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모사 1867 - 대만의 운명을 뒤흔든 만남과 조약
첸야오창 지음, 차혜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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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역사의 ‘나비’가 1867년 이 해변에서 첫 날갯짓을 했다. 이 날개짓은 1874년 일본의 대만 정벌로 이어졌으며, 1875년 심보정의 개산무번(청나라가 대만 원주민 산지를 개척하면서 진행된 침략)과 1885년 대만 건성(청나라가 대만을 성으로 승격시킴)을 거쳐,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에 걸친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다. 일본인이 대만에서 물러나면서 이 해변에서 시작된 대만 역사의 나비효과는 비로소 멈추게 된다. 


1867년 대만 남단 해역에 미국 상선인 로버호가 좌초되었다. 10명의 선원이 배를 버리고 해변에 상륙했으나 생번인 원주민에게 살해된다. 

이 소설은 1867번 로버호 사건을 파고들어 작가의 상상력에 의지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만은 당시 포르모사라고 불렸다. 17세기 중엽의 포르모사는 37년 동안 네덜란드의 동양 진출을 위한 근거지였으며,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가장 돈을 많이 번 식민지 중 하나였다. 이후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했으나 통치 범주의 최남단을 방료까지로 한정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력은 섬 가운데 서북부 정도에만 실렸다. 1858년 천진조약에 따라 담수와 안평항이 개방되고 북경조약에서 계롱과 타구가 추가 개방되었다. 


포르모사는 물산이 풍부할 뿐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로도 중요하여 영국, 프랑스는 진작부터 눈독을 들였다. 일본의 근대화 계기가 된 흑선의 주인공 페리가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1854년 7월에 마케도니안호(The Macedonian)과 서플라이호(The Supply)를 계롱항에 파견하여 포르모사 해안을 측량했다. 마케도니안호의 선상 목사이며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조지 존스(George Jones)는 상륙하여 내륙의 탄광 갱도까지 들어가 탐사했는데 이곳의 탄광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포르모사를 극동 기지로 여겨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자국에 남북전쟁으로 포르모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영국에 선점 기회를 내주었다. 


“1860년부터 지금까지 7년 동안 무려 스무 척 이상의 상선이 포르모사 해역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침몰했습니다. 청나라 지방 관리들은 백성들이 배와 선원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해도 방임합니다. 생번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스윈호가 청나라 정부에 몇 번이나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은 계속 미루면서 세월만 보냅니다. 신사적인 스윈호도 견디지 못하고 자구책을 강구하여 군함을 파견해 포르모사 연해를 순찰했습니다.”



위의 지도는 당시 미 외교관 이양례가 작성한 대만 지도이다. 한 눈에 봐도 다양한 부족들이 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부족 간에 교류 및 통혼이 있기도 했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풍습으로 갈등이 빈번했다. 복로와 객가는 언어와 풍속이 다를 뿐 아니라 생존 경쟁구도에 놓여, 매사에 대립하고 반목했다. 두 집단은 처음에는 땅을 두고 충돌했다가 나중에는 정치적 입장에서 충돌했다. 

몇 차례에 걸친 복로와 청나라 조정 간의 전쟁에서 객가인들은 모두 통치자인 청의 편에 섰다. 청나라 조정의 눈에 복로인들은 정성공의 반역 이후 태생적으로 반골 기질이 있는 고약한 백성이었다. 반면 객가 출신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의로운 백성이라고 여겼다. 


대만 역사 교과서는 1867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데 이 해는 전통적인 역사관으로 볼 때 그저 평탄했던 한 해였다 여기기 때문이다. 대만 남부에서 발생한 선박 조난 사고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는다고. 청나라 조정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만부의 지방 관리가 작성한 상주문 몇 편인데 사실을 그대로 쓰지도 않았을 뿐더러 기록도 소략하다. 

반면 작가는 1867년이 역사상 지극히 중요한 해라고 주장한다. 1683년에 강희제가 대만을 봉쇄하고 대만과 대만 사람들이 184년 동안 세계사에서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 이후 두 번째로 국제 무대에 등장한 해이기 때문이다. 


1867년 200명에 육박하는 미국 해병대가 대만에서 군사 행동을 전개했다. 군사 행동이 일어난 장소는 현재 세계적인 휴양지인 컨딩국가공원이다. 미국은 이 때 대만 원주민에게 맥없이 당하고 의기소침하여 돌아갔다. 만약 미군이 승리했다면 일본 정벌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르며 1867년 대만 남부가 이미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으로 대만과 미국은 조약을 체결했다(남갑지맹). 대만을 대표한 사람은 괴뢰산의 생번 두목이자 낭교 18부락 연맹 총두목인 탁기독이었고 미국을 대표한 사람은 대사인 이양례였다. 1869년 2월 28일 확인한 조약의 협의서는 지금도 미 국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양례는 19세기 대만 운명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일본의 대만 정벌(일본 입장에서 모란사 사건을 부르는 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1867년 사건은 대만 각 부족 집단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만은 다민족이 병립하는 사회였으나 사건 이후 심보정의 개산무번, 항해 금지 완화로 이주민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한족과 원주민의 경계가 허물어져 오늘날 대만계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뒤 ‘대만 본토 의식’이 일어났고 서서히 과거의 잊힌 문화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속에 2000년 이후가 되어서는 후손들이 조상의 유적을 찾고 ‘원주민 의식’을 부활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 이전에 <포르모사 삼족기>라는 책으로 17세기 대만 역사를 담은 소설을 집필한 이력이 있다. <포르모사 1867>은 대만 근대 역사 3부작 시리즈로 그 시작이라고 하니 이후 소개될 책들이 기대가 된다. 그 전에 <포르모사 삼족기>도 시간을 내어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대만의 역사를 읽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가가 넣은 허구적 인물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좀 뻔하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당시 사건을 나는 처음 알았기 때문에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작가의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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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2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01-02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이동물원 읽고 대만 역사를 살펴보다가 이 책 궁금했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거리의화가 2024-01-03 10:12   좋아요 1 | URL
저도 켄 리우 작가 소설은 언젠가 읽어보고 싶어 찜해놨었어요. 대만의 근대 초기 상황을 거의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인데 그레이스님이 읽으시면 어떨까 저도 궁금하네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1-04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나 그렇지만 대만은 더 모르는 것 같네요 어느 나라나 나름의 역사가 있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은 그런 데 관심을 많이 갖고 있고 공부를 하고 알기도 해서 즐겁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04 09:07   좋아요 2 | URL
대만은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외교와도 관련이 깊지만 근대 시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관련이 깊은 것 같아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조금씩 공부해보고 있습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병자일(23일)에 형남에 조서를 내려서 수병(水兵) 3천 명을 징발하여 담주(潭州, 湖南 長沙)로 가게 하였다.

북한(北漢)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요(遼)에 알리고 변방을 순수하겠다고 하면서 성원해 주기를 빌었다. 정해일(8일)에 왕전빈(王全斌, 908~976)이 다시 곽진(郭進, 922~979)·조빈(曹彬, 931~999) 등과 군사를 인솔하고 북한의 낙평(樂平)을 공격하고 그의 공위(拱衛)지휘사 왕초(王超) 등을 항복시켰다.
북한의 장수 울진(蔚進)·학귀초(郝貴超)가 번(蕃)·한(漢) 병사를 다 모아서 와서 구워하자 세 번 싸워서 모두 그들을 패배시키고 드디어 낙평을 떨어트렸고 바로 세워서 평진군(平晉軍)을 만들었다.

북한은 땅이 좁고 산물이 적으며 또 해마다 요(遼)로 물건을 날라야 했으니 그런고로 나라의 쓸 것이날로 깎이었는데, 마침내 오대산(五臺山)의 승려인 계용(繼容)에게 벼슬을 주어 홍려경(鴻臚卿)으로 삼았다. 계용은 옛날 연왕인 유수광(劉守光, ? ~914)의 서자로 승려가 되어 오대산에 살았는데, 《화엄경》 강론을 잘 하여 사방에서 공양하고 보시하니 많은 것을 축적하여 나라의 쓸 것을 보탰다. 오대산은 요나라의 경계에 가까워서 항상 그들의 말을 얻어서 헌상하여 도마(都馬)라고 불렸는데, 한 해에 평균 100필이었다. 또 백곡(栢谷)에서 은(銀)을 야광(冶鑛)하여 백성을 모집하여 산을 뚫고 광물을 가져다가 은을 녹였으니 북한에서는 그 은을 가져다가 요에 보냈는데, 해마다 1천 근이었으며 바로 야은(冶銀)하는 것으로 인하여 보흥군(寶興軍, 山西 繁峙縣 東南)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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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달력 표지를 뜯어내고 1월을 맞이했다. 달력은 뜯는 맛인가? 

2023년 12월 31일에서 몇 시간 지났다고 2024년 1월 1일이 되었으니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계속 흐르는 것일 뿐이다. 


3일 간의 연휴 동안 저녁마다 술을 마셔서 올해는 정말 절주 생활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커피도 좀 줄이고...



이번 달 읽게 될 책들을 추려 봤다.


<공포의 권력>만 구입하면 된다.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는 도서관에 있길래 빌려왔고. 



서울은 눈이 많이 왔다고 들었는데 이곳은 상대적으로 아랫 동네라 그런지 기온이 높아 비로 바뀌어 내려 다 녹았다. 게다가 오늘은 햇빛이 짱짱하니 산책하러 나가도 좋겠다.


이곳에 들르신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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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1-01 16: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뜯어쓰는 달력이라하셔서 저는 3개월치 묶어놓은 옛 달력인가 했는데 엄청 탐나게 생긴 달력이네요.

[공포의 권력] 리뷰들이 속속 올라올 듯한 예감,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거리의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4-01-01 19:48   좋아요 2 | URL
이 달력은 뜯는 형태는 아니고 탁상달력입니다! 매해 같은 날 재탕할 수 있어 좋을 것 같아요ㅋㅋ
공포의 권력 구입했는데 수요일에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왠지 한달 내내 붙잡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알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나의책장 2024-01-01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년 달력 선물이 들어오긴 해도 작년까지 따로 달력을 샀었는데 올해는 고민만 하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ㅎㅎ) 아직 못 샀어요 >.<
그래도 달력은 역시 뜯는 맛이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ෆ

거리의화가 2024-01-01 19:52   좋아요 1 | URL
탁상 달력 예전에 뜯는 형태 써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잘 안 뜯기는 문제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넘기는 스프링 형태로 샀습니다. 뜯는 달력은 역시 벽걸이가 짱입니다!ㅋㅋ
하나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은오 2024-01-01 20: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커피는... 그냥 마시면 안될까요? 😭 저녁에만 참을래요!!ㅠㅠㅠㅠㅠㅜ
화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4-01-02 08:59   좋아요 1 | URL
커피를 워낙 많이 마셔서 줄여보려고요^^ 2시 이후에 마시면 아무래도 영향이 가는 것 같더군요.
은오님 올해도 즐독하시고 서재에서 자주 보기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2024-01-02 0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달력 맨 앞장 뜯었어요 뜯은 건 연습장 같은 걸로 써요 달이 바뀔 때는 달력 천천히 뜯기도 하는데 새해에는 바로 뜯었네요

거리의화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24년에 만나고 싶은 책 즐겁게 만나세요 건강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걸 못하니, 마음 몸 건강 잘 챙기세요

새해 첫날은 따듯했어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02 09:01   좋아요 1 | URL
달력은 과감하게 뜯는 맛이죠. 2024년 1월이 되었네요. 희선님 말씀대로 독서도 좋지만 건강이 제일 중요한 듯 싶어서 올해는 건강에 신경을 써보려고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Vanessa 2024-01-02 0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쁘네요 일력^^
저도사고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1-02 09:02   좋아요 0 | URL
저 일력은 같은 일자로 과거의 어느 날을 소환하는 취지라 좋더군요. 요즘 일력이 다양하게 나와서 고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새파랑 2024-01-02 0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1월 2일! 절주와 절커는 언제나 다짐하지만 언제나 지켜지지는 않더라구요 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거리의화가 2024-01-02 09:03   좋아요 1 | URL
ㅋㅋㅋ 다이어트와 금연, 금주는 거의 매해 계획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새파랑님도 그러시군요ㅠ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자목련 2024-01-02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하신년, 익숙한데 생경하게 다가오네요 ㅎ

거리의화가 2024-01-02 12:46   좋아요 0 | URL
근하신년 요즘에는 잘 안쓰는 것 같기도 해요ㅋㅋ 올해는 일력을 한장씩 넘기며 북 다이어리를 써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자목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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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 P15


과거를 떠올리면 이제는 구체적인 기억보다 희미해진 기억이 더 많다. 적어도 내게는 이것이 감사했다. 어릴 적 부모님은 늘 장사로 바쁘셨고 집이라는 공간은 나와 동생들에게 내맡겨진 곳이었기에 차갑기만 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하루 빨리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폭력과 자본이란 단어는 일찍부터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주는 동시에 해방을 꿈꾸게 했던 것 같다. 


인간이란 큰 일을 겪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것일까. 다치고 아프게 되기 전 깨달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되뇌여보지만 그 때 아버지는 나사 풀린 브레이크 같았고 어머니는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였다. 괴로웠고 피하고만 싶었던 존재들이 시간이 지나 병마가 찾아왔고 이후에 그분들은 신앙을 찾고 바뀌었다. 

부모님은 노화와 병마의 후유증으로 신체적 기능은 떨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평화롭다 말씀하신다. 내게 종교는 의미가 없지만 부모님께서 신앙의 힘으로 기운을 차리신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매년 김치를 담가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행위는 분명 애정의 표현일 것이다. 어제는 2023년 마지막 날이었는데 가족들에게 전화를 내가 먼저 걸어야겠다 싶어 그렇게 했다. 

어머니는 “니가 웬일이야.” 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평소 내가 쌀쌀맞게 군다고 서운해하신다. 그럼에도 내가 이전에 가족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며 미안해하신다. 옆에 아버지도 계시다고 하셔서 이어서 통화를 했다. “고맙다.” 무서웠던 아버지는 없고 이제는 내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아버지가 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의 이런 표현이 익숙지 않지만.


사람들은 성격이나 감정을 말할 때 온도와 관련한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뜻하거나 냉담한 마음, ‘차가운‘ 기질, ‘뜨거운 열정처럼. 극지방의 태양에 관해 쓴 지 1년쯤 후, 그러니까 남편이 갑작스레 익사한 후에 메리 셸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마음이 차가운 사람인 걸까?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 마음 한가운데 있는 얼음같이 차가운 무언가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적어도 이 차가운 심장에서 나온 감정이 만들어 내는 눈물은 뜨거운 것임을."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듣곤 했다. - P71


어머니가 내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화를 내던 시절, 나 역시 내가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끔찍해하고 비슷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사실은 얼마나 닮았는지, 어머니가 나의 가장 본질적인 취향이나 관심사 혹은 가치체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게 된다. 어머니는 평생 동안 도덕적인 질문과 원칙에 사로잡혀 있었고, 사람의 삶은 그가 이룬 것과 그가 기여한 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점을 물려받았다. 좀 더 작은 것들도 있다. 꽃이나 메마른 나뭇가지를 보고 즐거움을 얻는다든가, 책을 좋아하는 점, 일종의 불안감과 불확실성 같은 것들. 물론 외모도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 P340


솔닛의 글은 위로가 되고 따뜻했다. 게다가 문장도 좋아서 기뻐서, 슬퍼서 벅차오를 때가 많았다. 읽을수록 내 스타일이다 싶어 전작 읽기를 해야겠다 결심했다. 그녀가 역사가이기도 해서 고전과 역사적 사례를 끌고 오는 것도 좋았다. 선물해주신 분의 마음이 더해져서 소중하게 읽었던 것 같다. 감사하다.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 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그 순간부터는 정말로 중요해진다. 이 순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손님은 때로는 안내인처럼 친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우리를 문밖으로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바로 그 순간 이후에 살아가게 될 삶이다. - P223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 P278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도 나는 멸종해 버린 과거의 어머니와 여전히 다투고 있고, 과거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너무 작아졌지만 여전히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과거의 어머니와 과거의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독특한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러낸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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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1 1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베카 솔닛의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올해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가족의 존재가 참 그런 것 같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거리의화가 2024-01-01 19:53   좋아요 1 | URL
솔닛의 글 참 좋네요^^ 페넬로페님께도 좋은 느낌으로 다가갈 것 같습니다.
가족이란 멀고도 가까운 존재인 듯 싶어요. 가까워서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01-01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1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1-02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면서 거리의화가 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부모님을 떠올리기도 하셨군요 이 책을 보시고 리베카 솔닉 책을 다 보시기로 하시다니... 멋지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02 09:04   좋아요 0 | URL
내용이 저자의 어머니의 사연으로 시작되어서인지 자동으로 저도 옛 기억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녀의 책을 조금씩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4-01-02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가까운 날에 이 책을 읽고 싶어요. 미루지 말고...

거리의화가 2024-01-02 12:45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이 이 책을 읽고 풀어내실 감상이 궁금해집니다^^
 

봄 정월에 王이 益州에 넌지시 지시하여 변방 밖에 있는 오랑캐들로 하여금 스스로 월상씨라 칭하고, 여러 번 통역을 거쳐 흰 꿩 한 마리와 검은 꿩 두 마리를 바치게 하니, 이에 여러 신하들이 ‘왕망의 공덕으로 주나라 성왕 때 흰 꿩을 바친 상서를 이루었으니, 왕망에게 마땅히 안한공이라는 호를 하사해야 한다.‘고 지극히 말하였다. ≪漢書 王莽傳≫ - P169

林氏가 말하였다.
"王莽의 반역하는 일이 이미 싹텄는데도 漢나라 조정의 公卿들이 그의 忠犬 노릇을 하면서 일찍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梅福은 會稽에 은둔하고 逢萌은 遼東에 나그네가 되어서 자기 몸이 장차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 夫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독실히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으로 지키고 道를 잘하며,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 살지않는다.‘ 하였으니, 두 사람이 이것을 행하였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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