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레구의 원정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통일된 제국이수행한 마지막 원정이었다. 이러한 원정은 1260년 이후 불가능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1259년 뭉케가 사망한 뒤 대칸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갈등 때문이다. 이제 제국은 다소 단순화해서말하자면 네 개의 독립된 칸국으로 나뉘었다. 중국과 몽골의 대칸국, 중앙아시아의 차가다이 울루스, 폰투스초원의 킵착 칸국, 그리고 훌레구 울루스가 그것이다. 그중 오직 일 칸들만이 쿠빌라이 - P321
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쿠빌라이는 훌레구의 형이고, 서방 원정군을 파견한 뭉케의 지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킵착 칸국 통치자들은 쿠빌라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차가다이 울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의 상황은 차가다이 영토 내에 새로운 칸국이 들어서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 칸국은 쿠빌라이의 적대적 반대자이자 우구데이 가문의 일원인 카이두가 이끌었다. 따라서 새로수립된 홀레구 울루스는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동쪽과 북쪽 국경에서 잠재적이고 종종 실제적인 적들을 상대해야 했고, 이집트와시리아의 맘룩 정권의 적대감도 감당해야 했다. - P322
케식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세습됐으며, 그 일원이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특권이자 의무였다. 홀레구 울루스에서 케식은 주로 페르시아 관료제와 병행하는 일종의 행정 체계를 구성했다(일부는 겹치기도 했다. 라시드 앗 딘은 자신이 아미르 쿠틀룩 샤와 같은 케식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는 몽골 페르시아 정부가 몽골적 특성을 매우 두드러지게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페르시아인과 몽골인 사이의 문화 변용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홀레구 울루스의 정치는 몽골인과 페르시아 관료를 모두 포함한 파벌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 P342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울제이투가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라시드 앗 딘은 가잔이 자신에게 의뢰하여 완성한 몽골사를 울제이투에게 헌상했고, 새로운 일 칸은가잔을 추모하는 의미로 이 작업을 이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라시드 앗 딘은 몽골이 만났던 모든 민족들에 대한 기록까지 포함시켜야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대작의 "세계사" 부분이다. 여기서 라시드 앗 딘은 중국인, 인도인, 튀르크인, 프랑크인 등의 역사를 서술했다. 추가된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사학사적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 P366
초기 몽골의 파괴적 영향과 그 이후의 통치 성격, 특히 홀레구가 자신과 후계자들을 위해 영구적인 왕국을 수립한 이후의 통치 성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 P383
몽골의 페르시아 지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고볼 수 있다. 적어도 초기 몽골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그랬다. 더 나아가 페르시아가 현대 이란 국가로 발전하는 데 몽골인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몽골인들이 그들의 페르시아 왕국을 "이란"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는 7세기 무슬림 아랍인의 침략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던 고대의 명칭이다. 몽골이 정복했을 당시 "이란"이라는 정치체는 600년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몽골의 이란 영토는 16세기 사파비 왕조가수립한 것보다 약간 더 넓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현대 이란의 국경과도 일치한다. 페르시아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명을 할 수 있다. 물론 페르시아어는 구어로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문어로 - P394
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됐다. 교육받은 계층 사이에서 아랍어로대체됐기 때문이다. 아랍어는 아랍 지배자들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페르시아로 가져온 이슬람교의 언어이기도 했다. 물론, 몽골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이미 "신(페르시아어 "(아랍 문자를 변형해 쓰고 수많은 아랍어 차용어를 포함한 페르시아어)가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랍어는 높은 위신과 지위를 유지했다. 쿠란과 이슬람 법학 및 신학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의 몽골인들에게 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 몽골의 통치 시기에는 신페르시아어가 아랍어를 제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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