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국민화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행진(1963.1.27): 1960년 반공주의 미·일 동맹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에서 패배한 일본의 평화운동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기획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설치된 각국에서 보내온 기념물: 서방 자유주의 진영에서 보낸 것들은 나가사키의 자매 도시에서 시장과 시민의 이름으로 보냈으나 공산주의 진영에서 보낸 것들은 국가 권력이 기증의 주체
싱가포르 해안의 건설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대량 학살된 중국계 주민의 유해 수백 구 발굴(1962.5)되면서 흐름 바뀌어
-> 희생자의 기억 뒤에 숨은 가해의 역사를 비판적 시선으로 응시하지 않는 한 기억의 재영토화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
쌍둥이 절대악으로서 히로시마-아우슈비츠 연계는 오늘날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까지 이어지며 일본 민족주의 우파의 문화적 기억을 구성하는 중요 축으로 남아

[아우슈비츠의 기억 전쟁]
국가 단위로 배치된 아우슈비츠 기념관의 구조 - 유대인 희생자를 출신국에 따라 그리스인, 네덜란드인, 이탈리아인 등으로 분류하면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이란 존재를 제거 -> 폴란드당 주류 민족 공산주의는 나치가 전멸시키려던 것은 폴란드인이고 유대인은 단지 이주의 대상이었을 뿐
1968년 아우슈비츠 유대관이 문을 열기는 했으나 1980년대 까지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폴란드 시민의 죽음만을 강조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은 지워짐.
아우슈비츠의 십자가를 둘러싼 유대인과 폴란드인 사이의 논쟁: 1979년 교황(요한 바오르 2세: 폴란드 출신)의 미사 집전, 1984년 지클론 저장 창고 건물에 카르멜 수녀원 들어섬 - 수용소가 홀로코스트보다는 폴란드인 가톨릭교도의 순교와 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짐
-> 결국 세계 각국의 반발로 1989년 2월까지 카르멜 수녀원 이전 합의했으나 잡음이 끊이지 않음 -> 1993년 교황 바오로 2세의 결단으로 이전 계획 철수, 하지만 교황의 십자가는 남음
십자가를 세우자고 요구하는 폴란드인과 십자가 철거를 요구하는 유대인 사이에서 충돌 벌어져 -> 1999년 5월 폴란드군 출동으로 십자가 계곡 청소되었으나 교황의 십자가는 치워지지 않음
2020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4명의 뉴욕 랍비가 비르케나우 카톨릭 교회의 철거를 요구
압도적 규모의 비극에서 오는 보편적 상징성으로 아우슈비츠는 다양한 희생자의 기억이 각축하는 정치적 경쟁의 장이자 재영토화의 대상이 되었음

[동아시아의 기억과 홀로코스트의 국민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가장 많이 팔린 나라 - 일본
1955년 동아시아 유일의 홀로코스트 교육센터(오쓰카 마코토가 세움, 후쿠야마)
2015년 오쓰마 마코토가 독일 방송 인터뷰에서 유대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고 유대주의와 일본의 국가신도에 공통점이 많으며 일본어와 히브리어의 발음이 유사하다 주장 -> 일본인과 유대인 사이의 과잉화된 동질성
1956년 《밤과 안개(by 빅토어 프란클)》라는 책이 독일에서는 절판된 반면 일본에서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중요한 역할. ‘1,000만 명을 학살한 대학살공장의 실태‘라는 출판사의 광고, 1956년 일본판은 자기반성의 관점에서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일본에 알림으로써 비극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출간 의도 밝혀. 1937년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 학살과 나치 강제수용소의 집단학살을 병치해놓은 자기 비판적 기억
1960~1970년대 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일본이 동아시아 반공 진영의 중심국으로 편입이 되면서 재군비로 무장하고 교과서 검정체제도 변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부정적 측면은 제한되고 어쩔 수 없이 제시될 때는 미화시키도록 촉구, 서구 식민주의로부터 아이사 민족들을 해방시켜 독립의 기회를 준 것이라는 식의 서술 필요 의견(침략->진출, 난징 학살 삭제, 종전을 위한 천황의 용단 강조)
1936년 만주국을 방문한 듀보이스(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인종문제 제기)는 만주국을 인종적 평등이 구현된 이상적 식민지이자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로부터 자유로운 체제를 가진 다인종 공동체로 인식.
세네갈 등의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더 검은 민족의 국제연맹(International League of Darker Peoples)‘ 결성하면서 일본과의 연대 추진
존 에드워드 브루스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은 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소설을 발표
1960년대 일본의 집단 기억이 홀로코스트를 자주 참조했다면 한국은 이스라엘을 건국 모델로 자주 소환했음. - 일본인이 유대인의 희생에 관심을 두었다면 한국인은 이스라엘의 영웅적 민족주의에 관심을 둔 것(식민지 조선인은 고향을 잃고 유랑하는 유대인의 곤경과 고통에 관심을 보였음)
1962년 7월 키부츠를 모델로 한 ‘농촌 개척대대‘가 출범하며 이스라엘 정부는 1963년 12월 화답하듯 한글 책자 간행 보조비로 ‘재건국민운동‘에 1,100달러 기증
-> 1970년대 초 가나안 농군학교는 농촌 지도자를 키우는 산실 역할을 했고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한국에서 세계적 경쟁의 성공 모델로 인식돼
한국의 언론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90년 이후. ->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이스라엘은 영웅적 투자에서 억울한 희생자로 변모
한국의 이스라엘 담론의 변화에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발현과도 관련할 것
한국의 1987년 정치 민주화는 냉전 시기 국가 권력에 의한 정치적 제노사이드의 진상조사와 기억의 복권 분위기가 이루어지며 홀로코스트가 부상
북한 민주화운동 주체들도 홀로코스트를 전거로 삼기는 마찬가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북한의 인권탄압, 아우슈비츠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병렬하면서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를 촉구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슬로건에서 보듯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중국과 조선을 열등한 동양으로 주변화하고 일본은 우월한 서양으로 정론화하는 헤게모니적 담론이었다." 아시아 이웃에 대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일본제국과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본의 문화적 기억을 구성하는서사적 틀이자 얼개였다. 아시아 이웃에 대한 우월감의 밑에는 일본은서양의 제국주의에 의해 밀려나고 주변화된 ‘서벌턴 제국주의‘에 불과하다는 연민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행진의 주도자들 또한 서벌턴 제국주의가 구성하는 일본 사회의 기억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 P221

원폭의 기억은 일본 사회의 희생자의식을 더 강화하고 기억의 국민화를 재촉했다. 원폭 희생자가 일본 국민으로 획일화되는 순간, 재일조선인, 타이완인, 오키나와인, 중국인, 연합군 전쟁포로, 거류 외국인등의 비국민 희생자들은 일본 사회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희생자의 국민화가 완성되었다. - P22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의 공산당 정권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의 기억을 숙청했지만, 탈냉전 시대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아우슈비츠를 유대화함으로써 오시비엥침을 탈폴란드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폴란드화=탈유대화‘ 대 ‘유대화=탈폴란드화‘의 진자운동 속에서 아우슈비츠는 끊임없이 재영토화하려는 민족주의적기억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 P230

일본의 저항 민족주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 침략을 거치면서 순식간에 식민주의로 변화해갔지만, ‘서양식민주의의 희생자‘라는 의식은 일본의 기억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축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인도의 세포이 반란이나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같은 반열에 놓고 서양의 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 민족의 반제민족투쟁으로 재구성하는 해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905년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서양 제국에 맞선 주변부의 저항 민족주의자들에게 희망의방아쇠를 당겼다. 모한다스 간디 (Mohandas Gandhi)가남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일본의 승리를 자축할 때, 라빈드라나트 타고 - P242

르(Rabindranath Tagore)는 학생들을 이끌고 승리 행진을 벌였다. 오스만제국의 병사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영국의 사립학교 해로에 다니던 소년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 이집트의 무스타파 카밀(Mustafa Kamil) 등에게 일본의 승리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서양 제국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듀보이스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이후 세계 각지에서 분출하는 ‘유색인의 자긍심‘에 대해 말했다. - P243

1947년 이스라엘 건국과 1948년남한 건국 이후, 한국 언론의 관심은 유랑하는 유대민족에 대한 공감에서 신생국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국민적 통합 과정에 대한 찬탄으로 바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20세기의 끝인 1999년12월 31일까지로 한정해도, 이스라엘과 유대인 관련 기사는 거의 6만건에 이른다. 중동 침입자에 맞서 싸우는 이스라엘, 수에즈 운하 사태,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중동 국가들과 벌인 크고 작은전투, 6일 전쟁 등에 대한 기사가 끊이질 않는다. 유대인의 표상이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유랑으로 고통받는 희생자에서 불굴의 의지와애국심으로 주변 중동 국가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부강한 나라 이스라엘을 건설한 영웅적 민족주의로 바뀐 것이다. - P246

홀로코스트가 유럽과 이스라엘, 미국의 밖에서는 진정한 반향을갖지 못한다는 식의 재단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당사자의 기억만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다는 당사자주의적 입장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당사자주의는 외부의 비판적 개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점에 - P253

서 기억을 특권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홀로코스트가 다양한 희생자의 연대를 타진하는 지구적 기억의 준거로 작동한 지는 이미 오래다. 그 과정에서 배태된 탈영토화하는 기억과 재영토화하는 기억 사이의 긴장과 균열은 비단 동아시아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그 균열은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성을 강조하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지구화한다는 작업 속에 이미 배태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지구적 차원의 인권을 지키는 코즈모폴리턴적 윤리성을 부여하면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특권화하는 이율배반이나 ‘지구화된 홀로코스트‘와 ‘진짜 홀로코스트‘ 사이의 긴장과 균열은 불가피한 면도 있다." 홀로코스트의 지구화가 곧 홀로코스트의 국민화가 되는 모순적 과정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긴장을 지구적 기억구성체의 상수로 만드는 경향도 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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