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년 전  콜린 히긴스 원작의  <19 그리고 80>을 무척 재미나게 읽었다. 끊임없이 자살소동을 벌이는 19세 소년  해럴드가  80세의 할머니 모드를 만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배운다는 이야기였다. 박정자가 여든 살의 모드 할머니로 분했던 동명의 연극도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장기공연에 들어가고 원작이나 연극의 인기는 한마디로 난리도 아니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말이지 해럴드, 두려워하지 말고 인간적이 되는 거란다.(모드가 해럴드에게)

어제 오후 우리 가족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러 광화문의 한 극장을 찾았다. 상영 시간이 거의 두 시간이고 한글 자막이라 일곱 살짜리가 진득하니 앉아 볼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그 염려는 쓸데없는 것이었음이 곧 밝혀졌다. 아이는 가끔 제 아빠가 조는지 안 조는지를 옆눈으로 감시했을 뿐 무서운 기세로 영화에 집중했던 것이다. 영화가 워낙 흥미진진해야 말이지.



몸통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네 다리로 걸어다니는 고철덩어리 하울의 성.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쉭쉭=3=3=3 하얀 연기를 내뿜는데 그 광경이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모자가게의 심드렁한 18세 소녀 소피


동료 재봉사들은 들떠서 퇴근을 하는데 아랑곳없이 완강한 등짝을 보이며 하던 일에만 열중한다. 바깥세상은 전운이 감돌고 하수상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얼굴은 왜그리 메마르고 덤덤할까? 잠깐의 외출.

하울과 관련된 황야의 마녀의 오해로 하루아침에 90세 노파가 되어버린 소피


자신의 변한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소피.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머무를 수는 없다고 판단 조그만 보따리를 꾸려 집을 떠나는데 그 침착함과 단호함이 놀랍기 그지없다.


마법사들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지팡이로나 쓸까 하여 주웠더니 무대가리 허수아비였다. 그는 여행의 끝까지 소피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준다.


하울과 모종의 계약관계라는 불 마법사 캘시퍼도 어느 날 갑자기 하울의 성에 잠입한  소피 할머니 앞에선 깨겡.


에잇, 이 먼지구덩이...소매를 걷어붙이고 청소부터 시작하는 소피. 왜 부지런한 여성은 남의 집에 가서도 청소부터 해야 하는지? 난 우리 집도 잘 안 치우는데......


"아아, 아름답지 못하면 사는 의의가 없어!" 여성들을 매료시키고 자신의 마음은 주지 않는 천하의 바람둥이 하울. 머리 염색이 잘못됐다고 우는 소리를 하고 있는 중.

미야자키 하야오는 '움직이는 성'과 '하루아침에 90세 노파가 된 소녀' 라는 두 가지 점에 착안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나이 듦'에 대한 독백이 심심찮게 나온다. "나이가 들어 좋은 것은 세상에 놀랄만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나이들어 좋은 건 더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래서야 앞에서 소개한 모드 할머니와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울을 사랑하게 되고 갖가지 모험을 통해 용기를 얻으면서 소피의 얼굴이 소녀가 되었다가 다시 불안에 잠기면 할머니 얼굴로 변하고 하는 장면은 무척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웠다.

소피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어 노파로 만든 황야의 마녀(그것도 자신보다 더한 할머니가 돼버린)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보살피는 대목도 인상적. 다음 두 컷의 사진은 황야의 마녀의 변신 전과 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오르라고 하면 나도 당장 오르겠다. 아흔의 소피가 신나게 한 일을 아무렴 나라고 못하겠는가? 하울과의 사랑, 그런 건 솔직히 관심없다. 노란색, 빨간색, 연두색, 파란색 색깔의 자물쇠가 있어 그 색깔의  대문을 열면 다를 세상이 펼쳐지던 그 신기한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온몸으로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소피처럼 나의 나이를 새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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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2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아침에 할머니가 되어버린 자신을 참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소피.....!

'나이 듦'에 대한 독백도... 인상적인...!

깍두기 2004-12-2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클수마스날 식구들과 이 영화를 보았어요.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깍두기는 이 영화가 무작정 재밌지만은 않아서 슬펐다우. 이제 나는 상상력을 맘껏 즐길 수 없는 것인가....아, 나도 페이퍼를 써야겠다.

바람구두 2004-12-27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당신은 못해요... 청소라니.. 푸핫.

sooninara 2004-12-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봐야겠다고 찜해두었다는..

로드무비 2004-12-2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빨리도 보셨군요.^^

깍두기님, 누구 앞에서 늙어버렸다는 둥 그래서 슬펐다는 둥.

떽이야요.

바람구두님, 전 청소는 할 생각이 없는데요.

그냥 움직이는 성을 타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말이었어라.^^;;

수니나라님, 애들 데리고 가서 꼭 보세요. 무지 좋아할 겁니다.^^

마태우스 2004-12-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애니메이션에 대한 제 오래된 편견이 깨질까요... 라이언킹, 미녀와야수를 보고 재확인한 그 편견들이 말이죠.

Laika 2004-12-2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 울 언니네 집에 놀러가서 매일 청소만 해주고 오는데..

이거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르며, 아직까지 못보고 있어요...

urblue 2004-12-27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청소 같은 거 안 하는 로드무비님이 좋아요!!

저도 이번 주말에 광화문 모 극장에서 이거 봅니다. ㅎㅎ

로드무비 2004-12-2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소피가 하울의 성 청소해주는 것 빼고는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애니메이션에 대한 마태우스님의 그 오래 된 편견

깨트릴 수 있을 거예요.

라이카님, 요리에 앞치마에 청소에...라이카님 언니가 정말 부러워요.

우리집에도 하루 놀러오실래요?^^

블루님, 요리 잘하면 됐지 어떻게 청소까지 잘할 수 있겠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ㅎㅎ

이번 주말 데이트 기대됩니다.^^

날개 2004-12-2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보고싶어 죽겠네... 로드무비님이 더 불을 당기시누만요..

2004-12-27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주 2004-12-27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행...아직 놀랄 일이 많은 걸 보니 내가 아직 젊었단 증거..고맙습니다. 로드무비님 한 살 더 먹는 판에 나의 젊음을 증명해 주시다니요!

플레져 2004-12-2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아요. 스틸컷만 봐도 이렇게 좋으니...

마지막에 좀 우스웠죠? 개구리 왕자가 생각나서...흐흐...


브리즈 2004-12-28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은 한때, 정확히는 10여 년 전 제 수집 1호 품목이었죠. <나우시카> <라퓨타> <홍돈> <추억은 방울방물> 등등.. 그때만 해도 하야오의 영화를 영화관에 앉아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말이죠.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오랜만에 하야오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갖게 한 애니입니다. 이번엔 극장에서 보고 싶네요. :)

니르바나 2004-12-2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에 무서운 인사를 건넨 친구가 캘시퍼군요.

그야말로 환타스틱한 영화네요.

로드무비님의 페이퍼가 아니었다면 감상하지 못하고 넘어 갈 뻔 했습니다.


2004-12-2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면 딱 로드무비님 만큼의 감상이 나올 것 같군요..저도 애니를 즐겨 보지 않았는데, 원령공주와 센과 치히로..고양이의 보은 등을 보면서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지요..한 장면 장면에 깔린 복선과 아이들에겐 의미심장할-실은 우리들에게도-대사 같은 것들이 인생을 생각하게 해서 좋아요..그 익숙함과 적당히 단순한 선들도..

로드무비 2004-12-28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무엇보다 이 영화는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더군요.

모자가게 작업실, 움직이는 성 내부, 특히 하울의 방......

풀과 꽃으로 둘러싸인 전경 등.^^

니르바나님, 캘시퍼가 무지 귀엽게 나와요.

소피가 요리를 하도록 기꺼이 허락도 해주고요.

브리즈님, 전 그의 영화들을 많이 챙겨보진 못했는데

'추억은 방울방울'이 특히 보고 싶군요.

플레져님, 그 대목 정말 웃겼어요. 어이가 좀 없기도 하고.^^

박찬미님, 님도 저처럼 젊음의 증거가 필요하시군요.

아유 반가워라!^^

....님, 기대됩니다. 받는 대로 제깍 님의 방에 달려갈게요.^^

날개님, 애들 방학 했죠?

빨랑 가서 보세요. 만화책만 들입다 사지 마시고...헤헤.^^

2004-12-2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저 소피의 뒷모습이 있는 컷이 마음에 들어옵니다..구석구석이 재밌네요..매생이 먹고 소감 올려 주셔여..맛있으면 위치도 가르쳐 주시구요..^^

poptrash 2004-12-2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크리스마스에 극장에서 봤더랬지요. 18시에 연극 라이어를 보고 22시에 역도산을 보고 00시 30분에 다른 극장으로 옮겨서 하울을 보는 좀 강행군이어서 -_-; 그럼에도 재밌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