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 남산 H호텔 일식당에서 부부 동반 점심 모임이 있었다.
입을 옷이 없어서 밑에는 검정색 추리닝 바지를(자세히 안 보면 추리닝인지 모른다)
위에는 짙은  잿빛 라운드 스웨터에 10년째 입고 있는 잿빛 반코트를 걸쳤다.
모두 다섯 쌍인데 다른 분들이 너무 화사하고 예쁘게 하고 나와 내 남편이 기죽을까봐
그게 신경이 좀 쓰였다.
아, 나도 신경을 좀 썼다.
스웨터 안에 흰 면티를 입어 하얀색이 살짝 보이도록 한 것.ㅎㅎ

그리고 그곳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는데 나는 이런 때나 먹어보자 해서 얼 그레이를,
다른 분들은 비엔나커피, 카푸치노, 카푸치노 아이스크림 등을 제각각 시켰다.
좋은 사람들과의 근사한 모임에 모처럼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더구나 일행 중의 한 분으로부터 두툼한 금일봉을 하사받았으니......

대우빌딩으로 걸어서 나오자 바로 서울역으로 연결되었다.
오후 세 시도 안 된 시간.
곳곳에 나뒹구는 소줏병들,  벌써 취한 사람들.
그리고 어느 계단 밑에는 목발을 짚었다가 넘어져 굴렀는지 피를 흘리며
한 장애인이 쓰러져 있었다.
지하철의 직원이 나와 어디론가 구조요청을 하고 있는데 그 쓰러진 사람의 눈빛이
너무 슬프고 막막했다.

전철 안에서 읽던 책(<마초로 아저씨의 세계화에서 살아남기>)을 펼쳤는데
그림과 글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는 게 지옥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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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17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얄궂게 저런 화사한 아이스크림 사진 아래, 이토록 마음 스산해지는 이야기를 쓰시다니. 로드무비 님 마음이 그러셨던 거죠?

바람돌이 2006-01-1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우아하게 하루를 보내것 같은 날. 저런 모습을 보면 마음에 더 알싸한 죄책감이.... 사는건 여전히 지옥같은데 나는 무얼하고있나 이런 죄책감이 나에게 면죄부를 줄까 뭐 이런 생각들.... 힘겹죠.

물만두 2006-01-1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검둥개 2006-01-1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돛 떨어진 배처럼 기우뚱거리는 날이 있어요. 사실은 뱃전에 항상 풍랑이 요란한데, 취해서 모르고 살다가 문득 정신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잿빛이 좋아하는 색깔이어요.

mong 2006-01-1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역을 지나칠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고 도착하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아저씨들을 볼 때 마다
가슴이 답답해 지곤 합니다

urblue 2006-01-1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이 턱 걸려요.

chika 2006-01-1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표현처럼 서재질 하며 희희낙낙 거리다가 이곳에서 이쁜 사진을 볼 때까지도 줄곳 희희거리고 있었는데... 그랬는데요.. ㅠ.ㅠ

로드무비 2006-01-1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계속 하던 대로 하자고요.
괜히 쓰다보니 울컥해서.^^;

새벽별님, 몇 킬로그램 감량하셨나이까?^^

블루님, endo님, 뭔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네요.

mong님, 뿅망치돼지볼펜 불빛 들어오는 게 재밌어요. 딴청~

검둥개님, 잿빛도 이젠 왠지 잘 안 어울려서 입을 게 없시요.;;

물만두님, 네. 저도......

바람돌이님, 전 죄책감 같은 것도 잘 안 들더라고요.
멍한 상태.

namu님, 저 아이스크림은 다른 분 꺼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도 껄떡대니까
하나 더 시켜주신 것이었습니다.
고마움의 표시로 한 장 찰칵!

2006-01-17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영엄마 2006-01-17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데리고 영화관 가면서 지하철 통로로 가면서 그 안에서 주무시는 노숙자분들 보니 제가 호사를 하는 것 같고 마음이 좋지 않더군요. 그 분들도 사는 게 지옥 같으실려나요..

비로그인 2006-01-17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역 주변을 자주 지나다녀요. 근처 쪽방들은 거의 철거된 것 같고, 잔뜩 돈을 들인 국적 불명의 상가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더군요. 일본 관광객들은 남대문시장으로 해서 주변으로 즐겁게 쇼핑하고... 전국농민대회를 하면 어김없이 전국 각지의 농부들을 태우고 올라 온 대절 버스를 주차해둔 곳이 서울역 뒤편 남산 방면으로 해서 올라가면 있는 용산도서관 근처예요. 서울역 주변은 다니기가 참 불편해요. 모형 퇴적층을 보듯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모습이 적나라하게 축약되어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이거든요. 잘 지내셨어요, 무비 언니? 흐흐.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리뷰 기다릴게요!

로드무비 2006-01-18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파님, 안 그래도 여기 어디 부근 도서관일 텐데, 잠시 생각했답니다.
양동 골목은 지금은 자취를 찾기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묘한 분위기의 동네예요.
100년은 되었다는 남대문교회에 언제 하루 예배를 보러 갈 생각이에요.
낡은 교회의 아우라가 굉장하던데......
(예배도 분위기로 보는 인간!=3=3=3)
리뷰는 기대 안하시는 게.^^

아영엄마님, 아이들이 물어보면 참 대답할 말이 궁하지 않나요?^^;

속삭이신 님, 생판 타인을 보는 시선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저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다니 반갑습니다.
진심이 담긴 인사말에 문득 가심이; 찡하네요.
님도 올해 건강하시고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바랄게요.^^*

속삭이신 님, 저, 저, 정말입니까요?@,.@


서연사랑 2006-01-1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이렇게 '의도적으로 가볍게'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인거죠. 보고도 못 본 척, 다같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면서도 내 책임이 아닌 척...
그래도 알라딘에 오면 같이 마음아파 해주는 분들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로드무비 2006-01-1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연사랑님, '엽서'로 썼다가 '의도적으로...'로 마무리됐습니다.
아이스크림 사진을 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헤헷.

플레져 2006-01-18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짠해서 추천만 두드리고 갔어요.
오늘에서야 책을 살펴보았네요. 땡스투여요.

날개 2006-01-18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로드무비 2006-01-19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방긋방긋.^^

속삭이신 님, 으윽, 전 100사이즈 니트 세트가 안 맞아서
우야꼬, 하고 있는데.
실도 좋고 깜장색인데 저랑 좀 바꿔 입으실라우?ㅎㅎ
경하드리옵니다.(_ _)

플레져님, 그날, 님의 향수 냄시를 설핏 맡았는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