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2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선 《독립운동 열전》 1권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잊힌 독립운동사와 한국근대사를 살펴보았다면 2권은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그래서 2권의 부제는 <잊힌 인물을 찾아서>이다. 1권은 목차가 부제와 착 들어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던 반면 2권은 부제에 맞게 목차도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이다.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김단야, 홍범도, 김창숙, 주세죽, 김마리아, 이동휘 정도를 제외하고 이 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낯설었다. 여전히 우리는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등 알려진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앞으로도 찾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많다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22년 조선공산당(내지당 또는 중립당)에 가담한 두 명의 인물이 있다. 김사국과 김한이다. 둘은 모두 당에서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사국의 경우 동생인 김사민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 놀라웠다(김사민은 신생활사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4년 7월 만기출옥했으나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평생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 김한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되어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하고 다량의 폭탄 국내 반입하려한 혐의로 형량 5년을 언도받는다. 그는 법정에서 총독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오 그 밖의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도 이 같은 총독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을 언급했다. 그는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P45)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내지당(조선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한은 시종일관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이 자신의 개인적 판단이었다고 진술했다. 덕분에 내지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P46)

유림 독립운동계의 거목인 김창숙 선생에 대한 일화는 감동적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북 경찰부를 통해 망명자 김창숙에게 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에 들어와 귀순한다면, 과거 '범행'을 모두 불문에 부치고 후대하겠다는 말이었다. 가옥을 새롭게 단장하고 논밭을 새로 사줘서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희 숙씨는 경상북도 경찰부의 내용을 받아들여 전향 권유 편지를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발송했다. 총독부 당국이 이처럼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니 이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권면하기까지 했다. 김창숙은 가까운 친족으로서 유교 고전학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던 사이였기에 실망감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김창숙은 바로 붓을 들고서 답장을 썼다. 절교 선언이었다. 그는 아들 환기에게도 사정을 전했다. 문중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김황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알리고, 내희 숙씨가 더 이상 일족의 일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P126~127) 자신의 일족의 잘못을 덮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내치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다. 이 일화야말로 대쪽 같은 선비의 꼿꼿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빨치산 대장들 박종근, 박영발, 방준표들이 있다.
박종근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 직이었다. 29세였다. 열일곱 살부터 반일운동에 참가했던 만큼 혁명운동 경력이 벌써 13년째였다. 사상범으로 투옥된 기간만 3년 7개월이나 됐다. 대중운동의 현장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 (...) 그뿐이랴. 해외유학도 나녀왔다. 모스크바 조선당학교 2년간의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배웠다. 실천과 이론,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잘 준비된 간부였다.(P199~200)
박영발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당과 노동조합 양 부문에서, 그리고 총파업 투쟁의 지휘 방면에서 없어서는 안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장래 당조직을 이끌 중견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최고위 간부교육을 이수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1948년 7월 그는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간부학교 입학대상자로 추천된 것이다.(P221~222)
9월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투쟁을 가리킨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지역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의 파업이 첫 출발점이었다. 경남도당 노동부장인 방준표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맞섰던 대상은 대한노총, 무장경찰, 미군 헌병 '3자의 합작적 공세'였다. 9~10월에 걸쳐 "장렬한 피투성이 반항투쟁에 직접 참가 지도하였다"고 기록했다.(P237)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 해방 이후 모스크바 유학을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의 노동 투쟁 이력이 유학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박종근은 12개의 과목 모두 5점 만점에 5점을 받을 정도였고 박영발도 그에 못지 않은 최상 레벨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박헌영의 좋은 평가까지 받은 것을 보면 실력자들이었음에 분명했던 것 같다.

여성 독립운동가 파트도 눈에 띄었다. 그 중 이덕요와 박신우, 송계월에 대해 말해보겠다.
이덕요는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함흥 자혜의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다 의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걸었고 해마다 신년에 신문사들이 개최하는 '여류 명사 초청 가정문제 좌담회'에 초대되어 여성 문제와 가정 문제에 대해 발언할 정도로 명사였다. 문필과 단체 활동 등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다. 우리가 잘 아는 여성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정치문화부에도 속해 있었다. 이덕요는 여성운동의 의의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 연관시켜 이해했다. 일간신문에 실은 한 기고문을 보자. 기고문에서 그는 오늘날 조선이 요구하는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 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을 실행함과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는 대중운동과 악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론 지면의 표현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관 지어 포착하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P275)
박신우는 <근우회>의 선전 조직부에 있으면서 책사 노릇을 했는데 기획력, 실행력 모두 출중했다고 한다. 남편 김규열과 박신우 모두 코민테른 제공 고등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는데 1928년 초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조선공산당의 해외 부문 사업을 맡게 되어 갔다. P-37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 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체포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 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P286)
송계월은 1930년 1월 제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을 주도적으로 모의한 혐의를 받았다. 글 실력이 출중해 문단에도 데뷔했고(<가두 연락의 첫날>) 잡지사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1933년 폐결핵으로 23살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래도 그녀의 전집이 두 권 남아 있어 다행이다.(<송계월 전집>) 그녀는 사상과 이론 문제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인 투사가 되곤 했다. 그녀와 교유하던 남녀 문인들은 말했다. "계월이는 그렇게 얌전하다가도 이론 투쟁에만 들어서면 여로하가 솟아오르는 기개가 있어 건드리기가 어렵다." 한걸음도 사양하지 않는 조리 있는 언변과 불길을 일으키는 듯한 열정으로 인해 무리 가운데 우뚝 섰다고 한다.(P292)

1962년 3.1절 일산 신문에 이채로운 보도 기사가 실렸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기로 예정된 한 인물의 자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다. 문제의 인물은 장재성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였다. 그에게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단장이란 포상 등급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1등 중장, 2등 복장에 뒤이은 3등 훈장이다. 해방 후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이었다.
왜 서훈을 취소했는가?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한 경우에는 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이었다.(P307~308)

이 사례 뿐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기준에 거부되거나 선정되었다 취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말 그대로 독립운동 이력이 있는 운동가에게 전달하는 훈장이다. 그것에 정치적 이유나 이념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이 아무쪼록 개정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서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중 한 둘이라도 더욱 깊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의 역할은 그 이상을 하는 셈이라 생각한다. 몰랐던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일대기 뒤에 숨겨진 뒷 이야기까지 만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2-11-27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을 정해서 역사만 읽는 달로 하고 싶었는데 오늘 이 리뷰를 보니 그 생각이 더욱..^^

거리의화가 2022-11-28 09:48   좋아요 1 | URL
역사만 읽는 달 좋은데요^^ 읽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읽을 거리가 늘어나서 저는 즐겁더라구요. 페크님의 역사 읽기를 응원합니다ㅎㅎㅎ

그레이스 2022-11-28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계신군요~♡
묵직한 제목때문에 나중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한 주제로 읽어야 할 욕구가 생길때 읽어봐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11-28 10:22   좋아요 1 | URL
제목은 묵직한데 내용은 사건과 인물에 얽힌 이야기라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많이 다루어서 좋았어요^^ 말씀처럼 구미가 당기실 때 한꺼번에 내리 읽으시면 더 깊이 보고 싶다라는 인물들도 생기실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 열전 1 - 잊힌 사건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1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마라.
나는 간다.
가기는 간다마는,
나의 가슴에 품긴 이상의 광명은 영겁무궁까지도 네가 그의 표상이로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봄은 오느니라.
제왕의 권력과 재화의 세력 밖에 있는 동군東君(태양신)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무궁화 다시 피건 또 다시나 만나자.

1910년 소년 잡지 4월호에는 이런 시가 실렸다. 최남선이 신민회 망명자들의 심정을 노래하며 그들을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여기서 태백은 조국을 가리킨다. 다시 만나자는 그의 말이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들리지만 조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고 일제의 압박 속에 35년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이 책은 몇 십년전 조선 땅과 해외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서 한국 근대사이자 독립운동사를 살펴본다. 사건의 상황을 설명하고, 관련 인물을 이야기하며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고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사건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운동, 광주학생운동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임이 눈에 띈다. 게다가 관련 인물도 김상옥, 이상설, 안창호, 이동휘 등 유명한 독립운동가들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으로 그동안 외면하거나 놓쳤던 독립운동가들이다. 때문에 책의 부제는 <잊힌 사건을 찾아서>다.

먼저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갈등을 살펴보자. 이상설과 정순만을 비롯한 망명자들은 '해도 거점 임시정부 수립론'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러시아 당국과의 교섭이 반드시 필요했다. 사건 당일 낮에 이미 한인 거류민회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로 충돌하여 갈등을 드러냈다. 정순만은 권총을 소지한 상태로 피살자인 양성춘의 집을 방문했다. 양성춘은 당시 한인 거류민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유력자로 신망이 두터웠고 영향력이 있는 자였다. 러시아 사법기관은 정순만에게 3개월 금고형을 언도한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방어로 고의 살해가 아닌 과실 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정순만 출감 후 한인 사회는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또 발생한다. 1911년 정순만이 양성춘의 아내인 전소사에게 도끼로 가격당해 사망한 것이다. 이상설은 분노했고 살인 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러시아 관청에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를 고발하는데 네 명은 모두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이 일로 이상설과 안창호는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3.1운동은 조선의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동료를 밀고하거나 변절한 자도 적지 않았다.
이미륵은 3.1운동 후 고문과 투옥의 위기를 피해 망명길에 오를 때의 경험을 복기하여 후에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한다. 북간도 용정의 철혈광복단도 3.1 운동이 시작이었다. 의열 투쟁을 벌인 김익상도 3.1운동의 체험이 그의 이후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공산당 2대 책임비서였던 강달영도 진주에서 3.1운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박길양은 강화도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인데 강화도 시위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박길양은 시위에 참여하고 다행히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시위가 사그라들자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초대 회장이었던 오현주는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고 동료를 밀고한 대가로 요즘 돈으로 3억원을 받아 챙겼다. 김대우는 3.1운동 학생단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학생단 지도부는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운동을 기획한 양대 비밀결사 가운데 하나였고 그는 경성시내에 소재하는 6개 전문학교 학생대표들 중 하나였다. 경찰에 체포된 뒤 초기에는 혐의사실을 인정했으나 향후 입장을 바꾸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시위를 벌였음을 인정했다. 그의 아비는 친일파이자 대지주였고 가계에 로비를 펼친 모양이다. 그는 "지금은 독립을 희망하지 않는다" 발언으로 징역 7개월만 받고 풀려나온 뒤 변절하여 도지사까지 되는 행보를 보였다. 김성근은 3.1운동에 가담한 후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 연락과 독립자금 모금에도 참여한 혁명가였다. 하지만 어느 날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음에도 무사히 석방됐고 아무 일 없는 듯 상하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밀정임을 의심받는다. 임정 경무국도 그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이를 눈치챈 그는 영사관을 통해서 은신처와 조선 귀국의 편의를 제공 받으며 경성으로 간다. 무사히 도착한 뒤에 그는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이따금 조선총독부에 출입한다는 근황이 언론에 보도될 뿐이었다. 그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고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등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의 노선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와중에 갈등은 더욱 불거졌다. 김립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 안에서, 독립운동 계에서 적이 많았다. 그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세력이라면 부르주아라도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이었다. 반면 이시파 공산당 세력은 부르주아와의 결탁은 결코 있을 수 없고 오로지 러시아 혁명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모스크바에서 1차로 전달한 40만 루블의 관할권은 박진순이 속한 한인사회당과 그 후속 단체인 고려공산당에 있었으나 임시정부는 김립 등이 이 자금을 횡령했다고 오해해 암살했다.
'15만 원 사건'은 이 책을 통해서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던 엄인섭이 동료들을 밀고하면서 사건의 관련자들이었던 철혈광복단의 희망을 꺾어버린 것은 너무나 뼈아프다. 그는 무려 14년간 밀정 활동을 했다고 하니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다.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의거 후 경성 총격전은 이제 영화로도 알려지고 많은 이야기가 있다. 1923년 3월에 발각된 폭발물 비밀반입 사건은 '제2차 대암살 파괴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흔히 의열단이 주도하여 사건이 전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의열단 단독 주도론은 사건 발발 당시 일본 경찰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찰 당국은 이 사건을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이 러시아 공산당에게서 자금을 받아서 대관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파괴함으로써 조선을 적화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음모"로 간주했다. 경찰과 정반대 입장에서 작성된 기록인 《약산과 의열단》도 시종일관 김원봉 단장의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 의열단 사건의 피고인 숫자는 18인이었는데 이 중 몇몇은 의열단과 달리 독자적인 정치 단체의 구성원이었다. 황옥은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부의 위원이었고, 장건상은 이시당의 최고 간부인 중앙위원이었다. 김시현과 권정필은 이시당의 국내 활동을 위해 1922년 3~5월 시기에 잠입한 당원이었다. 김한도 조선공산당(내지당, 중립당)의 간부였다.

이전에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공부했던 것이 책의 재미와 감동을 더 느끼게 했다. 7장 비밀결사를 통해서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를 지낸 인물들의 활동을 확인할 수가 있다. 2대 책임비서였던 강달영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만들어 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에 놀랐고 이를 일제가 풀어내자 정신을 놓았다는 것에 통탄했다. 사실 그가 옥중에서 정신이상이 되고 풀려나서도 온전한 정신을 찾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3대 책임비서인 권오설도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한 인물이다. 강달영과 마찬가지로 당이 가장 어려울 때 책임비서를 맡게 된 그는 자신이 수배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당 재건을 위해 부단히 애쓴다. 나는 4대 책임비서인 안광천이 오히려 낯설었다.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사의 전성기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의 재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안광천은 주목할 만한 인물임에도 사진 한장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아쉬운 점을 하나 꼽으라면 부제와 목차의 불일치다. '잊힌 사건을 찾아서'의 부제인 만큼 '사건'의 제목으로 목차를 구성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2, 3장의 경우는 <김립 암살 사건>, <15 만원 사건>처럼 부제에 들어맞으나 나머지 챕터는 그렇다고 말하기에 애매함이 있다. <망명>,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배신>, <비밀결사>, <옥중투쟁>, <국제주의> 어떤 것은 장소이고 어떤 것은 일반적 용어라서 묶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잊혀졌거나 외면받았던 다양한 사건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사건 관련자들의 모든 일대기를 알 수 있지 못하여 이후가 궁금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판결/수감 기록 등 외부를 통해 바라본 기록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본인의 마지막도 불명확하여 후손이 있더라도 그들의 종적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웠다. 향후 이들의 후속 연구가 이루어져서 전 생애를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2-11-25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독립운동을 한 조공
인사들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항상 역사의 공과를 따지
자고 하면서, 자신들의 과
는 파묻고 경쟁자들의 과는
들추는 모습이 예나 지금
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
는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11-25 13:13   좋아요 1 | URL
독립유공자 훈장에 대해서 생각해볼 지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자들을 밀고한 사람인데 독립유공자로 여전히 등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죠. 진짜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은 여전히 알지 못하거나 사회주의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서 씁쓸할 뿐입니다. 역사를 역사로만 바라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기에 그런 것이겠죠.

그레이스 2022-11-28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열단> 읽고 안개가 낀듯 개운치 않던 머리가 선명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변명도, 햡리성을 내세운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이유도 진실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해줬죠.^^

거리의화가 2022-11-28 10:39   좋아요 1 | URL
진실의 힘 맞습니다^^ 나약함이라는 무기와 변명 등은 결국 자신과 후손들 앞에 진실을 가릴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의열단>의 다양한 활동과 관련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해자가 과연 가해자이기만 할까. 피해자와 희생자는 어떻게 다른가. 2차 대전 이후 기억의 지구화가 진행되었다. 이를 동아시아 지역에 한정해서 보지 않고 독일과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비교하여 들여다보고 미래의 지구적 구성체제를 위한 연대 행동을 고민하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11-22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들 조부모들 모두 가해자 피해자가 뒤섞여 있어서 솔직히 일반 인들에게 전쟁의 비극은 가해자 피해자로 나누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저 매년 치뤄지는 선거철 정치인들의 편가르기 싸움 정쟁으로 끝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데도 유럽은 매년 역사적 비극을 되새기는 교육을 엄청 하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11-22 11:14   좋아요 0 | URL
2차 대전 참전에 가담한 국가이거나 피해를 입은 국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치부될 수 없는 문제이더라구요.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동유럽, 일본 제국주의에 이르기까지 국내 정치에 이용되는 것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이것이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해의 역사든 피해의 역사든 모든 것을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아요. 어찌됐든 확대 해석하거나 축소 은폐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 도스토옙스키부터 하루키까지, 우리가 몰랐던 소설 속 인문학 이야기
박균호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제목과 책의 내용이 매치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래서 아쉬웠다. 다른 제목을 썼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했다).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읽고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게다가 주제마다 등장하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는 미소를 짓게 만든다. 아내분과 따님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 같지만 나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아주 유명한 작품도 못 읽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내가 잘 못 읽어서 읽고 나면 자괴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소설을 읽다가 지루해서 졸았던 적도 많다. 최근에는 조금씩 소설을 읽어가고 있는데 여전히 어려움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인물과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 책에는 20권의 소설이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는 <분노의 포도>, <맨스필드 파크> 단 2권이다. 그래서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 이리도 많은데 어쩌나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저자의 글 솜씨도 좋아서이겠지만 소설에 얽힌 인물과 배경을 설명해주어서 읽지 않은 소설이었어도 읽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소설의 이야기보다 사실 뒷 이야기들이 더 재밌었다. 뒷 이야기들이라함은 소설에 대한 주변적 이야기지만 소설을 이해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장치적 역할을 한다. 소설을 조금씩 읽으며 생각하는 것이지만 배경을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이해의 깊이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이해도도 떨어지고 심지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여러 주제들 중 나는 고서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박인환 시인과 김수영 시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박인환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책 사랑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박인환 시인이 운영하던 마리서사가 지금도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아쉬울 따름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결혼 전 살던 동네 근처에 고서점이 있었다. 그 때도 책을 좋아했는지 남자친구와 함께 여러 번 들렀었다. 서점에 들어서면 나는 묵은 향기가 기억에 또렷하다. 무슨 책을 샀는지도 지금은 가물한데 어쨌든 갈 때마다 여러 권의 책을 집어들고 나왔었다. 결혼 무렵 더 이상 그 곳을 이전처럼 가지 못하게 되어 인사차 들렀을 때 주인 아저씨께서 운영난으로 서점을 그만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이제 더는 남아있지 않는 그곳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지금도 여전하다. 나의 추억만이 남고 실물은 사라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읽을 거리를 얻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읽는 즐거움은 당연히 배가 될 것이다. 책에 대한 사랑과 이야기적인 재미까지 가득해서 책쟁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책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11-13 2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까마득할 나이 오십이 되면 이전과 독서 방향이 크게 달라질것 같진 않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도서관 소장 도서 만큼 읽으셨던 제 교수님들
오십 이후 부터는 고전으로 돌아가서 읽으시더군요.

이북에서 느낄 수 없는 종이 향기, 손끝에서 느껴지는 질감 때문에
종이 책은 우리 곁에 영원 할 것 같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14 09:16   좋아요 2 | URL
저도 50이 된다고 해서 특별하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조금 더 깊게 팔 것 같긴 합니다. 그때쯤이면 좋아하는 책이 몇 권쯤 생길테니 재독하는 것도 좋겠죠^^ 말씀하신대로 고전 읽기도 좋겠습니다.
저도 이북은 손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쉽더군요. 헌책방이나 고서점에 들어갔을 때의 그 묵은 향이 저는 참 좋더라구요. 책은 역시 넘겨보는 맛인 것 같습니다ㅎㅎㅎ

박균호 2022-11-14 0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요즘 우울한 시기였는데 멋진 서평 덕택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14 09:17   좋아요 1 | URL
박균호님 덕분에 좋은 책 읽어서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분이 좋아지셨다고 하니 더 좋네요.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랄게요^^*

mini74 2022-11-14 16: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소설이 있는거 같아요. 예전과는 다른 맛, 그래서 20대에 만난 작가의 책이 50엔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괜히 앞에 적힌 나이때문에 이 책이 손해보는건 아닌가 ㅎㅎ 걱정되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2-11-14 17:28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 재독한 책이 손에 꼽아서요...ㅎㅎ 과연 50대가 되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얼마나 생길 것인가가 궁금하긴 합니다^^
저도 그 생각했어요. 저 숫자 때문에 책이 손해보는 것 같은 느낌? 내용도 사실 숫자에 상관없이 언제 읽어도 될 책들이라는 생각입니다ㅎㅎㅎ

희선 2022-11-16 0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인환 시인이 하는 책방은 아니지만, 마리서사 제가 사는 곳에 있어요 가 본 적은 없어요 박인환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마리서사라 지었다고 한 듯해요 한번 가 보려고 했는데 못 가 봤습니다 언젠가 쓴 적 있는데... 알 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 곳이네요 거기 산다고 해서 길을 다 아는 건 아니기도 하군요

https://blog.aladin.co.kr/798715133/11683260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16 09:16   좋아요 1 | URL
와 희선님. 마리서사가 있군요. 군산이라니... 예전에 여행 한번 했었는데 짧기도 했고 이곳을 알지 못해서 가보진 못했네요. 코로나인데도 운영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시는게 다행입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가봐야겠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희선 2022-11-17 03:49   좋아요 1 | URL
말하고 이제 문 닫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코로나로 문 닫은 동네책방 많을 거예요 저기 알 것 같은데, 예전에 찾아보니 안 보이더군요 집에서는 좀 멀어요 걸어서 삼십분쯤 걸리는 동네인데... 나중에 저쪽으로 가면 다시 찾아볼까 봐요


희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 지양으로서의 조선, 지향으로서의 동양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6
정준영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성제대는 학문의 전당을  표방하면서 제국과 식민이 중첩된 공간 위에 서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국책(國策)과 학문 사이의 균열'이라는 모순된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다. 이런 균열의 간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메울 것이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 P18~19

그동안 대한민국 사학계를 지배해온 식민사관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제기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총서 지난 시리즈 5권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 편찬을 위해 자료 수집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 그들의 논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조작 및 왜곡을 얼마나 서슴없이 자행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여다본 바 있었다.
하지만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관점에 입각한 연구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그로 인해 진실과 거짓의 중간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수많은 일본인의 조선 연구가 충분한 고려 없이 더 교묘한 왜곡으로 미리 단정되기 일쑤였으며, 모호함 그 자체에 주목할 여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P9). 저자는 이런 기존의 한계를 넘어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을 검토하고자 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주의적 지향이 관철되는 공간인 동시에 학술적 연구가 허용된 제도적 공간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독특한 위치를 점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이 책은 경성제대 초대 총장과 법문학부 일본인 학자 5인을 기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식민지 조선 연구의 흐름을 살펴본다.

국책과 학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으로 경성제대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는 조선 연구, "동양 문화의 권위"라는 지향을 내세웠다. 이 관점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연구만으로는 안 되고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이 주도한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까지 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방향성을 위해 조선총독부와 날을 세우면서 자신의 입김에 맞게 대학의 인력을 구성했다.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2강좌' 초대 주임교수였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교과서 편찬과 각종 고적조사사업을 주관한 식민지 관료로 출발하였으나 1923년 조선사학회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비로소 역사학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사학회는 식민사학의 제도화라는 흐름에서 보면 과도기적 성격이 강했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전문 연구자를 본토에서 촉탁으로 끌어오는 것으로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무리였기에 경성제대 설립이 추진되었다. 또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도 기존의 조선 연구의 전환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조선사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사강좌』 발행을 주도하고 경성제대 창설 작업에 참여하며 대학 예과의 형태와 대학 학부의 구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식민주의 역사학은 식민지 조선에서 제도화되었으며, 경성제대는 이런 식민주의 역사학의 제도적 중심으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P89).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1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인 이마니시 류는 당시 일본 학계에서 조선사 연구를 대표했던 인물로, 조선 고서적을 광범하게 수집했던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오다 쇼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조선사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오다 쇼고는 식민지 관료 출신으로, 조선사학이라는 학문 영역의 제도적 정착에 지원을 한 인물인 반면, 이마니시 류는 일본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에서 '조선사학'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최초의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조선사학'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마니시는 조선 고대사를 중국 제국주의로의 종속의 역사로 보았다. 그는 한반도 속의 중국이었던 한사군과 낙랑군을 조선 민족의 종속화의 사례로 보았다. 그는 고대 중국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속성을 읽어내면서 서구의 제국주의와 중국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제국의 가능성을 조선 고대사, 고대 한일관계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조선 민족의 종속을 '중국화'에서 찾고 조선이 일제의 일부분이 되었고 이것이 영원하려면 중국화를 걷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조선인에게 '지나화'를 벗겨내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곧바로 강제로 '지나화'를 벗기는 폭력적 행위를 유발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는 동양학자들 그룹이 있었다. '지나철학 강좌', '지나어학 · 지나문학 강좌', '동양사학 강좌' 등의 강좌를 기본으로 삼아 연구하고 가르친 일본인들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나철학 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와 1941년 '지나철학 강좌' 후임을 맡은 아베 요시오가 있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교수 부임 이전 일본에서 중국 고전 경전에 대한 권위자였다. 그는 고증학을 중심으로 하는 청대 중국의 학술문화가 어떻게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 주변 세계로 확산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청대 중국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한 조선의 지식인들(홍대용, 박제가, 김정희)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의 고증학은 청조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인이 있었음에도 그들 개인의 업적에 그친 반면 일본의 고증학은 서구의 근대 학문과 연계하며 발전해 나갔다고 주장했다. 아베 요시오는 퇴계 이황과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적 혈연 관계를 통해 퇴계 사상의 흐름은 조선에서 제국대학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일본의 도학파에게 전해져 황도 철학으로 만개했다고 보았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국제공법 강좌'와 '외교사 강좌'를 맡은 '이즈미 아키라(1873~1943)가 있었다. 그는 경성제대 부임 전 국제주의를 준거로 강제적 동화주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비동화주의 식민정책을 주장하였다. 타이완 현지 지식인들이 그의 이론을 수용하고 적극 호응하며 1920년대 '타이완의회설립 청원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식민의 개념을 규정하면서 이주와 식민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식민은 "생애거주"의 목적, "집단적", "가족과 더불어", "본국은 아닌", "무소속의 토지나 자국의 영토"일 때만이고 그 이외는 이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점진적 진화론에 가까웠고 이상적인 방향이었으나 현실의 식민정책과는 때문에 타협이 어려웠다. 그는 일본 식민정책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반대를 주장한 이였지만 민족자결은 혁명의 자유나 식민지 독립운동과 어떤 관련도 없다고 주장하는 등 한계를 보였다. 1927년 경성제대 부임된 이후 그는 퇴임 때까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기존의 식민정책학자로서의 활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1928년 《외교시보》에 발표한 「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논문에서 비동화주의와 조선의 여러 분야의 문제를 분석한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이 발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으로 이즈미 사상에 문제를 삼아 교수 해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아무리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가 학문적 자율성과 과학적 엄밀성, 그리고 제국적 보편성을 지향한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그 배후에 식민지배의 폭력적 현실이 최종심급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조선 연구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자 핵심적인 배경이다. - P243

1930년대 만주 사변 후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는 '지나'에서 '대륙(만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31년 경성제대 제4대 총장으로 온 야마다는 사명을 변경하며 조선은 '만몽 개발'의 적임자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연구'라는 용어 대신 '개발'이라는 용어를 쓰고 '지나'는 '만몽'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경성제대는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으로 발돋움하였으며, 개별적인 전문 연구활동 대신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조선 연구는 경성제대에 의해서 비로소 제도화된 분과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고, 분과학문이 된 조선 연구가 체계적으로 양성해낸 인력들이 통치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 참여하여 식민권력에 이바지한다. 매번 전문가를 촉탁이라는 형태로 일본 본토에서 초빙해 학술 조사를 수행해야 했던 조선총독부의 처지에서도 경성제대의 설립은 인력 수급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했다. - P241

다만 이들은 여러 조선 연구 중에서 극히 일부를 담당했을 뿐이고, 시기적으로도 앞쪽에 치우쳐 있다. 저자는 이렇게 조선 연구의 해당 분야와 연구자 세대에 대한 편향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도한 바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먼저 일본인들이 수행한 조선 연구가 가진 특징을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경성제대 조선학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들과 자유주의적 식민정책학자로서 식민지 사정을 비판했던 이가 경성제대 조선학의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형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 연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기존 조선 사학계를 대표하는 오다 쇼고나 이마니시 류 말고 동양학자 그룹들의 학자였던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 국제법 학자인 이즈미 아키라의 주장이 흥미로웠다. 청대 고증학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 지식인들에 주목한 후지쓰카 지카시와 퇴계 이황에 주목한 아베 요시오, 그리고 비동화주의를 주장한 이즈미 아키라. 이런 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1-12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덕분에 요즘 새로 공부하는 기분이에요. ^^

거리의화가 2022-11-13 19:3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어릴 때 좀 이렇게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ㅎㅎㅎ 다늦게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나네요~ 항상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1-13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혹시 역사학과 교수님이신가요? ^^ 저도 언제나 화가님 글이랑 읽으시는 책들 보면 놀라게 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13 15:20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무슨 그런 말씀을...^^;;; 진짜 역사학과 교수님들께 돌날라오는 소리가 들립니다ㅠㅠ 새파랑님께 놀라움을 드렸다니 저는 그저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