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 아니 어제 오전 <예술가로 산다는 것> 리뷰를 올렸더니 검정개님이
또 한 편의 페이퍼를 독려해 주셨다.
안 그래도 꼭 한번은 이야기하고 넘어가려 했다.
문학을 앞세워 여성들을 등쳐먹고 다녔던 한 사기꾼에 대해......
어느 날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다.
어딘가에서 나의 지점토 작품을 봤다며 한번 만나고 싶다는 용건이었다.
나는 어린애 장난 같은 손바닥만한 내 지점토 액자를 '작품' 이라고 표현하는 것부터 신경에 거슬렸다.
혹시라도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하지 않았냐고?
나도 모르는 미술적인 재능이 있어서 어쩌면 인생이 새로 꽃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0. 1프로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걸 보니 그 정도는 스리살짝 기대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커피숍에서 다음날 대낮에 남자를 만났다.
솔직히 말해 호텔 커피숍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승용차로 김해 도요까지 모시겠다고 했던 전날의 말과는 달리 그는 고물 오토바이를 끌고 나왔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지점토를 재미삼아 같이 만들고 있는 친구가 조금 뒤 올 거라고 했더니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처음 보는 순간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어서 도리어 나로서는 부담이 없었다.
무슨 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 않겠는가!
10여 분 뒤 내 친구가 왔고 그가 미적미적 일어나 계산을 하는 동안 나는 친구의 귀에 재빨리 속삭였다.
오늘 저 인간을 골탕 좀 먹여야겠는데 우리 둘이 떨어지면 큰일난다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달리다가 김해의 으슥한 수풀이나 자기 집에서 나를 자빠트릴
생각이었던 그는 내가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하자 당황하는 기색도 잠시, 그러자고 했다.
친구와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를 쫓아 택시를 타고 먼저 김해 그의 집필실이라는 데 갔다.
택시비를 내가 낼 줄 알았다가 그에게 내라고 웃으며 말했더니 지갑을 꺼내던 땡감 씹은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리뷰에도 썼다시피 그의 숲속 방은 꽤나 운치가 있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신동아 무더기를 비롯하여 꽤 많은 책들......
다탁 겸 책상으로 쓴다는, 나무밑둥을 잘라 만든 테이블......자칭 공예가요, 도요의 주인장답게
내오는 다기 세트도, 손놀림도 그럴듯했다.
도요에 가보자고 졸랐더니 다음에 안내하겠다던 이 남자, 마지못해 일어서서 우리를 안내한 곳은
아는 사람의 도요. 그것도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가 슬쩍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아 알았다.
친구와 나는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남자를 점잖게 따돌리고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다음날, 나의 펜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나의 집요한 추궁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던 것이다.
친구는 깜짝 놀라더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B일보에 실린 그녀의 시를 보고 시인이자 공예가라며 어느 날 그가 연락을 취해 왔단다.
여상을 졸업하고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바로 결혼을 해버렸던 그녀, 우체국에 근무하는데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시를 쓰는 것으로 간신히 인생의 고달픔을 달래던 중 재수없게 그 놈의 마수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남편에게 관계를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뜯어가는 돈도 수월치 않다고 했다.
어떻게 알고 남편이 없는 시간에 집까지 찾아오던 그에게 어느 날 지점토 액자와 내가 보낸 엽서가
눈에 띄었던 것.
그녀는 미안하다고 협박에 못 이겨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고 울먹였는데 나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런 상황이라지만 친구의 전화번호를 넘긴 그녀의 철없음이 이해가 안되어서......
문학을 공부하는 여린 여성들을 맘껏 유린하고 다닌 그 남자(자신의 입으로 열 명을 넘는다고 자랑까지
했다니 진짜 나쁜 놈이다!), 한 번만 더 나타나면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라 했더니
말을 안 듣고 얼쩡거리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걸려 ..죄로 고소당했다.(이후의 이야기는 생략!)
솔직히 말해 문학을 내세워 미끼를 던지면 그걸 덥석 물던 순진한 여성 문학도들의 태도도 내겐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은 든다.
내가 너무 정서가 메말라서 아예 문학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무튼 세상천지도 몰랐던 그 때(20대 중반) 나는 한 친구를 멋도 모르고 수렁에서 건져내었다.
그녀는 이혼(어차피 예정된 것이었다!) 등 호된 값을 치러야 했지만......
그런데 나는 첫눈에 그가 사기꾼임을 알아봤는데 왜 그녀들은 그걸 몰라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