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탈역사화

[패전의 우울과 희생자의식]
전후 한참이 지나도 독일인의 대다수가 나치즘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잘못 적용됐을 뿐이라는 생각을 가져: 히틀러의 희생자 - 연합군의 희생자, 독일인에 의한 희생자 의식 없어 -> 탈나치화
유대인의 희생, 이스라엘에 대한 사과와 배상에도 소극적
동독 정권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 진정한 위협이라 생각해(반제국주의 투쟁이 시급) - 나치즘의 과거는 자연히 극복된다
‘전 국민 희생자론‘이 전후 일본의 문화적 기억을 떠받치는 기둥. 제국의 기억이 포스트식민주의 문법으로 구성되면서 전후 일본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기억 문화로 자리잡아.
일본 우파, 자민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 평화헌법 지지자, 평화운동가 모두 희생자 신화에 목을 매고 있음

[공습의 기억과 원리적 평화주의]
드레스덴 폭격의 기억은 동독에서는 연합국을 가해자로 몰고 서독에서는 스탈린과 소련을 가해자로 만들었다. 폭격의 기억은 동서독 모두 독일 민간인을 희생자로 만드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다.
일본이 인류 유일의 피폭국이었다는 사실은 아시아 이웃에 저지른 전쟁 범죄와 가해 행위를 가리는 가림막 기억으로 작동했다.
전후 평화 메시지를 강렬하게 제기할수록 전쟁과 원폭 투하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책임이 가려진다. (모든 전쟁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전투적 평화주의는 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다) -> 탈역사화된 평화주의는 위험
‘도덕적 비가시성(moral invisibility)‘이 근대 문명의 기계화된 폭력을 가능하게 했다(by 바우만)
히로시마 위성도시 구레가 일본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었다는 것이나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중공업이 군함 건조 기지였다는 것, 오쿠노섬에 독가스 공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가려지고 지워진다.

[실향민 · 전쟁포로와 가해의 망각]
나치의 폭력 vs 소련군의 폭력 - 비대칭성
전후 독일과 폴란드 등에서 국경선의 조정이 일어나면서 대량의 피난민이 발생 -> 독일 피란민은 폴란드어로 독일인을 뜻하는 ‘Niemiec‘의 첫 글자 ‘ N‘ 표식을 가슴에 달고 다녔음. 폴란드 수용소에서 독일인 피란민에 대한 고문이나 학대, 가해, 살해 행위가 빈번하였음.
체코도 독일 피란민에 대한 가해 행위 자유롭지 않아
독일의 강제 추방 희생자들(70% 정도가 서독에 정착. 가톨릭 교회와 돈독한 관계. ‘기독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에 주요 지지 세력이 됨)은 자신들에게 가해 행위를 한 동유럽 국가들에 사과를 요구
아데나워 행정부는 독일 피란민의 고통을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과 동일시하면서 탈역사화 시도
일본 피란민 히키아게샤도 독일의 1/4 정도 규모(320만)지만 대부분 전 재산을 빼앗기고 유리걸식, 기아, 추위, 현지인의 복수에 시달렸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본토 일본인의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 소련과 중국의 포로수용소 출신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당해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고 전 직장으로 복귀할 수도 없었음.
《요코이야기》, 《게걸음으로》 모두 패전을 앞두고 서둘러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일본, 독일 피란민의 수난을 그렸으나 역사적 감수성의 차이로 다른 취급을 받아.
《게걸음으로》에서는 가해와 피해가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기억을 배치. 하지만 《요코이야기》는 개인의 고통만 강조되고 일본인이 저지른 범죄나 잔학행위에 대한 비판이 없음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억류된 전쟁포로의 기억도 탈역사화되어 슬라브 공산주의자들의 억압과 박해라는 집단 기억을 강화
서독이나 일본이나 모두 귀국한 전쟁포로에게 패전의 책임에 더해 폭력 이미지가 덧붙여져 악당 취급받아.


패전 직후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집단적 희생자라는 역사적 위치는 유럽과 아시아 전선에서 먼저 전쟁을 도발하고 이웃 국가들을 침략한 독일과 일본 같은 추축국의 가해자들이 선점했다. 인류 역사상최악의 비극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와 전쟁 책임 문제가 기억에서 지워지고 탈역사화하자, 전쟁은 어느 날 문득 할퀴고 간 자연재해처럼 기억되었다. 자연재해에는 가해자가 없고 피해자만 있다. 가해자를 꼭 찾아야 한다면, 신이거나 운명이거나 비인간의 영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전쟁을 탈역사화하고 희생의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순간, 역사의 가해자는 희생자로 위치를 바꾸고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한다.

원자폭탄의 섬광이 번쩍인그날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1964년 도쿄올림픽의 최종 성화주자로 평화의 불을 밝힌 것까지야 에피소드로 넘길 수 있지만, 히로시마평화기념자료관의 건립 역사는 불편하다. 자료관의 건립 전시실은 1949년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 및 자료관 설계 공모에서 당시 도쿄대학 조교수였던 단게 겐조(三)의 설계안이 1등으로 당선되었으며, 그의 설계안에 따라 1955년 8월에 자료관이 개관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전시실의 설명에는 단계의 설계안이 ‘대동아건립기념영조계획(大東亞建立記念營造計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원폭에 대한 탈역사화된 평화주의는 점령군의 엄격한 검열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점령군의 검열체제는 원폭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억누름으로써 풀뿌리 기억의 영역에서 일본의 희생자의식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희생자를 서열화하는 것도 기억의 폭력이지만, 모든희생의 기억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놓고 추상적 고통으로 획일화하는 것도 폭력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고통의 서열화와 획일화를 경계해야 하는 기억의 장은 불편하고 모순된 긴장으로가득 차 있다.

희생의 비대칭성은 종종 더 큰 희생자가 작은 희생자의 희생을 부정하고 희생자의 지위를 독점하는 논리적 근거로 작동하면서 화해의 발목을 잡는다. 자신의 가해 사실과 상대방의 희생을부정하면, 가해자가 회개할 이유도 희생자의 용서를 구할 이유도 없다. 용서가 없으면 화해도 없다. 자신들의 희생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독일이 저지른 죄를 대속했다는 독일 피란민의 입장은 역사적 화해를더 어렵게 만들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독일과 일본은 전근대의 잔재와 일탈한 자본주의적 발전 때문에 봉건 지배계급과 군부, 대자본가가 결탁한 위로부터의 파시스트적 혁명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특수한 길‘ 테제는 독일과 일본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사무직 노동자, 중하층 관료, 노동자계급, 농민 등 대다수 민중이야말로 위에서 강요된 파시즘과 폭력적인근대화의 희생자였다는 전제를 안고 있다. 소수의 나치와 군국주의자가 선량한 민중을 총동원체제로 밀어 넣었다는 ‘특수한 길‘ 테제는 추상의 사회 체제와 구조에 책임을 떠넘겼다. 그러나 희생자를 처형장에 몰아넣고 총을 쏘고 스위치를 당겨 사람을 죽인 가해자는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작은 행위자들이었다. 전쟁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것은 구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특수한 길‘ 테제는 전쟁과 식민지

의 현장에서 잔학행위의 가해자였던 작은 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역사적 담론이었다.
환전후의 자기 변명적 집단 기억 속에서 평범한 독일인과 일본인은사악한 나치와 전근대적 군부의 최초의 희생양이었으며, 전쟁이 끝날무렵에는 최후의 희생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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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15 1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이라는게 참 그런거 같아요.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그나라 국민은 다 피해자가 맞아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수도 없고~

거리의화가 2022-11-15 13:54   좋아요 3 | URL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가 희생자화된 경우)에 대한 문제입니다. 지역적인 범위에서 탈영토화되어 지구화(세계화)된 의미로 쓰이는 것이 왜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죠. 우리만 해도 피해자이기도 하면서 가해자이기도 한데 희생자를 강조하며 성역화시키는 부분도 분명히 있잖아요. 책이 지나치게 두껍다는 생각인데(사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1~2에서 2~3장 정도면 충분할 듯한데 구체적인 사례가 많이 들어가서) 메시지는 결국 하나인 듯 싶습니다^^*

mini74 2022-11-15 17: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의 묘 도 그런 의미로 비판 많았지요. 게걸음으로 읽어보고싶네요

거리의화가 2022-11-15 17:45   좋아요 2 | URL
네. 개인적인 수기라도 역사적 감수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게걸음으로>가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체크는 해두었는데 왠지 미니님이 더 먼저 읽으실듯합니다ㅋㅋㅋ
 

Ⅴ. 국민화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행진(1963.1.27): 1960년 반공주의 미·일 동맹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에서 패배한 일본의 평화운동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기획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설치된 각국에서 보내온 기념물: 서방 자유주의 진영에서 보낸 것들은 나가사키의 자매 도시에서 시장과 시민의 이름으로 보냈으나 공산주의 진영에서 보낸 것들은 국가 권력이 기증의 주체
싱가포르 해안의 건설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대량 학살된 중국계 주민의 유해 수백 구 발굴(1962.5)되면서 흐름 바뀌어
-> 희생자의 기억 뒤에 숨은 가해의 역사를 비판적 시선으로 응시하지 않는 한 기억의 재영토화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
쌍둥이 절대악으로서 히로시마-아우슈비츠 연계는 오늘날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까지 이어지며 일본 민족주의 우파의 문화적 기억을 구성하는 중요 축으로 남아

[아우슈비츠의 기억 전쟁]
국가 단위로 배치된 아우슈비츠 기념관의 구조 - 유대인 희생자를 출신국에 따라 그리스인, 네덜란드인, 이탈리아인 등으로 분류하면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이란 존재를 제거 -> 폴란드당 주류 민족 공산주의는 나치가 전멸시키려던 것은 폴란드인이고 유대인은 단지 이주의 대상이었을 뿐
1968년 아우슈비츠 유대관이 문을 열기는 했으나 1980년대 까지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폴란드 시민의 죽음만을 강조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은 지워짐.
아우슈비츠의 십자가를 둘러싼 유대인과 폴란드인 사이의 논쟁: 1979년 교황(요한 바오르 2세: 폴란드 출신)의 미사 집전, 1984년 지클론 저장 창고 건물에 카르멜 수녀원 들어섬 - 수용소가 홀로코스트보다는 폴란드인 가톨릭교도의 순교와 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짐
-> 결국 세계 각국의 반발로 1989년 2월까지 카르멜 수녀원 이전 합의했으나 잡음이 끊이지 않음 -> 1993년 교황 바오로 2세의 결단으로 이전 계획 철수, 하지만 교황의 십자가는 남음
십자가를 세우자고 요구하는 폴란드인과 십자가 철거를 요구하는 유대인 사이에서 충돌 벌어져 -> 1999년 5월 폴란드군 출동으로 십자가 계곡 청소되었으나 교황의 십자가는 치워지지 않음
2020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4명의 뉴욕 랍비가 비르케나우 카톨릭 교회의 철거를 요구
압도적 규모의 비극에서 오는 보편적 상징성으로 아우슈비츠는 다양한 희생자의 기억이 각축하는 정치적 경쟁의 장이자 재영토화의 대상이 되었음

[동아시아의 기억과 홀로코스트의 국민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가장 많이 팔린 나라 - 일본
1955년 동아시아 유일의 홀로코스트 교육센터(오쓰카 마코토가 세움, 후쿠야마)
2015년 오쓰마 마코토가 독일 방송 인터뷰에서 유대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고 유대주의와 일본의 국가신도에 공통점이 많으며 일본어와 히브리어의 발음이 유사하다 주장 -> 일본인과 유대인 사이의 과잉화된 동질성
1956년 《밤과 안개(by 빅토어 프란클)》라는 책이 독일에서는 절판된 반면 일본에서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중요한 역할. ‘1,000만 명을 학살한 대학살공장의 실태‘라는 출판사의 광고, 1956년 일본판은 자기반성의 관점에서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일본에 알림으로써 비극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출간 의도 밝혀. 1937년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 학살과 나치 강제수용소의 집단학살을 병치해놓은 자기 비판적 기억
1960~1970년대 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일본이 동아시아 반공 진영의 중심국으로 편입이 되면서 재군비로 무장하고 교과서 검정체제도 변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부정적 측면은 제한되고 어쩔 수 없이 제시될 때는 미화시키도록 촉구, 서구 식민주의로부터 아이사 민족들을 해방시켜 독립의 기회를 준 것이라는 식의 서술 필요 의견(침략->진출, 난징 학살 삭제, 종전을 위한 천황의 용단 강조)
1936년 만주국을 방문한 듀보이스(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인종문제 제기)는 만주국을 인종적 평등이 구현된 이상적 식민지이자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로부터 자유로운 체제를 가진 다인종 공동체로 인식.
세네갈 등의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더 검은 민족의 국제연맹(International League of Darker Peoples)‘ 결성하면서 일본과의 연대 추진
존 에드워드 브루스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은 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소설을 발표
1960년대 일본의 집단 기억이 홀로코스트를 자주 참조했다면 한국은 이스라엘을 건국 모델로 자주 소환했음. - 일본인이 유대인의 희생에 관심을 두었다면 한국인은 이스라엘의 영웅적 민족주의에 관심을 둔 것(식민지 조선인은 고향을 잃고 유랑하는 유대인의 곤경과 고통에 관심을 보였음)
1962년 7월 키부츠를 모델로 한 ‘농촌 개척대대‘가 출범하며 이스라엘 정부는 1963년 12월 화답하듯 한글 책자 간행 보조비로 ‘재건국민운동‘에 1,100달러 기증
-> 1970년대 초 가나안 농군학교는 농촌 지도자를 키우는 산실 역할을 했고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한국에서 세계적 경쟁의 성공 모델로 인식돼
한국의 언론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90년 이후. ->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이스라엘은 영웅적 투자에서 억울한 희생자로 변모
한국의 이스라엘 담론의 변화에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발현과도 관련할 것
한국의 1987년 정치 민주화는 냉전 시기 국가 권력에 의한 정치적 제노사이드의 진상조사와 기억의 복권 분위기가 이루어지며 홀로코스트가 부상
북한 민주화운동 주체들도 홀로코스트를 전거로 삼기는 마찬가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북한의 인권탄압, 아우슈비츠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병렬하면서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를 촉구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슬로건에서 보듯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중국과 조선을 열등한 동양으로 주변화하고 일본은 우월한 서양으로 정론화하는 헤게모니적 담론이었다." 아시아 이웃에 대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일본제국과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본의 문화적 기억을 구성하는서사적 틀이자 얼개였다. 아시아 이웃에 대한 우월감의 밑에는 일본은서양의 제국주의에 의해 밀려나고 주변화된 ‘서벌턴 제국주의‘에 불과하다는 연민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행진의 주도자들 또한 서벌턴 제국주의가 구성하는 일본 사회의 기억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 P221

원폭의 기억은 일본 사회의 희생자의식을 더 강화하고 기억의 국민화를 재촉했다. 원폭 희생자가 일본 국민으로 획일화되는 순간, 재일조선인, 타이완인, 오키나와인, 중국인, 연합군 전쟁포로, 거류 외국인등의 비국민 희생자들은 일본 사회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희생자의 국민화가 완성되었다. - P22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의 공산당 정권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의 기억을 숙청했지만, 탈냉전 시대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아우슈비츠를 유대화함으로써 오시비엥침을 탈폴란드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폴란드화=탈유대화‘ 대 ‘유대화=탈폴란드화‘의 진자운동 속에서 아우슈비츠는 끊임없이 재영토화하려는 민족주의적기억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 P230

일본의 저항 민족주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 침략을 거치면서 순식간에 식민주의로 변화해갔지만, ‘서양식민주의의 희생자‘라는 의식은 일본의 기억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축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인도의 세포이 반란이나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같은 반열에 놓고 서양의 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 민족의 반제민족투쟁으로 재구성하는 해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905년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서양 제국에 맞선 주변부의 저항 민족주의자들에게 희망의방아쇠를 당겼다. 모한다스 간디 (Mohandas Gandhi)가남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일본의 승리를 자축할 때, 라빈드라나트 타고 - P242

르(Rabindranath Tagore)는 학생들을 이끌고 승리 행진을 벌였다. 오스만제국의 병사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영국의 사립학교 해로에 다니던 소년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 이집트의 무스타파 카밀(Mustafa Kamil) 등에게 일본의 승리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서양 제국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듀보이스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이후 세계 각지에서 분출하는 ‘유색인의 자긍심‘에 대해 말했다. - P243

1947년 이스라엘 건국과 1948년남한 건국 이후, 한국 언론의 관심은 유랑하는 유대민족에 대한 공감에서 신생국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국민적 통합 과정에 대한 찬탄으로 바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20세기의 끝인 1999년12월 31일까지로 한정해도, 이스라엘과 유대인 관련 기사는 거의 6만건에 이른다. 중동 침입자에 맞서 싸우는 이스라엘, 수에즈 운하 사태,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중동 국가들과 벌인 크고 작은전투, 6일 전쟁 등에 대한 기사가 끊이질 않는다. 유대인의 표상이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유랑으로 고통받는 희생자에서 불굴의 의지와애국심으로 주변 중동 국가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부강한 나라 이스라엘을 건설한 영웅적 민족주의로 바뀐 것이다. - P246

홀로코스트가 유럽과 이스라엘, 미국의 밖에서는 진정한 반향을갖지 못한다는 식의 재단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당사자의 기억만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다는 당사자주의적 입장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당사자주의는 외부의 비판적 개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점에 - P253

서 기억을 특권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홀로코스트가 다양한 희생자의 연대를 타진하는 지구적 기억의 준거로 작동한 지는 이미 오래다. 그 과정에서 배태된 탈영토화하는 기억과 재영토화하는 기억 사이의 긴장과 균열은 비단 동아시아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그 균열은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성을 강조하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지구화한다는 작업 속에 이미 배태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지구적 차원의 인권을 지키는 코즈모폴리턴적 윤리성을 부여하면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특권화하는 이율배반이나 ‘지구화된 홀로코스트‘와 ‘진짜 홀로코스트‘ 사이의 긴장과 균열은 불가피한 면도 있다." 홀로코스트의 지구화가 곧 홀로코스트의 국민화가 되는 모순적 과정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긴장을 지구적 기억구성체의 상수로 만드는 경향도 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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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 도스토옙스키부터 하루키까지, 우리가 몰랐던 소설 속 인문학 이야기
박균호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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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과 책의 내용이 매치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래서 아쉬웠다. 다른 제목을 썼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했다).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읽고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게다가 주제마다 등장하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는 미소를 짓게 만든다. 아내분과 따님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 같지만 나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아주 유명한 작품도 못 읽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내가 잘 못 읽어서 읽고 나면 자괴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소설을 읽다가 지루해서 졸았던 적도 많다. 최근에는 조금씩 소설을 읽어가고 있는데 여전히 어려움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인물과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 책에는 20권의 소설이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는 <분노의 포도>, <맨스필드 파크> 단 2권이다. 그래서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 이리도 많은데 어쩌나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저자의 글 솜씨도 좋아서이겠지만 소설에 얽힌 인물과 배경을 설명해주어서 읽지 않은 소설이었어도 읽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소설의 이야기보다 사실 뒷 이야기들이 더 재밌었다. 뒷 이야기들이라함은 소설에 대한 주변적 이야기지만 소설을 이해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장치적 역할을 한다. 소설을 조금씩 읽으며 생각하는 것이지만 배경을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이해의 깊이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이해도도 떨어지고 심지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여러 주제들 중 나는 고서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박인환 시인과 김수영 시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박인환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책 사랑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박인환 시인이 운영하던 마리서사가 지금도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아쉬울 따름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결혼 전 살던 동네 근처에 고서점이 있었다. 그 때도 책을 좋아했는지 남자친구와 함께 여러 번 들렀었다. 서점에 들어서면 나는 묵은 향기가 기억에 또렷하다. 무슨 책을 샀는지도 지금은 가물한데 어쨌든 갈 때마다 여러 권의 책을 집어들고 나왔었다. 결혼 무렵 더 이상 그 곳을 이전처럼 가지 못하게 되어 인사차 들렀을 때 주인 아저씨께서 운영난으로 서점을 그만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이제 더는 남아있지 않는 그곳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지금도 여전하다. 나의 추억만이 남고 실물은 사라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읽을 거리를 얻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읽는 즐거움은 당연히 배가 될 것이다. 책에 대한 사랑과 이야기적인 재미까지 가득해서 책쟁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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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13 2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까마득할 나이 오십이 되면 이전과 독서 방향이 크게 달라질것 같진 않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도서관 소장 도서 만큼 읽으셨던 제 교수님들
오십 이후 부터는 고전으로 돌아가서 읽으시더군요.

이북에서 느낄 수 없는 종이 향기, 손끝에서 느껴지는 질감 때문에
종이 책은 우리 곁에 영원 할 것 같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14 09:16   좋아요 2 | URL
저도 50이 된다고 해서 특별하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조금 더 깊게 팔 것 같긴 합니다. 그때쯤이면 좋아하는 책이 몇 권쯤 생길테니 재독하는 것도 좋겠죠^^ 말씀하신대로 고전 읽기도 좋겠습니다.
저도 이북은 손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쉽더군요. 헌책방이나 고서점에 들어갔을 때의 그 묵은 향이 저는 참 좋더라구요. 책은 역시 넘겨보는 맛인 것 같습니다ㅎㅎㅎ

박균호 2022-11-14 0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요즘 우울한 시기였는데 멋진 서평 덕택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14 09:17   좋아요 1 | URL
박균호님 덕분에 좋은 책 읽어서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분이 좋아지셨다고 하니 더 좋네요.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랄게요^^*

mini74 2022-11-14 16: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소설이 있는거 같아요. 예전과는 다른 맛, 그래서 20대에 만난 작가의 책이 50엔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괜히 앞에 적힌 나이때문에 이 책이 손해보는건 아닌가 ㅎㅎ 걱정되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2-11-14 17:28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 재독한 책이 손에 꼽아서요...ㅎㅎ 과연 50대가 되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얼마나 생길 것인가가 궁금하긴 합니다^^
저도 그 생각했어요. 저 숫자 때문에 책이 손해보는 것 같은 느낌? 내용도 사실 숫자에 상관없이 언제 읽어도 될 책들이라는 생각입니다ㅎㅎㅎ

희선 2022-11-16 0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인환 시인이 하는 책방은 아니지만, 마리서사 제가 사는 곳에 있어요 가 본 적은 없어요 박인환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마리서사라 지었다고 한 듯해요 한번 가 보려고 했는데 못 가 봤습니다 언젠가 쓴 적 있는데... 알 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 곳이네요 거기 산다고 해서 길을 다 아는 건 아니기도 하군요

https://blog.aladin.co.kr/798715133/11683260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16 09:16   좋아요 1 | URL
와 희선님. 마리서사가 있군요. 군산이라니... 예전에 여행 한번 했었는데 짧기도 했고 이곳을 알지 못해서 가보진 못했네요. 코로나인데도 운영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시는게 다행입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가봐야겠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희선 2022-11-17 03:49   좋아요 1 | URL
말하고 이제 문 닫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코로나로 문 닫은 동네책방 많을 거예요 저기 알 것 같은데, 예전에 찾아보니 안 보이더군요 집에서는 좀 멀어요 걸어서 삼십분쯤 걸리는 동네인데... 나중에 저쪽으로 가면 다시 찾아볼까 봐요


희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 지양으로서의 조선, 지향으로서의 동양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6
정준영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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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는 학문의 전당을  표방하면서 제국과 식민이 중첩된 공간 위에 서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국책(國策)과 학문 사이의 균열'이라는 모순된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다. 이런 균열의 간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메울 것이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 P18~19

그동안 대한민국 사학계를 지배해온 식민사관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제기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총서 지난 시리즈 5권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 편찬을 위해 자료 수집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 그들의 논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조작 및 왜곡을 얼마나 서슴없이 자행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여다본 바 있었다.
하지만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관점에 입각한 연구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그로 인해 진실과 거짓의 중간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수많은 일본인의 조선 연구가 충분한 고려 없이 더 교묘한 왜곡으로 미리 단정되기 일쑤였으며, 모호함 그 자체에 주목할 여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P9). 저자는 이런 기존의 한계를 넘어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을 검토하고자 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주의적 지향이 관철되는 공간인 동시에 학술적 연구가 허용된 제도적 공간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독특한 위치를 점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이 책은 경성제대 초대 총장과 법문학부 일본인 학자 5인을 기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식민지 조선 연구의 흐름을 살펴본다.

국책과 학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으로 경성제대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는 조선 연구, "동양 문화의 권위"라는 지향을 내세웠다. 이 관점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연구만으로는 안 되고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이 주도한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까지 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방향성을 위해 조선총독부와 날을 세우면서 자신의 입김에 맞게 대학의 인력을 구성했다.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2강좌' 초대 주임교수였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교과서 편찬과 각종 고적조사사업을 주관한 식민지 관료로 출발하였으나 1923년 조선사학회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비로소 역사학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사학회는 식민사학의 제도화라는 흐름에서 보면 과도기적 성격이 강했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전문 연구자를 본토에서 촉탁으로 끌어오는 것으로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무리였기에 경성제대 설립이 추진되었다. 또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도 기존의 조선 연구의 전환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조선사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사강좌』 발행을 주도하고 경성제대 창설 작업에 참여하며 대학 예과의 형태와 대학 학부의 구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식민주의 역사학은 식민지 조선에서 제도화되었으며, 경성제대는 이런 식민주의 역사학의 제도적 중심으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P89).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1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인 이마니시 류는 당시 일본 학계에서 조선사 연구를 대표했던 인물로, 조선 고서적을 광범하게 수집했던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오다 쇼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조선사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오다 쇼고는 식민지 관료 출신으로, 조선사학이라는 학문 영역의 제도적 정착에 지원을 한 인물인 반면, 이마니시 류는 일본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에서 '조선사학'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최초의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조선사학'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마니시는 조선 고대사를 중국 제국주의로의 종속의 역사로 보았다. 그는 한반도 속의 중국이었던 한사군과 낙랑군을 조선 민족의 종속화의 사례로 보았다. 그는 고대 중국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속성을 읽어내면서 서구의 제국주의와 중국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제국의 가능성을 조선 고대사, 고대 한일관계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조선 민족의 종속을 '중국화'에서 찾고 조선이 일제의 일부분이 되었고 이것이 영원하려면 중국화를 걷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조선인에게 '지나화'를 벗겨내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곧바로 강제로 '지나화'를 벗기는 폭력적 행위를 유발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는 동양학자들 그룹이 있었다. '지나철학 강좌', '지나어학 · 지나문학 강좌', '동양사학 강좌' 등의 강좌를 기본으로 삼아 연구하고 가르친 일본인들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나철학 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와 1941년 '지나철학 강좌' 후임을 맡은 아베 요시오가 있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교수 부임 이전 일본에서 중국 고전 경전에 대한 권위자였다. 그는 고증학을 중심으로 하는 청대 중국의 학술문화가 어떻게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 주변 세계로 확산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청대 중국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한 조선의 지식인들(홍대용, 박제가, 김정희)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의 고증학은 청조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인이 있었음에도 그들 개인의 업적에 그친 반면 일본의 고증학은 서구의 근대 학문과 연계하며 발전해 나갔다고 주장했다. 아베 요시오는 퇴계 이황과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적 혈연 관계를 통해 퇴계 사상의 흐름은 조선에서 제국대학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일본의 도학파에게 전해져 황도 철학으로 만개했다고 보았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국제공법 강좌'와 '외교사 강좌'를 맡은 '이즈미 아키라(1873~1943)가 있었다. 그는 경성제대 부임 전 국제주의를 준거로 강제적 동화주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비동화주의 식민정책을 주장하였다. 타이완 현지 지식인들이 그의 이론을 수용하고 적극 호응하며 1920년대 '타이완의회설립 청원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식민의 개념을 규정하면서 이주와 식민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식민은 "생애거주"의 목적, "집단적", "가족과 더불어", "본국은 아닌", "무소속의 토지나 자국의 영토"일 때만이고 그 이외는 이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점진적 진화론에 가까웠고 이상적인 방향이었으나 현실의 식민정책과는 때문에 타협이 어려웠다. 그는 일본 식민정책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반대를 주장한 이였지만 민족자결은 혁명의 자유나 식민지 독립운동과 어떤 관련도 없다고 주장하는 등 한계를 보였다. 1927년 경성제대 부임된 이후 그는 퇴임 때까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기존의 식민정책학자로서의 활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1928년 《외교시보》에 발표한 「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논문에서 비동화주의와 조선의 여러 분야의 문제를 분석한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이 발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으로 이즈미 사상에 문제를 삼아 교수 해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아무리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가 학문적 자율성과 과학적 엄밀성, 그리고 제국적 보편성을 지향한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그 배후에 식민지배의 폭력적 현실이 최종심급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조선 연구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자 핵심적인 배경이다. - P243

1930년대 만주 사변 후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는 '지나'에서 '대륙(만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31년 경성제대 제4대 총장으로 온 야마다는 사명을 변경하며 조선은 '만몽 개발'의 적임자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연구'라는 용어 대신 '개발'이라는 용어를 쓰고 '지나'는 '만몽'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경성제대는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으로 발돋움하였으며, 개별적인 전문 연구활동 대신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조선 연구는 경성제대에 의해서 비로소 제도화된 분과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고, 분과학문이 된 조선 연구가 체계적으로 양성해낸 인력들이 통치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 참여하여 식민권력에 이바지한다. 매번 전문가를 촉탁이라는 형태로 일본 본토에서 초빙해 학술 조사를 수행해야 했던 조선총독부의 처지에서도 경성제대의 설립은 인력 수급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했다. - P241

다만 이들은 여러 조선 연구 중에서 극히 일부를 담당했을 뿐이고, 시기적으로도 앞쪽에 치우쳐 있다. 저자는 이렇게 조선 연구의 해당 분야와 연구자 세대에 대한 편향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도한 바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먼저 일본인들이 수행한 조선 연구가 가진 특징을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경성제대 조선학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들과 자유주의적 식민정책학자로서 식민지 사정을 비판했던 이가 경성제대 조선학의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형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 연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기존 조선 사학계를 대표하는 오다 쇼고나 이마니시 류 말고 동양학자 그룹들의 학자였던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 국제법 학자인 이즈미 아키라의 주장이 흥미로웠다. 청대 고증학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 지식인들에 주목한 후지쓰카 지카시와 퇴계 이황에 주목한 아베 요시오, 그리고 비동화주의를 주장한 이즈미 아키라. 이런 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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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2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덕분에 요즘 새로 공부하는 기분이에요. ^^

거리의화가 2022-11-13 19:3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어릴 때 좀 이렇게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ㅎㅎㅎ 다늦게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나네요~ 항상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1-13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혹시 역사학과 교수님이신가요? ^^ 저도 언제나 화가님 글이랑 읽으시는 책들 보면 놀라게 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13 15:20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무슨 그런 말씀을...^^;;; 진짜 역사학과 교수님들께 돌날라오는 소리가 들립니다ㅠㅠ 새파랑님께 놀라움을 드렸다니 저는 그저 감사하죠.
 

Ⅳ. 지구화

[탈냉전과 기억의 지구화]
‘스톡홀름 선언‘(2000.1.28 공표): 홀로코스트가 보편적 의미를 지니며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되어야한다라고 명시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발족으로 동유럽에서 강제 노동된 노동자와 독일 내 강제수용소의 수감자와 유대인, 전쟁포로 등이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 법. 1953년 ‘런던채무협약‘으로 전후 배상 문제는 일괄 타결되었다고 간주해온 독일 정부 및 재계의 과거 입장과 비교하면 큰 진전이 이루어진 것 - 인권에 대한 보편적 관심의 확대
-> 한국 언론은 독일의 배상을 전례로 삼아 일본 정부와 재계에 식민지 조선인 강제노동 배상에 대한 촉구 - 지구적 기억 공간에도 큰 반향

[일본군 ‘위안부‘와 반인륜적 범죄]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여성 국제전범재판소(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2000.12 도쿄): 법적 구속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도덕적 목소리로 인해 정치적 의미가 컸음. 일본군 ‘위안부‘ 기억활동가들은 천황을 비롯한 일제 최고위 정치 군사 지도자 10명을 전쟁범죄와 반인륜 범죄로 기소. 생존자 증인 35명의 법정 증언과 비디오 증언을 증거로 채택. 법정은 위안부 제도 아래 자행된 강간과 성노예제가 ‘반인륜적 범죄‘라 판결 -> 아시아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여성에게 저지른 성범죄를 기억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지구적 기억의 문제가 되었음을 선포한 것
1994년 르완다와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벌어진 제노사이드가 ‘일본군 여성 국제전범재판‘에 영향을 주었음
1993년 빈 세계인권회의에서 여성의 권리는 인권 문제임이 강조, 같은 해 12월 유엔 총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 철폐 선언 채택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 로마 규정: ‘강간, 성노예제, 강요된 매춘‘을 전쟁범죄이자 반인륜적 범죄로 규정
20세기 성폭력은 제노사이드의 주요 수단 중 하나였고 생물학적 인구 재생산을 통제하는 제노사이드의 방법과 결합하면서 성폭력의 양상이 더 체계적이고 정교해짐.(가부장제와의 결합)
성폭력으로서의 강제 결혼이 반인륜적 범죄라는 최초의 판결은 ‘시에라리온특별재판소‘의 찰스 테일러 항소 법정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공개 증언 이후 양국 여성단체의 초국가적 연대와 북미 대륙의 한국계 이주민 여성들의 문제 제기로 ‘위안부‘ 문제는 전지구적 이슈로 발전 일본계 미국인 NGO 단체인 ‘인권과 배상을 위한 일본계 미국인(Nikkei for the Civil Rights and Redress, NCRR)‘의 활동: 일본군 위안부가 거짓이라 주장하고 백악관 청원과 의회 로비, 지방 정부에 대한 압력 등을 통해 ‘위안부‘ 기림비나 소녀상의 철거를 주장한 본국 정부와 일부 일본계 미국인의 원거리 민족주의와 대조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음
미국 내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기억활동가(글렌데일의 시의회 의원인 아라 나자리안, 자레 시나얀)와 일본군 ‘위안부‘ 기억활동가의 연대
글렌데일 시립도서관 안에 문을 연 갤러리 리플렉트스페이스에서 열린 기획 전시(2017.5) 개막전 ‘기억의 풍경‘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서 공식 역사와 생존자 증언의 관계를 묻는 전시, 두번째 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침묵과 대화에 대한 예술적 성찰‘
2005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박물관에서 열린 ‘나치 강제수용소와 강제 성노동‘ 전시: 강제 성매매의 문제를 기억의 공론장에서 논의하게 된 계기
2007년 9월 라벤스브뤼크 ‘전시 강제 성매매‘ 여름 대학: 일본군 위안부와 보스니아 그르바비차에서 벌어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이슬람 여성 집단 강간, 나치 수용소의 강제 성매매를 함께 다루면서 강제 성매매와 폭력을 같은 기억 공간에 배치

[검은 대서양과 홀로코스트]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기소한다> 유엔에 청원서 제출(1951):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미국의 인종주의적 박해가 지닌 공통점 지적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정치범들, 넬슨 만델라에게 인기가 높아
1920년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일로 이주한 ‘검은 독일인‘과 독일에서 태어난 자식 세대 역시 괴롭힘과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았음
《할런의 책(The Book of the Harlan)》(2016): 아프리카계 미국인 재즈 연주자 할런과 리저드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그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대한 묘사나 수용소 소장 부부에 대한 비역사적 설정, 아프리카계 독일인이나 유럽의 흑인보다 파리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홀로코스트의 주된 희생자로 그리는 등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 많은 문제점 노출
아실 음벰베 논쟁(2020): 아프리카의 탈식민주의적 기억과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만났을 때 누가 더 큰 희생자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한 갈등을 보여
다른 역사적 비극과의 비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홀로코스트를 절대화하고 홀로코스트가 도덕적 불문율로 탈역사화되어서는 안되

[68혁명과 기억의 연대]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베트남 반전 평화운동과의 결합)은 탈영토화된 지구적 기억구성체의 연대를 향한 역사적 배경
1971년 중일전쟁과 난징학살에 대한 일본 사회의 비판적 기억을 끌어낸 것은 1960년대 일본 베트남 반전운동인 ‘베트남평화시민연합’의 행위에 따른 결과 - 일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1968년 혁명은 실패했지만 기억 문화의 관점에서 실패라고 단언할 수 없다.
1961년 아이히만 재판,
파리 시가에서 반식민주의 시위에 나선 알제리 이민자들의 학살 피해, -> <두 개의 게토>(마르그리트 뒤라스): 바르샤바 게토 생존자와 알제리 노동자를 병치해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에 대한 기억의 연대 타진
아메리카 선주민에 대한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정착민 민주주의 체제가 권위적인 식민주의 체제보다 학살의 빈도와 강도가 훨씬 더 많고 높음)와 홀로코스트의 기억의 연대 ->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제노사이드의 기억은 서구에서 제노사이드나 홀로코스트가 발생할 수 없다는 서구중심주의의 역사적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표출. 서구 민주주의가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을 내장한 체제인 것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기억은 20세기의 제노사이드를 비판적으로 기억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든다다.
독일의 이슬람계 이주민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맺고 있는 기억의 연대: 소설 ‘위험한 유사성’(1998)에서 터키계 이슬람 독일인의 기억 속에서 홀로코스트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조우하게 하면서 기억의 민족적 경계를 뒤흔듬
베를린 노이쾰른구의 기억활동가들이 시도한 ‘노이쾰른 동네 어머니 프로젝트’

1989~1991년 소련 및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유주의 서구문명이 세계사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낙관주의에 취해 있을 때, 르완다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와 체계적 성폭력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역사의 반복‘임 - P173

을 일깨워주었다. 특히 인종 청소라는 이름으로 보스니아의 이슬람 여성에게 자행된 체계적인 집단 강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전 세계에 되살렸다. 또 거꾸로 르완다 및 유고슬라비아의 국제전범재판에서는 무력 충돌 때 발생한 체계적 강간에 대한법적 정의를 내리는 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참고하기도 했다. 국제노동기구 또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1930년 제정된 강제노동협약위반이라고 보았다. - P174

실제로 성폭력은 피해자인 여성은 물론이고 그 여성이 속해 있는공동체의 남성에게도 여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안겨준다는 점에서 가해자의 권력을 행사하고 과시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효율적인 지배 도구였다. - P174

성적 제노사이드의 가해자에 대한 단죄가 지체될수록 더는민족의 몸을 재현하지 못하는 성폭력 피해자는 외부의 가해자뿐 아니라 내부의 가부장적 민족주의자들의 비난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일본 전범에 대한 도쿄 재판에서 성범죄에 대한 고발과 처벌은 홀로코스트와 난징 학살, 연합군 포로 학대 등의 이슈에 밀려 주변화되었다.
반인륜적 범죄로서의 전시 성폭력이 전 세계 시민사회의 심각한 윤리적 의제로 등장한 것은 21세기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지구적 기억구성체의 형성과 더불어 지금까지는 타자화되었던 성폭력 희생자에대한 윤리적 감수성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 P175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트랜스내셔널한 억압의 기억 때문에트랜스내셔널한 페미니즘적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은 일본 제국의 파시스트 가부장주의, 전후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탈냉전기의 신민족주의의 결절점으로서 가해자 이데올로기의 연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일본 내부의기억 정치적 지형에서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은 페미니즘의 미투동에 대한 남성주의적 혐오와 연결되어 있다. - P180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다른 제노사이드의 기억과 경쟁하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 ‘다방향적인 기억‘ 또는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의 ‘비판적 상대화’를 통한 비교는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홀로코스트의 단일한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특권적 지위에 대한 헤게모니적 욕망을 제어하는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기억과 더불어 식민주의적 과거에 대한 망각이 전후 독일의 기억 문화를구성하는 다른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P194

1960년대의 반전운동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미국의 노예제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과 잔학행위에 대한 기억이 전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서로 만나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히 전지구적 시민운동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정치 동학의 관점에서는 68혁명이 실패한 혁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문화의 관점에서는 실패라고단정하기 어렵다. 1968년을 기점으로 국가권력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자기중심적 기억 문화의 코드를 흩트리고 국경을 넘어 타자의 고 - P198

통에 공감하는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과거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국민국가의 틀에서 구출하여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기억 문화의 코드를 바꾸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68혁명의 문화사적 의의는 실패한 정치혁명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 P199

민족공동체가 흔히 빠지기 쉬운 영토화된 민족주의적 기억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과거를 공유하지 않는 이질적 기억 주체의 참여가 필요하다. 예컨대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억은우파적 기억이냐 좌파적 기억이냐, 공식 기억이나 풀뿌리 기억이냐의구분을 넘어서 베트남계 이주민들이, 더 나아가서는 베트남의 침공을받은 캄보디아계 이주민들이 기억의 구성 과정에 참여할 때 급진적으
‘로 탈영토화될 것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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