골 정체성, 그리고 이념적또는 구조적 차원에서는 창건자의 유지에 대한 해석과 심지어 그표현 등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는 역사가들이몽골 역사를 쓸 때 사용하는 사료들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 시점에서 제국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했다고 해도, 그것은 전적으로 우구데이 재임 기간에 발생한 문제이다.
지배 집단 내부의 다툼은 오랫동안 작용해온 역학, 즉 강력한카툰들이 자신의 아들(또는 대리인)을 왕좌에 앉혀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보호하려는 욕구, 계승 절차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황금씨족의 선임 지도자들(아카)인 주치계 칸 바투와 오르다,
그리고 톨루이계 카툰 소르칵타니 베키의 입장, 정치적으로 밀려나고 (자원의 감소와 함께) 영토가 제한되는 상황에 대한 차가다이계와 우구데이계 왕자들의 점점 커지는 경계심 등이 표면화한 것이었다. - P122

뭉케의 승리로 인해 톨루이 가문의 미덕과 희생, 특히 자삭준수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페르시아 측 사료에서 즐겨 다룬 주제는 소르칵타니 베키에대한 찬사였다. 그녀는 이상적인 몽골의 어머니이자 카툰으로, 자녀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재혼을 거부한 지혜로움을 지녔다고 묘사됐다. 심지어 칭기스의 어머니 후엘룬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다른 서사는 막내아들이자 아버지의 화로를 물려받은톨루이가 칭기스의 유일하고 진정한 후계자였음을 강조하는 서사이다. 「몽골비사」의 편찬과 개정, 중국과 몽골의 다양한 전통에서보이는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의 모습, 주베이니와 라시드 앗 딘의연대기 등은 모두 뭉케의 집권을 ‘칭기스 칸 그 자체‘라는 자삭의원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사건으로 재해석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오직 뭉케만이 칭기스의 유산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P142

1259년경에는 몽골의 정치적 통일성이 취약해졌고, 과도한 확장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뭉케가 제국의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잘 통합해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는 불가피한 분열을 늦추었으며, 제국을 이루는 각부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뭉케의 통치는 대칸이 칭기스의 비전을 어떻게 역동적 청사 - P166

진으로 확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후 몽골인들이 분열을 어떻게다루었는지는 몽골 제국의 역사적 우연성, 변화, 지속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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