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은 이론적인 주장이 아니며 하나의 견해도 아니다.
이것은 "용납됨을 용납한다고 하는 역설적인 태도의 특징"이다.
은혜가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알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이 더는 아니며,
받아들이기 힘든 교회적인 선포의 모음도 아니다.
믿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의 용납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서문 중에서

 


오늘 아침, 새해 첫책으로 고른 <존재의 용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문에 '용납'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러자 생각나는 우리 할머니.

10여 년 전 90여 세의 나이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당신이 쓸 줄 아는 글자라고는
'오리'와 '라디오' 밖에 없었다.
우리 자매가 장난삼아 가르쳐드렸던 것 같다.
글자를 한두 개라도 쓸 줄 알면 일자무식은 면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런데 왜 하필이면 '라디오'와 '오리'였을까?
할머니가 공책에 쓴 삐뚤빼뚤한 그 글자를 들여다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사이가 별로인 며느리(우리 엄마)의 강권으로 어느 날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신 할머니.
언제부터인가 그 좋아하던 막걸리와 담배를 딱 끊으셨다.
나는 그때 속으로 그게 좀 아쉬웠다.
저 연세에 좋아하는 거 조금씩 하면서 사시는 것도 괜찮을 텐데......
하나님이 아니라 솔직히 며느리 눈이 무서워 할 수 없이 끊으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어느 날 친지 몇 분과 버스를 탈 일이 있었는데 먼저 자리에 앉은 우리 할머니
손을 허우적대며 기사님께 이렇게 외치시는 거다.

"저기 한 사람 아직 안 탔습니더. 저 사람이 타도록 용납하이소!"

혹여라도 버스가 일행을 두고 떠갈까봐 애가 타서 하시는 말씀이었는데
나는 그 '용납'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우스울 수 없었다.
'우리 할머니 왜 이렇게 유식하시댜?  교회 다니시더니 그렇게 어려운 단어도 다 아시고..."
아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 할머니,  하면 '오리', '라디오', '용납' 이라는 세 단어가 동시에 떠오른다.
잘 안 어울리는 낱말 같으면서도 제목으로 쓰고보니 기가 막힌 조합이다.(라고 우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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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06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열시에 들어오면 열시 넘어 12시반에 들어오면 그 넘어 절묘하게 올라오는 이 페이퍼..ㅎㅎ
그러게요
상관없을 것 같은 저 단어를 화두로 삼아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막걸리와 담배는 저도 아쉽네요..^^;;
결국 첫 주문하셨군요..ㅎㅎ

로드무비 2006-01-0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어찌 이리 시간을 딱딱 맞추시는 겐지?!ㅎㅎ
<붓다, 나를 흔들다>와 함께 두 권을 마일리지만으로 주문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의지!^^
(그리고 어제 두 번째 주문 4만 원 채워 했습니다요.=3=3=3)

비로그인 2006-01-0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ㅎㅎ
근데 이거보세요 제 주문은 아직도 제 손에 안들어왔습니다
어마어마한 배송비를 내는데도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 삽니다..ㅎㅎ

하루(春) 2006-01-0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본 글에는 관심도 없고 두 분의 대화에만 눈길이 멈췄어요.

mong 2006-01-0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의 대화의 장이 좀더 열릴 필요가 있습니다
로드무비님, 벌써 올해의 두번째 주문도 하신겝니까?
부지런 하셔라~~저는 자꾸만 이책 저책 담았다 뺐다만 반복중입니다 ㅎㅎ

로드무비 2006-01-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본글을 읽으세요.
이렇게 좋은 글을!!!=3=3=3

사야님, 열악한 환경이라고 말씀하시니 이상하게 주둥이가 쑥 나오는데요?ㅎㅎ

로드무비 2006-01-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그게 첫 주문이나 마찬가집니다.
마일리지만으로 달랑 두 권 주문했거든요.
알라딘에 미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mong 2006-01-0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 이윤학


로드무비 2006-01-0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엉엉~~
가슴을 후비는 詩句입니다.

mong 2006-01-0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엉엉~~

로드무비 2006-01-0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학 시인이 건국대 앞에서 허름한 카페 경영한 적이 있어요.
술을 얼마나 퍼마시는지......좋으면서도 안쓰러운 시인.

2006-01-06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6-01-06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가 라디오를 듣도록 용납하라~ (라고 조합해본다) 가슴이 싸해졌어요. 저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쯤 전에 기침이 심해져서 담배를 끊으셨지요.

oldhand 2006-01-06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본 글 읽었어요!! 추천도 했어요!! ^____^

로드무비 2006-01-0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 감사감사!!^_____~

숨은아이님, 어른들이 건강 때문에 즐기시던 걸 하루아침에
못하게 되면 지켜보는 사람도 속상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멋진 조합입니다!^^

비로그인 2006-01-06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주둥이..ㅎㅎ
하루님 글을 보니 정말 앞으로 체면을 좀 지켜야겠어요..ㅎㅎ
 안그래도 연애중독때도 날개님이 댓글 길다고 구박했잖아요.^^
정말 추천부대 짱으로서 전투에 임하다 장렬히 전사할려고 했는데 댓글보병으로 전락한 느낌입니다..하하
물론 우아한 부대장보다 보병생활이 훨씬 재밌고 인간적입니다만 짱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명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ㅎㅎ
당신을 떠날때만 사용되었던 그 날개를 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전 속력으로 저를 향해 날라오던 오리.
오리지날이 그렇게 박동감 넘치는 진실을 품고 있는 구절이라는 걸 그때 절절히 체험했지요.
이 긴 글은 댓글보병의 유서라 생각해주시고
전 이만 사라집니다..흐흐

독일청둥오리들 찬조출현..^^




paviana 2006-01-0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삼실에서 누가 <데르수우잘라> 산다고 해서 제가 주문넣어주고 님께 땡스투도 눌렀사와요.칭찬해주세요.. ㅎㅎ
페니미즘은 지금 읽고 있는 쾌도난마 다 읽고 스밀라도 해치우고 주문할 겁니다.충성 !! ㅎㅎ

로드무비 2006-01-0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파비아나님. 너무 고마워서! 허둥지둥.
그런데 정말 저에게 땡스투 눌러주시려고요?
다시 한 번 감사! ^^
(그런데 책을 엄청나게 읽으시네요, 스밀라는 좀 오래 걸릴 텐데...)

사야님, 님의 댓글 때문에 요즘 제 서재가 사는데 무신 말씀이십니까.
잔말 마시고 계속 댓글 달기에 매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이야 뭐라건 우리의 애정을 구축하는 데 댓글 이상 좋은 게 있을라구요.
저도 요즘 님 방에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지 않잖습네까!
독일 청둥오리들, 이윤학의 시 모두 마음에 듭니다.
사람들이 페이퍼가 아니라 댓글 읽으러 제 방에 오는 거 아닌가 몰러유.
저도 이제 그만 아이 점심 차려주러 주방으로.=3=3=3

서연사랑 2006-01-0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아니시면 만들수도 없는 조합일껄요.
그러니 어울린다고 우기셔도 됩니다. 허락해 드리지요.^^(서연사랑, 니가 무슨 권리로...??)

로드무비 2006-01-0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연사랑님, 방금 님 방에 갔다왔더니. 호호~~^^

비로그인 2006-01-0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제 이 고차원(!)적인 유머를 몰라주시고 그렇게 정색을 하시면
이 민망함을 어쩌란 말입니까? ㅎㅎ
그럼 저도 이만 오랫만에 페이퍼라도 하나 올리러 제 방으로..^^
이윤학시인처럼 로드무비님 눈에 안쓰러운 인간이 되어서는 안되겠단
의지를 새삼 다지며 그런 의미에서 또 포도주 한 잔..하하

paviana 2006-01-0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르수우잘라 주문할려고 봤을때 님의 글이 있어서 제가 오히려 감사했어요.앗싸 땡스투 누를분이 있구나 !!
글구 저 책 많이 안 읽어요.님같은 분께 그런 말을 들으니 식은 땀이 다 납니다.
스밀라도 여름부터 읽던 책인데 자꾸 다른 책에 순서가 밀려서 아직 1/3 밖에 못 읽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스밀라를 꼭 끝내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자 중입니다.^^

로드무비 2006-01-0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땡스투 이제야 저도 제자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시행된 지 한참 지나고 나서도 걸핏하면 까먹었거든요.
지금은 주문취소 누르면서까지 땡스투 챙기는 편입니다.
한 푼 두 푼......아시죠? 그 기쁨!
님은 저보다 100배 나으세요.
전 스밀라 두어 페이지 읽다가 다음에 머리 맑을 때 읽어야지 해놓고
이때까지 머리 맑은 날이 하루도 없어서리.^^;;

사야님, 저도 정색하는 척 해봤어요. 왜 이러세요.ㅎㅎ
아무튼 유머의 기교를 좀 습득하고 싶어요.
사야님께 한참 밀리는 기분이 들어서...^^
(전 올해 들어 술을 거의 못 마셨네요. 당장이라도 마시고 싶어라!)

sandcat 2006-01-06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골 계시는 저희 엄마는 가끔 "깜빡했단다." 하시면 될 것을 부러 "망각했네."라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때의 제 기분이랑 비슷하지 싶어요.
근데 이거 새로 생긴 페이퍼인가요?

히피드림~ 2006-01-0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들은 다 비슷하신 것 같아요. 그 옛날에 태어나셔서 누릴 것도 다 못누려 보시구 시골에서 일만 하시고, 글 모르는 할머니도 많구요. 우리 할머니도 그렇거든요. 그러고보니, 새로운 카테고리네요. 카테고리의 주제가 재밌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이 많이 나오겠네요.^^

클리오 2006-01-0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교육수준과 관계없이 현란한 문어체 용어를 구사하셔서 주변인들이 놀라는 경우가 있죠... ^^ (저희 시부모님도... 흐..)

날개 2006-01-0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페이퍼에는 몇 시간만에 넘 많은 댓글이 달려서 읽느라 허덕대요...^^
근데, 정말 새 카테고리네요? <마이도러>는 어디갔어요!!!

밥헬퍼 2006-01-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활기넘치는 서재군요. 이 식을 줄 모르는 인기가 누구에게나 기쁨이 되어 지속되기를 기꺼이 '용납(?)'합니다. '용납됨을 용납한다는 역설....'이렇게 댓글을 달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시는 것'...오늘은 제가 '용납'을 경험하는군요. 그래서 살아갈 기분이 더욱 더 깊게 드는군요. 마음에 잘 새겨두고 갑니다.

깍두기 2006-01-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늦게 왔더니 댓글 읽느라 힘들어 죽갔시요.
좋은 글 읽고는, 댓글 다 읽으면 '내가 뭘 읽었지?'하고 위로 도로 올라가봐야 한다니께.
스크롤의 압박 장난 아니어요^^

비로그인 2006-01-06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로드무비님
유머와 촌철살인의 답글내공을 제가 어찌 감히 님을 따라 가겠습니까.
또 이런 님 팬들의 원성을 들으며 님을 독차지 할 수는 없지요..ㅎㅎ

술마시고 들어왔습니다
금요일은 원래(?) 둘이 퍼마시는 날이거든요..^^
행복한 밤 보내시고 계시길 바라며..

sudan 2006-01-0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소개해주신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서문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돼서 세번쯤 다시 읽어 보고나서야 이해했어요. 그런게 신앙이군요! 믿는 종교는 없지만, 그게 뭔지 느낌이 확 왔어요.
(본문을 이해했으니까 이젠 댓글 읽어야지.)

로드무비 2006-01-08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dan님, 얼핏 보면 번역이 좀 어색하죠?
세 번 읽어보시고 느낌을 잡으셨다니 저 문장을 받아들인
용기와 인내에 경탄합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댓글 읽으신 소감도 한 줄 남겨주시지.ㅎㅎ

사야님, 전 어젯밤 한잔했습니다.
책장수님 주무시고 혼자 한잔 더 했습니다.
금요일 밤에 퍼마시는 분들이 많군요.
그럴 테지요.ㅎㅎ
제 일생의 소원이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좋아해서 삼각관계에
빠져보는 거였는데 그 소원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알라딘 방에 와서 사야님이 제 못 다 이룬 한을
풀어주시는 듯합니다.
독차지할 수 없다느니 하는 달콤한 말씀으로.ㅎㅎ

깍두기님, 그러게 누가 늦게 오라고 했수?=3=3=3

밥헬퍼님, "God above God"라는 말이 폴 틸리히 책에서 나왔군요.
이현주 목사의 글을 읽고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있는 말이었거든요.
밥헬퍼님의 댓글을 보니 뛰어오를 듯이 기쁩니다.
님도 새해에는 좀 활기찬 서재 만들어 주세요.
제가 부지런히 들락거리겠습니다.^^

날개님, '마이 도러' 서랍 치운 지 벌써 몇 달짼데
이제야 그걸 아시다니.
님의 애정이 식은 게 틀림없어요. 흑=3

클리오님, 그러니까요.
그리고 기도할 때 보면 놀라워요.얼마나 청산유수이신지들......^^

펑크님, 책읽다가 생각이 곁가지를 칠 때가 있는데
그런 때를 위한 카테고리입니다.
괜찮을 것 같죠? 관심 가지고 읽어주세요.^^

샌드캣님, 님도 아셨지요?ㅎㅎ
어머니가 부러 어려운 낱말 쓰시는 모습 보면 귀엽지 않으세요?
뭔가 짠~하기도 하고.^^

검둥개 2006-01-1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까 왜 눈물이 날까요. 꺼이꺼이... 저두 참 =3=3=3

로드무비 2006-01-1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애잔한 글이라고 생각해요.=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