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으로 7~11장의 내용은 공감이 잘 안 가서인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7장의 '욕'은 뜬금이 없었다. 갑자기 왜 욕이 등장할까? 나는 욕을 혼자 내뱉는 것은 상관없지만 대화를 할 때 써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욕을 쓰면 일단 대화의 격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불평이나 분노를 해야 할 상황에 꼭 욕만이 답은 아니지 않나? 더군다나 욕을 많이 쓰는 사람들은 굳이 그런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자신의 힘을 이상하게 과시하는 등의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생각하지도 않고 막 뱉어내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8~9장: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


목소리의 특질 중에서 음정은 독특한 성격을 띤다. 음량, 톤, 심지어 개인의 모국어와도 달리, 유일하게 생리학에 의해서 좌우된다. 평균적으로 남성의 성대는 여성 성대보다 조금 더 길다. 언어학자들은 낮은 음정이 더 큰 몸집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낮은 음정은 지배나 역량과 관련 있었다. - P257


2015년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셰릴 샌드버그는 "여성으로서 말하는 일의 이중 억압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은 간단하다고 적었다. 여성 상사를 더 많이 뽑는 것이다. - P268

여성이 이끌고 남성이 따라가는 일이 정상화될수록, 여성이 '새된' 소리나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고 말할 일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여성과 종속적인 태도가 자동적으로 연합될 일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젠더가 어떻게 들려야 하고 권력이 어떻게 들려야 하느니에 대해서 서로 잘못 연결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 P269


어릴 적 나는 목소리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합창단의 구성으로 따지면 '알토'와 '메조 소프라노'에 어중간하게 걸린 낮은 음성이었는데 누가 내 목소리를 들을 때 남자 목소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오해를 많이 받았었다. 맑고 높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걸걸하고 낮고 탁한 목소리를 가졌을 뿐이라 목소리를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더 낮아졌다. 

공적인 자리에서 목소리가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낮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해서 임팩트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굳이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다르다고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성이 누구나 인정하는 리더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주는 목소리에만 집중할까? 결국 그 사람의 능력과 내용이 주는 것이 큰 것이 아닐까.  

 


10장


기쁨을 위한 섹스에 대한 담론, 즐거움을 생식과 분리하는 담론, 여성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며 성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하며 발기한 페니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기존의 권력 구조에 도전하고 이에 직면할 수 있다. 상호적인 탐색, 소통, 발견, 서로를 기쁘게 해 주는 새로운 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삽입은 다가 아니라, 에로틱한 기쁨을 찾는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이다. - P317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성애 중심의 성과 섹스의 용어에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지는 힘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겠다. 결국 이를 위한 해결 방법은 남성과 여성의 권력 구조에 의한 폭력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성애가 다가 아니라는 기본 전제부터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11장: 여성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까?


"저는 늘 '여성의 인식을 표현한다'는 언어에 담긴 생각에 회의적입니다. 그게 어떤 인식이고, 어떤 여성에게 속하게 되는 걸까요?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인식의 집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단적 자매애를 느끼는 건 좋지만, 여성의 경험은 복잡한 스펙트럼을 구성하고, '자매애'는 하나만 의미하지 않는다. - P330


"언어는 페미니즘에 대한 전방위적인 지지가 있을 때 (1970년대처럼) 더욱 페미니즘적인 방향으로 갔어요." 캐머런은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침묵을 거부하고, 페미니즘을 확산하도록 싸우는 것이겠지요."


인용문처럼 나도 드라마틱한 변화가 단기간에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과연 될까 싶은 생각도 있지만 현재의 페미니즘이 더 진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라야 개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목소리로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 P275

게이 남성들이 여성처럼 말한다는 문화적 스테레오 타입은 모든 여성이 업토크를 한다거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에 사람들에 대한 가십을 즐긴다는 것만큼이나 취약하다. - P283

화자의 이데올로기를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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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9-18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도 나오는군요?
며칠 전 만두 님 서재에서도 얼핏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언어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언어에 영혼이 깃든다고 어떻게 말을 쓰느냐에 따라 권력의 우선권을 가진다는 건 참 뭐라 형용할 수가 없네요.

거리의화가 2023-09-19 09:07   좋아요 1 | URL
네. 제가 평소 욕과 친하지 않기도 하고 저자가 가진 욕에 대한 생각이 저와 맞지 않음을 느꼈어요.
저도 언어가 가진 힘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위에 따라서 그 힘이 부여되는 만큼 더 잘 사용해야겠죠.

희선 2023-09-19 0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 목소리보다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더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목소리로 사기 치는 사람이 있기도 하네요 그런 데 속으면 안 되는데 많은 사람이 속을지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19 09:0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희선님 생각과 비슷해요! 목소리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소리로 사기치기!ㅋㅋ 그러네요. 번지르르한 목소리에 속아넘어가면 안되겠지요. 역시 내용이 중요^^
 

[ 단오절 ]
중국어에 ‘그게 그것(差不多)’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이 말을 쓰는 경우는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정도의 말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 팡쉬엔춰는 이 말을 요즘 입버릇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그가 이 말을 사용할 때가 대부분 이 말과는 관련 없거나 적당하지 않은 상황인 경우가 많다. 곤란하거나 불평이나 분노해야 할 상황을 애매하게 넘어가기 위해서 이 말을 쓰는 것이다.

팡쉬엔춰는 교원의 월급이 반 년 밀려 다른 교원들과 동맹휴업을 결행한다. 수업을 하면 돈을 주겠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교원이 돈을 요구하는 것은 고상하지 못하다는 말로 위안한다. 아내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도 반찬 투정은 하면서도 돈을 받아내는 것은 왜 어려워하는건가?

내가 만약 wife 입장이라면 같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은데 말이다.

자신이사회악과 싸울 용기가 없기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고 고의로 도피할 길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이건 혹시 ‘시비(是非)를 가리는마음이 없는 것‘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고치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도리어그의 머릿속에서만 자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그게 그것‘을 최초로 공표한 것은 베이징의 서우산학교(北京首善學校)의 강당에서였다. 그때 아마 역사상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별로 다르지 않다古今相遠는 것을 말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일지라도 "성격은 비슷하다"고 말하는 데까지 이르더니, 끝내는 학생과 관료의 신상에까지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일대 열변을 토한 것이다.
"현재 사회에서의 유행이 관료를 욕하는 것인데 학생들이 더욱심하게 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료라고 결코 타고난 특별한종족이 아니라 바로 평민이 변해서 된 것입니다. 지금 학생 출신의 관료도 적지 않은데, 그들이 나이 든 관료와 무슨 다른 점이있습니까? ‘자리를 바꾸면 다 그런 것(易地則皆然] 이니, 사상, 언론,행동, 풍채에 무슨 커다란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 단체가 새로 하고 있는 많은 사업도 폐해를 면치못하거니와, 대부분은 연기나 불같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않았습니까? 그게 그것입니다. 중국의 장래 걱정거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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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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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내용이 짐작 가능한 책들이 있다. 이 책은 내겐 그렇지 않은 책이었다. ’피에 젖은 땅’은 BloodLand의 번역어이다. 이는 소련 서부로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러시아 서부 일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폴란드를 의미한다. 그럼 이 땅에서 피에 젖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사 분야의 신간이 나오면 으레 살펴보기 마련인데 이 책이 발간된 무렵도 그랬다. 다만 시간을 두고 읽기를 원해서 미루어 두었다(역사 하위 분야 중에서도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으면 신간을 바로 사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정말 궁금한 경우가 아니면 좀 묵혀 두었다 평가를 보고 읽는 편이다). 그동안 보관함에 묵혀두었다가 다른 신간이 나왔길래 이 책으로 미리 예열을 해볼까 해서 이제 접하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 앞 수식이 길고 명사로 끝나는 문장의 번역어 투가 강해서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이 안 되어서 잘 읽히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중반 이후에는 독자도 문체에 적응하기 마련이어서 나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치주의와 스탈린 체제는 블러드랜드에서 1400만 명 이상의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1932년 스탈린은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집단화 정책을 실시하며 300만 명을,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대공포 실시로 부농들과 소수 민족 70만 명을 학살했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소련과 독일이 합동하여 폴란드 국민 20만 명을 학살했다. 1941년 스탈린을 배신하고 전쟁을 선택한 히틀러는 소련 전쟁포로와 민간인 400만 이상의 목숨을, 점령지 소련과 폴란드, 발트3국에서 540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벨라루스와 폴란드 바르샤바의 빨치산 전투로 50만의 민간인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사건에 가담한 인물, 그리고 관련 숫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이 책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숫자 안에 포함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집중하여 읽었다. 


1932년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진 집단화 정책으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 무렵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런 동요가 아이들에게 불렸다고 한다. 이는 결코 아름다운 동요가 아니라 잔혹한 노래가 아닐 수 없다. 동요에서 당시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스탈린 아버지, 이걸 보세요

집단농장은 정말 정말 멋지다나요

오두막은 망가졌고, 헛간은 꼴랑 내려앉았죠

말은 몽땅 지쳐서 주저앉았죠

오두막에는 망치와 낫이

헛간에는 죽음과 굶주림이 있대요

소는 한 마리도 남지 않았고, 돼지도 몽땅 사라졌대요

꼴랑 벽에 걸린 스탈린 아버지 사진만 있대요

아빠 엄마는 집단농장에 계세요

불쌍한 아이는 혼자 울면서 걸어간대요

빵도 없어요, 기름기도 없어요

공산당이 모조리 쓸어갔어요

친절함도 부드러움도 쓸려갔어요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요

당원은 아버지를 때리고 밟고

우릴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버리죠


1937년과 1938년 사이 대공포 시대 소련 서부 지역은 살육과 매장이 곳곳에 자행되었다. 일명 폴란드 박멸 작전으로 내무인민위원회 전담은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 지정된 숫자의 사람을 잡아들이고, 고문과 자백을 강요한 뒤 처형을 집행했다. 

체포된 남편의 아내들은 음식과 깨끗한 속옷을 들고 매일 의례적으로 면회를 갔다. 간수들은 더럽혀진 속옷을 건네주었다. 더럽혀진 속옷은 남편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기에, 아내들은 기쁜 마음으로 속옷을 받았다. 간혹 남편들이 몰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한 남편은 아내에게 보낸 속옷에 이렇게 적었다. “감옥생활이 너무 힘들어. 난 죄가 없는데.” 어떤 날은 속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 이튿날에는 속옷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남편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1941년 레닌그라드 봉쇄가 있었던 겨울의 기온은 혹독했는데 사전에 비축해둔 식량과 땔감, 물이 떨어지자 10년 전 우크라이나의 기근의 상황이 이 곳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레닌그라드 포위 당시 소녀였던 반다 즈비예리예바는 훗날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며 그녀를 향한 사랑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참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그분의 얼굴은 모나리자와도 견줄만했을 겁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주머니칼로 나무를 깎아 그리스 여신상을 만들 만큼 예술가적 기질이 충만한 물리학자였다. 온 가족이 배고픔에 쓰러져가던 1941년 말,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구할 배급 카드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잠에서 깬 반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낫을 든 채 그녀 곁에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저항했고 어머니를, 아니면 “그녀의 모습만 하고 있던, 그녀의 그림자”를 떨쳐냈다. 즈비예리예바는 어머니의 행동을 자신을 구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했다. 자신을 빨리 죽여줌으로써 굶주림에 더는 고통받지 않게 해주려고 그랬으리라. 이튿날 그녀의 아버지가 먹을거리를 가지고 돌아왔지만, 어머니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어머니는 숨이 멎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시신을 묻을 수 있을 만큼 땅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녀의 시신을 바느질한 담요로 감싸 부엌에 놓아두었다. 아파트가 너무나 추웠기에 어머니의 시신이 썩는 일은 없었다. 봄이 되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전쟁에서 밀리게 된 히틀러는 유대인 절멸에 대한 계획을 실천해 나간다. 


“러시아 중부” 나치 친위대 상급 장교 및 경찰 지휘를 맡은 이는 벨라루스에서 여성 및 아이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느 독일인(오스트리아인) 경찰은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10월의 첫째 날 벌어진 유대인 사살 작전에 대한 자신의 심경과 경험을 밝히고 있다. “처음으로 총구를 당겼을 때, 내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소. 허나 누구나 이내 익숙해지는 법이지. 열 번째가 되자 나는 수많은 여자,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이까지 차분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조준 사살하게 되었다오.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은 이 무리들을 살려두면 이들이 분명 내가 그들에게 했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집에 있는 우리 두 젖먹이에게 그 못지않은 짓을 하리라는 것이었소. 우리가 그들에게 선사한 죽음은 게페우GPU 교도소의 수천만 명이 겪은 지옥 같은 고통에 비하면, 오히려 고통 없이 빠르게 죽여주는 아름다운 것이었소. 젖먹이들은 큰 원을 그리듯 공중으로 내던져졌는데, 우리는 그들의 몸뚱어리가 구덩이나 물에 떨어지기 전에 사격, 말 그대로 공중에서 갈가리 찢어버렸소.” 1941년 10월의 둘째 그리고 셋째 날, 독일인들은 (우크라이나 보조 경찰 인력의 도움을 받아) 모길료프의 남성, 여성, 아이 2273명을 사살했다. 그달 19일 또 다른 3726명이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독일 경찰들은 유대인 경찰들에게 특정 시간까지 주어진 장소에 유대인들을 끌어모으라고 지시했다. 먼저, 유대인들을 꾀어내기 위해 흔히 해당 장소로 나오면 음식을 내준다거나 좀더 유리한 “동부” 노동 인력으로 배정되었다는 등의 거짓 약속들이 주어진다. 그러고는 끌어모으기 작업이 진행되는 며칠 동안, 독일인 및 유대인 경찰들은 특정 구역 혹은 가옥들을 봉쇄하고 강제력을 동원해 해당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집합지로 몰아간다. 어린아이, 임신부, 장애인, 나이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았다. 베우제츠 수용소에 이동한 그들은 먼저 살균 소독을 위해 어떤 건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살균 소독 후 돌려줄 테니 입고 있던 옷가지와 귀중품을 내놓으라는 말을 듣게 된다. 다음이자 마지막 단계에서, 그들은 발가벗은 채 이내 엔진 배기가스(일산화탄소가 들어 있는)로 가득 차게 될 정체불명의 방으로 들어간다. 베우제츠에 내린 유대인들 중 겨우 2~3명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머지 약 43만4508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 공산주의 하에 집단화 정책으로 특히 우크라이나에 기근을 불러와 대참사를 일으켰으며 부농 및 소수 민족을 대량 학살하는 일을 저질렀고 히틀러는 유대인을 절멸하는 것으로 나치 숭배와 전쟁 승리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나치와 소련을 비인간화하여 몰아 그들을 가해자로 규정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너무 단순하고 위험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도 이 말에 동의했다. 


범죄자를 단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는 편리하다. 경제의 중요성과 정치의 복잡성을 무시해버리고, 그런 요인들이 사실상 역사의 죄인들이자 나중에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할 자들과 매한가지라고 치부해버리면 더 편안할 수 있다. 더 유혹적이 될 만한 것은, 적어도 오늘날 서구인들에게는, 희생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들이 블러드랜드의 범죄자와 방관자들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희생자와 자기 자신의 동일시는 스스로는 범죄자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기억을 지우는 일에 방조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해자의 행위에 집중하여 사건의 실체를 돌아보지 못하고 정작 버려지거나 지워진 기억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죽은 사람 한 명 한 명의 숫자가 아닌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죽은 사람들은 기억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억할 힘이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판단한다. 나중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정한다. 의미가 살육 행위에서 나온다면, 문제는 더 많은 살육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각각의 사망 기록은 하나의 독특한 삶에 대해 그 존재를 제시하지만, 내용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대규모 학살에 심층 조사를 실시한 경우는 홀로코스트로, 57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그 가운데 540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숫자도, 다른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추상적인 ‘570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나의 570만 배’로 여겨져야 한다. 그것은 뭐랄까, 한 사람의 유대인이 570만 번 죽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 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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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18 0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에서 죽은 사람은 숫자로 말할 때가 많기는 하죠 한사람 한사람을 알면 전쟁 같은 거 일으키려 하지 않을지도 모를 텐데 싶네요 그렇게 해도 전쟁을 일으킬 사람 있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보다 그러지 않는 사람이 더 많으면 좋을 텐데... 한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끌면, 히틀러처럼...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생각하기도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지키기 어렵기는 하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18 09:06   좋아요 2 | URL
이 책을 보면 기근으로 굶주려서 죽거나 수용소에 끌려가 죽거나 그런 세세한 사연들이 여럿 나옵니다. 그래서 읽는 게 괴롭기도 했는데 보통 우리가 전쟁사 하면 가해자에 주목하거나 전투의 면면만 살펴보기 쉬워서 주목하기 어렵죠. 그런 면에서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3-09-18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베를린 함락>도 만만치 않네요. 붉은 군대가 복수한다고 독일 여성들 강간하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_- 독일 여성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소련의 어린 소녀들한테도... 하....... 전쟁.

거리의화가 2023-09-18 10:38   좋아요 2 | URL
사실 이 책에도 그런 장면들이 여럿 나오는데 올릴까 하다가 비참해서 넘겼는데 <베를린 함락>은 더 할 듯한 예감이...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도 떠올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그 때도 많은 피해를 입었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슬프네요 진짜ㅜㅜ

잠자냥 2023-09-18 10:45   좋아요 2 | URL
x놈들.. 전쟁은 남자놈들이 벌여놓구 피해는 여성과 아이들이 고스란히... 하.....(쌍욕했다가 화가님 서재라서 지움요 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9-18 10:57   좋아요 2 | URL
전쟁하면 피해는 약자들만 받는 구조기 때문에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욕은 저도 하면서 읽었어요ㅋㅋㅋ
 

유대인들은 중세 말, 대부분의 중부 및 서유럽에서 그러했듯 독일에서도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런 그들에게 폴란드는 마치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고, 이에 따라 폴란드는 이후 유럽 유대인 정착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9년 폴란드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유대인이었으며, 대다수는 유대교 전통 복장과 관습을 지켜오고 있었다.

스기하라는 폴란드 장교들의 도움에 힘입어 리투아니아에 있던 수천 명의 유대인이 무사히 탈출길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먼저 기차를 타고 드넓은 소련 땅을 오랜 기간 가로지른 뒤 배를 통해 일본에 들어갔고, 거기서 다시 팔레스타인이나 미국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이 일련의 과정은 바로 수십 년 동안 조용히, 하지만 굳건하게 이뤄진 폴란드-일본 정보 협력의 결과물이었다.

1940년과 1941년, 바르샤바 게토를 비롯한 여러 게토는 이내 급조된 형태의 노동수용소이자 유대인들을 가둬두는 장소가 되었다. 독일은 이곳에 흔히 전쟁 전 지역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 중 일부로 구성된 유대인 위원회 혹은 평의회를 구성했다. 독일은 유대인 경찰도 만들었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게토의 질서 유지, 유대인들의 탈출 방지, 독일의 탄압 정책 수행 등이었다.

동방 총독부 여러 지역에서 이뤄진 AB 악치온(‘특별 평정 조치‘)은 그 살해 흔적들에서 볼 수 있듯 범위나 방식에 있어 제각각이었다. 크라쿠프에 있던 수감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간단한 평결문을 읽었다. 물론 거기에 이들을 무슨 형벌에 처한다 따위의 내용은 있지 않았다. 평결문에 적힌 죄목은 반역죄 곧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모순적이게도 전원이 도망치다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독일이 1941년 6월 22일의 기습 공격을 통해 소련을 침공해 들어오자, 폴란드와 소련의 관계는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동맹으로 변했다. 그들은 이제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꽤나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었다. 앞선 2년 동안 소련은 50만에 달하는 폴란드인을 탄압한 자들이었다.

"동유럽 종합 계획"이라는 제목하에, 동부 식민지에 관한 일련의 기획안 초안이 작성됐다. 첫 기획안은 1940년 1월, 두 번째는 7월, 세 번째는 1941년 말, 그리고 네 번째는 1942년 5월에 완성되었다. 기획안들의 한결같은 부분은 바로 독일인들이 점령 지역 사람들을 강제추방, 살해, 동화하거나 혹은 노예로 삼는 것, 그리고 이를 발판 삼아 새로 개척한 변경 지역에 질서와 번영을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굶주림 계획에 따르면, 독일군은 모든 집단농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곳곳의 수확을 감시하며, 단 한 톨의 식량도 빼돌려지거나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독일 국방군은 나치 친위대 및 각 지역의 협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집단농장을 관리하고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과거 소련이 했던 수준의 효율성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독일인들은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곳의 작황 및 농작물을 빼돌릴 만한 장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은 공포감을 조성할 수는 있었으나, 공포와 함께 신념을 불러일으켰던 공산당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는 점에서 소련만큼 체계적이지 못했다. 도시 지역을 시골 지역으로부터 봉쇄할 만한 인적 자원 역시 없었다.

원칙상 수용소들은 세 종류, 즉 굴라크(임시 수용소), 스탈라크(사병 및 부사관 대상의 기본 수용소), 소규모의 오플라크(장교 대상)로 나뉘었다. 하지만 세 종류의 수용소 모두 실제로는 대부분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인 벌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폴란드 동부에 일종의 유대인 보호구역을 마련한다는 ‘루블린 계획’은 동방 총독부가 독일 본토와 너무 가깝고 복잡한 관계로 1939년 11월에 포기되었다. 그 다음으로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유대인들을 소련 땅으로 보내려 했던 ’대소련 합의 계획‘은 스탈린이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안았기에 1940년 2월 폐기되었다. 그다음 유대인들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보내는 것을 골자로 한 마다가스카르 계획 역시 처음에는 폴란드가, 뒤이어 영국이 독일과 협력하기는커녕 싸우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1940년 8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 자신들이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도 실패함에 따라, 굴복한 소련 땅을 유대인 문제 해결의 장으로 활용하려던 ’대소련 강제 이주 계획‘마저 1941년 11월에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소련 침공은 독일에게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한 반면, 유대인 문제는 확실히 악화시켰다.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 달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 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태풍 작전’은 최종 승리를 일궈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독일은 독일인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추방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이는 일종의 연쇄반응을 불러왔다. 좁은 게토에 유대인 수용 공간을 더 마련해야 했던 상황은 특정 대량 학살 방법(리가, 독일이 점령한 라트비아)을 공식화했고, 또한 또 다른 방법(우치, 독일 치하의 폴란드)이 고안되는 것을 촉진시켰다.

일본이 움직이던 때는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꽁무니를 빼던 바로 그 시점이었기에 진주만 공격은 독일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의미했다. 영국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력으로 미국에 맞설 준비에 들어갈 대륙 제국으로서의 독일은 커녕, 하나같이 약한 동맹국들(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혹은 결정적이랄 수 있는 동유럽 전선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맹국들(일본, 불가리아)을 이끌고 소련, 영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된 것이었다.

전쟁의 주도권이 스탈린에게로 넘어가자 히틀러는 목표를 다시 써내려가기에 이른다. 소련을 파괴하겠다던 계획은 이제 유대인을 없앤다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소련 파괴가 ‘무기한 연기’됨에 따라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이 곧 전시 정책이 되었다.

유럽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히틀러의 결정은 유대인과 빨치산 사이의 관련성을 과장하여 일종의 추상적인 관념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곧 유대인들은 독일의 적을 지원하는 자들로서, 우선적으로 몰살해야 할 대상이었다.

1942년 중반부터 그 이후 독일의 주요 작전은 이른바 "거대 작전"이라 불린 것으로, 그것은 실제로 벨라루스 유대인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민간인들까지 학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빨치산을 물리칠 수 없게 되자, 빨치산들의 전투를 지원할지도 모를 민간인을 살해했다.

히틀러의 총통부는 바르테란트 내 폴란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스 실험 뒤, 독일 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이 프로그램은 의사, 간호사,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핵심 기획자는 히틀러의 주치의였다. 희생자들은 표면상 의료적 실험 및 치료라는 미명하에 시설로 오게 되는데, 실제로는 가스통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로 질식하게 될 "샤워장"으로 인도된다. 금니를 한 희생자들은 미리 등 뒤에 분필로 표식을 해두었는데, 이는 그들이 죽은 뒤 금니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첫 희생양이었고, 부모들에게는 이들이 치료 과정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적은 가짜 소견서가 전달되었다. 이 "안락사" 프로그램의 희생자 대다수는 비유대 독일인이었다. 물론 장애를 가지고 있던 독일 유대인들은 아무런 검사조차 없이 곧바로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독일 경제는 유대인들을 아무런 안전망 없이 자기 위를 맨발로, 또 눈가리개를 한 채 걷게 만들었던 날선 곡예줄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그들의 죽음 사이에 있었던 것이자, 피비린내 나는 기만의 체제였으며, 종국에는 그들의 소멸을 가져왔던 것임에 틀림없다.

선발은 서류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아주 중대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냈고, 사적인 안전 확보에 대한 집착을 일반화시켰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들만은 제대로 된 일이나 관련 증명서를 확보한 채 게토 안에 남겨질 거라 믿곤 했다. 이 같은 희망의 개별화, 그리고 사사화는 그들 집단에게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남은 힘은 저항을 조직하기보다는 노동 관련 서류 뭉치를 뺏고 빼앗는 데 쓰였다. 그 누구도 독일인과 유대 경찰들이 게토 내에서 폭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비틀어 보려 하지 않았다. 독일은 소수의 인력만으로도 이를 관리 감독하는 데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미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베를린의 진군 도중, 붉은 군대는 제3제국의 동부 영토, 다시 말해서 폴란드 영토가 될 예정이던 땅에서 소름 끼치도록 단순한 행동을 반복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남성은 (그리고 일부 여성도)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런 행동은 병사들이 독일 영토로 남게될 땅에, 그리고 마침내 베를린에 닿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초에서 1947년 말까지 이뤄진 피란과 추방 과정에서, 본래 독일 땅이었다가 폴란드에 병합된 땅에서 약 40만 명의 독일인이 숨졌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련과 폴란드의 수용소에서 죽었고, 그 다음으로는 군대에 당했거나 바다에 수장되었다.

본래는 ‘동방 작전’으로 불렸던 비스와 작전은 전적으로 폴란드군이 수행했으며,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기획에는 소련 인사가 적잖이 관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모스크바와 연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근 소련 영토에서의 다수의 소련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연관성이 높았던 소련 작전은 ‘서부 작전’으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폴란드 접경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비스와 작전이 끝날 무렵, 소련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도록 했다.

1948년 5월에 실시된 ‘춘계 작전’에서 리투아니아계 주민이 강제이주되었다. 이듬해 3월에, ‘프리보이 작전’으로 리투아니아계 주민이 추가로 이주되고, 라트비아계, 에스토니아계도 이주되었다. 모두 따져보면, 1941년에서 1949년 사이 스탈린은 20만 명가량의 인구를 발트 삼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전쟁 중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이 전쟁이 유대인 해방전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대체적인 합의를 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소련, 미국, 영국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고통은 기껏해야 독일 점령의 사악함의 한 측면으로 여겨져야지, 그 자체로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스탈린이 죽은 한참 뒤에도 동유럽을 떠돌았다. 그것이 중요한 통치 수단이 되는 일은 드물었으나, 언제나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면 불거지곤 했다. 반유대주의는 각국의 지도자가 전시 고난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게 해주고(오직 슬라브족들만 고통받았다는 식으로), 스탈린주의의 역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게 했다(왜곡을 거쳐 유대인들이 공산주의를 훼방 놓은 식으로). 새로운 종류의 반유대주의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스탈린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축소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적인 집단 기억이 1970년과 1980년대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독일과 서유럽 유대인들의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희생자 가운데 소규모 집단들, 아우슈비츠(학살된 유대인 중 6명에 1명 정도와 관련 있던)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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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17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년 전, 이 책 리뷰 대회 덕분에 쟁쟁한 분들의 글들로 간접 접했었네요. 거리의 화가님 몰입 독서 중이시네요.
이렇게 역사책, 특히 유럽어가 많이 등장하는 외서는 번역가님이 무척 고생하셨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하게 되네요.
˝리가˝와 ˝우치˝는 고유 명사인걸까요?^^ 와...어려워요

거리의화가 2023-09-17 15:20   좋아요 1 | URL
ㅎㅎ 맞습니다. 저는 뒷북으로 읽게 되었네요^^; 이미 올라온 리뷰들이 훌륭하기 때문에 저는 읽는데 의의를 두었어요.
사실 인물이나 지명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많습니다. 다 신경쓰면 머리 공간이 터져서 곤란하니까요ㅎㅎㅎ 이 중 핵심 키워드만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보 봅니다. 이런 책은 정말 번역이 중요한 듯 싶어요.
 



Shamshi-Adad, King of the Whole World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는 또 다른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 Shamshi-Adad가 있었다. 그는 티그리스 강 근처의 Asssur라고 하는 도시에 살았다. Assur의 왕이 된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신(바람과 태풍)이 모셔진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 그는 온 세계의 왕이 될 것이라 소리쳤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고 두 아들로 하여금 자신 곁을 따르게 했다. Assyrian army는 얼마 있지 않아 메소포타미아 근방의 모든 도시를 다 정복하게 된다. 그는 독재자였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을 죽였으며 말을 듣지 않는 리더들은 자르곤 화형대에 그들을 던져버렸다. 마을은 불타고 군대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shamshi-Adad와 Assyrian army의 소문을 들은 주변국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게 되었다. 그의 제국인 Assyria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영역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그는 죽을 때 한 아들에게는 제국 통치 완수 사업을 맡기고 다른 아들에게는 Assyria에서 가장 큰 도시인 Mari를 맡기며 두 아들이 협력하여 제국을 강성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서로 다투었고 이 때 Hammurabi가 Mari를 무너뜨렸다. Hammurabi는 다행히 Assyria의 지도자와 주민들의 자치를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Assyrians들은 언젠가는 자신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며 또 한 번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꿈을 간직했다.



The Story of Gilgamesh


옛날 Gilgamesh라는 왕이 Uruk라는 도시를 다스렸다. 그는 지구상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젊고 건강했으며 돈도 권력도 모두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잔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들의 백성을 밤낮으로 부리며 돈과 먹을 것을 착취했고 아이들은 노예로 삼는 등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Uruk 사람들은 Gilgamesh을 없애고 싶어 하늘의 신인 Anu를 불러내 도와달라 외쳤다. Anu는 살펴보더니 그를 주무를 적인 Enkidu라는 괴물(반인반수, 12마리의 사자의 힘을 가졌음)을 보내 Gilgamesh와 싸우도록 명했다. Gilgamesh는 도끼가 문에 보이는 꿈을 꿨는데 그의 어머니가 꿈을 해석하더니 한 남자가 널 죽이려고 오고 있다. 너는 그를 친구로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죽는다!” 그러나 정작 Enkidu는 오다가 사냥꾼의 아들을 만나 그의 집에서 한동안 지내게 되었다. Enkidu는 그 곳에서 말하는 법과 먹는 법, 옷 입는 법을 배웠다. 어느 날 Enkidu가 친구들과 Uruk에 들어가서 결혼 피로연을 보게 되었다. Gilgamesh(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문득 자신이 신랑이 되고 싶어했고 신부 될 이를 훔쳐내 도망쳤다. Enkidu는 분노하여 “이 여자를 데려가려면 날 죽여야 한다.”하고 외쳤다. Gilgamesh는 Enkidu를 들어 올려 땅에 내리꽂으며 서로 피튀기게 싸움을 이어갔다. 싸움의 승자는 Gilgamesh였다. Gilgamesh는 이기기는 했지만 자신이 이전에 보지도 못한 힘을 가진 Enkidu에게 반했는지 친구를 청하고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도망쳐나온 신이 지상에 내려와 Gilgamesh 왕국을 지나가다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가 숨쉴 때마다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Gilgamesh와 Enkidu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Enkidu는 신을 죽이고 나라를 구해냈다. 그러나 신들은 Enkidu에게 앙심을 품고 재앙을 내려 12일 간 고통에 신음하다 죽는다. Gilgamesh는 친구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영원한 삶의 비밀을 찾고 죽음을 정복할 길을 찾으러 떠난다. 그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는다는 Utnapishtim 집으로 찾아가 영원한 삶의 비밀을 묻고 6일 낮과 7일 밤을 깨어 있을 수 있다면 불멸할 수 있다는 답을 얻는다. Gilgamesh는 잠을 잤다가 7일 후 깨어나는 바람에 다른 방법을 묻고 바다 바닥 밑까지 수영하여 마법의 식물을 찾아내서 가져와 먹으면 다시 젊어질 것이라는 답을 얻는다. 우여곡절 끝에 식물을 얻은 Gilgamesh는 집에 가서 식물을 먹겠다 생각한다. 그러나 Gilgamesh가 잠을 자는 동안 뱀이 다가와 식물을 찾아내 먹고 나이가 어려진다. 그는 Uruk로 갔고 원래대로 늙어 사망했다. 이 이야기는 구전에 구전을 거듭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 chasm

It was so powerful that whenever it breathed, huge holes and chasms opened up in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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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9-16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길가메시가 왕이었군요? 역사지식이 부족하여 이제사 알게 되네요.ㅋㅋ
근데 잔인한 왕이었네요.
그 시절엔 온화했다는 왕 이야기가 별로 없네요. 서로 전쟁을 치뤄 땅과 목숨을 지켜나가는 세상이라 그랬을까요?
근데 뱀이 어려지는 식물을 먹어버렸다면?
새끼뱀이 된 것인가? 상상해 봅니다. 이 와중에 몹쓸 상상!ㅋㅋㅋ

건수하 2023-09-16 10:26   좋아요 2 | URL
그래서 허물을 벗게 되었다 라고 나오더군요 ^^

거리의화가 2023-09-16 21:29   좋아요 1 | URL
공교롭게도 작년에 가부장제 창조 읽으면서 길가메시 이야기가 나오길래 관련 영상을 찾아본 게 있어서인지 이후 이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또 읽으니 훨씬 이야기가 익숙하네요^^ 뱀이 어려지는 식물을 먹어버린 결과는 수하님이 친절히 설명해주셨네요!ㅋㅋㅋ

독서괭 2023-09-16 1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7,8장 들었습니다. 따라잡긔!!ㅋㅋ

거리의화가 2023-09-16 21:29   좋아요 1 | URL
앗! 두 장 동시에 들으셨군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