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유자의 흥기

- 정명론
- 계술을 통한 창작자로서의 공자
- 직 인 충 서
- 의 리 성

각각의 이름들은 그 정의가 있으며, 그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그 이름이 지칭하는 그 사물이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물인 까닭 즉 그 사물이 본질 혹은 개념(이데아)이다. 만약 군, 신, 부, 자가 그 정의에 부합한다면 모두 각자의 도를 다하는 것이고 그러면 "천하에 도가 서게 된다." -> 정명론의 정의 - P103

공자는 당시에 이름이 바르지 못해서 어리저뤄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을 바룸으로써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했다. -> 정명론이 나온 배경 - P103

춘추가 "선을 북돋우고 악을 물리치게 하며", 난신적자를 단죄하고, "춘추로써 명분(본분)을 계도했다"는 말에 공자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공자가 정명론을 주장하여 춘추를 지었다는 전통적 설명과는 달리, 공자가 춘추 등의 책에서 의를 취해서 정명론을 주장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 대의만은 공자가 "은밀히 체납했다"는 맹자의 말이 그것이다. -> 춘추가 교육용 교재로 쓰인 배경 - P107

중국문화에 대한 공자의 공헌은 바로 원래의 제도를 이론화하고 이론적인 근거를 부여하는 시도를 개시했다는 데에 있다. - P107

의례는 본래부터 있던 것이지만 유가가 계술했고, 예기는 유가가 창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기의 사상사적 가치는 의례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경은 모두 사(역사)이고 공자는 계술했을 뿐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고문학파의 주장도 물론 틀린 말이 아니고, 공자가 창작했지 계술한 것이 아니라는 금문학파의 주장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닌 것이다. - P111

중국역사상 한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그냥 주역이 아니라 계사, 문언 등이 곁들어진 주역이었으며, 그냥 춘추가 아니라 공양전 등이 곁들어진 춘추였으며, 그냥 의례가 아니라 예기를 근거로 한 의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금문학파가 공자를 지성선사라고 했을 때, 그들이 말한 공자는 이미 역사상의 공자가 아니라 바로 이상적인 공자 즉 유가의 이상적인 대표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P112

정직이란 안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밖으로 남을 기만하지 않고, 심중의 좋고 싫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P113

인이란 우리 마음의 진실되고도 예에 맞는 발로로서, 동정심을 바탕으로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 P117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해주는 것"이니 곧 충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니 곧 서이다. 충과 서를 실행한다고 함은 인을 실행한다는 말이다. - P121

공자는 다섯 가지를 세상에 실천할 수 있으면 인이다고 했는데, 공손하면 남에게 모욕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미더우면 남의 신임을 받고, 기민하면 공을 이룰 수 있고, 은혜로우면 남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 P124

"군자가 벼슬함은 자기의 의를 행하는 것일 따름인즉", "그 옳은 도리를 바룰 따름"이며, "그 도를 밝힐 따름"이다. 도가 과연 행해질지의 여부는 결과로서, "이익"이고 "공(성과)"이니, 반드시 "꾀하고" 반드시 "계산할" 필요는 없다. - P127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
이것이 공자와 맹자의 일관된 주장이고 묵가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공자의 철학은 인간의 심리(마음의 도리와 이치) 측면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후 유가는 모두 심리학을 중시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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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 P170

누구도 우리 위에 있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아래 있지 않았어. 우리 중에 양탄자나 고급 식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하지만 우리는 행복했어. 정말 행복했지.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남았으니까.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마음껏 거리를 돌아다니고.. - P222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평범하다.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또 무엇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기억의 저 깊은 구석으로 밀쳐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장막을 쳐버리고 싶어하는지를 보고 듣는 목격자. 적절한 말을찾지 못해 절망하면서도,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온전한 표현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과거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본다. 그때는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얼마나 보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를. - P255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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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유가의 흥기

1. 중국 역사상 공자의 위치
2. 전통적 제도와 신앙에 대한 공자의 태도

공자는 육예를 일반인에게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공자의 강학은 그후의 다른 제자백가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학설만을 중시했는데, 이를테면『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서 보여지듯이 묵가의 제자들은 『묵경(墨經)』을 암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교육가였다. 그의 강학목적은 "인재(人)" 양성에 있었다. 특히 국가를 위해서 일할 인재를 양성했지, 어떤 한 학파(一家)의 학자를 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각종 서적을 읽게 했고, 각종 과목을 가르쳤다. - P83

공자는 이미 있던 책을 가지고 교육했는데, 가르칠 때 다소 취사선택을 가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렇듯 수시로 취사선택하여 강해한 사실을 두고 "육경을 산정(刪正)했다"고 한다면, 공자가 "산정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산정"이란 사실 아무런 비상한 의미가 없다. 그후 유가는 관습대로 여전히 계속해서 육예를 교재로 사용한 반면, 다른 학파에서는 오직 자기들의 새로운 학설만을 강할 뿐 옛 서적은 강하지 않았던 까닭에, 육예는 마침내 유가의 전유물처럼 되어 공자가 제작한 것처럼 여겨졌고, 산정(산정을 했다면) 역시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인 양 여겨졌던 것이다. - P84

공자는 한 교육가였다. "계술만 하고 창작하지 않았으며, 신념을 가지고 옛것에 심취했으며"," "학문에 싫증을 낸 적이 없었고, 인재교육에 게으른 적이 없었다"는 말은 바로 공자가 자신에게 내린 평어(考語:評語)였다.
이로써 보건대 공자는 단지 한 "선생님(老敎書匠)이었지만, 중국역사상 여전히 지극히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 P85

전국시대에 학문이 있으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직접 노동을 해서먹고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허행(許行)은 "그의 추종자가 수십 인이었는데, 모두가 갈옷을 입었으며 짚신을 삼고 자리를짜서 생계를 유지했고, 진중자(陳仲子)는 "몸소 짚신을 삼고 처는 길쌈해서 "살아갔다. 그러나 맹자는 그렇지 않았다. 맹자 자신은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에 시종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제후에게서 자고 먹었는데", 이를 두고 그의 제자인 팽경(彭更)이 "너무 지나치다(泰)"고 여겼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의 비평이야 더 말할나위도 없다. - P89

선비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봉양만 기대했다. 이런 선비계급은 공자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이전의 소위 사(士)란 주로 대부·사(大夫士)의 사였거나 혹은 남자 병사의 칭호였지 후세의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는 아니었다. 이들 선비계급은 오직 벼슬살이와 강학이라는 두 종류의 일만 할수 있었다. - P90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흡사했다. 소크라테스도 원래 "소피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지식을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법으로써 정의(定義)를 구했고,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공자 역시 정명(正名)을 주장했고, 명(名)에 대한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공자도 인간의 "인(仁)"이
"정치담당(從政)"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 P92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양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공자의 학파도 맹자와 순자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국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 P93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례(周禮)를 입증할 문헌이 충분했기 때문에, 공자는 주례에 대해서 깊이 알았고 간절히 사모했다. 그래서말했다.
주는 이전의 두 왕조를 조망하여 거울삼았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다! 나는주(周 : 즉, 주의 문화, 周禮)를 추종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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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게는 먼 지역이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도 있으나 2차 대전 중 독일과 소련 간에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독소전쟁이라고 불린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연의 주인공들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이다.
전쟁이 발생했다고 내가 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나섰던 사람들이 나온다.
비단 젊은층 아니라 중장년층, 노년층도 참전을 하였고 심지어 어린 소년/소녀도 참전했다. 많은 여성들이 급박해진 전선에 부랴부랴 참전에 나선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짐작했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나선 것이지만 전쟁은 사람을 군인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조국을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것일까.
조국을 위해 봉사하라는 명령에 의해 우크라이나 등의 국가는 많은 곡물을 수탈당하는 등의 피해를 겪었다.
그럼에도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이라니. 현재의 나로서는 오롯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팔다리가 잘리고 피냄새와 소독약냄새가 진동하는 잔혹한 전쟁터 속에서도 깊숙한 숨속에 들어서면 고요하여 딴 세상 같다는 것을 읽을 때 나도 그 풍경이 떠올라서 복잡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2


오디오북은 목소리에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콘텐츠가 좋구나 느끼게 한다.
윌라 서비스를 구독한 가장 큰 이유가 토지 오디오북을 듣기 위해서였는데 드디어 시작했다.
처음이라 사투리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아직은 몰입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다.

얼마 전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1919년의 일제강점기 시기 한 가문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터넷에서 드라마 소개를 보니 이 시기가 끝이 아니라 1990년대 초까지 다룬다고 하니 굉장히 긴 시기를 삼고 있는 셈이다.
3.1운동의 결과로 많은 이들이 잡혀 들어가고 일부는 증오를 키우고 일본을 향한 칼을 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조선인들을 헌병대에 찔러 잡혀들어가게 만드는 앞잡이들이 있다.
그리고 양반집의 여인네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딸만 둔 며느리는 시어머니 앞에서 항상 주눅이 들어 있고 아들을 낳기 위해 그녀 뿐 아니라 친정 어머니도 불공 기도를 한다. 남편은 다행히 부인을 구박하지는 않는 듯하지만(!) 뒷일은 알 수 없지.
이제 1부만 보아서 후가 궁금한데 생각보다 전체 회수가 대하 드라마 치고 길지 않다(24부작).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토지와 겹쳐지는 시기가 존재하고 토지에서도 최참판댁이라는 가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토지는 조선 말의 시기부터 그리고 있기에 이 작품보다 더 앞의 시기까지 다루기는 한다.
어쨌든 토지 오디오북은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다. 흐름이 끊기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들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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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7-13 17: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화가님 끝까지 함께 가보시죠!! 사투리 곧 적응되실 거예요 ㅎㅎ
아니 바람꽃? 엄청나게 긴 시대를 다루네요. 24부작이면 성큼성큼 진행되겠군요.
전쟁은 여자의.. 읽어야하는데;;

거리의화가 2022-07-13 22:02   좋아요 3 | URL
1991년 드라마이고 지금은 중견배우들의 아역 시절도 나오더군요. 이야기는 아마도 속터지는 내용일 것 같습니다 여성들의 수난과 역경이 예상되어요ㅠㅠ 토지 응원받아 열청해보겠습니다!^^ 전쟁은… 대화문이 주이지만 무게가 가볍지 않습니다 화이팅!

레삭매냐 2022-07-13 1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소전의 와중에 가장 큰 피해
를 입은 곳이 바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로 알고 있습니다.

81년 만에 다시 전쟁의 포화
에 휩싸인 우크라이나의 상황
이 참 그렇네요. 그리고 적은
당시에는 같은 편이었던 러시
아라는 점도 그렇구요.

저도 책은 수배해 두었는데
미처 못 읽고 있네요.

거리의화가 2022-07-13 22:05   좋아요 3 | URL
네^^ 우크라이나가 당시에도 소련에 의해 받은 피해가 굉장히 큽니다 그때도 곡창지대였는데 대농장 시행으로 물자 다 뺏어가고 이후에는 전쟁터로 내몰리게 되지요. 지금 무슨 데자뷔도 아니고 마음이 씁쓸합니다ㅡㅜ

책읽는나무 2022-07-13 2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동쪽 사투리라면 제가 번역해 드릴 수 있는데요ㅋㅋㅋ
제가 아직 토지를 읽질 않아서....
한국 사람이 토지를 읽질 못했네요.ㅜㅜ

1번 책은 어제 <전쟁 일기>를 읽고 나니 이게 약간 분리가 되질 않아, 읽기를 조금 미뤘습니다. 분리해서 그냥 전쟁에 참여한 여성이란 객체로 읽어야 하는데, 나라로 읽히니...참...ㅜㅜ
이러나 저러나 러시아 나라는 나빴네요.

거리의화가 2022-07-13 22:07   좋아요 4 | URL
ㅋㅋ 사투리 아무래도 들은지 얼마 안되어서 어색함이 있지만 곧 적응되겠지요^^; 토지는 긴 호흡이 필요하긴 해서 저도 이번 참에 꼭 읽어보려합니다ㅎㅎㅎ 전쟁일기 읽고 이 책 읽기엔 참 마음이 더 무거워질 것 같습니다ㅠㅠ 평화는 왜 이리도 어려운지요.

희선 2022-07-14 02: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라를 생각하고 전쟁에 나갔겠지만, 실제 전쟁터에서는 쉽지 않았겠습니다 어린이는 자라서 집에 돌아왔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그 뒤에 잘 살았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한 사람이 많았겠습니다 그때 여성이 전쟁에 나갔다는 건 이 책을 보고 안 듯도 합니다 오디오북으로 듣는 토지, 어쩐지 드라마 같을 것 같습니다 자꾸 듣다보면 사투리 익숙해지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14 08:02   좋아요 4 | URL
네 6년이 지나 돌아간 사람도 있으니 16살에 나갔다면 22살이 되었을테죠. 일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전쟁 당시의 기억은 외면하고 싶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허나 끔찍한 기억은 오래가니ㅠㅠ 오디오북 특히 소설은 듣는 드라마의 느낌입니다ㅎㅎㅎ

다락방 2022-07-14 09: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저 윌라 해야겠네요. 토지 재독을 계속 목표하고 있었는데 21권이나 돼서 섣불리 도전을 못하고 있었거든요. 오디오북으로 점심 식사 시간 때 들어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07-14 10:46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처음엔 엄두가 안나더군요. 태백산맥은 그나마 10권이라 괜찮았는데 그것도 길긴 했지만... 이번참에 책까지 구비해서 같이 오디오북하고 겸해서 독서해보려고 합니다^^
 

공자 이전과 당시의 종교 철학사상

화와 동의 차이가 인상적이다.

황제, 전욱, 제곡 - 요, 순, 우, 탕, 직 - 문왕, 무왕

당시 사람들은 미신은 있었으나 지식은 없었고, 종교는 있었으나 철학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믿은 내용은 바로 그리스 인이 믿었던 종교와 같고, 그들이 믿은 신들은 바로 그리스 인의 신들과 같았다. 하(夏), 상(商) 이후에는 "천(天: 하늘)"과 "제( : 하느님)"의 관념이 생겼고 일신론이 점차 세력을 얻는 듯했지만, 다신론이 결코 소멸하지는
않았다. - P49

신령과 인민을 병칭했은즉, 집정자의 최대 책무는 "백신을 편안하게 하고, 만민을 화평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지 못하면 "신령이 노하고 인민이 배반하여" 장구할 수 없었다. 주나라 양왕이 또 하느님(上帝)과 백신을 병칭했은즉, 하느님은 백신의하나가 아니었다. 내사 과는 신 지방에 강림했다는 어떤 신령을 단주의 신령으로 여겼은즉, 적어도 신령의 일부는 바로 인귀(人鬼)였다. - P52

고대인은 대체로 우주간 사물들을 인간사와 상호 영향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고대인은 이른바 술수(術數:OccultArts)의 법, 즉 각종 술법으로써 우주간에 사람의 주의를 끌 만한 현상들을 관찰하여, 인간의 화복을 예측했다. - P53

사조, 비조, 자신, 신수, 장홍, 사묵 등은 모두 자연현상 또는 그밖의 "하늘의 이치(天之道)"를 바탕으로 인간사(人事)를 예측했다. 그들이 사용한 술수는 명백히 "천문"인 것도 있고, "역보"와 "오행"이 뒤섞인 듯한 것도 있다. 요컨대 이른바 "천문", "역보", "오행" 등은 모두 "천인지제(天人之際 : 하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것으로서, "천도(天道)"와 인간사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후의 소위 음양오행가는 이런 사상읗 부여한 것으로서, 중국철학사상 심대한 세력을 떨쳤다. - P60

대체로 하느님은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권위자로서, 여러 관직을 설치해두고 있다. 여러 신령들은 그 지위나 권위가 하느님에 미치지 못하므로 복종했다. 이것은 곧 중국의 일반 평민의 종교적신앙인데, 옛날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 P61

춘추시대에 이르러 점차 각종 제도에 인본주의적(Humanistic) 해석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나타나, 각종 제도는 모두 인간이 설치한 것이며 또 인간을 위해서 설치되었다고 생각했다. - P65

무릇 화합(和)은 실제로 사물을 산생하지만, 같은 것(同)끼리라면 아무것도산생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에다 다른 것을 조합하는 것이 화합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풍성한 성장이 가능하며 만물이 산생합니다. 만일 같은 것에다 같은것을 보태는 경우라면 둘 다 못 쓰게 되고 맙니다. - P66

임금이 예악을 사용하는 이유는 "백관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율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 P70

예악과 형벌의 효용은 백성이 ‘혼란’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고, 기원은 바로 천지를 모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 P72

제사의 기능은 "인민을 굳건히 단속하는" 데에 있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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