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일(23일)에 형남에 조서를 내려서 수병(水兵) 3천 명을 징발하여 담주(潭州, 湖南 長沙)로 가게 하였다.

북한(北漢)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요(遼)에 알리고 변방을 순수하겠다고 하면서 성원해 주기를 빌었다. 정해일(8일)에 왕전빈(王全斌, 908~976)이 다시 곽진(郭進, 922~979)·조빈(曹彬, 931~999) 등과 군사를 인솔하고 북한의 낙평(樂平)을 공격하고 그의 공위(拱衛)지휘사 왕초(王超) 등을 항복시켰다.
북한의 장수 울진(蔚進)·학귀초(郝貴超)가 번(蕃)·한(漢) 병사를 다 모아서 와서 구워하자 세 번 싸워서 모두 그들을 패배시키고 드디어 낙평을 떨어트렸고 바로 세워서 평진군(平晉軍)을 만들었다.

북한은 땅이 좁고 산물이 적으며 또 해마다 요(遼)로 물건을 날라야 했으니 그런고로 나라의 쓸 것이날로 깎이었는데, 마침내 오대산(五臺山)의 승려인 계용(繼容)에게 벼슬을 주어 홍려경(鴻臚卿)으로 삼았다. 계용은 옛날 연왕인 유수광(劉守光, ? ~914)의 서자로 승려가 되어 오대산에 살았는데, 《화엄경》 강론을 잘 하여 사방에서 공양하고 보시하니 많은 것을 축적하여 나라의 쓸 것을 보탰다. 오대산은 요나라의 경계에 가까워서 항상 그들의 말을 얻어서 헌상하여 도마(都馬)라고 불렸는데, 한 해에 평균 100필이었다. 또 백곡(栢谷)에서 은(銀)을 야광(冶鑛)하여 백성을 모집하여 산을 뚫고 광물을 가져다가 은을 녹였으니 북한에서는 그 은을 가져다가 요에 보냈는데, 해마다 1천 근이었으며 바로 야은(冶銀)하는 것으로 인하여 보흥군(寶興軍, 山西 繁峙縣 東南)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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