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대학 다닐 때 '맥박'이라는 노래패에서 활동했다.
오오래 전, 초대를 받고 공연을 보러 갔더니, 강당 무대에서 솔로로
'장작불'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산다는 건 장작불 같은 거야~로 시작하는 백무산의 시로 만든 노래.
(언젠가 페이퍼에 쓴 적 있다.)
썩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닌데 이상하게 그의 노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무엇이 있다. 심지어 '미쓰 고'를 부르더라도.
지난주 '오프앤프리'영화제 마지막 날, 차학경의 비디오아트 <망명자>를 보러
신촌의 한 대학을 찾았는데(동생의 모교) 그때 생각이 났다.
옆 테이블의 손님들이 학번을 묻더니, 술병을 가지고 와 한잔 가득 술을 따라주었다.
오고가는 술잔 속에, 웃음 속에 여름밤이 깊어 갔다.
그 여자의 사께집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동안 30미터 남짓 떨어진 길 모퉁이에
새로운 사께집이 생겼다.
술집은 어디까지나 좀 어둑시구리하고 퀘퀘하고 술집다워야 하는데
젊은층을 겨냥한 것인지 그곳은 너무 밝고 화사했다.
인테리어뿐 아니라 안주도 신통치 않았다.
어묵 국물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살짝 흉내만 낸 듯한 맛이었다.
딸아이가 고개를 내저을 정도니 괜시리 내 가슴이 철렁, 젊은 주인이 안됐다 싶었다.
어묵국물을 얻어 돌아오던 밤, 살짝 가게 안을 들여다봤더니 주인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느 오후, 반찬거리를 사러 나갔다가 길에서 사께집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다짜고짜 내 팔짱부터 꼈다.
털이 달린 앙징맞은 조끼에 미니스커트에 레깅스 차림, 미장원에서 막 손질을 마친 듯한 머리.
저녁 장사에 쓸 채소를 손질하다 너무 답답해서 가게를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양파 냄샌지 파 냄새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하마터면 내 입에서는 "우리 어디 가서 한잔힐까요?" 하는 말이 나올 뻔했다.
그리고 '임시휴업' 쪽지를 붙이기 얼마 전에는 한 할머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얘기하며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도 아는 할머니였다.
우리 동네에는 요일별로 단지별로 임시장터가 서는데, 그 장터의 길목에서 채소를 파는
노점상이었다. 호호백발 단발이 인상적인데 어쩌다 할머니의 채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강매를 일삼아 지켜보는 시장 상인들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나도 한 번 멋모르고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았다가 원치 않는 채소까지
전부 싸짊어지고 와야 했다.
'내 사전에 거스름돈이란 없다'가 아마 할머니의 인생 모토인지도 모른다.
그 할머니와는 눈도 마주치기 싫은데 그 여자는 세상에,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안고
딸처럼 손녀처럼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니는 어떻노? 채소를 일부러 팔아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남은 채소까지 억지로 다 떠안기면
그래도 그 할머니를 계속 찾을 꺼가?"
"어림도 없다. 나도 그런 사람은 못 참는다."
"그런데 이상하제? 와 나는 그 여자를 보면서 밑도 끝도 없이 '졌다!'하는 생각이 들었으까?"
술김에 나는 마음의 한 자락을 털어놓았다.
최근 부쩍 심해진 무력감과 열패감, 그리고 비애......
(일례로 포천 고모가 농사 지은 고춧가루를 좀 팔아달라고 하는데 한 근도 못 팔았다.
아예 입도 못 뗐다. 고모에게 미안해서 된장고추장을 몇 통 사서 쟁여두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무능한 인간인지 몰랐다.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알고 난 뒤의 충격이라니!)
그런데 그녀는 어떤가.
두 달 가까이나 가게를 비웠는데도 바글바글 그녀를 찾는 손님들은
맛있고 푸짐한 안주에. 화사하고 싹싹한 외모에만 반한 것이 아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외면하는 노점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안는
따뜻함과 천진함에 매료된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께집이 잠시 문을 닫은 동안 게릴라처럼 출몰하여 재미를 봤던 새로운 사께집 주인은
어젯밤에도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어제 기말고사를 친 딸아이가 며칠 전 얻어먹은 어묵국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저녁을 먹고 나서 다시 그 집에 가자고 해 가서 한잔했거든요.)
돌아오면서 보니 두어 테이블 손님이 있어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