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눈이라도 뿌릴 듯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 마태우스님의 페이퍼를 보니 한 해가 저물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허전하고 섭섭하다. 항상 뭔가 정리를 해야 할 텐데...생각하는데 정리할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집안 대청소. 우리집 창들이 투명해지고 반짝반짝 빛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뜬금없는 이름들이 생각난다. 전경연. 초등학교 고학년 때 친구. 어느 날 무슨 일로 버스를 함께 탔을 때 내 차비를 내어준 친구이다. 나는 친구의 차비를 대신 내준다는 건 상상도 못해봤다. 그런데 그녀는 뽐내는 기색도 없고 너무 태연한 것이 아닌가. 나는 뒤통수가 후끈거렸다. 하긴 그때 친구의 차비까지 낼 형편도 아니었지만......

또 한 명은 중학교 때 친구 박정숙. 이 친구랑도 어느 날 무슨 일로인지 버스에 함께 올랐는데 내 우산을 달라고 하더니 주름을 한 개씩 정리, 얌전하게 착착 접어 단추까지 끼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요술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교복 치마단이 터지면 옷핀 같은 걸로 대충 꿰어 며칠을 입다가 엄마에게 들켜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는 아이였다. 그녀의 단정한 매무시, 찰랑찰랑한 밤색 단발, 깨끗한 덧니...그 모든 것이 너무 신비로웠다. 나는 그녀에게 이성에게 대한 듯 경외감까지 품게 되었다.

그 친구 둘보다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으니 학교를 졸업하고 하릴없이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몇 년째 시립도서관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도 한나절을 열람실에서 책을 읽고 또  몇 권 빌려서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가 갑자기 흔들린다 했더니 내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나를 확 껴안는 것이 아닌가. 열린 창문 사이로 가로수 가지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고  아줌마는 그 순간 자신의 아이 보호하듯 몸을 던져 나를 감싸안았던 것이다.

나는 버스 옆자리에 앉은 생판 모르는 처녀를 몸을 던져 보호해준 그 아줌마를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남을 돕겠다는 의지나 노력이 개입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머리까지 나빠서 학창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열 명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인데 이상하게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그 두 친구의 이름과 얼굴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줌마의 얼굴도......오십대 초반의 수수한 아줌마였다.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준 사람들이었다.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각각 다른 무엇을 내게 최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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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1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주머니 참 대단하시군요.. 누군가의 기억속에 그렇게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식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을까요?

연말이라 로드무비님의 글이 더더욱 감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깍두기 2004-12-15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과 글의 조화가 압권이오...

진/우맘 2004-12-15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문구는 뭘로 넣을까요?

로드무비 2004-12-1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저도 이런 날은 감상적이 된다구요.

저한테 잘해준 사람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네요.^^

깍두기님, 그렇죠?

님도 안목이 높으십니다.^^

진/우맘님, 제깍 가서 메모 남겼습니다.^^

urblue 2004-12-1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길가다보면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 있잖아요.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던지, 아파 보인다던지 등등...저만치서부터 보기 시작하면 엄청 신경쓰이는데, 막상 그 사람 앞을 지나치면서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를 못하겠더라구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 돌려 흘끔거리기만 합니다.

님을 보호해준 그 아주머니, 훌륭한 분이시네요.

로드무비 2004-12-15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저는 가까이 가서 일단 물어는 봅니다.^^;;

그 아줌마 생각하면 조금 덜 외로워요.^^

2004-12-15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4-12-1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주머니가 제 엄마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대신 저에게 지금이라도 고마움을 표시하심이...=3=3=3=3

파란여우 2004-12-15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님! 어제 퇴근해서 님이 보내주신 책을 잘 받았습니다. 사진은 한 이틀있다가 한 번에 올릴께요...400쪽에 달하는 허걱하는 책이지만 대충 펼쳐보니 만족합니다. 고맙습니다....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님을 알게 된 2004년은 행복한 한 해였습니다. 잘 읽을께요^^

로드무비 2004-12-15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파란여우님도 그러면 고향이 부산?

이거이거 반갑습니더!

그라고 책 잘 갔다니 다행입니더.

고마움을 표시하라는 부분은 모른척.('')(..)=3=3=3

oldhand 2004-12-15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까운 사이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에 강렬한 한 방을 남기고 멀어진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 같아요. 연말에 어울리는 아주 따뜻한 글입니다. ^^

하얀마녀 2004-12-15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줌마 너무 멋지신데요? 거의 로드무비님 수준이에요.

기다림으로 2004-12-1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 꼭 가로수 가지가 차창을 뚫고 들어왔을 때 앞에 앉은 누군가를 안아주고 말아야지..라는 가능성 없는 다짐을 가슴깊게 새기게 만드는 글입니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남을 수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게 그저 한 줄의 이야기일 뿐이라도, 그렇다면..정말 행복 하겠군요.

아마, 내일 친구를 만나러 전철을 탔을 때 누군가 제 옆을 지나친다면 혹은 창 밖으로 마른 나뭇가지를 본다면, 로드 무비님이 생각나지 않을까요? 아주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파란여우 2004-12-1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님! 제 고향은 조오기 '인천'입지요....울엄니 고향도 인천짠물...그냥 웃자고 한 소린데 어캔데요? 아잉, 죄송하게 됐심더, 내사 마 아무 뜻없이 한 소리라요. 괘념치 마소!!^^

2004-12-1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4-12-1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 말씀에 한 표. 정말 강렬한 한 방을 안겨주신 아주머니네요. 내 나이 50에 그럴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추천도 한 방!!!

잉크냄새 2004-12-1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가슴 훈훈한 이야기........

로드무비 2004-12-1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작은별이 코트 단추 빨리 달아주세요.

비즈 작품에만 매진하시면 답니까?^^

잉크냄새님, 소소, 훈훈...예쁜 단어네요.^^

조선인님, 님은 너끈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십니다. 추천 한 방 고맙.^^

속삭이신 님, 아침에 해장은 하셨어요?^^

파란여우님, 저도 웃자고 한 소리였어요.

저의 유머 감각에 문제가 있군요.^^;;;

기다림으로님, 페이퍼를 하나 쓰셨군요. 제 페이퍼 밑에......

서재 사진이 너무 애잔합니다.^^

하얀마녀님, 저도 노력할게요. 불끈!=3

올드핸드님, 안 그래도 연말이라 생각난 거예요.

오랜만에 님을 만나니 무지 반갑습네다.^^

숨은아이 2004-12-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으로님 말씀에 동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