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딱 서른 살일 때,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여겼고 실제로 나는 기운이 없었다.

오래도록 애인이 없는 것(더 자세히 말하면 내가 매력이 없어서 남자들이 거들떠도 안 본다는 것)도
열등감 중의 하나였고, 세상을 사는 일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는 것도 내겐 공포였다.
(항상 그랬다는 건 아니다. 어느 날은 또 아지못할 자신감이 넘치기도 했다.)

어느 날 일 때문에 알게 된 어느 작가의 집에 저녁초대를 받아갔을 때, 
내 맞은편에는 중년의 한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미혼이고 시인이라 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는 오십이 다 되어 보이는데 퍼머기 없는 단발에 검정색 스웨터, 골덴바지를 고수(!)하고 계셨다.
그이 옆에는 대조적으로  탤런트 같은 화려한 화장과 복장의 60대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서예가라고 했다.
여성스러움과 아름다움에 굉장히 집착하는 것이 느껴지는 그 서예가는 빨간 매니큐어 바른 흰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미장원에서 정성껏 올린 그 헤어스타일은 오로지 그를 위한 것으로 여겨질만큼 잘 어울렸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무슨 선물인가를 자랑했고,  미녀이고 멋쟁이인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나의 시선은  어쩌면 나의 미래의 모습이 될지도 모를 그 시인에게 자주 갔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고 술과 음식을 아주 맛나게 먹었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따끈하게 데운 정종 주전자가 열 번쯤 테이블을 돌았을 때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로드무비는 참 좋겠다. 여기 이렇게 있는 걸 알면 그 누군가 얼마나 기뻐할까!"

 맞은편에  말없이 앉아 술만 납작납작 받아마시는 내게서  오래 전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일까.
나는 그렇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나는 어느 책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
박목월 시인의 추천사는 그에 대한 믿음과 애정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젊은 날, 데뷔 시들은 정말이지 멋졌다.
나는 그의 시들을 읽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화려한 여인 옆에서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해 보였던 그이는 사실은 그렇게
멋진 청춘을 구가하고  멋진 시를 쓰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양귀비가 부럽지 않은 아침" 이라는 그의 詩句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는 정말  양귀비가 부럽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튼, 나도 언젠가 젊은 날의 나를 빼닮은 인간을 만나면 그이가 그날 해주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알라딘 서재에서 이미 두어 명을 만났다.)

"xx이 여기 있는 걸 알면 그 누군가 얼마나 기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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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이퍼를 올리고 시인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출생연도가 1941년.
그가 부디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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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11-2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또 로드무비님이 맛난 걸 먹고 사진 올렸는 줄 알았어요^^

mong 2005-11-2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가슴이 따땃해지는 아침입니다
서른살때의 로드무비님이 이해가 되는건
제가 서른을 넘겼기 때문일까요? ^^

하루(春) 2005-11-2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지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요?

플레져 2005-11-2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전까지 침대에서 뭉개고 있다가 훤한 창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언젠가 아주 개운한 아침을 맞았던 그날의 느낌과 여운이 비슷하다고...
어떻게 이름을 붙일까 했는데, 양귀비가 부럽지 않은 아침으로 해야겠어요...^^

로드무비 2005-11-2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오랜만에 페이퍼 올리는 기분이에요.
서른 살, 참 좋은 나이인데 그것도 모르고...^^

로드무비 2005-11-2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해물파전 어제 특대로 구워먹고 사진 한 장 찍어놨는데 올릴까요?ㅎㅎ

플레져님, '양귀비가 부럽지 않은 아침'이 뭘 뜻하는지 아셔서 기뻐요.^^

하루님, 님도 양귀비가 부럽지 않은 아침을 매일 맞으시길!^^

blowup 2005-11-2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을 따끈하게 데우는 글이어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그런 말을 건넬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로드무비 2005-11-2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정종처럼 천천히 몸을 데우는 그런 말, 그런 글을 쓰시길.^^

새벽별님, 타인 속의 제일 예쁜 걸 끄집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시인처럼.

야클 2005-11-2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면 그 누군가 과연 기뻐할까!"를 생각하게 돼요.
아, 잠 너무 많이 자서 머리가 묵직한 일요일. 운동하러 가야지~~~ ^^

날개 2005-11-27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간에 여기서 로드무비님 글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그래요...
양귀비가 부럽지 않은 점심..(시간이 벌써....ㅎㅎ)

싸이런스 2005-11-27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말은 저에게 필요한것 같아요. 해주셈 앙!

로드무비 2005-11-27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싸이런스님이 이렇게 있다는 걸 알면 누군가 아주 기뻐할 텐데요.^^

날개님, 양귀비가 부럽지 않은 저녁, 이라고 했으면 저 삐졌을 거예요.
왜 이리 요즘은 늦게 오시나? 아예 안 오시기도 하고...^^

야클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ㅎㅎ=3=3=3
잠 많이 자서 묵직, 술마시느라 잠 못 자서 묵직.
님의 머리도 가벼울 때가 있어야 하는데...^^

검둥개 2005-11-2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 스웨터, 골덴 바지, 단발, 이거 저 아닌가요? ^^ 용모는 다 갖췄으니 이제 화려한 젊음만 복구하면 되는데 음, 음음...

로드무비 2005-11-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하니 제가 지금 그 시인의 그때 허름한 모습과 흡사한 것 같아요.
청바지 대신 골덴바지만 꺼내 입으면...
검둥개님도?^^

검둥개 2005-11-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요. 멋져요!!! 자, 이제 "핫바에서 풍겨오는 이 그윽한 인생의 냄새~~"를 시구로 제게 시 한 수만 지어주시면 바루 그 멋진 시인분의 반열에 오르실 수 있어요. ^^ =3=3=3

히나 2005-11-2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60대에도 남자친구에게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서예가가 넘 부러워요
아, 이러면 속물인가요? ㅎㅎ 저도 오래도록 애인이 없다는 열등감으로
내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이 되지만 아주 가끔은
이기지 못할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을 때도 있답니다. 다행이죠.
그런데 타인 속의 제일 예쁜 것을 꺼내는 즐거움도 좋지만 타인 속의 제일
미운 것을 꺼내 놀려주는 심술궂음도 좋더라고요. 마치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남자아이처럼 말이예요. ㅎㅎ
전 일요일 일하러 나와서 그런지 절세미녀 양귀비가 부러운 나른한 오후예요.

로드무비 2005-11-2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 없는 별로 안 예쁘고 화사하지도 않은 시인이나 소설가보다
60대에도 연애와 자신에게 도취된 여인이 귀엽긴 하더군요.
스노드랍님, 일요일에도 일이라니, 에구.^^

검둥개님, 전 이미 그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걸요.=3=3=3

하늘바람 2005-11-2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뇽. 전 아직 그런 경험이 없어서 좋은 시는 시로만 만나야지 시인을 대면하면 서먹하고 그다지 마음이 와닿게 되지 않더라고요

sudan 2005-11-27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없이 추천만.

로드무비 2005-11-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반갑고 고맙고......^^

하늘바람님, 시인을 직접 만나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뭐 그런 면도 있겠죠?^^

urblue 2005-11-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 그 말을 들려주고 싶으신 걸까요? ㅎㅎ

로드무비 2005-11-2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이가 있다오.('' )

비로그인 2005-11-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따라 말없이 추천..은 하고 가지만 약간 얼이 빠진 상태로 웃고 있삼!!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저니까요!! 음홧홧홧!!

로드무비 2005-11-2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아심시롱.^^*

2005-11-28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