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즌 경Lord Curzon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속 어딘가에,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약 - P26

간의 정의나 행복이나 번영, 남자다움이나 도덕적 존엄의 인식, 샘솟는 애국심, 지적 계몽의 여명, 또는 솟아오르는 의무감을 남겼다고 느끼는 것-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이것이 영국인이 인도에 진출한 이유입니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라는 말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커즌을 비롯한 식민 지배자들이 보기에, 토착민들은자기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또한 이런 것들을스스로 이룰 수 없었다. 커즌은 다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없으면 여러분은 할 수 없습니다.
19한 세기가 넘도록 식민주의자들은 다른 지역의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바로 이런 언어로 묘사했다. 테오도르 헤르츨을 비롯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구사하는 경멸적인 언어는 다른유럽인 동료들의 언어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 P27

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mizrahi (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Sephardi(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개 제2언어나 제3 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 P40

당시 영국 정부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는 지난100여 년간 충분히 분석되었다." 여러 동기 가운데는 히브리인에게 성서의 땅을 <돌려준다〉는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친유대주의 philo-Semitism적 열망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이런 기대는 <전 세계 유대인>이 새롭 - P47

게 등장한 혁명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벌이게 만들고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일 힘이 있다는 확신과 연결되었다. 이런 여러 충동 외에도영국은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염두에 두었으며 전시의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지정학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를 원했다.23 다른 동기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해도 이것이 핵심 동기였다. 영제국을 움직인 것은 절대 이타주의가<아니었다>. 영국이 전시에 이 지역에 대해 내놓은 여러 약속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 기획을 후원한 것도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완벽하게 기여했다. - P48

실제로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최근 들어 유대인의 민족자결에 대한 (광신적이지는 않더라도) 터무니없는 반대로 표현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 P55

위임통치령은 사실상 영국의 위임통치 정부와 나란히 시온주의 행정 체제가 탄생하도록 허용했다. 위임통치 정부는 이 체제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런 유사 정부는 결국 인구의한 부분에 대해 주권 국가의 많은 기능을 행사했다. 민주적 대표뿐만아니라 교육, 보건, 공공사업, 국제 외교의 관리까지 그들의 수중에들어갔다. 주권의 속성을 전부 누린 이 정치체에 없는 것은 군사력뿐이었다. 하지만 군사력도 조만간 확보하게 된다. - P63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차별적인 이민법이 제정되자, 독일의 많은 유대인은 이제 팔레스타인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히틀러의 부상은 팔레스타인과 시온주의 양자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이 입증되었다. 1935년 한 해에만 6만 명이 넘는 유대인 이민자가 팔레스타인으로 왔는데, 이 숫자는 1917년 이 땅에 살던 유대인 인구 전체보다 많은 규모였다. 주로독일에서 왔지만 유대인 박해가 점점 격렬해지던 이웃 나라들에서도왔다. 이 난민들 대부분은 숙련되고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독일에 대한 유대인의 불매 운동을 끝내는 대가로 나치 정부와 시온주의 운동이 맺은 이전협정 Transfer Agreement 덕분에 독일 유대인들은 총 1억 달러에 해당하는 자산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 P68

1939년 1월 팔레스타인에서 방침을 변경할 것을 내각에 권고한 보고서에는 이집트와 이웃 아랍 국가들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인도 담당 장관의 언급이 실려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단순히 아라비아의 한 문제가아니라 범이슬람 차원의 문제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는 만약 이<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인도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 P79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런 삼중의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엇을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질문이다. 어떤 이들은 보수적 지도부가 선호했던 방식, 즉 공허한 항의 시위를 개시하면서 영국의 선의와 <공정성>에 호소하기 위해 아무 쓸데 없이 런던에대표단을 파견하던 법적 접근법을 포기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 P86

명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 대신 영국인들과 완전히 결별하고, 위임통치 당국에 협조를 거부하며(국민회의당이 인도 제국에 대해, 또는신페인당이 아일랜드의 영국인들에 대해 했던 것처럼), 달리 방법이없으면 실제로 결국 그랬던 것처럼 이웃 아랍 나라들이 걸은 길을 따라 무장봉기를 일으켰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영국과 시온주의 운동, 국제연맹 위임통치라는 강력한 삼각동맹 앞에서 해볼 만한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뚜렷한실체가 없고 조직화되지 않은 아랍의 여론 말고는 진지한 동맹자도전혀 없었다. - P8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6-08-0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이 유대인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려고 했다는 것이군요. 역시 악랄한 영국... -ㅁ- 석유의 발견 또한 영국이 중동을 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 같습니다. 영국엔 석유가 없었으니... 나중엔 발견되었지만요.

팔레스타인이 국가를 빨리 만들었어야 했는데.. 한 번의 실수가 길게 이어지네요.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6-08-06 10:52   좋아요 1 | URL
작가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라 실제로 집안 식구들 중 고초를 겪은 분들이 있더라구요(책에도 관련 사연이 나옵니다). 영국의 밸푸어 선언은 선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모로 유대인에게 유리한 정책이 수행되었습니다. 교묘한 기만 정책도 있었구요. 이런 사건들이 누적되어 팔레스타인인들이 1930년대 후반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아직 초반부지만 일단 지금까지 읽어본 책들 중에서는 이 책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