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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누의 집 이야기
이지누 지음, 류충렬 그림 / 삼인 / 2006년 4월
평점 :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족은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라고.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다.
"누가 안 보면 내다버리고 싶은 것"이라고.(얼마나 웃었는지!)
<이지누의 집 이야기>를 펼치는데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면서 소개한 첫 말에
'가족' 대신 '집'을 대입시켜도 딱이겠다고 생각했다.
'집은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다.'
음, 그런데 적고 보니 문장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제각각의 집은 남이 모를, 얼마나 많은 사연과
그 가족만이 아는 다정하고 콤콤한 냄새들을 품고 있는가!
지은이는 말한다.
'집은 단순히 건축학적 구조물이 아니며, 집은 그 자체로 다분히 철학적'이라고.
-- 대문은 '오래'라 했다. '오래'는 담과 잇대어 있는 큰문을 뜻하고 '지게'는 방이나 광,
부엌이나 화장실과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바라지'는 방 안에서 밖을 바라보거나
환기나 채광을 위해 벽에 만든 창문을 일컫는 아름다운 우리말이다.(41쪽)
집과 관련하여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름다운 용어 소개와 함께,
지은이는 요즈음의 공동주택 중 원룸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한마디를 빠트리지 않는다.
원룸에서 사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건 공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공간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
그럴듯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놀던 동네의 골목길과 대문과 울타리와 마당과 변소와 지붕과
부엌과 마루와 창문과 구들을 거기 엮인 구체적인 일화들과 함께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는
<이지누의 집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우리 집 골목길과
대문간, <작은 아씨들>의 조우처럼 내가 죽치던 다락방과, 찐쌀 자루와 꽁치구이와
약간 눌은 감자볶음 냄비에서 풍기던 저녁 나절의 그리운 냄새를 떠올렸다.
외출에서 돌아온 내 젊은 엄마가 아버지 몰래 살금살금 새옷 봉지을 숨기느라 벽장 문을 열면
유난히 크게 끼이익, 사람을 소스라치게 하던 음향도......
골목에서 친구들이 놀자고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 식구들에게 없다 하라고 시키고
신발을 벽장 속에 숨기고 공부했던 한 얄미운 녀석의 이름과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동네 시장에서 복숭아 구루마를 끌던 을지문덕 장군도.(이름이 김을문이라...)
이렇듯 이지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는 잊고 있던 나의 옛집, 골방, 젊은 엄마와 아버지,
운전학원이나 양재학원에 다니느라 차례차례 시골에서 올라온 군식구들로 빌 틈이 없었던 뒷방,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으니, 독특하고 즐거운 독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허균이나 장유 등 가난한 옛 선비들의 詩와 오두막을 훔쳐보는 재미까지 곁들였으니,
별 다섯 개가 아깝지 않은 책이로되, 사진작가인 저자의 그 좋은 사진 한 장 싣지 않고
덤덤하고 수수한 삽화들로만 채운 것이 조금 허전해서 별 한 개를 뺀다.
(리뷰 제목은 책 속에 소개된 백운거사의 시에서......)
거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어
내 얼굴이 어떤지 기억할 수도 없는데
우연히 와서 우물에 비추어 보니
옛날에 조금 알았던 얼굴 같네.
( 이규보의 詩 '우물에 비친 것을 보고 희작함(炤井戱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