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조은 지음, 최민식 사진 / 샘터사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4년 전,  내가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잘하면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저축이라곤 1천만 원짜리 적금이 다였고 만약 그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실직이라도 하면 그 돈을 가지고 몇 달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급한 마음에 수소문해 덥석 물었던 원고도 엉망이어서 돈은 돈대로 다 못 받고 그 일을 내게 주었던 후배와도 틀어지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세 살짜리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게 된 것도 낮시간에 좀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우리는 서울의 순대국밥집이 즐비한 기사식당 골목에 살았는데 형편이 그렇게 되자 예전에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손님을 유인하고 주차를 담당하는 순대국밥 집의 50대 아저씨를 보면 '청소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는데 저렇게 하루종일 서서 일하고 얼마를 버실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냄비를 들고 순대국을 사러 가서 보면 젊은 주인에게 지청구를 들으며 주방에서 허리 한번 펼 틈 없이 일하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그들은 임시 일자리와 거처라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사식당 그 골목엔 머리가 조금 모자란 30대의 총각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식당 주인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치워주며 국에 아무렇게나 만 밥을 한 그릇씩 얻어먹었다. 순대국밥집 앞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린이집 봉고버스를 기다리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는 것이 행사였는데 어느 날 그가 커피를 마시는 나를 보고 입맛을 다시길래 한잔 빼주었더니 그 뒤론 아주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스웨터 차림의 그가 너무 추워보여 집에 가서 남편이 안 입는 모직 점퍼랑 골덴바지를 가져다 주었다. 다음날 뜨뜻하게 옷을 입은 그가 나를 보자 어색하게 웃으며 먼 데서 달려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 손의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빼앗더니 앞장서서 걷는 것이었다. 우리 집 앞에 도착하여 그냥 들어가기 뭐하여 밥이나 먹었냐고 물었다. 아직 안 먹었다고 해서 국밥 사먹으라고 돈을 좀 주었는데 주면서도 나는 그 총각이 앞으로 나를 너무 좋아할까봐(?) 그것이 좀 부담스러웠다.(써놓고 보니 어이가 없다!)

"엄마, 왜 저 아저씨가 아빠 옷을 입었어?" 딸아이가 내게 물었다.

"응, 집이랑 가족이 없는 아저씨인데 외투가 없어서 아빠 안 입는 옷을 줬어."

"그러면 저 아저씨는 추운데 어디서 자?"

"응, 식당 같은 데 일해주고 거기서 잘 거야."

딸아이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는 이 골목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으니 착한 식당주인들이 돌아가며 그를 재워줄 거라고......그러나 그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아아, 그 해 내가 느꼈던 삶의 공포가 고스란히 생각난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엔 시대는 좀 다르지만 내가 살던 순대국밥집 골목에서 만났던 허름한 이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벼랑 앞에 선 듯하던 나의 얼굴도......

이 책은 부산역 앞, 자갈치시장, 용두산공원, 영도다리 부근 등 내가 나고 자란 곳이 배경이었던 1987년도에 나온 열화당 사진문고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는데 1957년 용산역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국수 먹는 소녀 등 몇 장의 사진이 재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몇 해 뒤 소설가 조세희의 발문을 제목으로 달고 나온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책에 빠지지 않고 실리는 국수 먹는 이 소녀의 사진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찡하다. 그 바로 앞 페이지의 까치둥우리 머리를 하고 인중에 허연 코를 두 줄 달고 있는 팔 없는 소녀의 사진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하긴 마찬가지.

최민식 선생은 이 책의 서문에서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슴 서늘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직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진작업의 생애를 걸 뿐이라는 최민식 선생의 말은 얼마나 믿음직한가! 믿고 싶어도 믿을 것이 없어 몸부림치는 이 허무한 세상에 말이다.

사진작가 강운구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싶다. 몇 개의 책꽂이와 책상 하나가 전부인 내 조그만 방에는 그의 '우연 또는 필연'이라는 대형 포스터 액자가 십몇 년째 걸려 있다. 우리 엄마는 볼 때마다 내다버리라고 하는데 왜냐, 손에 담배가 들려 있는 사진이기 때문이이다. 광부인지 농부인지 얼굴을 안 보여주니 모르겠고 늙고 메마르고 주름진 시커먼 손에 거의 다 탄 담배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마지막 연기를 불사르고 있는 손 클로즈업 사진이다. 태백이나 황지 등 광산촌 혹은 폐광 주변 사람들을 즐겨 찍은 그의 사진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시적 서정이 물씬 풍겨난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 금호갤러리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멋장이로 유명한 정치인 홍사덕이 혼자 와서 그의 사진들을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같은 농부나 광부의 얼굴을 동시에 찍더라도 강운구와 최민식의 사진은 분명 다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적 서정'인가 뭔가 하는 필터를 안 쓴 최민식 선생의 종주먹을 들이댄 듯한 사진이 훨씬 좋다. 지난 50년 동안 그의 카메라에 포착된 거리와 움막 속의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시적 서정'이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책 출간 당시 화제가 되었던 시인 조은의 심정적인 해설은 때론 적절하고 감상을 도와주는 역할도 했지만  뒤쪽으로 넘어갈수록 눈에 거슬리고 좀더 솔직히 말하면 짜증스러웠다. 가령 144쪽의 이런 구절을 보라.

--속에 있는 옷의 문양이 정의를 상징하듯 곧고 균일하군요. 하지만 아이가 두르고 있는 거적 같은 현실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구멍 뚫린 홈스펀 양복 윗도리를 뒤집어쓰고 있는 찌그러진 눈의 소년 사진에 가당치도 않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사람들은 헐벗은 모습으로 움막이나 거리에 나와 있든지 생활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삶은 고구마 몇 개나 생선 몇 마리를 들고 손님을 기다리는 행상이나, 구멍 뚫린 옷을 입은 바가지머리의 꾀죄죄한 소녀, 그 소녀의 등에 매달린 아기, 깊게 패인 굵은 주름과 합죽한 입의 노인, 부랑아, 그리고 막일꾼 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끼니를 구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좋으면서도 충격적이었지만 이 책의 맨 앞에 실린 움막 사진이 나는 특히 좋았다. 밥을 끓이고 있는 건지 국을 한 냄비 끓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벽에 뚫린 굴뚝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최민식 선생의 사진에는 양푼이나 냄비째 국수 같은 것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유독 많다. 그 점은 사람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 보기를  좋아하는 나의 기호에도 딱 부합되는 것이다.

 


이런 사진들 앞뒤에 '초라한 날들이 미래의 골조가 될까요?'니 '사랑만이 어둠을 역전시킵니다'하는 시인의 해설은 너무 생뚱맞았다. 물론 사진을 빛내주는 근사한 구절들도 몇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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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4-10-2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해설이 정말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네요..그냥 독자가 느끼게 가만 두는것이 좋을듯..

파란여우 2004-10-2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또 최민식 사진이군요. 상처로 가득한 세상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분입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군요...배가 고파져요..늦은 점심을 감사하게 먹으러 갑니다....

쎈연필 2004-10-2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해설이 정말 짜증나는군요. 시는 그렇지 않은데.

숨은아이 2004-10-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이 모락모락 나는 리뷰입니다. ^___^
(그런데, "서울의 순대국밥집이 즐비한 기사식당 골목"이라면, 혹시 연남동인가요?)

에레혼 2004-10-2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로 많은 말들과 침묵을 안고 있는 것인데.....
시인의 해설이, 덧말이 '가당찮다'는 님의 지적이 서늘하게 와닿습니다.

최민식과 강운구는, 모든 장르의 대가들이 그렇듯이, 서로 다른 걸음걸이로 걸어와 자연스레 어떤 지점에서 만나 서로 담배 한 대 나눠 피울 것 같아요, 아무 말없이......

옆으로 새는 얘기지만.... 이 글을 보다 보니 오늘 점심엔 국수 한 그릇 먹고 싶어지네요^^

플레져 2004-10-2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침묵, 옥의 티군요.
로드무비님의 리뷰에는 책 리뷰만 있지 않고 님의 삶도 들어있어 애틋합니다.
추천합니다! (너무 좋아서...흐흐...)

urblue 2004-10-2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화당 사진 문고를 보면서 먹먹했지요.
님의 훌륭한 리뷰가 그 느낌을 다시 깨웁니다.

로드무비 2004-10-2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어느 시인이 썼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조은 시인이 지나가다 이 글을 혹시라도 읽고 기분나쁘면 어쩌죠?^^;
파란여우님, 저도 담담하게 따뜻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늦은 점심은 맛있게 드셨는지요?
몽상자님, 조은 시인의 <벼랑에 살다> 읽어보셨나요?
시보다 더 좋은 산문집인데......
숨은아이님, 맞아요. 바로 그 골목입니다.
가끔 남편이 그 골목의 순대국과 감자탕을 사오곤 하죠. 저의 부탁으로......
라일락와인님, 쓰다보니 제가 사진작가 강운구를 조금 비판하는 듯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좋아하지 않는데 십몇 년 그의 전시회 포스터를 방에
걸어놓을 리 없지요.
님의 말처럼 두 분 어느 지점에서 만나 담배를 나눠 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국수는 제일제당 우리밀 햇국수를 육수가 맛나서 애용합니다만......
플레져님, 다른 분들의 리뷰가 이미 몇 나와 있어 저는 차별화시킨답시고
제 얘길 좀 끼워넣었어요. 좋아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블루님, 열화당 사진문고가 사실 그의 책들 중 제일 괜찮은 것 같아요.
슬쩍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없는 이 안 2004-10-2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민식의 자기 사진에 대한 단호한 글처럼 로드무비님의 리뷰도 가슴 서늘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panda78 2004-10-2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해설이 정말 사진과 따로 노는군요. 로드무비님, 이 리뷰 정말 멋져요.
이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를 많이 읽었지만, 이 책 보고 싶다! 란 생각을 하게 만든 리뷰는 로드무비님의 것이로군요.

로드무비 2004-10-28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너무 반갑네여.^^
판다님, 님의 말을 들으니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가려고......
추천수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고마워요, 여러분.^0^

엔리꼬 2004-10-2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의 리뷰를 보면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들지만, 내가 이 책을 산다면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로드무비 2004-10-2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님, 잘 됐습니다.
이 책을 제가 선물할게요. 너무 약소하지만 그냥 받아주세요.
주소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기뻐요.^0^

엔리꼬 2004-10-2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그런 반응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요^^ 아무튼 주신다니 저야 기쁘기 한이 없네요.. 알라딘을 안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벌써 선물까지 받고... 감사합니다.
이 책을 선물받아도 장식적 소유를 고민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요...
(그리고, 어린시절에 저도 남포동 근처에 살았어요...)

로드무비 2004-10-29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저는 부민동에 살았어요.
반가워요.^^
(장식적 소유니 뭐니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골치 아파요.
저는 그냥 하하호호 마음 가는 대로 살기로 했답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최소한 하면서요.)

2004-10-29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4-10-2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민식...서글픈 현실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그의 망막에 서려 있더군요.

로드무비 2004-10-29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접수했습니당.^^
잉크냄새님, 밤늦게(새벽 일찍인가?) 반갑습니다. ^^

2004-10-2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4-10-2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드무비 2004-10-2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 고맙습니다.
추천수 열 명 채워주셨네요.^^

다연엉가 2004-11-1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씩 마음이 뒤숭생숭 할때면 일부러 썩어 문드러진 골목을 누비며 걷습니다. 그 곳의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서 맴을 쓰다듬고 옵니다. 돌아오는 길 낙엽이 쌓여 있는 곳을 일부러 눌러 보고요....저 책 책 사봐야겠습니다.

로드무비 2004-11-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자님, 오늘 님을 자주 만나네요.

썩어문드러진 골목이라는 표현에서 어떤 슬픔이 느껴집니다.

세상에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사람들이 많지요.

언제 어떤 곤경에 처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사는 게 두렵고도 가슴설레나 봐요.

가끔 님과 얘기 나누고 싶네요.