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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평점 :
이 소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2022년 '독립운동열전' 책에 언급된 덕분이었다. 확인해보니 2000년에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었고, 2010년에도 나왔으나 절판되었다. 내가 구입하려 했을 때는 이미 소설을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워하던 찰나였다. 그러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과거 식민지 조선에서 1919년 3월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사상 불온 등을 이유로 옥고를 겪었다. 한편으론 혐의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이 땅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이미륵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여러 편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어린 시절부터 겪은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내며 간접적으로 조선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시기가 참 교묘하다. 아주 어릴 때는 대한제국 시기를 겪었고 기억이 날 무렵에는 조국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이미륵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한학을 공부하며 여러 경전을 두루 읽었고 나중에는 서당에서 훈장님으로부터 심화 학습을 거쳤다. 아버지에 의해서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그것을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11살이 되었을 때 그가 이미 중용과 맹자를 읽은 터였던 만큼 아버지는 한문 고전 공부는 그만하면 되었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는 신식 학교에서 서양 교육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차를 만드는 방법, 달까지 거리를 추정하는 방법, 전력을 만드는 방법 등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어느 샌가 시내에는 일본군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민가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은 흉흉했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고도 하고 세계가 멸망한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우리의 임금님이 물러나셨다.” 왕의 옥새가 찍힌 고지문이 방에 붙어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었다는 왕의 편지가 이렇게 허망한 글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런데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고지문이 국권피탈 소식임을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 같긴 하다. 이미륵은 얼마 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게 되기도 했다.
일제의 통치는 조선에 여러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11년이 되면 일제에 의해 새 교육령이 발표된 후 서당 교육은 구교육으로 치부되었고 신교육인 서양의 수학, 과학 교육 등을 배워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게다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아야 했으니 일본어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실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에게는 수학, 물리, 화학 등 모든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의 괴로움을 알고 신식 학교를 그만두라 이야기한다. 그는 한동안 농부의 집에서 지내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가출을 감행했던 적도 있다.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물론 후회하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방황을 끝내고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하면서 대학 입학 시험 준비를 위해 독학하며 열심히 매진한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지나간 일에 너무 괘념하지 말아라! 새로운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고… 네가 그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마당이니, 네 온화한 성격을 늘 유지하고 그들의 거친 태도를 아울러 참아내도록 해라.” 그는 때늦은 공부에 열등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런 위로와 응원은 그에게 지지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되었다. 경성의전은 당시 조선 최고 교육기관들 중 하나로 조선을 여행하는 사람은 그 학교를 방문할 정도로 유명했다. 다만 강의와 실습을 선택할 수 없는 등 여러 모로 규율이 강해서 학교라기보다는 군대 같았다고 한다.
여섯째 학기가 지나고 있을 때 그는 친구로부터 시위 소식을 듣게 된다. 정부 직속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만큼 그는 가능한 정치적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친구는 민족과 관련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참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야기한다. 고민하던 그는 친구와 같은 길을 가겠다 결심하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이 소식은 후에 어머니께도 알려진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불안해한다. 실제로 얼마 후 사태는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다. 일제의 검거 작전이 시행되자 어머니는 어느 날 그에게 짐을 싸고 빨리 떠나라는 지령을 내린다.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넌 네 갈길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어. 나는 너를 신뢰한다. 부디 용기를 내렴!” 그때 이미륵은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면서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고 고백한다.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학교를 다니며 조선에 남아 어머니와 살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부랴부랴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책의 제목이자 소제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짐작하겠지만 이 내용은 그가 압록강을 건넌 뒤 어느 곳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읊는 감상이다.
아득한 옛날 이래로 이 끝없는 만주 땅으로부터 내 고향을 분리하고 있는 그 국경의 강은 막을 길 없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둠침침하고 진지했고, 저 건너편은 모든 것이 작고 쾌활했다. 짚으로 지붕을 이은 밝은 집들이 언덕들 곁에 흩어져 있었다. 여러 굴뚝에서는 벌써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리 밝은 가을 하늘 아래에 한 무리의 연산들이 다른 연산들로 연이어지고 있었다. 산들은 석양을 받아 빛났고, 어스름 속에서 다시 한번 활짝 빛을 발했다가는 푸른 연무 속으로 서서히 잠겨 들었다. 나는 멀리 남쪽에서 골짜기들과 여울들을 거느린 수양산을 본 것 같았고, 어릴 적 매일 저녁 그 위에 앉아 저녁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하던 삼층 석탑도 내 두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남쪽으로부터 바람처럼 날아온 것에 틀림없는 그 천상의 소리를 두 귀로 약여하게 듣는 듯했다. 압록강은 그칠 줄 모르고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P189~190).
읽는 내내 정말이지 짠했다. 이 모습을 보며 발길이 제대로 떨어졌을지.
이후 그는 기차를 타고 심양(묵덴)을 거쳐 산해관으로, 이후 난징까지 곧장 이동했다. 그리고는 상해에 도착해서 유학생을 대상으로 상담하는 조선인을 찾아간다. 망명을 위해서는 중국 여권이 필요했는데 여권이 나오기까지의 기다림은 지난했다. 이미륵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조선 학생들이 망명을 위해 같은 절차를 밟았던 것 같다.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기다림은 까마득하지 않았을까. 마침내 1920년 초가 되어 여권을 구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거대한 증기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돌며 마침내 그는 독일 땅에 닿았다.
한때 유럽을 가고 싶어 기차를 타고 싶어했지만 완전히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삶을 정착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이 좀 정리되자 매일 그는 고향에서 돌아온 소식을 살펴보기 위해 우체국에 들르기를 수개월 동안 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소식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제대로 이별하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떠난 길이 마지막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런 삶을 경험했을까 싶어 마음이 먹먹하다.
이미륵은 독일에 정착해서도 세계피압박 반제국주의의회에 유일하게 한국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조국을 위한 일을 놓지 않았다. 아무튼 마침내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읽고 나니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여러 소회가 든다. 읽고 싶으셨던 분들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