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중세 말, 대부분의 중부 및 서유럽에서 그러했듯 독일에서도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런 그들에게 폴란드는 마치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고, 이에 따라 폴란드는 이후 유럽 유대인 정착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9년 폴란드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유대인이었으며, 대다수는 유대교 전통 복장과 관습을 지켜오고 있었다.

스기하라는 폴란드 장교들의 도움에 힘입어 리투아니아에 있던 수천 명의 유대인이 무사히 탈출길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먼저 기차를 타고 드넓은 소련 땅을 오랜 기간 가로지른 뒤 배를 통해 일본에 들어갔고, 거기서 다시 팔레스타인이나 미국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이 일련의 과정은 바로 수십 년 동안 조용히, 하지만 굳건하게 이뤄진 폴란드-일본 정보 협력의 결과물이었다.

1940년과 1941년, 바르샤바 게토를 비롯한 여러 게토는 이내 급조된 형태의 노동수용소이자 유대인들을 가둬두는 장소가 되었다. 독일은 이곳에 흔히 전쟁 전 지역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 중 일부로 구성된 유대인 위원회 혹은 평의회를 구성했다. 독일은 유대인 경찰도 만들었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게토의 질서 유지, 유대인들의 탈출 방지, 독일의 탄압 정책 수행 등이었다.

동방 총독부 여러 지역에서 이뤄진 AB 악치온(‘특별 평정 조치‘)은 그 살해 흔적들에서 볼 수 있듯 범위나 방식에 있어 제각각이었다. 크라쿠프에 있던 수감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간단한 평결문을 읽었다. 물론 거기에 이들을 무슨 형벌에 처한다 따위의 내용은 있지 않았다. 평결문에 적힌 죄목은 반역죄 곧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모순적이게도 전원이 도망치다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독일이 1941년 6월 22일의 기습 공격을 통해 소련을 침공해 들어오자, 폴란드와 소련의 관계는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동맹으로 변했다. 그들은 이제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꽤나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었다. 앞선 2년 동안 소련은 50만에 달하는 폴란드인을 탄압한 자들이었다.

"동유럽 종합 계획"이라는 제목하에, 동부 식민지에 관한 일련의 기획안 초안이 작성됐다. 첫 기획안은 1940년 1월, 두 번째는 7월, 세 번째는 1941년 말, 그리고 네 번째는 1942년 5월에 완성되었다. 기획안들의 한결같은 부분은 바로 독일인들이 점령 지역 사람들을 강제추방, 살해, 동화하거나 혹은 노예로 삼는 것, 그리고 이를 발판 삼아 새로 개척한 변경 지역에 질서와 번영을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굶주림 계획에 따르면, 독일군은 모든 집단농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곳곳의 수확을 감시하며, 단 한 톨의 식량도 빼돌려지거나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독일 국방군은 나치 친위대 및 각 지역의 협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집단농장을 관리하고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과거 소련이 했던 수준의 효율성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독일인들은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곳의 작황 및 농작물을 빼돌릴 만한 장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은 공포감을 조성할 수는 있었으나, 공포와 함께 신념을 불러일으켰던 공산당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는 점에서 소련만큼 체계적이지 못했다. 도시 지역을 시골 지역으로부터 봉쇄할 만한 인적 자원 역시 없었다.

원칙상 수용소들은 세 종류, 즉 굴라크(임시 수용소), 스탈라크(사병 및 부사관 대상의 기본 수용소), 소규모의 오플라크(장교 대상)로 나뉘었다. 하지만 세 종류의 수용소 모두 실제로는 대부분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인 벌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폴란드 동부에 일종의 유대인 보호구역을 마련한다는 ‘루블린 계획’은 동방 총독부가 독일 본토와 너무 가깝고 복잡한 관계로 1939년 11월에 포기되었다. 그 다음으로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유대인들을 소련 땅으로 보내려 했던 ’대소련 합의 계획‘은 스탈린이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안았기에 1940년 2월 폐기되었다. 그다음 유대인들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보내는 것을 골자로 한 마다가스카르 계획 역시 처음에는 폴란드가, 뒤이어 영국이 독일과 협력하기는커녕 싸우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1940년 8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 자신들이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도 실패함에 따라, 굴복한 소련 땅을 유대인 문제 해결의 장으로 활용하려던 ’대소련 강제 이주 계획‘마저 1941년 11월에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소련 침공은 독일에게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한 반면, 유대인 문제는 확실히 악화시켰다.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 달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 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태풍 작전’은 최종 승리를 일궈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독일은 독일인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추방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이는 일종의 연쇄반응을 불러왔다. 좁은 게토에 유대인 수용 공간을 더 마련해야 했던 상황은 특정 대량 학살 방법(리가, 독일이 점령한 라트비아)을 공식화했고, 또한 또 다른 방법(우치, 독일 치하의 폴란드)이 고안되는 것을 촉진시켰다.

일본이 움직이던 때는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꽁무니를 빼던 바로 그 시점이었기에 진주만 공격은 독일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의미했다. 영국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력으로 미국에 맞설 준비에 들어갈 대륙 제국으로서의 독일은 커녕, 하나같이 약한 동맹국들(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혹은 결정적이랄 수 있는 동유럽 전선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맹국들(일본, 불가리아)을 이끌고 소련, 영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된 것이었다.

전쟁의 주도권이 스탈린에게로 넘어가자 히틀러는 목표를 다시 써내려가기에 이른다. 소련을 파괴하겠다던 계획은 이제 유대인을 없앤다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소련 파괴가 ‘무기한 연기’됨에 따라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이 곧 전시 정책이 되었다.

유럽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히틀러의 결정은 유대인과 빨치산 사이의 관련성을 과장하여 일종의 추상적인 관념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곧 유대인들은 독일의 적을 지원하는 자들로서, 우선적으로 몰살해야 할 대상이었다.

1942년 중반부터 그 이후 독일의 주요 작전은 이른바 "거대 작전"이라 불린 것으로, 그것은 실제로 벨라루스 유대인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민간인들까지 학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빨치산을 물리칠 수 없게 되자, 빨치산들의 전투를 지원할지도 모를 민간인을 살해했다.

히틀러의 총통부는 바르테란트 내 폴란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스 실험 뒤, 독일 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이 프로그램은 의사, 간호사,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핵심 기획자는 히틀러의 주치의였다. 희생자들은 표면상 의료적 실험 및 치료라는 미명하에 시설로 오게 되는데, 실제로는 가스통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로 질식하게 될 "샤워장"으로 인도된다. 금니를 한 희생자들은 미리 등 뒤에 분필로 표식을 해두었는데, 이는 그들이 죽은 뒤 금니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첫 희생양이었고, 부모들에게는 이들이 치료 과정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적은 가짜 소견서가 전달되었다. 이 "안락사" 프로그램의 희생자 대다수는 비유대 독일인이었다. 물론 장애를 가지고 있던 독일 유대인들은 아무런 검사조차 없이 곧바로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독일 경제는 유대인들을 아무런 안전망 없이 자기 위를 맨발로, 또 눈가리개를 한 채 걷게 만들었던 날선 곡예줄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그들의 죽음 사이에 있었던 것이자, 피비린내 나는 기만의 체제였으며, 종국에는 그들의 소멸을 가져왔던 것임에 틀림없다.

선발은 서류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아주 중대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냈고, 사적인 안전 확보에 대한 집착을 일반화시켰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들만은 제대로 된 일이나 관련 증명서를 확보한 채 게토 안에 남겨질 거라 믿곤 했다. 이 같은 희망의 개별화, 그리고 사사화는 그들 집단에게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남은 힘은 저항을 조직하기보다는 노동 관련 서류 뭉치를 뺏고 빼앗는 데 쓰였다. 그 누구도 독일인과 유대 경찰들이 게토 내에서 폭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비틀어 보려 하지 않았다. 독일은 소수의 인력만으로도 이를 관리 감독하는 데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미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베를린의 진군 도중, 붉은 군대는 제3제국의 동부 영토, 다시 말해서 폴란드 영토가 될 예정이던 땅에서 소름 끼치도록 단순한 행동을 반복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남성은 (그리고 일부 여성도)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런 행동은 병사들이 독일 영토로 남게될 땅에, 그리고 마침내 베를린에 닿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초에서 1947년 말까지 이뤄진 피란과 추방 과정에서, 본래 독일 땅이었다가 폴란드에 병합된 땅에서 약 40만 명의 독일인이 숨졌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련과 폴란드의 수용소에서 죽었고, 그 다음으로는 군대에 당했거나 바다에 수장되었다.

본래는 ‘동방 작전’으로 불렸던 비스와 작전은 전적으로 폴란드군이 수행했으며,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기획에는 소련 인사가 적잖이 관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모스크바와 연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근 소련 영토에서의 다수의 소련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연관성이 높았던 소련 작전은 ‘서부 작전’으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폴란드 접경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비스와 작전이 끝날 무렵, 소련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도록 했다.

1948년 5월에 실시된 ‘춘계 작전’에서 리투아니아계 주민이 강제이주되었다. 이듬해 3월에, ‘프리보이 작전’으로 리투아니아계 주민이 추가로 이주되고, 라트비아계, 에스토니아계도 이주되었다. 모두 따져보면, 1941년에서 1949년 사이 스탈린은 20만 명가량의 인구를 발트 삼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전쟁 중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이 전쟁이 유대인 해방전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대체적인 합의를 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소련, 미국, 영국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고통은 기껏해야 독일 점령의 사악함의 한 측면으로 여겨져야지, 그 자체로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스탈린이 죽은 한참 뒤에도 동유럽을 떠돌았다. 그것이 중요한 통치 수단이 되는 일은 드물었으나, 언제나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면 불거지곤 했다. 반유대주의는 각국의 지도자가 전시 고난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게 해주고(오직 슬라브족들만 고통받았다는 식으로), 스탈린주의의 역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게 했다(왜곡을 거쳐 유대인들이 공산주의를 훼방 놓은 식으로). 새로운 종류의 반유대주의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스탈린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축소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적인 집단 기억이 1970년과 1980년대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독일과 서유럽 유대인들의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희생자 가운데 소규모 집단들, 아우슈비츠(학살된 유대인 중 6명에 1명 정도와 관련 있던)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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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17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년 전, 이 책 리뷰 대회 덕분에 쟁쟁한 분들의 글들로 간접 접했었네요. 거리의 화가님 몰입 독서 중이시네요.
이렇게 역사책, 특히 유럽어가 많이 등장하는 외서는 번역가님이 무척 고생하셨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하게 되네요.
˝리가˝와 ˝우치˝는 고유 명사인걸까요?^^ 와...어려워요

거리의화가 2023-09-17 15:20   좋아요 1 | URL
ㅎㅎ 맞습니다. 저는 뒷북으로 읽게 되었네요^^; 이미 올라온 리뷰들이 훌륭하기 때문에 저는 읽는데 의의를 두었어요.
사실 인물이나 지명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많습니다. 다 신경쓰면 머리 공간이 터져서 곤란하니까요ㅎㅎㅎ 이 중 핵심 키워드만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보 봅니다. 이런 책은 정말 번역이 중요한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