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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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살롱 사이에는 현실이 끝나는 분리선이 놓여 있었다. 게르망트댁에서의 저녁 식사는 마치 오랫동안 욕망해 오던 여행을, 머릿속의 욕망을 내 눈앞에 지나가게 하여 꿈과 친해지는 여행을 시도하는 것과도 같았다. 집주인들이 누군가를 초대하여 "오세요, ‘완전히‘ 우리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친구들이 자기들 사이에 섞인 그를 보며 느낄 두려움을 그 배척받은 자의 탓으로 돌리는 척하면서, 지금까지 그들의 내밀한 친구들에게만 부여해 오던 특권을 본의 아니게 비사교적이고 조금은 호감을 사고 있는 그 따돌림 받는 자에게도 부여하여, 그를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권적인 사람으로 변모시키려고 애쓰는 그런 저녁식사 중의 하나라고 나는 믿었을지도 모른다. - P109

'게르망트 쪽'(5,6권)을 읽고 나선 몸도 마음도 어지러웠다. 차라리 찰스 디킨스의 작품처럼 '빈민가와 뒷골목 이야기가 더 나았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음울하고 비참해서 읽기 힘들었는데 말이지).

화자가 청년이 된 뒤 사교계 모임에 하나 둘 참여하게 되고 나서 이런 모임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줄곧 등장하는데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현대에도 이런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의 모임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고 이런 세계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문제는 이 배경이 19세기 유럽 프랑스라는 사실! 나는 대략의 프랑스 역사를 알 뿐인데 이 책은 당시의 문학과 예술 전반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대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도통 모르는 대화가 이어지니 지루할 수밖에(하필 이 부분이 제일 길다). 관찰자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재미가 있을 터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만큼 힘들게 읽었다는 넋두리였다.

5권 마지막에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켰다. 병명은 요독증(신장 기능이 떨어져 소변 배출이 잘 안 되고 체내에 노폐물이 축적되어 각종 합병증을 일으킨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할머니의 통증은 더해 가고 본인의 아픔도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고통도 그만큼 커진다.
나중에 할머니는 눈이 안 보였다가 귀가 안 들리고 언어장애까지 오게 되는데 그 때 가서는 자기가 하는 말을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며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을 지경이 된다. 프랑수아즈는 신문 광고를 보고 전문의를 찾아 데려오는데 할머니는 진료를 거부한다. 그리고 끝내 얼마 후 할머니는 가족들 곁을 떠난다.
이 모습을 보면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병증과 고통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죽더라도 비참한 모습을 보이며 죽고 싶진 않았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다를 것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함께 해서 아픔이 덜어질 수만이라도 있다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베르고트 역시 몸이 아팠고 누군가는 그가 단백뇨에 걸렸다고도 하고 종양에 걸렸다고도 했다. 점점 그의 몸은 쇠약해졌으나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은 위상이 커지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그 무렵 화자에게 관심이 가는 신인 작가가 생겼는데. 이때부터 그는 베르고트를 그다지 찬미하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부족함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오랜동안 우상이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경험은 누구나 할 것 같다. 그 우상에게는 어쩌면 잔인한 일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또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세월에 따른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 유행은 바뀌고 세상에 사람은 많으니까.

10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던 적이 있다. 그러다 회복이 어느 정도 되려니까 몇 년 전 또 아버지가 암에 걸리셔서 항암 치료-재활하는 기간이 이어졌다. 그 때는 무신론자인 나도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 같다. 열심히 사셨던 분들이어서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다행히 두 분 다 회복이 되셨다. 물론 계속 관리해야 하지만). 두 분 다 이후 독실한 교인이 되시기도 했는데 사람이 크게 앓고 나면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인 중에서도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있으시고 췌장암으로 사망하신 분도 있다.
이런 각종 일을 겪다 보니 사람이 아픈 것이 쉬운 것이구나 나만 피해갈 순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점차 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죽음의 시간이 불확실하다고 말하지만, 이런 말을 할 때면 그 시간이 뭔가 막연하고도 먼 공간에 위치한 것처럼 상상하는 탓에, 그 시간이 이미 시작된 날과 관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ㅡ 혹은 우릴 먼저 부분적으로 차지하고 나서 그 후엔 결코 손에서 놓아주지 않는―이렇게 확실한 오후, 모든 시간표가 미리 정해진 오후에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달 동안 필요한 신선한 공기 전부를 마시려고 산책하기를 열망하면서도, 입고 나갈 외투나 우리가 부를 마부를 고르면서는 망설이고, 그런 후 합승 마차에 오르면 하루가 당신 앞에 온전히 놓인 듯 보이지만, 여자 친구를 맞이하려고 때맞춰 집에 돌아가기를 바라기에 하루가 짧다고 느끼고 다음 날에도 날씨가 좋기를 바라곤 한다. 그리하여 다른 쪽에서 당신을 향해 걸어오던 죽음이,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바로 그날 몇 분 후 마차가 거의 샹젤리제에 도착할 바로 그 순간을 선택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한다. 어쩌면 보통 때는 죽음 특유의 기이함 때문에 그 공포에 시달리던 이들은 이런 종류의 죽음에서 - 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과의 접촉에서 - 그것이 우리가 아는 일상의 친숙한 모습을 띤다는 사실에 오히려 어떤 안도감 같은 걸 느낄지도 모른다. 죽음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찾아오기도 하고, 건강한 사람의 외출길에 찾아오기도 한다. - P11~12

생루 어머니는 생루와 애인(라셸)을 헤어지게 했고 생루로 하여금 라셸을 잊게 만들려고 모로코로 보내버린다. 생루는 어느 날 짧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프랑스에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화자에게 전한다. 스테르마리아 부인을 만나야 하는데 자기 대신 파리에서 그를 만나 달라 부탁한 것이다(이것은 나를 잡아두기 위한 생루의 작전이었다. 생루는 여전히 라셸과 나의 사이를 의심하며 질투했고 그는 라셸을 여전히 자신에게서 떼어놓지 못했다). 

우리의 말과 생각을 닮지 않게 하는 것은 욕망 뿐이다. 시간은 촉박한데, 우리는 마음을 사로잡는 주제와는 전혀 무관한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벌고 싶어 한다. 입 밖에 내는 말에 이미 어떤 몸짓이 따를 때도 ㅡ 즉각적인 쾌락을 얻기 위해, 또 그 몸짓이 초래할 반응에 대해 느끼는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ㅡ 우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어떤 허락도 구하는 일 없이, 마치 그 몸짓을 하지 않은 척 가장하면서 얘기를 계속한다. - P74

알베르틴이 화자의 집에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더는 예전처럼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는다 느끼면서도 신체적 욕구를 넘기지 못한다. 화자는 이제 알베르틴이 자신에게 여자가 아님을 깨닫는데 그가 더는 붙잡아두기 어려운 여자가 아니며 금방 소유할 수 있는 여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여자를 소유한다는 고정 관념은 벗어던지시지!)
화자는 스테르마리아 부인에게 육체적 욕망을 느꼈고 불로뉴 숲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으나 거절의 편지를 보내며 바람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는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칩거하는 상황에서 생루가 자신을 찾아온다.
생루는 화자의 애정에 대한 갈증(?)을 조금은 이해했을 것 같다. 그는 부모님의 반대로 라셸과 억지로 떨어져야 했으니 말이다. 어른들이 원하는 스타일과 자식이 원하는 스타일은 왜 이다지도 다를까.

게르망트 부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때, 나는 마치 파브리스가 자신의 고모 집에 도착하면서 느꼈던 그 보랏빛 아름다움과, 모스카 백작에게 소개되었을 때의 그 기적 같은 일을 떠올리면서, 그녀가 가진 최상의 것을 내게 음미하게 하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금요일에 혹시 시간 되세요? 아주 작은 모임이에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파름 대공 부인께서 오실 텐데 아주 매력적인분이랍니다. 기분 좋은 분들과의 만남이 아니라면 당신을 초대하지도 않을 테지만요." - P110

게르망트 부인 댁에 초대에 응한 화자는 그 곳에서 많은 이들과 교류를 갖는다. 대부분은 귀족 가문들이 많은데 자신의 가문의 이력을 드러냄으로써 '나 이런 권위(뼈대) 있는 집안이야!' 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참석자들 대부분 자신의 가문 이력을 자랑하고(저 먼 곳까지 거슬러 가는) 거기에 물론 문학과 예술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급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설왕설래 논변이 이어진다.
유독 많이 거론되는 두 사람이 톨스토이와 바그너다. 바그너는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던 인물인 것 같다. 나는 그의 개인사는 별로지만 그가 관악기를 잘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톨스토이는 아직은 제대로 된 작품을 읽어보지를 못해서 언급하기가 좀 그렇다. '부활'만큼은 읽어보고 싶다.

게르망트 사람에게 있어(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존재란 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악의적인 말을 할 줄 알고 논쟁에서 이긴다는 걸, 또 그림이나 음악과 건축에 관해 상대방에게 맞서고 영어를 말할 줄 안다는 걸 뜻했다. - P217
"제가 맹세해요. 그들은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해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겨요. 그런데 실은 가진 의견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의 의견을 묻는 데 인생을 보내고, 다음에는 그 의견을 우리에게 다시 전해 주는 데 허비하죠. 그들은 기어코 이건 좋은 연주였다, 저건 좋지 않은 연주였다라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니까요.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테오도시우스의 동생이(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네요.) 한 오케스트라의 모티프에 대해 그게 무언지 제게 물었죠. 그래서 전 대답했어요."라고 공작부인은 반짝이는 눈과 아름다운 붉은 입술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아, 물론 그건 오케스트라의 모티프라고 불리는 거죠.‘라고요. 사실 그는 내 말에 만족하지 않았나 봐요. " - P468

이런 사교 모임이 화자에게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같으면 기가 빨렸을 것 같은데... 그는 몇 차례나 기회를 살피다 막판에 빠져나온다. 노르푸아 남작이 찾는다는 소식에 갔으나 '내 마음도 몰라주고 서운했어!'를 표현하는 듯 '내 말대로 따르지 않았던 너를 버릴 거야!' 계속 여지를 남기다가 결국 꼬리를 자르지 않는 모습이 웃펐다. 좀 애처롭기도 했고. 결국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무렵 화자는 게르망트 대공 부인의 초대를 받는다. 게르망트 대공 부인은 왕족에서 기원하는 배타성과 엄격함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왕족과 공작들만을 우선시하는 그런 사람이 자신을 초대하다니 화자는 도무지 믿지 못한다. 사교계 인사들은 대공 부부가 더 현대적이고 똑똑한 데다가 지적이라며 말들을 내놓으니 초대장의 주인을 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르망트씨 부부가 파리에 왔다는 소식에 화자는 일부러 찾아간다. 게르망트 사촌이 오늘 내일 하여 들여다보려고 한다는 거였다. 나는 대공 부인의 초대장의 진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있었다. 스완은 건강이 좋지가 않았다. 의사가 몇 달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도 뒷 시리즈는 스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프루스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잘 알고 있지 않으면 난해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숨겨진 의미가 많다고도 하는데 이야기 자체도 이해 못하면서 무슨 숨은 의미까지를 해석하겠는가. 내겐 무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물의 실재를 추구한다. 그러나 실재는 지속적으로 우리 곁을 빠져나가고, 온갖 시도도 헛되이 우리는 허무를 발견하고, 그러나 그 자리에 뭔가 단단한 것이 남아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던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인식하면서, 설령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옷이 의도적인 환상이라는 수단에 의해 그 믿음을 대신한다. -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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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6-30 01: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게르망트가에서의 오랜 대화는 저도 많이 지루했어요. 부르주아계급의 사람들이 끝까지 귀족 계급에 들어가려는 것도 이해가 잘 되지 않고요.
그 당시는 지금처럼 정보를 공유할 수 없던 시절이라 살롱이 출세를 위한 정보를 얻고 세상의 소식을 듣기 좋았던 곳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5권 마지막과 6권 초반, 할머니의 고통을 서술한 문장들이 저는 넘 맘에 와 닿았어요.

그나저나 혼자서 잃.시.찾 읽어 나가시는 모습에 감탄, 감동 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6-30 09:02   좋아요 1 | URL
저도요. 페넬로페님 마음과 딱 같아요. 부르주아 계급이 굳이 귀족 계급을 열망하며 그들에 합류하려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네요. 당시 중상류층은 그만큼 폐쇄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사교 모임에 굳이 끼여들면서까지 만남을 가지려 노력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할머니에 대한 서술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뒷 시리즈에서도 많은 죽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전조로도 읽히는 듯 합니다.
긴 시리즈라서 단 번에 읽어야 하는데 역시 쉽지 않은 책이라 한달에 한 권을 겨우 읽어내고 있네요. 페넬로페님이 꾸준히 응원해주셔서 힘을 내봅니다. 감사합니다.

미미 2023-06-29 2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렵고 알아야할 배경 지식도 많아보이지만 그럼에도 또 그래서 재독을 부르는 책이라는건 분명하네요. 다른 분들 리뷰만 봐도요ㅎㅎ 화가님 완독향해 가시는 길 응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30 09: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려워서 재독을 할 수밖에 없는 책인 것 같아요. 속에 담긴 의미까지 알려면 몇 번은 읽어야 가능한건지...ㅎㅎ 미미님 응원 고맙습니다^^

다락방 2023-06-30 0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왜이렇게 읽고 싶죠? ㅋㅋㅋ 부르주아들의 사교모임 같은 건 저랑도 거리가 멀고 그래서 아마 읽다가 어떤 지점에서 분노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되게 읽고 싶네요. 늙거나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고 또 한편에선 사랑하는 혹은 사랑이 식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 도전이 쉽진 않겠지만 도전해보고 싶긴 하네요.

거리의화가 님,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3-06-30 09:07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은 왠지 저보다는 덜 지루하게 읽으실 것 같아요. 사랑과 죽음이라는 테마가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는데 프루스트만의 세밀한 묘사로 표현되어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락방님도 이 책을 도전하시게 되실 듯!ㅎㅎ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3-06-30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해놓고 혼자 꾸준히 읽어가기 쉽지 않은데 대단하십니다.
살롱에서 하루에 일어나는 일을 이렇게 세세하고 길게 쓸 일인가 싶었습니다.
예민함이 그의 병인듯!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30 09:08   좋아요 1 | URL
올해부터 읽기 시작해서 한 달에 한 권 읽기를 놓치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입니다. 세밀한 묘사가 어쩔 때는 지치기도 하는데 이것이 또 프루스트 글의 매력이라 생각해요. 응원 감사합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2-2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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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안한 시기에는 늘 그렇듯 대립과 음모의 흔적이 없는 주말은 없었다. 전형적인 여름 날씨와는 대조적인 기사, 그러니까 "(미)군 전투부대는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선항으로 얼마나 빨리 이동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대기 상태에 있었으며 그 검증은 7월 1일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기사가 묻혀 있는 것을 주의 깊은 독자만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일본에 있는 미군 전투부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검증을 위해)경계 태세에 있었다. 이것은 우연일 가능성이 컸지만, 중국이 타이완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측과 관련된 것이었다. 6월에 세계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59만1000명이었다. 거기에는 미국 국내의 10개 전투 사단 36만 명과 가장큰 규모의 해외 파견부대인 주일미군 10만8500명이 포함됐다(독일에는 8만명이 파병됐다. 일본에는 4개 사단-제7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갑사단이 주둔했다. - P243




한국전쟁 발발 한 해 전 1949년 6월 무렵 38도선을 둘러싸고 수많은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는 한국전쟁의 개전 초 작전과 복사판이었으며, 시간만 다를 뿐이지 특징은 같았다. 1949년 북한은 전투를 벌일 준비가 덜 되어 있었지만 1950년은 그렇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1949년 전투는 남한 정부가 주도적으로 일으켰는데 이는 한국 정부 지도층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며 자신들의 이익과 영토를 지켜주길 원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과 애치슨은 타이완 문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로서는" 타이완 방위 계획은 없다 밝혔다. 흔히 애치슨 라인은 남한이 범위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으로 오해되어 스탈린이나 김일성에게 청신호를 켜주고 한반도를 분열로 몰고 간 외부적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본은 방어되며, 위협받는 그 밖의 국가(한국 같은)는 공격받을 경우 처음에는 스스로 방어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상황은 다시 평가될 것임을 암시한 것이었다(P70). 애치슨의 방위선은 정치와 경제적으로 "거대한 초승달 지대"를 만들어 일본부터 인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확보해 발전시키려는 구상이었다. 평양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믿었고 애치슨의 이런 의도는 북한 정권의 동요였다고 판단했다.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북 정치 지도자들의 회담을 촉구하는 발표를 하면서 6월 19일 38도선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으며, 8월 초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실시해 평화통일을 이루고 해방 5주년 기념일에 새로운 통일 국회를 소집하자고 요구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한의 무소속 의원들에게 특별성명을 발표해 호소하면서 여운형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조선 민족의 애국자"라고 불렀고, 김구가 암살된 것을 애도했으며 김규식의 통일 노력을 칭송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의 복구를 요구했다. 무초는 북한이 이런 요구와 관련된 선전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말하면서, 그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이며 "아직도 38도선의 철폐를 갈망하는 남한 여론 대부분과 국회의 "혼란스러운 자유주의 세력"에게는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지방의회가 구성될 가능성은 없겠지만, 한국 전역에서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는 "전면적 내전의 전초단계"가 될 수도 있다고 무초는 지적했다. - P160~161

북한은 6월 19일 남북 의원의 회의를 개최하고 8월 15일까지 남한 국회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에 통합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이는 선전 책략이자 공격을 은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5월 30일 총선 결과 이승만 세력이 아닌 중도파와 온건 좌익이 승리했기 때문에 북한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조만식과 남로당 지도자인 김삼룡,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내건다. 하지만 교환 방식에 합의를 찾지 못했고 6월 23일 북한은 6월 26일 정오에 교환하자고 제안했다(교묘하다). 이건 대놓고 전쟁 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준비를 착실히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장제스가 직면한 난제는 타이완섬을 지키려는 국제협력주의자들과 총통을 옹호하는 반격론자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공군력은 나라를 구할수 있는 만능의 수단으로 생각됐기 때문에 국민당은 중국 본토의 연안 도시들을 폭격하고 남한에 공군기지를 확보해 만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미국 정치를 조종해 자신의 정권을 보호할 수 있는 지원을 얻는 것이었다. 미 해군은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 P190

타이완은 설탕, 바나나, 원자재를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기계와 기관차, 옷감 등을 수입하며 1948년 무렵부터는 미국의 태평양 영해에서 전략적 가치이자 경제적 효용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1950년 초 장제스는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하이난섬은 4월 셋째 주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고 워싱턴은 지원을 끊으면서 국민당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장제스는 쿠데타/암살 위기에 직면하고 필리핀과 한국에 망명을 신청하기까지 한다. 미국은 중국 정책이 위기에 빠졌다 판단했고 6월 초 타이완 문제는 유엔 위원회로 넘어간다. 하지만 6월 22일 무렵 맥아더는 타이완이 연합국에 갖는 가치가 크기 때문에 장제스의 권한은 유지시키고 타이완은 유지되어야 한다 주장한다. 러스크 장관은 장제스에 대한 쿠데타 계획을 애치슨에게 제안했고 트루먼에게 그 사안은 상신되었다. 트루먼이 결정하기 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 정권은 한국 전쟁으로 존속될 수 있었다.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저자는 세 가지 모자이크를 제시한다. 세 가지 모두 음모론(또는 가설?)이며 소련과 북한이 침공을 은밀히 준비했다는 설, 남한이 이유 없이 기습했다는 설,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을 이야기한다.

널리 제기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 지도부의 파벌 다툼 때문에 침공했다는 것이다. 박헌영과 그 세력은 남한에 있는 자신들의 기반을 잃을까 우려했고 전면 공격을 일으키면 대중이 호응해 봉기해 공산주의의 승리를 신속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런 가설은 CIA, 김일성 지도부, 일본에서 작성된 한국 관련 자료 그리고 미국의 중요한 일부 학자가 동의한 특이한 사례다. 그 가설의 장점은 6월이라는 시점에 공격이 시작된 까닭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한에 있던 유격대가 1950년 봄에 정말 소멸되고 거기에 토지문제가 더해졌다고 가정하면, 그 가설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 P116

또 다른 학설은 북한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에 통일을 추구하려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지금 독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묘한 시점이라는 요소가 있다. 몇 년 동안 북한은 이승만이 "북침해 한반도를 강제로 통일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1945~1946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요구와 1948년 5월 총선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분단주의가 아니라 북침의 기반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언제나 해석했다.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50년 5월에 처음으로 북한 문서는 이승만이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 이후 상투적 표현으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은 전쟁 이전 북한의 표현에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앞의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어떻게 남한이 한반도의 항구적 분단을 바라는 동시에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 P120

6월 25일 이른 아침 전쟁이 서부에서 동부로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첫 번째 모자이크, 다시 말해 잠들어 있고 준비를 갖추지 못한 남한을 38도선 전역에 걸쳐 갑자기 전면적 침공을 개시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조지프 대리고는 전투가 시작됐을 때 38도선에 있었던 유일한 미군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포성에 잠을 깼다. 초기 전투에 관한 그 밖의정보는 모두 한국군 정보원에서 나왔으며, 1949년 여름에 얻은 증거가 보여주듯, 그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조차도 전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몇 시간에 걸쳐 번져나갔으며, 한국군 제6사단은 적어도 하루 정도 먼저 경고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문산·춘천이나 동해안에서 그리 좋은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남한 부대들이 저항으로 보기 어려운 반격을 하거나 싸움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은 개성과 의정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북한이 투입한 병력도 군사전략 측면에서 보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존미어 샤이머는 치밀한 논리를 전개한 저작에서 전격전술을 사용할 때 "전략적 돌파"를 성공시키려면 공격 측의 병력이 3대 1 정도 우세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6월 25일 이후의 전투 과정은 고전적 전격작전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투 데이터의 순서를 따라가보고 증거들에 살펴보더라도 이는 비슷한 규모이거나 더 큰 규모의 적을 상대로 진행된 전격전이었다. - P296~297

국내와 국외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승만과 장제스는 봉쇄를 먼저 실시한 뒤 반격을 추진하기를 바란 반면, 애치슨은 한국과 타이완을 모두 방어하기로 결심하고 장제스를 축출하려고 했으며 봉쇄 지역 주변에서 공산 세력이 먼저 공격하기를 바랐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이처럼 긴장되고흥미로웠다. 1950년 여름 헨리 월리스는 딘 애치슨에게 분노가 담긴 서한을 보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애치슨은 격렬히 반대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무의식적 실언 가운데 하나가 담겨 있었다.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라면 거기에 아무 의문을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 공산군은 도발을 받기는 했지만 경고도 정당한 이유도 없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증거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이 먼저 공격했음을 여전히 입증하지 못한다.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면 다음 두 사항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첫째,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그런 도발을 이용해 남한을침략할 태세를 갖췄다는 명백한 증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의침공을 정당화해주는 한국적 맥락일 뿐이다. 둘째, 정말 남한이 38도선을넘어 공격했다면, 1년 전 한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것을 감안할 때 도발은북한에 동조하는 내부의 적이 일으킨 자작극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침공은 북한이 일으킨 것이 된다. - P320

북한이 명분 없는 공격을 시작했다는 판단은 한반도가 놓인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바로 2년 전 38도선을 "국제적 경계선으로 만드는 데 유엔이 이용됐다(이승만을 포함한 어떤 한국인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5년 전 미국은 고대부터 이어진 통일국가를 분열시키기 시작했고 소련의 큰 도움을 받아)때 이른 "냉전"을 심화했으며, 반동·친일 세력을 후원해 한국인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국무부의 정책에도 역행하면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이런 일이 모두 이뤄지면서 한국인들이 한국을 침공하는 최악의 역설이 가능하게 됐다. 진실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는도발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P341

저자는 세 모자이크 중 두 번째 모자이크의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고 이야기한다. 2권 첫번째에서도 의견을 냈지만 어느 것도 100% 증명할 수 있는 설은 없다고 생각한다.

1950년 6월 시작된 전쟁은 1953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스탈린이 더 이후에 죽었다면 미소 지도부의 교체가 늦어져 전쟁이 더 길어졌을지 모르겠다. 한반도의 내전은 군인들 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의 사상이 잇따르고 주요 기반 시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분단 체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뼈아픈 현실이다.

이 책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그 부분은 세밀한 반면 중국, 특히 소련에 대한 검토는 상대적으로 많이 약하다. 그래서 소련에 대한 입장은 빈 공간이 많은데 소련의 기밀 문서는 나중에 해제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이조차 여전히 기밀 자료들이 있을 것으로 판단).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한국 전쟁 책들로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내부적 입장을 이만큼 잘 다룬 책은 드물 것이다. 궁금한 독자들은 일독을 권한다.

『타임』지는 소련이 "미국의 시간"을 잘못 계산했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36시간 동안 ‘침묵‘했던 것이었다. "미국의 행동을 예측했다면 소련은 말리크를 유엔으로 보내 미국이 주도한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 소련이 저지른 최악의 실패였다. 달리 말하면 스탈린은 은밀히 침공을 계획했고, 물질적으로 소련을 능가하는 초강대국과 세계 전쟁을 벌일 위험을 각오했으며, 전략과 전술 모두 차례로 큰 실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의 전략에서 남한이 지닌 가치와 전쟁이 일본과 서방의 재무장에 줄 영향 그리고 미국의 참전 의지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는 시간조차 잘못 계산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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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26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빠른 시간에 대작을 완독하셨네요! 거리의화가님 완독 축하드리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3-06-26 18:20   좋아요 1 | URL
가능한 이달 내에 읽으려고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희선 2023-06-29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북이 갈라지고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이제는 통일을 바라는 사람은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은 정보가 별로 없기도 하네요 북한은 남한 정보를 얻는다고도 하던데... 한 나라가 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죠 오랫동안 따로따로였으니... 나라를 빼앗긴 것도 나라에 힘이 없어서였고, 독립을 하고 다른 나라 간섭을 받았네요 그런 게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둘로 갈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립운동 한 사람이 중국쪽 일본 미국으로 나뉘었으니... 전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29 09:15   좋아요 1 | URL
통일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좀 어색하게 느껴지죠. 남한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어색한 듯 합니다. 한국이라는 국명이 자연스러워졌고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한을 굳이 알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북한학을 전공한다든지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한도 많은 것을 과거 자신들도 희생했던 전쟁인만큼 이제는 더 신중해지면 좋겠네요.
 
한국전쟁의 기원 2-1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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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세계는 추상적이기도 하고 국내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건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 사건들은 권력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이용된다. 외부의 위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구 전체의 적과 전면적 대결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 패권국이 중요하지 않은 여러 주변부에 이처럼 관심을 쏟고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세계는 대체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친 현실과 갈등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위기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재료를 폭발시킨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 뒤 "외교정책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국내에서 전개된 갈등의 결과이며,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기본적으로 추상적 형태로 남아 있다. 또한 외국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한 나라 안의 권력 균형은 행정부 쪽으로 기울며, 행정부는 그 위기를 이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갖게 된다. - P52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이 되었다. 세월이 이리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체제에 종속되어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의 종속도 그렇고 일본은 한국 전쟁으로 큰 이익을 얻었으며 중국과 타이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설들이 존재했다. 어떤 가설도 완전한 진실은 없다고 생각하며 추측성이 존재한다 여긴다. 다만 더 가능성이 높은 설이 무엇이냐를 두고 셈할 뿐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내전이자 혁명전쟁이었다고 해석한다.

나는 '반공 세대'는 아니었고 그 끝 무렵, 그리고 이제 더는 통일이라는 것이 요원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걸쳐 있는 세대인 듯하다. 교련 수업을 고등학교 때 받으면서도 이걸 왜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통일이 막연해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던 것 같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를 바랄 뿐 한 체제, 한 국가로의 통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나가듯 북한을 안전하게 여행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뿐이다. 죽기 전에 가능이나 할런지...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총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권의 내용은 앞선 1권과는 성격이 다르다. 1권은 한반도 내부에 포커싱을 맞추어 전쟁의 기원을 살펴보았다면 2권은 마치 조감도로 외부에서 한반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성격이 엿보인다. 첫 번째 권은 총 2부로 1부는 미국에 초점을 맞추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 이후 미국을 둘러싼 세계와 미국의 외교적 변화를 살펴본다. 2부는 한국 내부의 상황을 살펴보되 외국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1권과 2권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아야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47년은 어떤 해였는가. 이 시기 트루먼 독트린이 실시되면서 한반도 뿐 아니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이는 1950년 초반까지 그 흐름이 이어진다.
모스크바 3상회의 후 한반도의 신탁 통치 논의를 두고 여러 차례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이 무렵에는 남한과 북한의 체제가 이미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영향이 여전하던 남한에서 미국의 힘은 막강했을 것이므로 미국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 외교정책은 1947년 전후부터 1951년 사이에 크게 변화한다. 미 외교가에는 크게 세 집단이 존재했는데 첫 번째는 '국제협력주의(제국주의)'다. 이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세계에 적용한 것으로 세계시장 체제를 규제 관리하고, 문호 개방 정책 또는 "광대한 지역" 정책에 규제를 가미한 것이며, 자유무역과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개방성을 추진하고 장벽을 제거하며, 경제 침체와 다루기 힘든 나라들을 길들이는 데 필요한 규제를 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봉쇄'다. 국제협력주의와 민족주의가 타협한 것으로, 자본주의 지역에서 자유무역과 개방된 체제, 세계경제의 동력으로 일본과 서독의 부흥을 꾀하고, 방어벽을 세워 지상군과 관료기구를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격 '으로 국제협력주의에 반대하고 봉쇄에도 불만을 가진 세력으로 반공 기치를 내세우고 군사 부문을 강화하는 것이다.
1943년부터 1947년 이전까지는 한반도에 다국적 신탁통치를 기치로 한 '국제협력주의' 외교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신탁통치는 한국인에게 인기가 없었다. 1947년 이후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봉쇄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타이완의 안보에 위기가 드리운데다 한국전쟁 발발 후 가을 무렵이 되면 미 외교는 반격 정책으로 돌아선다.

트루먼 정부에 대표 중요 인물 중 딘 에치슨은 누구인가. 그는 트루먼독트린과 마셜 플랜의 핵심 인물이었고 1947년부터 1950년까지 한국 정책을 전반적으로 설계하였다. 그는 군부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미 점령군의 봉쇄는 애치슨의 구상에 영향을 주었고 1947년 이후 남한이 트루먼독트린에 사실상 포함되게 만들었다.
에치슨에 대한 뛰어난 묘사에서 I. F. 스톤은 1952년 "미국에서는 공직자가 역사와 인류에 품위 있는 동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라고 썼는데, 애치슨은 바로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
냉전의 열기로 뒤틀린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만 애치슨은 실제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거칠고 거만한 표현을 쓰자면 그는 "개명한 보수주의자"로 보였다. 전전戰前 애치슨이 재무부 관료로 워싱턴에 처음 나타나자 뉴딜 정책 지지자들이 그를 "모건사에서 파견된 사람", 월가에서 보낸 트로이의 목마, 거대 은행들이 침투시킨 첩자라고 비난했다는 사실을 매카시즘이 휩쓸 때 누가 기억할 수 있겠는가?
봉쇄 정책은 미국 영국 서유럽 일본은 지키되 산업적으로 낙후되고 공격에 취약한 지역, 특히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부패한 아시아의 국지전이나 혁명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에치슨을 비롯한 미 관료들은 아시아 대륙의 여러 지역을 일본의 부흥과 연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했지만 주변국에 전쟁이나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일본의 군사력을 제한적으로 증강하는 것이 고려되었다.

1949년 후반 트루먼과 맥아더는 충돌한다. 미 국내에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고 개인과 사회는 서로 대립했으며, 정치, 경제와 세계에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져가야할 역할이 무엇인가 갈등은 폭발하였다. 고립주의자이자 반격 세력은 아시아가 유럽보다 덜 중요하고 통제하기 어렵지만 개방되어 있어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으로 보았다. 팽창주의자는 아시아 중 중국에 주목했다. 이 중 반격 정책을 지지한 맥아더는 누구인가.
맥아더는 아시아를 새로운 국경으로 봤다. 그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극동에서 반격 구상을 추진하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으나 그의 지지자는 대부분 우파 고립주의자들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1951년 한국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령부를 떠날 때까지 한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간절히 바랐다. 중국의 거대 재벌과 국민당 인사들은 깊은 교류 관계가 있었고 중국 로비를 위해 상당한 액수가 미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지 매카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이용하여 매카시즘 광풍을 만들어냈다. 그는 성(동성애), 공산주의를 증오의 뿌리로 매도했으나 사실은 미국의 뿌리에 존재하는 미국의 정치였다. 적색공포가 외면으로 표출되었을 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메산골과 빈민가, 서부의 소박한 개신교적 정신(좌익은 대중 영합주의적 진보적이며 우익은 무지함)과 동부의 남보스턴 정신을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비유하자면 후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하 묘지로, 동부 상류상회의 두 영역(자유주의자와 월가)에 있는 경박하고 건망증 심한 유력자들에게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왔다. - P178
중국의 공산화, 미국 내 팽창주의자에 반하여 미국 내 공산 세력은 좌불안석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요 언론 기업주도 매카시에 협조했다.
매카시는 1950년 3월 13일 오언 래티모어를 공격한 뒤 3월 21일 "소련의 간첩 두목"을 적발했다고 말하며 그를 지목했다. 표면적으로는 래티모어를 말했으나 궁극적 목표는 애치슨이었다. 트루먼을 제외하면 그 무렵 장개석은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기댈 자가 미국 내에 없었다. 5월 매카시는 한국 정책과 관련하여 "애치슨-래티모어 추축"을 공격하면서 애치슨을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남한 체제의 권력 핵심층은 부를 가진 우익 세력이었고 이들은 경찰은 물론 군정 사령부, 일선 현장 대부분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 자체로 안정을 바랐으나 일반 대중들은 통일에 관심을 두었고 분단 정책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수많은 청년 단체를 비롯하여 광신적 우익 대중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파시즘화한 한국 정치를 이끌었다.
우익 단체는 조선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광복청년회, 이승만의 대한독촉청년총연맹 등이 있었고 조선민족청년단이 미군정이 자금줄을 댄 공식 기관이었다. 청년 단체를 조종한 것은 이승만, 이범석, 조병옥, 장택상 같은 우익 인사들이었고 경찰은 우익 청년들을 후원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좌익의 탄압과 색출에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은 미국인이나 미국에서 여러 해를 보낸 측근 인사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친일파들을 기용하고 그들에게 로비 자금을 받으면서 면죄부를 주었다.

1947년 제주 4.3이 발생하고 1948년 여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한 정부는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되어 경찰과 청년 단체들을 동원해 이들을 색출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북한을 "괴뢰"라 명칭하라 지시하고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으며 공식적인 좌익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은 유격대 활동에 영향을 끼쳤고 제주와 전라도 중심이던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격대는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고 `촌락을 공격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유격대 관련 사건은 1949년 4월부터 10월까지 증가하다가 11월부터 점차 감소하였다. 미국은 다른 어느 곳보다 전라남도가 남한에서 가장 좌익적인 도라고 판단했는데 이는 빨치산 활동이 지리산에 집중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전라남도 유격대는 1950년 초 대규모 토벌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지하로 숨거나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1950년에는 유격대 주요 활동지는 경상북도였다. 우거진 지형 덕분에 은신이 쉬워서 경찰들도 많은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이외에서 유격대는 강원도와 충청도 영동군 정도에서 활동이 있었다.

북한은 인민위원회를 기반한 정부를 구성하고 인구의 12~14퍼센트(성인 인구의 1/4 이상)를 포괄하는 대중 정당인 로동당을 만들면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 지지층을 확보한다. 북한은 빈농을 포용하여 프롤레타리아로 개조시켰는데 이들이 군 단위의 공무원이나 장교도 꿈꿀 수 있게 함으로써 김일성의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만들었다. 당의 지도부는 항일 유격 투쟁에 활약을 했던 이들로 채워졌다.
1947~1948년 소련과 북한의 전략적 이익은 일치했다. 이 시기의 시작부터 중국 국민정부군은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은 거슬리는 뾰루지를 짜듯 북한을 압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8~1949년 중공군과 북한군이 국민정부군을 동북 지역에서 몰아내면서 이제 짜낼 뾰루지처럼 보인 것은 남한이었다. 스탈린은 그것을 대단히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봤을 것인데, 현지 정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P476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북한 외교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소련에 의존해야 했다면 이제는 중국의 전쟁에 한 몫을 거들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사회주의 동맹을 얻은 셈이었다. 1948년 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외부의 공격이 있을 때 서로 방어해준다는 내용의 협정을 소련과 체결했고 1950년 중소 간에도 이런 협정이 맺어졌다. 반면 1949년 3월 김일성은 경제, 문화, 군사 협정을 맺고 돌아왔으나 소련에 유리한 조건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만주에서 일본 및 중국 국민당에 맞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중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국은 한국이 중국의 경세론과 문화를 모방하고 중국의 적에게 영토 점령을 허용하지 않는 한 한국의 문화적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선의의 무시"를 해왔다. 


2-2권은 1950년 이후 전쟁의 서막과 종막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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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26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해 하던 책이었는데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현대사
에도 관심이 많아, 일독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6-26 18:19   좋아요 1 | URL
네.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전쟁과 현재 체제의 기원을 엿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 페미니스트 법 이론
낸시 레빗.로버트 베르칙 지음, 유경민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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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스트 법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법 이론은 공통적으로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바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observation)과 나아가야 할 목표(aspiration)다. 먼저 페미니스트는 현재 남성이 누리는 권력과 특권은 남자들만이 이 세상을 만드는데 참여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페미니스트 법학자는 남성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문명의 법을 만드는 데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 역사에서 남자가 만든 법이 남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다음으로 모든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평등을 달성하는지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 - P28


대한민국 국민 중 헌법을 읽거나 공부해 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 법관이 되기 위해 필요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법적 싸움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사회에 어떤 문제적 사건이 벌어져서 법리 해석에 따른 논쟁이 있을 때 해당 조항을 확인하지 않을까.


나도 그 대부분의 사람에 속한다. 솔직히 법이라는 것을 몰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거 월급을 못 받아서 고통 받던 일과 더 과거로 가면 집안에 돈 때문에 타인과 분쟁이 생겼을 때 몰라서 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법을 어설프게 알거나 제대로 모르면 당하는 일이 사실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전세사기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건설사, 공인중개사 등은 법의 허점을 노리고 덤벼드는데 계약자는 그 빈틈을 제대로 알지 못해 당한다. 언제까지 각자도생이라고 그냥 넘길 것인가. 법의 구멍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법의 개정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편 윤리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가부장제에 의해 생성된 것이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법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져 여성들에게는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거 미국 여성들이 법적으로 어떤 권리를 위해 싸워왔는지 여성들의 지난한 소송(법적 싸움)의 역사를 알려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훓어볼 수밖에 없는데 1장에서는 때문에 페미니즘의 역사와 정립된 이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페미니즘 이론이 실제 어떻게 법으로 만들어지는지 맥락화하여 보여준다. 


특히 동등대우 이론(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과 문화 페미니즘(남녀 차이와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대우는 달라야 한다)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기 때문에 실 사례에서도 논쟁이 많았던 이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 페미니즘과 지배 이론(여성과 남성은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은 서로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배 이론은 특히 가부장제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다양한 법적 주제를 담고 있는데 개인별로 관심이 가는 부분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아무래도 직업과 고용, 교육, 섹스와 폭력에 특히 주목하여 보았던 것 같다. 


몇 년전 남성과 여성의 급여율에 대한 비교 리포트를 기사에서 보았었다(아마 주기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질텐데). 그 비율이 충격적이었던 것인지 지금도 그 비율이 기억이 난다. 69%였던가. 

그러니까 남성이 100만원 받을 때 여성이 69만원 받는다는 이야기다. 

전문대학이긴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입사를 했다.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하루 빨리 취업을 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입사하자마자 내 급여가 얼마였는지 지금도 기억나는데 솔직히 창피해서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문제는 초봉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매년 연봉이 오를텐데 나는 너무 더디게 올라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남성과 초봉이 얼마나 차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다고 하더라도 남성들은 희한하게 나중에 보면 비율이 나와 다른 것이다. 

아무튼 나는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얼마 오르지 않았다(천 단위 올라가는 것이 왜 그리 오래 걸리는지...). 안 그래도 박봉인데 나는 늘 중소기업, 그것도 잘 나가는 회사가 아닌 곳들만 전전하며 다녀서인지 회사가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임금이 성별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방끈의 길이에 따라, 전문성(스킬)에 따라, 태도 등 여러 가지 평가 기준이 있겠지만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굳이 이걸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내가 남자였다면 좀 더 나았을까 싶기도 했다. 

직업군 별로 여성의 비율이 높은 직업이 있고 남성의 비율이 높은 직업이 있다. 물론 꾸준이 이 비율의 차이가 줄어든다지만 여전히 교사, 간호사 등은 여성의 비율이 높고 트레이너, 군인, 지게차 기사, 철강/기계 종사자 등은 남성의 비율이 높다.

애초에 이런 직업들은 남성 또는 여성만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소수자들의 경우에도 이로 인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직업 간의 장벽이 사라지고 넘나듦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직업적인 차별도 줄어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미국 사례이다보니 재미는 덜하다. 그러다보니 한국 법 사례는 어떨까를 계속 생각하며 읽었던 것 같다. 관련 책이 있을 지는 모르겠고 없다면 이런 책이 나와주면 좋겠다.

법은 실생활에 적용되는 만큼 중요한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보면서 법적 권리의 싸움에서 패소/승소하는 사례가 누적되어야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여성 문제를 묻는다는 것은 겉보기에 중립적인 듯한 법률이 어떻게 성편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데이터를 사용하는, 어느 정도는 실증적인 평가이다. 여기서 특정한 법률이 여성의 경험을 고려하는지, 법규범이 암묵적으로 하나의 성에 우호적인지, 사회적 관행이 불법적인 성적 고정관념을 조장하는지에 관해서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젠더의 영향을 평가하는 사례에는, 특정한 고용주에 의해 승진된 남성과 여성의 숫자를 세어보는 것,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더 아이의 양육권 분쟁에서 이기기 쉬운지를 기록하는것, 학교 수업에서 소녀와 소년의 대우에 관한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포함된다. 조사 결과는 항상 여성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은데, 남성 역시 법에서 성별 편향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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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6-20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의 구성 비율이 높은 직종일 수록 성별 급여 차이가 좀 더 컸던 걸로 기억이 되네요?
지금도 그러한가 보군요?ㅜㅜ

거리의화가 2023-06-21 10:11   좋아요 1 | URL
직업별 성별 비율에 대한 구분이 없어져야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제가 다닐 때보다는 여성들도 임금의 수준이 더 나아졌겠지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차이는 존재하는 듯해서 씁쓸하네요.

다락방 2023-06-20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연하게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구체적 사례들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달리 생각하는 경험을 이 책을 읽으며 하고 있어요. 읽어두면 좋은책인 것 같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전 최근 회사 너무 바빠 스트레스 가득이라 좀처럼 진도가 안나가네요. 빨리 따라갈게요!!

거리의화가 2023-06-21 10:18   좋아요 0 | URL
네.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아서 도움이 되더라구요. 단편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론에 따른 다양한 시각을 보여줘서 좋았어요. 한국에 관련된 법 사례에 대한 책도 나와주면 좋겠습니다ㅠㅠ
다락방님 많이 바쁘실텐데 건강 잘 챙기시고 완독도 응원합니다! 화이팅!
 
토지 17 - 5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7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17권은 1941년 무렵 즈음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1880년 후반부터 시작했던 시기가 어느덧 40 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조선이 식민지가 된 지도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1941년 무렵은 일본은 장개석의 원조 루트를 방해하기 위한 작전이 진행중이었고 오랜 전쟁으로 전쟁 물자도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미국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단계에 와 있었기에 미국이 참전하느냐 마느냐 사람들은 기대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40년 안에 큰 전쟁이 두 차례가 벌어지고 국가 간 전쟁은 부지기수인 상태였다. 전쟁에 끝이란 있는 것인지 공포를 넘어선 권태가 몰려오던 시기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국내에는 창씨 제도가 시행되었고 주요 신문이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었으며 반전운동단체라는 빌미를 구실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어졌다.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이 만들어지면서 농촌은 군량이 끊임없이 반출되었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군수품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 무엇보다 사상범 보호관찰령의 강화로 조금이라도 건수를 잡으면 잡아가는 현실이 되어 버린다.

"파괴란 새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휴머니즘을 결여한 새 질서란 허구이며 허구에서 시작되는 파괴란, 남 뿐만 아니라 자신도 무너지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지. (...) "
평소 환국이답지 않게 그의 어투는 매우 신랄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민족성에다가 못 박는 것은 반대다.
체제에 따라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보편성 아닌가."
"민족성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말한거야. 인간의 보편성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일본의 역사는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해왔다. 그렇게 본다. 나는 민족성에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길들여진 상태를 말했을 뿐, 그러니까 그들 스스로도 피해자인 셈이지."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했다. 그게 뭔데?"
"우라시마 타로의 다마테바코처럼 속이 텅텅 비어 있는 신도(神道), 혹은 신국사상과 현신이라 부제가 붙은 만세일계世一系)는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와 진실, 또는 사실은 그들 형편 따라 변화무상이지. 결국 그것들은 일맥(一脈)으로써 변하건 변치 않는 것이건 허구다 그 얘기야." - P22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휴머니즘(인간애)이 없다면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질서가 보편성을 띤 가치인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자국만의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아니면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부심이라면? 이를 위해 타인을 짓밟고 전진하는 행위는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17권에서 세 가지의 큰 사건이 있었다.

송관수가 죽고 길상은 모임을 해체하기로 결심한다. 길상은 독립 자금 강탈 사건을 기획했으나 이는 명백히 실패했다(이 때문에 본인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으니). 확보한 자금은 국외로 나가기는 했으나 비중 있게 쓰이지도 못했다. 평사리에 우가(家)가 미꾸라지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다가(자식 하나는 군대에 나가고, 다른 하나는 면서기에 진출. 그러니 안하무인이지!) 최참판 가(家)도 무한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수감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며 무의미한 침체 상태에서 조직의 멍에를 벗겨주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체념하고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하는 자조감이었달까.
길상은 최참판 가(家)의 일원이 되면서 어쩌면 스스로의 입지를 넓힐 수 없는 처지임을 한탄하기도 했을 것 같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서희, 환국이, 윤국이 등이 위험해지니까.

홍이의 아내 보현이는 아파서 국내에 들어갔다가 금을 구입해 들어온다. 그런데 이 사건이 경찰에 발각되어 홍이 내외는 곤욕을 치른다. 홍이는 처가와 썩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산소를 보러 오거나 할 때 아니면 들어올 생각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국내에 압송되고 처가집과 직면해야 했다(아마도 불편했겠지).
홍이는 40이 다 된 나이이지만 공적인 외부 활동(독립 운동) 이외에는 대처를 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보현이와 아이들에게도 밖에서 보면 잘하는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서로 간에 끈끈한 정은 없다. 아내는 장이와의 일 이후에 늘 전전긍긍해했는데 홍이가 좀 더 세심하게 대처했다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것 같다. 딸인 상의와의 대화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상의가 아는 언니가 간호부가 되겠다고 하는데 나도 하고 싶다고 말하니 발끈한다. 왜 발끈하는지 설명이라도 하던가. 차라리 김두수가 여자들을 팔아 넘기는 일을 한다고 말하는 누나의 직설적인 말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물론 상의는 당황하지만). 감정이 앞서서 욱하다가 (누적되어)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되니까.

인실과 오가타가 드디어 만난다. 지난 번에 하얼빈에서 인실이 탄 마차를 발견하고 오가타가 얼마나 미친 듯 쫓아갔던가. 결국 잡지 못했지만 인실은 그가 자신을 보았음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번 만남에서 오가타는 인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과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왔음을 알게 되곤 혼란스러워한다. 오가타는 세월이 흘렀지만 예전과 별반 다름이 없다. 좋게 말하면 이상주의자고 나쁘게 하면 현실감이 부족한? 인실은 진실을 말하고 오가타에 대한 애정의 말을 던진다. 오가타는 분노의 말을 토로하고 헤어지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인실은 오가타를 잊지 못했구나... 해방이 되어 둘은 해후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국적이라는 장벽은 너무나 크다. 조선이 해방한다면 일본은 패망이니까 말이다.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타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 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타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 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 심중에 회한이 없겠소? 종속을 그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변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자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노예근성, 나같이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는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 적이 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 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겠소. 친구지." - P198

오가타와 조찬하가 적이 아니고 친구라고 말하는데 나는 희망을 찾고 싶으면서도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인실과 오가타도 마찬가지의 복잡한 감정을 느꼈듯이 말이다.

마지막 5부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등장 인물들은 과거를 자주 회상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일명 "옛날이 좋았대이." 다.
내가 생각에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조선인은 식민지민이 되었기에 위치성에서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식민지 정책의 변화, 외부 상황에 따라(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그 비애가 더 커졌을 뿐이다.
물론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서 이득을 본 많은 이들은 상실이 아니라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마음 속에는 일말의 비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지난 권에서 송관수가 호열자로 타국에서 쓸쓸하게 죽고 이번 권에서는 봉기 노인이 죽는다. 같은 사망이라도 반응은 달랐다. 한 사람은 타국에서 쓸쓸히, 다른 한 사람은 고향에서. 한 사람은 호열자로, 다른 한 사람은 자연사로. 한 사람은 동학, 형평사를 비롯 독립 운동에 노력했던 인물,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이 땅에서 먹고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만큼 둘을 놓고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송관수는 너무 이르게 갔음을 한탄하고 봉기 노인은 살 만큼 살았다는 식이다(물론 그만큼 오래 살기도 했다). 송관수는 출신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펼친 행동들은 그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기에 존경을 받았다. 반면 봉기 노인은 주변 사람들을 시기하고 괴롭힌 적이 많았으므로 호평을 받지 못한다.
두 사람의 살아온 궤적을 보면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었다. 주어진 조건과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 개인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물며 당시 상황에서 반기를 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송관수의 죽음은 안타까웠으나 그의 삶은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 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 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 있던 간도 땅에서 홍이는 감수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 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복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 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 값도 안 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 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정면돌파를 했든 측면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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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6-15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때 송관수나 봉기 노인처럼 산 사람으로 나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이 평범하게 살려고 했지만, 시대 때문에 그러지 못하기도 했겠습니다 소설에서는 한국말로 하지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고 한국말을 한 게 들키면 잡아가기도 한 듯한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람은 예전에 잘 살지 못했다 해도 예전이 좋았다 할지도 모르죠 지나간 일이기에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걸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5 09: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40년대 초니까 창씨개명 시행이 되고 이미 교육 체계는 일본어가 국어처럼 쓰이던 때죠. 조선말 하면 혐오와 괄시를 받는 그런 때! 내가 잡혀가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덤탱이 씌우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이 좋았다고 한 이유는 그때는 독립운동의 불꽃이 남아 있을 때고 그에 참여한 인물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동네도 북적였고 활기가 있었을 때였는데 이제는 친일파들 빼고는 몇몇 남지도 않은 데다가 잡혀가지 않기 위해 쉬쉬하는 그런 분위기? 라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