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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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오대 십국의 혼란기를 겪은 후 송 왕조가 들어섰다. 송은 이전 왕조와는 색채가 확연히 다르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제도 등을 많이 이어받았고 사회적 분위기 등도 비슷했으나 송나라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송도 초반까지는 당 말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에는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는데 이는 유교적 국가 체제로 변화된 것이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된다.

송대 왕조는 공자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조상 숭배와 국가 제사와 같은 유교적 규범을 이상화하여 국가 정교로 받아들였다. 송대 이후로 변화한 유교 중심의 사회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문화적 기반 특성을 유지하는 견고한 중심이 되었다. ‘유교국가‘라는 용어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 또는 유토피아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상고시대에서 차용해온 유교적 통치의상적인 구조와 혼동하면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지성의 전통을 이끌어온 사상과 지배적인 행정 체제인 관료정치가 역사의 무대에서 긴밀히 결합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고대 경서에 뿌리를 둔 유교는 도덕, 즉인, 의, 예, 효, 충 그리고 무武보다 우선하는 문의 원리와 의례등에 기초한 윤리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교양 있는 상류 계층, 즉 계층적인 구조의 사회에서 다른 모든 계층이 제공하는 봉사를 필요로 하는 지식인 지도층의 행동지침으로 간주되었다(P68).

송은 외교 정책으로 '공존'을 택한다. 중국은 자신의 우위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형제애'라는 허구에 합의하는 것을 생각해냈다. 요, 서하와의 맹약으로 평화를 가장하고 있었으나 11세기에 들어오면 송나라는 군비 지출이 급증하여 재정적 위기가 초래되면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된다. 인종 때 범중엄 등이 1차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인종이 개혁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고 보수파들이 개혁을 반대하면서 실패하였다. 그 이후 개혁이 지지부진하다가 신종 때 왕안석이 경제, 군사, 교육 등 전반적인 개혁을 들고 나온다. 하지만 이 때도 반대파들은 왕안석의 개혁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다며 그의 사퇴를 이끈다. 이후 조정 대신들은 서하에 대한 대규모 전쟁을 강행함으로써 정국을 바꾸어 보려고 했지만 전쟁에 패했다. 개혁파 사이의 투쟁은 북송 말까지 계속되었으나, 왕안석의 뒤를 따른다고 선언한 자들도 왕안석만큼 넓은 식견과 수양을 갖지 못했다. 휘종은 선친 신종과 형 철종의 뒤를 이어 철저한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휘종은 채경蔡京(1046~1126)이나 동관(1054~1126)과 같은 용렬하고 부패한 관리와 환관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했으며, 이들이 이끄는 사이비 개혁당이 원한 것은 고작해야 황제를 즐겁게 해주어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는 것이었다(P129).
1123년 송과 금은 국가 간 계약을 하며 평화 체제를 유지하는 듯 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금은 1125년 송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한다. 1127 년 개봉과 북송이 붕괴된 이후, 희생양을 찾던 남송의 학자들은 왕안석을 실패한 개혁을 주도한 단독 인물로 지목했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 후의 사이비 개혁가들이 보인 떳떳치 못한 행동들까지 왕안석과 연관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P123). 왕안석의 개혁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할 필요가 있겠으나 이후 북송이 무너지므로써 그는 북송의 멸망의 희생양이 된 측면이 컸던 것 같다.

1127년 송 왕조의 붕괴는 북송시대의 끝을 의미했다. 화북 지역을 금에게 빼앗긴 후송 조정과 행정 부서들이 서둘러 남쪽으로 떠나면서 송 왕조 역사의 두 번째 단계, 즉 1279년까지 152년간 지속되는 남송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송과 남송이라는 용어는 물론 송대에는 사용되지 않은 역사학적 명칭이다. 사건을 목격한 동시대 사람들 중에는, 1127년 송 왕조의 와해로 송의 연속성이 훼손되었고 왕조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는 견해를 일부 보이기도 했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한 왕조가 서한(전한)과 동한(한)으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송의 역사도 1127년을 기준으로 하여 양분된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P139).
1130년 금 기병대가 항주를 함락하고 압박을 가하자 송 정부는 고종과 신하들은 도주하여 소흥에 자리를 잡았다. 금의 기병대는 중원을 거듭 습격했으나 송의 지방군이 금의 군대에 끊임없이 대항하면서 고전하게 된다. 이 때 악비를 비롯한 유명한 장수들이 주전파로 활약하였다(주화파 중 유명한 이는 진회가 있다. 그는 악비 독살을 명령하였다). 금은 송을 정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평화 회담을 벌여 결국 1141년 양국 간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로써 송은 회수를 경계로 인정함으로써 중원과 호북성의 두 개의 주를 잃게 되었다.

송대에는 불교와 도교의 영향 아래, 유학 사상가들이 고대의 중국사상을 재편하고 ‘도학道學‘으로 알려진 철학 체계의 기초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결코 한가지의 철학학파였다고 할수 없는 이 사상적 운동은 서구 사회에서 대개 ‘신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일차적으로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수립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신유학은 합리주의적 인식론이나 근본주의 도덕론 같은 중국적인 가치 체계를 규정하고 재평가하였으며, 이것이 공공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까지도 송문화의 중심축으로 작용했다(P193). 신유학 사상가들은 전통과 개인의 사회적 책임 문제와는 무관하게 개인만을 위한 독립적인 철학이나 구원을 위한 교리를 창조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동에 꼭 필요한 현실적인 답을 제공해주고자 노력했다. 유교 사회라고 해서 유학만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사회로 오해하기 쉬운데 기존의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유학'이 아니라 '신유학'이라고 따로 명명했다 생각된다. '신유학'은 남송 시기 제대로 자리를 잡는데 국가 이념 뿐 아니라 사회 구조의 틀을 전반적으로 바꾼다.

송 왕조는 교육과 시험을 통해서 자기 영속이 가능한 관료 혈통을 이루는 문신 가문의 시대가 되었다. 지배층은 특권을 누렸으나 관료 집단 대열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 시험이 유일한 길이 되었다. 송사회에서 결혼은 조상 숭배를 이어가는 것을 최고의 의무로 삼는 합법적인 후손을 생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송대의 혼례 의식에는 기원전 주 왕조시대의 유교와 가족 연대를 구축하여 특권과 영향력 또 경제적 번영을 확보하려는 사대부 계층의 이익이 융합되어 있었다. 송에서는 지속적이고도 의식적으로 올바른 행동의 모범을 탐구하던 송대 사대부들의 정신이 상고시대 주나라의 경전에 서술된 소박한 매장 관습을 부활시켰다. 고대의 문화를 존중하는 송대인들의 관념이 신유학 사상운동의 지지를 받아 타당하며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한족 중국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더욱 강화되었다(P302). 송대에 시는 어떤 상황과 변화에 내재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였고, 위태로운 정치 영역을 포함한 인식과 존재의 모든 방면을 다루었다. 다양한 유형으로 훌륭한 시를 지을 만큼 재능이 있다는 것은 뛰어난 정신세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송대 작가들에게는, 내면세계의 본질이 시에 응축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본질은 외부세계와 자연의 현상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도 복잡다단하게 연관되었다(P308). 시는 당 이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송 시대부터 과거 제도에 '시'가 과목으로 선정되면서 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본다.

송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상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특히 개봉은 국제적인 상업 도시였다(대규모의 교외, 24시간 깨어 있는 도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동네들, 도시 의식을 지닌 주민들을 특징으로 한 개방 도시). 송대의 뛰어난 경제적 성취는 몇 가지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조세 등 기상의 농업 경작지가 크게 증가한 것이 송대의 번영을 보장해준 요인이었다. 토지 등록은 과세 호구에 대한 개혁과 함께 추진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자영농이 송대 농업의 중추가 될 수 있었다. 농업 경제의 번창에는 모든 종류의 기술적 개선, 특히 새로운 도구의 사용이 필요했고, 이것은 다시 더욱 효율적인 채광 방법과 철, 구리의 높은 생산을 요구했다. 이러한 금속의 이용이 쉬워지면서 막대한 규모로 화폐를 주조할 수 있었다(P427). 양송 시대에는 상업, 금전대출, 조세제도 그리고 대외 정책에도 현금 통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P431).

근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송대 사람들은 중세의 다른 사회에 비하여 보기 드물 정도로 사적 영역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천자에게 순종적인 신민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이론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 만큼 잘 알려져 있는 규칙과 제재를 따랐으며 이러한 규율은 유교적인 행동 규범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주택 건축과 의상에서의 기호부터 위생, 오락, 자선의 범주까지 사적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는 방임적 태도가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몽골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중국인이 누리던 자기결정적인 생활방식의 편안함은 끝나버렸다(P503).

남송 시대부터 이후 제국시대의 여성들은 제약을 받고 가내 공간에 갇혀 있게 된다. 이제 완벽한 여성상은 남자보다 작고 날씬하고 부드럽고 연약하며, 집안에 머물면서 부모와 남편, 가족들에게 봉사하고 어린 자녀들을 교육하는 여성이 된다. 이상적인 상류층 남성상 역시 송대를 지나면서 변화하여 호리호리한 체구와 여성적으로 나긋하게 행동하는 세련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P482~483). 이를 비롯하여 유교가 중국의 발전을 방해한 족쇄였다는 부정적 평가는 19~20세기 들어 강해졌는데 이는 고려 말, 조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나도 유교 이념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사회가 경직화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은 앞으로도 더 자료를 찾아 보면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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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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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보다 확실히 더 내 스타일이라는 느낌이 왔다. 1950년 제2의 페미니즘 물결 이후의 기록을 되짚으며 여성, 문학, 정치 키워드를 맥락으로 연결짓는다. 특징은 미국을 중심 지도로 위치 시켰다는 점이다. 최근 여성 인권 후퇴의 우려에 대한 고찰을 위해서라도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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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05 22: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오오. 저 100자평 7일까지 쓰려고 열심히 읽고 있는 중…

책읽는나무 2023-08-05 23:23   좋아요 2 | URL
헐...완독하고 백자평 써야 했던 건가요?? 오.....😯
7일이 마감입니다.
파이팅~^^

잠자냥 2023-08-05 23:24   좋아요 3 | URL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고 싶어져서 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8-06 17:55   좋아요 2 | URL
앗 저는 7일까지 읽을 자신은 없어서...ㅎㅎ 잠자냥님 표 리뷰 기대되네요^^ 화이팅입니다!

독서괭 2023-08-06 20:22   좋아요 3 | URL
잠자냥님 파이팅!

잠자냥 2023-08-07 00:04   좋아요 4 | URL
이틀만에 다 읽은 나 칭찬해요! ㅋㅋㅋㅋ 여러분 이건 작품 많이 안 읽어도 쭉쭉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거리의화가 2023-08-07 08:18   좋아요 4 | URL
잠자냥님 엄지척!!!

책읽는나무 2023-08-07 08:21   좋아요 3 | URL
와...잠자냥은 한다면 한다.ㅋㅋ
완독 축하드리고, 무엇보다도 작품 많이 안 읽어도 된다니 넘 반갑습니다요^^

독서괭 2023-08-06 20: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우리는 12월에 읽어요.. ㅋㅋ

거리의화가 2023-08-07 08:18   좋아요 2 | URL
네^^ 사전에 독서 좀 하고 읽으면 더 맛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토지 20 - 5부 5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20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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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권부터 20권까지 근 1년여 기간 동안의 독서 대장정을 끝마쳤다. 뒤로 갈수록 대강 훑어 읽은 느낌이 들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뭉클함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작가의 필력과 내공은 역시 대단했다 싶다.


20부는 무엇보다 조선인이면서 앞장서서 조선인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게 만든 장본인이 심판을 받아서 후련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 한 사람의 무게가 징용 인원 몇 십명 또는 몇 백명의 무게와 어찌 견줄 수 있겠는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이지만 사람은 당장 내 앞가림을 위해서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서 내 동포를 팔아넘기는 유혹에 굴복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유혹을 이기고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인류는 여전히 나, 개인, 그리고 자국의 이익에 우선하여 돌아가는 모습만 보아도 이것은 역사를 넘어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강두매와 홍이는 만주에 온 영광과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이상현 씨 말이야. 인생이 시궁창인 걸 모르겠어?
하는 일 없이 땀 흘려 만들어낸 곡식이나 축내고."
"나도 이선생을 곱게 보는 사람은 아니다. 자네 말대로 나 역시 프롤레타리아니까. 하지만 인간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그것에는 동조 못 해! 인민은 일하고 밥 먹는 기계 아니야!"
"기계가 되어야만 미래가 열린다. 그때까지 고생을 해야 해."
"인간은 기계 부속품같이 그렇게 해체되는 게 아니야. 이 만주 벌판 눈구덕 속에서 수많은 우리 조선인들이 죽어갔지만 그들은 심정적으로 죽어갔어. 고귀한 마음으로 죽어갔단 말이야!"

강두매와 홍이는 한 바탕 설전을 벌인다. 송영광은 진심으로 싸우는 줄 알고 놀랐고 홍이는 별 일 아니라 했지만 왠지 슬퍼보였다.

"서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강두매는 깨끗하다. 깨끗한 정열이지. 사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친구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있어. 획일적인 그것이 맘에 안 들어. 주의와 주장이 어떻게 다르다고 하더라도 결국 정치나 조직은 다수를 통제하는 것, 보다 이상적으로는 전부를 통제하는 것 아니겠어? 나는 정치나 조직 같은 게 생리적으로 싫어. 당장 시급한 것은 내 터는 찾아야 하고 억압하는 왜적은 물리쳐야 하고, 싫고 좋고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저는 뭡니까? 돼지군요."

영광의 '돼지' 타령은 이상현과 이어진다. 머리도 몸도 굴리지 않고 그저 한탄하며 사는 삶, 본인을 비하하는 동시에 나아가 이상현도 그런 사람의 일종이라는(강두메의 주장처럼)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시대 룸펜들을 비하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영광은 뒤에 정석과 이상현을 만난다. 송관수의 아들인 송영광을 보면서 이상현은 그가 자신과 비슷한 동족임을 느꼈는지 동질적인 감정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송영광도 전쟁이 끝나더라도 조선으로 돌아갈 지 어떨지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상현과 같은 방향일지 모른다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사람도 그 감정도 정리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떠밀려 만주로 온 송영광, 그리고 몇 십년째 만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상현, 둘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만큼은 공통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조병수가 지리산 절로 아들인 남현과 함께 발걸음을 했다. 길상이 그린 관음탱화를 볼 겸 스님이 된 소지감도 만날 겸 해서다. 둘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본다.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시간이 그리 허술했다 할 수 없고..." - P96

아비인 조준구가 없었다면, 불구의 몸이 되지 않았다면 병수는 더 행복했을까. 병수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가 비록 신체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로운 신체를 가졌어도 그 아비는 남을 해치고 욕을 먹는 비루한 삶을 살았다면 그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그런 망나니 같은 아비를 탓하지 않았으며 아비가 돌아갔을 때도 진심으로 울던 이가 그였다. 누구나 조병수처럼만 산다면 이 세상은 희망적일텐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홍이는 한복이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홍석기라는 청년을 만난다. 그는 낯선 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징용 갔다가 어느 할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도망할 수 있었다고 자신의 처지를 술술 내뱉는다.

"할머니가 따라왔기 때문에 별 탈이 없었지요. 부처님한테 너가 무사하기만을 빌겠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그 할머니 얼굴이 바로 부처님 같았십니다."
"세상에 일본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다 있나? 하 참."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동쪽을 보고 절을 합니다. 할머니한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장가든 지 한 달도 못 되어 잡혀간 홍석기. 징용에서 도망나온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일 것이겠지만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감행했을지, 그리고 끝내 징용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다치거나 죽어서 돌아온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면 뼈아프고 숨이 가쁘다. 그런 그의 사연을 듣고 홍이는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홍이는 그 때문에 곤욕을 겪는다. 조그마한 일로도 정치, 사상범으로 몰아 잡아 가두던 시절이었으니 오죽했을까.


김두수는 만주를 떠나 서울로 아예 들어온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더 이상 만주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대받으며 살아온 것이 어디 나라 탓이오? 아버지 죄업 탓이지."
"반가에 태어나서 시정잡배만큼의 대접도 못 받고 능멸과 하시 속에서 살았다. 왜 그랬지? 어떤 놈은 만석 살림으로 떵떵 거릴 적에, 나라도 살인했겠다! 하고말고, 아버지 잘못인가? 이놈의 땅, 세상 때문이지."
"딱하요.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김두수는 애초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라곤 한복이 밖에 없었다. 결국 김두수는 한복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부모를 두었지만 김두수(김거복)와 김한복의 삶은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한 사람은 세상 탓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감내하고 욕 안 먹으며 살아왔다. 한복이는 형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데 이 감정은 독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명희가 마음을 먹고 내 놓은 거금을 둘러싸고 운동 세력 간에 충돌과 갈등이 발생한다. 충돌의 중심에는 이범준과 몽치다. 이범준은 극렬한 사회주의자인 반면 몽치는 그런 이념과는 거리를 두었고 어찌 보면 신분제에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도 있음에도 그 세계에 부합하며 사는 측면이 있다. 이 무렵 지리산에는 이범준을 받들며 모여든 많은 청년들이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동학의 교도라 할 수는 없지만 계급 타파에 대해서는 이론보다 심장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이 땅 식으로, 말하자면 토종, 순종이라 할 수 있는데 자네는 그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결국은 민족주의 얘기로군요. 그것은 반통합적이며 세계혁명으로 가는 길에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혼돈하지 말게."
"이 말 저 말 할 것 없고,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무너져 가고 있는 일본, 느슨해진 후방, 이때야말로 우리가 나설 때 아닐까요?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해외파들에게 국내에서도 체면이 서는 일이며 민심에도 크게 고무될 것입니다. 앉은뱅이 늙은이도 아니겠고 암죽 받아먹는 갓난아기도 아니겠고 이 산에 있는 사람들은 피 끓는 청년들입니다. 넘쳐나는 힘, 열정에 불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 생광스러운 힘을 산속에 사장하려는지 도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력들이 범상하지 않은 여러분께서 이렇게 무기력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여러 번 실망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지금 살아 있습니까? 죽어 있는 것입니까? 왜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까?" - P384~386

이범준의 말은 과격하지만 분명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방향이 다른 것일 뿐인데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보면서 해방 후 극렬한 좌우대립의 미래가 그려지는 건 비단 나뿐이 아닐 것 같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독립이 되면 우리 나라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미래상을 떠올려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테지. 눈을 뜬 몇몇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많았고 사회주의 안에서도 분파들이 많았다. 나는 이런 잠재적인 불안 요소를 작가님께서 미리 배치해두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은 났지만 뒤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이 많다. 주갑이 아저씨는 살아 계시는건지, 인실이는 어떻게 되었으며 오가타와 쇼지와는 만났는지, 윤국이와 성환이는 살아 돌아오는건지 등등... 그러나 그 많은 인물들의 소식을 다 담기란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은 상상하는 묘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독자의 기호에 맞게 그들의 미래가 어떠했을지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어쨌든 긴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뭔가 시원하기도 한데 섭섭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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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8-01 1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권 완독하시다니 대단합니다~!
오늘부터 토지의 화가로~!!
이런 엄청난 장편을 완독하셔서 시원섭섭하실거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3-08-02 09:07   좋아요 1 | URL
토지의 화가ㅎㅎㅎ 새파랑님이 그동안 응원해주셔서 더 지치지 않고 잘 읽을 수 있었다고 하면 오버인가요?ㅋㅋ 작년 8월부터 읽기 시작했었더라구요. 딱 1년만에 완독의 결실을 맺을 수 있어 뜻깊습니다. 이 책은 재독, 삼독해도 좋을 책임에는 분명한 듯 싶어요. 감사합니다^^

은오 2023-08-02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누가 저한테 토지 읽었냐고 물어보면 아니 안읽었지만 내 친구분들 중에 토지 완독하신 분이 있어! 하고 대답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축하드려요 화가님!! 1년의 대장정 마무리라니 크!!! 😆

잠자냥 2023-08-02 22:0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아 나도 그래야겠닼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8-03 09:34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막판에는 초반 회상 장면 나올 때 사건의 기억이 가물거릴 지경이었다는ㅠㅠ 두 분 모두 감사합니다^^
 
김성곤의 중국한시기행 2 : 강남·유배길 편 김성곤의 중국한시기행 2
김성곤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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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시기행 2권 후속편은 '강남' 지역과 '유배길' 편으로 묶여 있다. 1편에 이어 읽었더니 자연스레 흐름이 이어져서 좋았다. 오히려 1편을 묵혀두었던 게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강남'은 대체적으로 장강 중하류 지역의 강소성 남부, 절강성 북부, 안휘성 남부, 강서성 동부 일대를 가리킨다. 넓은 평원과 나지막한 구릉이 주를 이루는 이 지역은 장강과 전당강, 파양호와 태호와 같은 수자원이 풍족해서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했다. 남송 때 강남의 경제력이 급상승하면서 자연을 조경적 차원에서 경영할 수 있었던 까닭에 자연과 인문이 결합된 최고의 풍경이 만들어졌다(P5). 중국의 당송시기 역사를 읽고 마침 이 책을 읽으니 인문, 역사와 지리가 결합되어 활자가 눈 앞의 현실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예로부터 강남 지역은 물이 많아서 수나라 이전까지는 오히려 문제가 되었는데(범람, 질퍽한 땅) 대운하 건설을 시작하면서 관개 용수가 원활해져 농사 짓기에 좋은 땅이 된다. 게다가 남송 시기가 되면 남쪽으로 도읍이 옮겨져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다.

작가가 방문한 지역 중 인상적인 곳은 첫 번째로 항주다. 정치적 격변기에 호북성 황주에서 5년의 생활을 마치고 복권되어 항주 태수로 오게 된 소동파는 항주를 최고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병원을 만들고, 상하수도 시설을 개량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사업에 나서는 등 여러 부문에서 탁월한 행정가의 면모를 과시했는데, 특히 그가 힘을 쏟아부었던 건 서호를 준설하는 일이었다. 서호는 오랜 세월 퇴적된 토사로 인해 수심이 얕아져서 걸핏하면 물이 범람하여 백성들에게 큰 시름을 안겨 주었다. 소동파는 조정에 특별 지원금을 청하고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서 항주의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서호를 대대적으로 준설했다. 그리고 퍼올린 엄청난 분량의 흙과 모래로 서호를 남쪽으로 가로지르는 제방을 쌓았다. 제방 중간중간 여섯 개의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어 호숫물이 서로 통하게 만들었고 길을 따라 버드나무와 복숭아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품종의 나무와 꽃을 심어서 서호를 감상하는 최고의 산책로로 만들었다(P23~24). 지금의 항주의 모습은 소동파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백성들을 생각하는 관리의 마음이 절로 느껴지는데 오늘날의 관광객도 소동파에게 감사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소동파의 음식 하면 다양한 것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동파육이다. 동파육은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탄생했다. 이 요리를 만들어 먹을 때만큼은 힘든 유배 생활 중 유쾌함을 느끼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가 황주에서 지은 시 <식저육食猪肉>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동파육 레시피가 적혀 있다.

솥을 깨끗이 씻고
물은 조금만 넣고
땔감을 덮어 불꽃이 일지 않게
절로 익을 때까지 뒤적이지 말고
불 시간 충분하면 절로 맛나게 된다네
황주는 돼지고기가 좋은데
값은 흙처럼 싸다네
귀한 사람들 먹으려 들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요리법을 모른다네
매일 일어나 한 그릇 뚝딱
내 알아서 배부르게 먹나니 그대 상관 마시게

돼지고기 값이 흙처럼 싸다니 그만큼 돼지가 풍부하다는 것인가. 일어나자마자 뚝딱 하기에는 기름기가 많을 것 같은데 상관 말라고 하는 걸 보면 동파육에 소동파는 진심이었던 것 같다.
항주에 동파육이 유명해진 것에는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다. 서호 준설이 되자 가난한 백성들이 너도나도 값싼 돼지고기를 들고 와서 태수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람에 관저에는 돼지고기가 가득 쌓이게 되었다. 소동파는 5년 전 황주 유배 시에 개발한 동파육을 백성들에게 다 돌려보내 맛보게 했다. 동파육을 맛본 사람들은 그 맛에 환호했고 마침내 거리 음식점에는 '동파육'이 상품으로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했다(P34).

두 번째로 꼽을 곳은 황산이다. "오악에서 돌아오면 산이 보이지 않고, 황산에서 돌아오면 오악이 보이지 않는다(오악귀래불간산五嶽歸來不看山, 황산귀래불간악黃山歸來不看嶽)." 흔히 오악을 묘사할 때 웅雄, 험險, 준峻, 유幽, 수秀라는 글자를 써서 "동악 태산은 웅장하고, 서악 화산은 험하며, 중악 숭산은 높고, 북악 항산은 깊고, 남악 형산은 수려하다"라고 구분하는데, 각각 모두 '천하제일'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오악도 황산 앞에서는 그 존귀한 지위를 순간 잃어버린다. 앞서 황산을 예찬한 이 유명한 구절은 본시 명나라의 유명한 여행가 서하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유복한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평생 천하 명승을 찾아 떠돌며 방대한 여행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황산의 최고봉은 연화봉蓮花峰이다. 중심부의 큰 봉우리를 여러 작은 봉우리들이 겹겹이 옹위하여 솟아오르는 형세인데, 한 송이 연꽃이 하늘을 향해 막 피어나는 것 같다 해서 연화봉이라 멋지게 부른 것이다(P102). 다종다양하고 수려한 봉우리와 그 봉우리마다 기이하게 자리잡은 소나무가 구름의 출몰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연출하여 황산의 또 다른 별칭은 '운산雲山'이다.

선계의 연뿌리를 뉘 심었는가
대지는 이곳에서 연꽃을 피웠네
곧게 솟아 하늘의 이슬을 마시고
높이 손들어 오색의 노을을 받드네
사람들 향기의 나라에서 맴도는데
길은 연꽃 송이로 난간을 세웠네
연밥은 어느 해 맺으려나
은하수 가는 뗏목으로 쓸 수 있을 것을

선근수수종 대지차개화
仙根誰手種, 大地此開花。
직음반천로 고경오색하
直飮半天露, 高擎五色霞。
인종향국전 로차옥방차
人從香國轉, 路借玉房遮。
연자하년결 창명대범사
蓮子何年結, 滄溟待泛槎。
- 청淸, 매청梅淸 <제화연화봉題畵蓮花峰>

중심 봉우리를 둘러싼 봉우리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정말 신선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묘한 풍경이었다. 더군다나 황산에는 비래석이 있다. 장방형의 거대한 돌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절벽 가까이에 자리한 평평한 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 있다. 기울어진 각도로 서 있는 품이 금세라도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를 기세라 날아서 온 돌, 비래석飛來石이란 이름이 붙었다.


중국 지역의 많은 곳 중 가까우면서도 풍경이 뛰어나고 먹거리가 많은 지역인 강남은 한국 여행객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다 가보지는 못하더라도 소주와 항주만큼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


유배길 편은 호남성, 광서장족자치구, 광동성, 해남도를 아우르는 중국 남부의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배지를 대상으로 한 여정이다. 중국의 유배지는 주로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지금도 가기에 쉽지 않은 길을 당시에 가는 길은 무척이나 어려운 여정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배길 아닌가. 언제 돌아올 지 모를 슬픔의 길을 따라가자니 고개가 숙여졌다.

첫 번째로 꼽은 곳은 영주다. 영주는 호남성을 흐르는 주요 하천인 상강과 소수瀟水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호남 지역을 소상瀟湘이라 이름하는데, 풍경이 빼어나고 운치가 넘쳐서 당송 이래로 그림의 단골 소재로 등장했으니 이른바 '소상팔경瀟湘八景'이다. 소상팔경은 그림의 소재 뿐 아니라 시의 소재로도 널리 활용되었는데, 원나라 희곡 작가인 마치원이 소상팔경을 노래한 <수양곡>이라는 작품이 유명하다. 팔경 중에서 '소상야우( '소상야우'는 상강과 소수가 합류하는 영주 평도를 가리킨다)'를 노래한 작품이다.

어둑한 배 불빛
나그네 꿈도 깨어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 부서진다
외로운 배는 오경을 넘고 고향은 만 리 밖인데
떠나온 사람 가슴 적시는 눈물 같은 빗줄기
어등암 객몽회 일성성적인심쇄
漁燈暗, 客夢回, 一聲聲滴人心碎。
고주오경가만리 시리인기항정루
孤舟五更家萬里, 是離人幾行情淚。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가 희미한 등불 너머로 바라보는 빗줄기는 가슴 시린 눈물이다. 유종원은 이 곳 영주에서 10년 간 유배 생활을 했다고 한다. 유종원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세족 집안의 자제였다. 스물한 살 진사 시험에 합격한 뒤 정치혁신 운동을 주도했다가 환관과 번진의 눈 밖에 나 실패하였다. 개혁을 이끈 왕은 폐위되고 함께 이끌던 세력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예부원외랑이라는 높은 직급에서 하루 아침에 사마라는 낮은 직급으로 강등되어 갔으니 그 신세가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 유종원은 영주에서 우계愚溪라는 곳을 사랑하여 시냇가 부근에 살림집을 짓고 지냈다. 우계라는 이름도 유종원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윽이 흘러가는 시냇물 우계를 보며 마음이 좀 안정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우계는 비록 세상을 이롭게 할 능력은 없지만, 만물을 거울처럼 비추어 맑고 투명하고, 음악 소리처럼 높게 울리며 흐른다. 그래서 어리석은 나를 즐겁게 해주나니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비록 세속에 부합하지 못하나 글로써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으며 세상 만상을 다 끌어안을 수 있으니, 어느 것도 내 붓끝을 벗어날 수 없다. 내 어리석은 문사로 어리석은 시내를 노래하리니 혼연일체의 무아의 경지에서 노닐게 될 것이다.
- <우계시서> 중

우계시서를 통해 유종원은 어리석은 자신의 삶이 나아갈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유종원은 정치적으로 실패하여서 비록 이곳에 내려와 있으나 우계처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겠다는 다짐이 엿보인다. 그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다. 오히려 그의 글쓰기는 유배 생활로 깊어진 면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전체 시문 540편 중에서 영주 시기에 쓴 것이 무려 317편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벼슬에 매여 있던 내 인생
행운이런가, 남만 땅 멀리 유배 왔네
한가로이 농부들과 이웃하며 살아가니
간혹 산속의 은자처럼 보인다네
새벽에 밭을 갈아 이슬 풀 뒤집고
한밤중 노를 저어 시냇가를 울리네
오고 가며 사람 하나 만날 일 없어도
길게 노래하면 초 땅 하늘이 푸르러진다네

구위잠조루 행차남이적
久爲簪組累, 幸此南夷謫。
한의농포린 우사산림객
閑依農圃隣, 偶似山林客。
효경번로초 야방향계석
曉耕翻露草, 夜榜響溪石。
내왕불봉인, 장가초천벽
來往不逢人, 長歌楚天碧。

'시냇가에 살다'라는 뜻의 <계거溪居>라는 시이다. 비록 멀리 유배를 왔으나 농부나 은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의연함을 엿볼 수 있다.

유배길 중 두 번째로 꼽은 곳은 광동성에 있는 혜주다. 혜주는 주강의 삼대 지류 중 하나인 동강이 흘러가는 곳으로 현재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경제 중심 도시 중 하나다. 당송 시기에도 광동성의 중심 지역이었고 거대한 물류의 집산지였다고 한다. 혜주는 아열대 지역이라 사계절 초목이 있고 맛좋은 과일이 풍부한 곳이다.

혜주와 인연을 맺은 이는 소동파다. 혜주는 특별히 인상적인 장소가 있다기보다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더 재미 있었다. 소동파는 '여지'라는 과일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과 그의 여인 3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동파가 여지에 관해 남긴 유명한 시가 있는데 <식여지食荔支>다.

나부산 아래는 사계절 봄날
노귤과 양매가 차례로 새로 익어가네
매일 여지 삼백 알을 먹을 수 있다면
영원히 영남 사람 되는 것도 사양치 않으리라

나부산하사시춘, 노귤양매차제신
羅浮山下四時春, 盧橘楊梅次第新。
일담려지삼백과, 불사장작령남인
日啖荔支三百顆, 不辭長作嶺南人。

여지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매일 300알을 먹을 수 있다면 영남 사람이 되겠다는 소리가 나올까. 대단한 사랑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하루에 300알을 먹으면 당수치가 너무 높아지지는 않을까나.

이제부터는 소동파에 대한 여인의 이야기다.
소동파는 19세 되던 해 사천성 미산 남쪽 청신에 살고 있는 왕씨 집안의 16세의 왕불王弗과 결혼한다. 왕불은 아름답고 총명한데다 시서에도 능해서 천제 시인인 동파도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곤 했다.
왕불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어서, 매사 넘치는 자신감으로 속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는 동파를 늘 걱정하며 시시로 적당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손님들이 동파를 찾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왕불은 병풍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고 손님이 떠난 후에 적절한 평을 내려 동파에게 조언하곤 했다. 지혜롭고 신중한 왕불의 내조 덕에 동파는 개봉에서 직사관이라는 내직을 맡게 되었다. 동파의 명성이 이제 뻗어나가는 시기 왕불은 돌연 병을 얻고 만다. 결혼한 지 11년,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 일곱 살 어린 아들을 남기고 갔으니 동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동파는 왕불을 고향에 묻고 10년이 지나 이런 사를 지었다.

십 년 세월 삶과 죽음으로 갈라져 아득한데
생각지 않으려 해도 잊기 어려운 사람
천 리 길 떨어진 외로운 무덤
그 처량함을 뉘에게 하소연하랴
설사 서로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나 있으랴
얼굴은 세상 풍파에 시들고
머리는 서릿발이 하얘졌느니

십년생사량망망 불사량 자난망
十年生死兩茫茫, 不思量, 自難忘。
천리고분 무처화처량
千里孤墳, 無處話凄凉。
종사상봉응불식 진만면 빈여상
縱事相逢應不識, 塵滿面, 鬢如霜。
- <강성자江城子>

부인과 사별한 지 10년 세월이 지났으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던 소동파는 꿈속에서 부인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 아득한 그리움이 듬뿍 느껴지는 사가 아닐 수 없다.

동파가 다시 부인으로 맞아들인 사람은 왕윤지王閏之라는 여인이다. 왕윤지는 전처인 왕불의 사촌 동생이였다. 동파와는 열두 살 차이가 났는데 왕윤지는 왕불처럼 시서를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했다. 살림살이를 잘 돌볼 줄 알아서 동파는 늘 고마워했다고 한다. 동파의 정치 생활의 부침과 영욕을 함께했던 것은 왕윤지였다. 황주에서 유배 생활을 함께 했고, 항주 태수, 병부상서, 예부상서 등 고위 관직을 섭렵했던 시기에도 함께 지냈다. 왕윤지는 결혼 25년, 향년 46세, 동파 나이 58세 때 숨을 거두었다. 동파는 그녀를 추모하는 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함께 가자 했거늘, 고향 전원으로 함께 돌아가자 했거늘
그대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났구려
누가 문 앞에서 나를 반겨주리오
누가 밭으로 내게 참을 보내주리오
끝이로구나, 무엇을 어찌하랴
눈물도 다하여 눈이 말라 붙었구나
낯선 도시에 그대를 임시로 안장하려니
나는 참으로 박정한 남편이구나
내 그대와 무덤을 함께하리니
이 언약을 이루어 그댈 다시 만나리다

8년의 세월이 지나고 소동파는 세상을 떠난다. 그 때 곁에 있었던 여인은 시첩 왕조운이다. 동파가 왕조운을 알게 된 것은 항주에서 통판 벼슬을 할 때였다. 당시 왕조운은 관청에 소속된 악기樂妓였다. 연회 자리에서 동파는 가무에 뛰어나고 시서에도 밝은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소동파는 왕조운을 기적에서 빼내어 자신의 몸종으로 들였다. 왕윤지는 비록 현숙한 내조자였지만 소동파의 예술적 동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한계를 절감하던 왕윤지가 왕조운을 첩실로 들이기를 적극 권하였다. 왕조운은 예술적 동지로 동파의 삶의 한 축이 되었다.

59세 소동파는 광동성 혜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만년의 고단한 귀양살이를 함께 한 왕조운에게 종종 아름다운 시를 써서 고마움을 표현했다.

나는 백발의 창백한 얼굴, 정히 유마거사의 경지라
빈 승방에 천녀가 꽃잎을 뿌려도 아무렇지도 않다네
붉은 입술 사랑스럽고 빛나는 머리 탐스럽다네
이렇게 천생 만생 인연이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
착한 일 좋아하는 심성은 모습 속에 절로 드러나는데
한가한 창가에서 단정하게 앉아 불경을 읽네
내일은 단옷날, 난초꽃 엮어 그대 허리춤에 채워주고
좋은 시 찾아내어 그대 치맛자락에 써주리라
- 소식, <증조운>

왕조운은 30대 초반, 불행하게도 혜주에 도착한 이듬해 말라리아에 걸려 동파 곁을 떠난다. 소동파는 그녀의 소원대로 서호 주변 산기슭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었다.


여름의 뜨거움을 녹여버릴 정도로 즐거웠던 한시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여름 더위의 한복판에서 멋드러진 풍광을 마주하고 한시를 읊으니 또 하나의 좋은 피서법이 되었다. 역시 더위 쫓는 데는 여행기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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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7-31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급관심이요
어릴때 한시 읽을때랑 느낌이 너무 다른 순간이 많아요.
중국어로 읽는 분들도 꽤 되시더라구요.
거기에 이 책까지 읽으면 너무 좋을듯 하네요

거리의화가 2023-07-31 15:1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말처럼 어릴 때 이 책을 만났다면 결코 지금처럼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시기 역사를 알고 인물을 알고 만나면 더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삶의 깊이가 좀 쌓이고 만나면 더욱 좋을 책입니다.
마치 여행하는 느낌으로 만났어요. 중국어로 한시를 읊으며 책을 읽으면 한층 더 좋겠죠. 직접 이 책을 들고 그 장소로 가고 싶더라구요!ㅎㅎ

미미 2023-07-31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남에 저런 풍광이 있나보군요? 중국에서 사진에 나온 저런 곳... 사는동안 꼭 가보고 싶어요!
올려주신 한시들 아름답네요.^^

거리의화가 2023-07-31 15:22   좋아요 1 | URL
네^^ 강남은 물이 풍부한 곳이라 아주 아름다운 풍광이 많습니다. 저도 다른 곳은 몰라도 소주, 항주는 꼭 가보고 싶더군요(한국에서 2시간 밖에 안 걸린다고 하네요^^;).
한시는 사연을 알고 보면 더 깊은 울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성 백화점 상품 박물지 - 백 년 전 「데파-트」 각 층별 물품 내력과 근대의 풍경
최지혜 지음 / 혜화1117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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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근대 시기 백화점은 모든 유행의 집결지이자 집합소 기능을 하는 곳이었다. 1920~1930년대 경성의 백화점에서 팔았던 각종 물건들의 유래를 통해 당시의 풍경을 엿본다. 백화점에서 팔았을 법한 물건들과 광고에 등장하는 단골 아이템들을 통해 그 당시 어떤 것이 유행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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