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낮, 남산 H호텔 일식당에서 부부 동반 점심 모임이 있었다.
입을 옷이 없어서 밑에는 검정색 추리닝 바지를(자세히 안 보면 추리닝인지 모른다)
위에는 짙은 잿빛 라운드 스웨터에 10년째 입고 있는 잿빛 반코트를 걸쳤다.
모두 다섯 쌍인데 다른 분들이 너무 화사하고 예쁘게 하고 나와 내 남편이 기죽을까봐
그게 신경이 좀 쓰였다.
아, 나도 신경을 좀 썼다.
스웨터 안에 흰 면티를 입어 하얀색이 살짝 보이도록 한 것.ㅎㅎ
그리고 그곳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는데 나는 이런 때나 먹어보자 해서 얼 그레이를,
다른 분들은 비엔나커피, 카푸치노, 카푸치노 아이스크림 등을 제각각 시켰다.
좋은 사람들과의 근사한 모임에 모처럼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더구나 일행 중의 한 분으로부터 두툼한 금일봉을 하사받았으니......
대우빌딩으로 걸어서 나오자 바로 서울역으로 연결되었다.
오후 세 시도 안 된 시간.
곳곳에 나뒹구는 소줏병들, 벌써 취한 사람들.
그리고 어느 계단 밑에는 목발을 짚었다가 넘어져 굴렀는지 피를 흘리며
한 장애인이 쓰러져 있었다.
지하철의 직원이 나와 어디론가 구조요청을 하고 있는데 그 쓰러진 사람의 눈빛이
너무 슬프고 막막했다.
전철 안에서 읽던 책(<마초로 아저씨의 세계화에서 살아남기>)을 펼쳤는데
그림과 글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는 게 지옥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